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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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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4,698회 작성일 08-02-16 01:39

본문

  

전갈자리 아내


문혜영


이녀석 목이 타는지 꿈쩍도 않는다.

하기야 너의 종말을 지켜내는 것이 나의 희열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면 오늘도 그 천연덕스럽던 아내의 립스틱 같은 붉은 병뚜껑에 물을 넣어두어야 하는 습관적인 기억 따위를 지워내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지. 이제 서서히 머리부터 꼬리 끝까지 유난히도 긴 자태를 뽐내는 너의 교만도 그 모습을 지워야 할 것이리라. 꼬리 끝 분절된 부분에는 분명 치사량의 독기가 아직 남아 있겠지만 그 독마저 네 몸의 수분을 오염시키고 서서히 네가 제 목을 비틀어 삶을 토해내는 그 순간까지 나는 한 방울의 관용도 베풀지 않으리라. 거미 한 마리 눈치 없이 반투명의 상자 집 문을 탐하기에 파리채가 날렵한 몸놀림으로 흔적도 없이 뭉개버렸지. 네가 직접 그 참변을 목격했으니 너의 목마름이 오늘따라 더 고통스러웠을 테지. 그래 이제 너는 그렇게 삶을 구걸해야 할 이유가 생긴 거야.

 처음에는 둘이었지만 이제 너만 남았다는 걸 명심해야 할 거야. 너는 동고동락하던 한 녀석을 살점 하나 남김없이 먹어치웠으니 너의 배고픔이 일으킨 첫 번째 살기(殺氣)임에 틀림없겠고 이제 너는 제 몸을 숨길 이유조차 잊고 두 번째 살기를 너의 살점을 뜯는 일로 시작할지도 모르지. 그렇게 물고 물리는 적자생존의 순리를 온전히 따라온 너의 본능에 나는 더없이 감사할 따름이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꿈꿔온 완전범죄이기에 말이야.

 네가 내 집에 이사 오던 날을 난 아직 기억하지. 너희 두 마리의 전갈은 오리온의 교만을 심판하던 헤라의 충실한 심복의 모습 그대로 공포의 상징물 자체였어. 날카로운 찌름 장치를 곧추세우며 내 집의 한 공간을 채우는 너희들의 불손함을 참으며 나는 가식적인 애정을 보이려 애를 썼지. 애완동물이라는 말에 내 두려움은 무색하게도 무릎을 꿇고 말았던 거지.

 그러나 이제 너의 헤라는 없다. 주인 잃은 하인이 살아갈 방법은 새 주인에게 순응하는 길 밖에 없지만 그 복종을 용납할 내가 아니다. 혹 너의 그 얕은 복종의 수에 놀아나 어느 날 네 꼬리가 내 정수리로 기어올라 독을 뿜어대며 전 주인 헤라의 보복을 일삼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그래 나는 너희들을 신임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나의 공간에서 네가 헤라를 따라 떠날 차례다. 나는 너의 영혼을 오로라의 신전에 바침으로써 나의 고통스럽던 1년의 날들을 보상받으리라. 그게 나의 숨을 틔우는 유일한 끈이기에 나는 그 끈을 놓치는 불행을 겪지 않으려 철저히 너의 삶을 외면하리라. 철저히…

날카로운 찌름장치를 곧추세우면서

집의 한 공간 채우려 했던 네 불손함

2주일째 아내는 돌아오지 않고 있다. 

2주일째 아내는 돌아오지 않고 있다.

어머니는 가끔 그녀를 찾곤 하시지만 그녀가 보고 싶거나 사랑스러워서 그러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제 아들 녀석이 밥이나 굶을까 싶은 노파심 때문일 게다. 오늘 오전 의사 선생님의 조치로 어머니는 다행히 중환자실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일반 병실로 옮기는 내내 어머니는 참 다행이다 싶은 지 눈물을 비추셨다. 왜 우느냐고 물을 생각은 애초에 없는 탓에 나는 어머니의 눈물에 형광가루 날리는 푸석한 두루마리 화장지 몇 마디를 건네었을 뿐이다.
차가운 아스팔트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지구 온난화 탓도 그 무엇도 아니다. 흡사 사막을 걷는 나의 고통 때문이리라. 왜 나에게만 이런 고통을 주는가. 내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을까. 그렇게 사랑하던 첫 아내를 잃고 새롭게 일어서려는데 이제 겨우 익숙해져가는 삶인데 나에게 이런 시련이 다가오는 것은 또 무슨 이유인가. 이유라도 알면 이 답답한 인생을 찢어 발겨서라도 다시 원점으로 돌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도시의 잔인함을 온몸으로 호흡해왔다고 믿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초겨울의 찬 서리 보다 더 날카로운 칼바람을 휘휘 피해 다닐 일이었나 보다. 고통 따위 다시는 없게 해 달라 주문하고 주문했지만 내 주문은 주문서에 기록조차 되어 있지 않았나보다.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젊은 혈기로 면접시험을 치르던 그때 나는 얼마나 당당했던가. 그 누구도 나의 언변에 토를 달지 못했다. 사장님은 내 혈기가 맘에 들어 바로 합격시켰다며 회사에 큰 인재 하나 얻었노라고 껄껄 웃기까지 했는데 지금 그 기억은 그의 기억 속에는 없는가 보다. 있었다면 나만큼은 그가 버릴 수 없었을 테니….

 

2주 만에 한 밥이라서 그런지 밥알이 영 착착 달라붙질 않는군.

 찰기가 없는 쌀밥을 오랜만에 씹는 일이 이도 부담스러운지 자꾸 밥알이 이 사이로 새어 나오니 나의 즐거운 식사 시간을 방해하려는 저 전갈의 사주는 아닐까 싶네. 네 녀석의 꼬리가 보이는군. 배가 고파서 나왔나 본데 어림도 없지. 나는 이 밥이 너무 맛있어서 너에게는 한 톨도 나눠 줄 맘이 없거든. 아참, 너는 어차피 익힌 밥알 따위엔 관심이 없겠구나. 아니 아니지, 목이 마를 테니 밥 한 톨에 있는 수분이라도 섭생하고 싶겠군. 안될 말이지. 내가 네 주인처럼 잔인한 종은 아니었지만 너에게만은 잔인해야겠어. 네 주인이 그랬었거든. 나를 전갈만도 못한 버러지라고. 전갈은 묘한 매력으로 자신을 지킬 줄 알지만 나는 눈 씻고 봐도 매력이라곤 없으니 사랑받을 권리가 없다는 거야.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네 주인이 늘어놓을라치면 그 핏대선 목 줄기를 꽉 물어주고 싶더라니까. 하지만 그 목 줄기에서 철철 붉은 피가 흐를 거라는 상상은 하지도 않았지. 분명 붉은 피가 아닐 테니 말이야. 퍼런 피가 흐를 게 분명해. 붉은 피는 심장이 따뜻한 포유류에게나 흐르는 거 아닐까 싶거든. 그녀는 그런 종이 아니야. 그리 따뜻한 심장을 갖고 태어나지 않은 게 틀림없어. 이 오징어 젓갈처럼 질겅질겅한 실핏줄을 동강동강 잘라내 버리고 나면 그녀의 심장이 오그라들고 쫄깃한 그 거시기 부위만 숨을 쉴지도 모르지. 그게 이상하게 혼자 움직이는 것 같았거든. 그래도 쓸만한 게 그것 하나더라구.

 주인이 신임했으니 너도 주인을 닮아 거기는 좀 쫄깃하지 않을까 싶군. 근데 어쩌나. 혼자서는 그 본능적 종족 번식의 행위를 이행할 리가 만무할 터인데. 그녀는 종족 번식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지. 애가 뭐가 중요하냐고 우리만 행복하면 그만 아니냐며 요즘 자식들은 돈 먹는 기계라고 우리에겐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는 등. 난 다시는 아내도 아이도 잃고 싶지 않은 맘에 그녀의 비음 섞인 달콤한 속삭임에 옳다구나 찬동했었지. 그게 나와 그녀를 위해 좋은 방향이라 여겼던 거야. 언제나 방향타는 그녀의 혀가 조종했지. 밤에도 낮에도 끝없이. 내게는 방향타를 맡기지도 맡길 마음도 없었던 게지. 어리석게도 그때 난 알지 못했던 거야. 음기에서 흐르는 그 짜릿함에 중독 되어 하루하루 스스로가 그녀의 시종이 되어가고 있었음을.

 그녀는 아름다웠거든. 처음 만난 그 순간에 그녀는 내게 새로운 출발을 의미할 만큼 좋은 배필이었거든. 게다가 만난 곳이 결혼식장이라 나는 한 번 겪은 결혼 생활이었지만 또 그 곳에서 결혼의 신성함을 맛보는 중이었거든. 그러니 그녀가 얼마나 성스러웠겠어. 그 성스러움에 취해 그게 성(性)스러움인지 성(聖)스러움인지 구별해낼 힘이 나에겐 그날 없었던 거야. 모든 것이 좋아 보였어.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린 탓도 있었겠지만 이혼을 한 적 있다며 솔직하게 털어놓는 그 마음에 더 감동 받았던 것 같아.




 처음 만나 자신에게 한눈에 취한 나에게 자식도 없는 그녀가 그런 불리한 사실을 밝힐 필요는 없었거든. 그런데도 그녀는 나에게 선택하더라도 후회하지 않도록 진실로 나를 대했던 거지.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녀의 진솔함에 끌려 우리는 그날 단란주점에서 끝내지 못하고 바로 뜨거운 열정을 뿜어낼 장소를 찾았던 거지. 나는 나의 몸을 받아들이면서 울고 있는 그녀를 보고 참 아름다운 여자라고 생각했지. 여자의 눈물은 언제 먹어도 달콤하다고 느껴지거든. 이지적인 외모에 순해 보이는 미소까지 담고 있는 그녀의 몸을 탐하며 나는 너무 행복했어. 아내를 잃고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자의 내음도 좋았지만 그녀라서 더 좋았던 거 같아. 약간의 백치미가 느껴지는 눈동자는 허연자가 더 많아보였지만 그게 또 소위 S라인 몸매에 어울리는 눈매가 아니겠어?

 늦장가 드는 친구의 결혼식에는 그리 많은 사람이 참석하지 않았는데도 어렵게 베트남에서 얻어온 어린 처자를 아내로 맞이했다는 친구는 연신 무엇이 좋은지 싱글벙글이었지. 베트남에서 온 여자라는데 신부 친구들은 전혀 베트남 여인의 냄새가 풍기지 않는다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가짜 친구들이라는 거야. 그녀도 그 중 한명이었지. 신부가 친구가 없는 게 딱해서 가짜 친구들을 알바생으로 공습해온 내 친구의 배려로 나는 그날 보석 같은 그녀를 만날 수 있었던 거야.

 "자기는 별자리가 뭐야? 난 내 별자리를 너무 사랑하거든."

 "그래? 나는 오리온자린데, 이 예쁜 처자는 무슨 자리?"

 "나? 나는 전갈자리야. 전갈자리 너무 예쁘지 않아? 전갈자리 여자는 오묘한 매력이 있대. 나한테…그거 느껴져?"

 "그래? 어째 그런 것 같더라. 자기는 별자리도 그 눈빛도 다 오묘한 매력을 가졌나 보군."

 "그렇다고들 해. 근데 난 자기한테만 그 매력을 보여줄라 그러는데……자기 어때?"

 "나야, 고맙지. 우리 확 결혼해 버릴까?"

 그날 밤부터 나는 스스로 그녀의 모든 것이 되기로 했지. 모든 것이라니? 사실 나는 정말 모든 것이 되고 싶었지만 모든 것을 주고 어느새 빈껍데기가 되었을 뿐이었지.

 집안에 밥과 반찬이 남아 있는 게 다행이지 뭐야. 이젠 밥버러지라고 할 그녀가 없으니까 이 식량들은 그나마 나의 소유가 아니겠어. 지금 나는 그녀의 그 눈동자를 씹고 그녀의 쫄깃했던 음기를 핥고 고추장으로 버무린 그녀의 가슴 한 덩이를 물컹물컹 씹는 중이야. 흰 밥알이 틱틱거리며 입주위에서 튕겨나가도 나의 식사를 성스럽지 않다고 면박을 줄 근거는 어디에도 없거든.

 아, 벌써 어두워졌군. 너의 집 위로 모아 놓은 전등의 위력을 남기고 갈 차례야. 피할 테면 피해봐라. 이 음탕한 전갈 녀석아.

어머니에게 벌레라면서 악담을 퍼붓기 일쑤

피할테면 피해 봐라, 이 음탕한 전갈 녀석아

이 저녁 어머니는 혼자 식사를 마쳤는지 어떤 여인이 식판을 하나씩 치워가고 있었다.

 아내의 음기에서 흘러나온 구정물냄새 나는 그 무엇을 연상케 하는 누런 국물에는 간간이 짙푸른 줄기 같은 게 섞여 있었는데 그것들이 한꺼번에 푸른 양동이의 입 속으로 쏟아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애써 무시하며 병실로 들어섰을 때 어머니는 깊이 잠이 들어 있는 듯 했다. 그녀와 사는 1년 동안 어머니는 천덕꾸러기가 되어 있었다. 방 안에 틀어박혀 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밥이라도 차려 어머니 방으로 내가라 하면 아내는 어머니 때문에 못 살겠다고 자기가 어머니를 그렇게 잘 모시는데도 어머니 병은 나아지지 않으니 참 걱정이라고 속상해 죽겠는 마음을 자꾸만 드러내고 싶어 했다.

 나는 그런 아내를 안쓰럽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실직한 후에는 어머니에게 조차 벌레니 식충이니 하며 악담을 퍼붓기 일쑤였고 때로는 내 눈 앞에서 어머니의 허리를 걷어차며 빨리 죽어 차라리 빨리 죽어를 연발했다. 나에게 대놓고 하는 소리였다. 무능력한 남편에 어미까지 먹여 살리려니 제 꽁지가 무너날 일 아니냐는 것이다. 결국 어머니는 구박에 못 이겼는지 갑자기 숨통을 누가 죄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을 움켜쥐고 화장실 문 앞에 쓰러져 있었다. 표독스런 아내의 죽어라는 주문을 들어주기라도 하려는 지 119 응급차에 실려 가는 내내 어머니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아내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응급실에서 하루를 견뎌내더니 어제까지 중환자실에서 아내가 조롱하는 그 질긴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것이다.

 형광 불빛 아래 누운 어머니의 눈 주위는 검푸른 기운이 감돌고 있다. 아픔이 모두 눈가로 몰려 있는 지 오늘 따라 그림자진 어머니의 세월이 더 깊은 호수를 이루고 있다. 그 깊은 호수에는 먼저 떠나보낸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 대한 애틋한 슬픔이, 처음 맞았던 며느리에 대한 미안함이 잔잔하게 밀려갔다 밀려오는데 그 어디에도 지금의 며느리에 대한 감정은 남아있지 않다. 어머니는 늘 원망도 부질없는 일이라 하셨으니 무엇이 남아 있다고 해도 그것은 원망 따위는 아닐 성 싶다. 그녀를 죽도록 미워하거나 당한 것 만치 똑같은 죽음의 저주를 퍼붓더라도 그것은 나의 몫이지 어머니의 몫은 아니기에 그녀에 대한 살기(殺氣)는 나 혼자만 키워나갈 일이었다. 가엾은 어머니의 희끗한 머리카락 마디마디에 내려앉은 세월이 야속할 만치 어머니는 깊은 잠에 빠졌다.

 하릴없이 어머니의 잠을 지키던 나는 새벽 한 시가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독약 짙은 병실 복도를 지나오는 동안 문득 전갈 생각을 했다. 지금쯤 타들어 죽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다면 오늘 밤은 아주 행복하게 잘 수 있겠노라고 상상하며 나는 세 블록 거리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네온 빛은 도시에 가득 차서 마치 낮인 양 세상을 수놓는데 그 속에서 낯익은 한 여인의 향기를 느꼈다. 혹시 그녀의 것인가 나는 깜짝 놀라 그 여자를 빤히 바라본다. 다행이다. 짙은 화장에 붉은 블라우스, 검정 미니스커트까지 그대로인데 그녀는 아니다. 아니 그녀일 리가 없다. 그녀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전갈자리 아내는 이제 자신의 애완용 전갈과 함께 세상을 밟아선 안 될 운명이다. 그게 신의 뜻이 아니던가. 내게 신은 그런 임무를 허용했다. 나 이외에는 믿을 자가 없다 했다. 나는 순순히 신의 부름을 따른 착한 인간이다.
2주 전 그날, 나는 아내의 젖가슴을 살짝 들여다보았었다.

 술에 흠뻑 젖어 시야를 확보하지 못하고 거실 바닥에 갈지자로 누웠으니 내게 몸을 허락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나는 그녀의 비에 젖은 블라우스를 벗기고 그녀가 제일 좋아한다던 앵두 빛이 도는 가슴가리개를 들어내었다. 그리고 젖어서 빳빳해진 검은 미니스커트를 내리니 아니나 다를까 검은 숲을 가린 순백의 팬티가 오롯이 자리 잡아 있지 않은가. 뽀얀 분가루가 흩어진 양 그녀의 맨살은 순백이었다. 그 순백의 몸 위로 봉긋 솟은 젖가슴을 얼마나 오래 버려두어야 했던가. 나는 그녀의 왼쪽 가슴에 살짝 입맞춤을 하고는 오른쪽 가슴에 눈길을 돌렸다.

 전갈 무늬다. 그녀의 가슴에 이제껏 본 적 없던 붉은 전갈이 두 마리 엉겨 있다. 가까이 들여다보니 선명한 사람의 이 자국이 아닌가. 흡사 사람의 것은 아니길 원했지만 분명 그것은 짐승의 것은 아니었다. 가슴을 내려와 그녀의 무성한 숲을 지나다 그 숲을 벌려 놓자 그 곳에도 자리 잡은 인간전갈의 흔적, 그 곳에선 낯익은 남자의 그것이 끈적하게 머물러 있다. 나의 것은 아닌데 누구의 것일까. 나는 그녀의 알몸을 본 지 이미 석 달이 다 되어 가는데 그럼 이 익숙한 냄새는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나는 그녀의 옷을 갈아입히려던 기억도 잊고 그녀의 하루를, 격렬했을 두 남녀의 음탕한 몸짓을 떠올린다.

 나에게 그랬듯 행복한 신음소리를 연거푸 쏟아내었을 테고 사내는 커져가는 자신의 양기를 그녀의 부족함을 채워주고자 미친 듯 집어넣었을 게다. 그게 그녀를 살리는 길이라고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이라고 여기며…내가 그랬던 것처럼…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그들은 탄성을 질러댔을 게다. 얼굴에 종긋이 자리 잡은 입술 안 혀를 마구 비벼대며 그 혀를 끌어내려 그녀의 목을 쓸고 젖가슴에 와선 발기된 자신을 참으려 전갈의 독침 마냥 그 이로 물고 늘어졌을 테지. 내가 전에 그녀를 위해 했던 그 행위를 그 사내도 성스럽게 생각했을 테지. 그녀의 가랑이로 흘러내린 그 사악한 독침의 자국은 더 이상 나를 이성의 힘으로 붙잡아 둘 수 없게 했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내게는 제 남편이라도 먹어버릴 전갈의 대가리를 닮아 있었고 그녀의 음부에서는 독기가 충만한 찌름 장치가 장전되어 있는 듯 했다. 내가 잡아먹히기 전에 그녀를 먹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먹어야 흔적도 없을까. 어떻게 없애야 그녀를 사랑했던 기억까지 먹어버릴 수 있을까.

 나는 밤새 끙끙 앓는 소리를 하며 그녀의 죽음을 꿈꿨다. 무방비 상태인 나의 공간으로 들어온 그녀를 이제는 내 보내야 하는데 어떤 식으로 나를 살리고 그녀를 내보낼까 나는 해가 뜰 때까지도 그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조금 있으면 또 하루가 시작된다. 버러지 같은 내 삶이 반복된다. 아내의 즙을 빨아먹는 식충이로 취급받으며 이미 더럽혀진 그녀의 몸뚱이에 신성한 목례를 해야 한다. 그게 내가 살아온 방식이기에 아내는 아주 당당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 젖가슴에 나는 또 고마움을 느끼며 다른 놈에게 잘 물려주라고 우유 한 잔에 토스트 한 조각을 서슴없이 안겨야 한다. 그렇게 살아가는 일이 나를 살릴 유일한 길이라고 믿으며 나는 연신 아내의 돈다발에 기대어야 한다. 다른 놈이 채워놓을 내 소유의 구멍을 위해 나는 향기로운 자스민 향 거품 목욕물을 준비해야 한다. 그녀의 입술에 촉촉한 기가 돌아 또 다른 사내의 혀가 깊게 흘러 들어가도록 나는 그녀의 얼굴을 덮어씌울 마사지용 오이도 얇게 저며 갈아둬야 한다. 아아~ 나는 그렇게 그녀의 몸을 꾸며둬야 한다. 내가 아닌 낯선 놈들의 끈적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나는 또 그렇게….

 그래 그녀의 저 음흉한 젖가슴부터 도려내리라. 아니 아니다. 음탕한 생각을 당연시하는 뻔뻔한 그 머리통부터 으깨 먹을 일이다. 그리고는 가랑이 속 숲을 모두 불태우리라. 그래, 태우면 흔적도 없겠다. 더러운 몸이라 진하고 독한 냄새가 진동하면 옆집 인간들이 의심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아 그래, 그녀도 좋아할 방법이 있지. 전갈! 그 녀석은 주인의 알몸은 본 적이 없으니 제 주인인지도 모르고 수십 번을 찔러댈 테지. 두 놈의 전갈이 그녀의 정수리부터 그 음탕한 부위까지 아삭아삭 씹어댈 모양이면 나는 그녀에게 동정어린 눈으로 최후를 지켜내게 될 게야. 나의 잘못은 전혀 없지. 자식을 잘못 키운 어미의 벌일 뿐이니까. 훗, 그녀가 좋은 애완동물을 갖고 왔었군. 제 죽음을 아름답게 승화시킬 최대의 영웅을 키워온 것이니 그녀도 분명 자랑스러워할 게야. 그 녀석들 배가 많이 고팠음 좋겠군. 잠자는 중에라도 그녀의 온 몸이 전갈들의 독침을 잘 발라내도록 신음하며 흐느적흐느적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으면 좋겠군. 아마 그 음탕한 머리에는 사내들이 자신을 깨무는 기쁨에 행복한 오르가즘을 몇 번이고 느낄지도 모르지. 오르가즘을 느끼다 절정에 이르러 힘껏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그녀를 보며 나는 내가 참 고마운 인간이라 여기게 될 거야. 오르가즘을 느끼다 복상사 하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죽음이던가. 나는 그녀에게 가장 아름다운 선물을 안긴 거야. 내가 약속했던 내 모든 것을 오늘에서야 완전히 보여줄 수 있는 게지. 낭자한 피가 없어도 죽음은 신성한 법. 그 죽음에 경의를 표한다. 내게 준 자유에 고마워서 말이야.

 해가 뜬다. 이제 정말 새로운 시작이다. 밥버러지의 인생은 이제 없다. 처음처럼, 나는 혼자다. 그냥 언제나 혼자였다. 아무 것도 욕심내지 않고 그냥 어머니의 효자가 되어 착한 웃음 가득 보이는 키 작고 성실한 한 샐러리맨이다. 아침이면 경비원에게 수고하신다 인사를 건네고 길에서 우연히 만난 이웃에게 안부를 묻고 그냥 착한 웃음 지어 훈남이라 소리 듣는 한 남자. 그게 나다. 나의 일상이다. 이제 나는 돌아간다. 나에게로….

 전갈자리 아내는 이제 없다.

지독한 침만큼 목숨도 그리 질긴 거냐

인터폰 화면에 그녀가 떴다. 그녀가? 

이 녀석, 아직도 살아있는 거야?

 네 그 지독한 침만큼 네 목숨도 그리 질긴 거냐? 움직임이 없군. 죽었나? 혹시 살아 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자기를 저 비 내리는 밖으로 내던져주길 바라는 지도 모를 일이야. 그럴 순 없지. 나도 너처럼 완전 범죄가 필요하거든. 네 몸이 푸석푸석 말라 비틀어 가루가 될 때까지 나는 결코 너를 밖으로 내 보낼 생각이 없어. 너는 누가 뭐래도 살인마야. 살인마를 내 보내는 일은 있을 수 없지. 너는 그 반투명의 감옥신세를 좀 더 져야해. 그게 공정한 거야.

 아, 네가 죽든 살든 지금은 집안 청소를 해야겠어. 생각해보니 그 년의 흔적을 다 없애야 할 것 같아. 내가 숨쉬는 공간에 더러운 그것들이 함께 있다는 사실이 역겹거든. 구토라도 하기 전에 얼른 치워야겠는데…뭐부터 아니 어디부터 치우지? 오호 그래. 빨간 저 침대시트부터 걷어내야겠군. 속이 하얀 내가 그년의 음탕한 빨간 시트 위에서 어떻게 잠을 자겠어? 이제는 소파 신세 질 이유도 없으니 침상 정리가 우선일 테고…에…그 다음에는…그래, 옷장! 내 옷장에 그 년의 더렵혀진 육신에 걸친 것들을 채워둘 수야 없지. 부엌이야 이미 내 살림이었으니 치울 게 없을 테고…저저 봐라! 거실 바닥에 아직도 그 년의 꼬불꼬불한 털 뭉치가 돌아다니네. 그것부터 치워내야겠군. 그런데 청소기는 어디 있더라?

 참, 아니지. 저 녀석의 죽음을 확인하기 전까진 잠시 참기로 하자. 죽어가던 놈이 소리에 놀라 다시 깨어나기라도 하면 낭패 아닌가. 그래 조금만 더 두고 보자. 딱 하루만. 그래, 딱 하루만 관용을 베풀지. 너의 죽음이 침묵 속에 이루어지도록 내가 아량을 베풀 필요는 있어. 그럼 나는 무얼 하지. 그 놈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걸 지켜보는 것도 지겹고….

 벌써 여섯 시네? 간만에 세상 소식 좀 들어 볼까? 이놈의 리모컨은 또 어디 갔나. 오호~ 여기 있었군. 먼지 봐라. 먼지. 후~

 "어제 새벽 H동 B아파트 근처 공터에서 발견된 사체의 나머지 부분이 발견 되었습니다. 전날과는 500미터 가량 떨어진 야산에서 발견되었는데 부패 상태로 보아 2주일 쯤 전에 살해되어 버려졌을 것으로 경찰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경찰은 흉악한 이번 살인 사건의 범인을 잡기 위해 목격자를 찾고 있습니다. 죽은 30대 여인을 실종자로 추정한 경찰은 몽타주를 작성하여 전국에 배포중입니다. 이 얼굴을 보시고 가족이나 친지 이웃의 목격자는 H동 B경찰서나 그 외 가까운 경찰서로 연락 주십시오. 여러분의 제보가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반듯한 이마, 오뚝한 콧날. 죽어서 눈을 감고 있는 저 여자. 붉고 짙은 립스틱에는 약간의 흙이 살점과 엉겨 있군. 머리 색깔은 맥주 빛이지 아마…가슴에는 전갈무늬가?

 아무래도 청소기가 필요하겠어. 내일까지 기다릴 필요가 뭐 있어? 그 녀석이 살았어도 나는 계속 그 녀석의 목을 비틀 텐데 뭐.

 나는 먼저 천장에 묻은 세월의 살점을 훑어낸다. 의외로 거미줄이 군데군데 눈에 거슬리게 사방치기를 하고 있었다. 야속하게도 키가 닿지 않자, 나는 패대기치듯 거미줄을 향해 빗자루를 날린다. 투둑. 아뿔싸, 딱딱한 그 녀석의 등에 거미 한 마리가 추락하고 말았다. 나는 적이 당황스러워하는데 그 녀석 꼼짝도 않는다. 얼마 만에 맞는 살아있는 먹이냐. 그러나 그 녀석은 이제 더 이상 전갈이 아니다. 그냥 그대로 먼지일 뿐. 이제 치워도 될 때가 된 겐가?

 

이제 드디어?

 "문 열어! 밥버러지. 안 들려? 나 열쇠 수리공 불러 왔어. 존말 할 때 열어. 이 개자식아."

 인터폰 화면에 그녀가 떴다. 그녀가? 아아, 그럴 수는 없는 일인데….

 외면하고 돌아선 순간 나는 반투명의 감옥을 응시했다. 그런데….

 이 녀석은 또 어디로 간 거야? 어, 그 거미는? 흐…흔적이…없…다.

<문혜영>

<끝>

 중환자실에 있는 한 달 동안 어머니의 옆 침상에는 거의 날마다 낯선 이들이 오고 갔다. 때론 일반 병실로 옮겨가는 환자도 있었지만 보통은 물 떠난 물고기 마냥 숨만 헐떡이다 그대로 죽어나가는 이들이 태반이었으니 제 목숨도 저리 쉽게 줘버리게 되면 혼자 남겨질 아들은 어떨까 하는 안타까움에 그 속이 얼마나 탔겠는가. 착한 여자 만나 잘 살려나 싶더니 자식 낳다 자식과 함께 죽어버리고 새 여자하고는 잘 살겠지 싶었는데 피죽도 못 얻어먹을 마냥 구박만 받는 모습만 봐왔으니 너 두고는 쉬 죽지도 못 하겠더라 살려고 발버둥쳤다는 어머니. 나는 무뚝뚝하게도 쓸데없는 걱정이라며 어머니의 말마디를 툭 베어버리기 일쑤였는데 그래도 어머니는 세상 귀한 보물마냥 30대 후반의 아들의 이목구비를 슬쩍 훔쳐보곤 곱게 웃으신다. 중환자실에 들어온 지 한 달 만에 드디어 4인용 병실로 옮기게 된 행운을 보고 남은 환자들의 가족들은 부러운 듯 우리를 쳐다본다. 이제 죽음의 족쇄를 벗어버린 게 아니겠냐는 듯 그들의 시선은 삶으로 가는 어머니의 하얀 침상을 미끄러지듯 샅샅이 훑어낸다.

 우리가 들어선 4인 병실은 화장실 하나가 딸린 그래도 고급스러운 병실이란다. 4인에 화장실이 하나라니 그게 뭐 대단한가 싶었는데 다른 4인 병실에는 그마저 없어서 밖으로 나가서 쓰는 공용화장실을 이용해야 한다고 혼자 링거주사를 맞고 있던 60대 중반의 한 남자가 귀띔해 주었다. 금방 갈아놓은 듯한 깔끔한 백색의 침대보 위로 어머니를 눕히고 나니 그제야 긴장이 풀리며 부실해 보이는 키 작은 의자에 두 다리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앉아서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자니 자그마하니 L사의 옥빛 2단 냉장고가 그래도 제일 중요한 물건인양 TV와 함께 아래위로 쌍을 이뤄 자릴 잡고 있었다. 문 입구 쪽에 딸린 연갈색 껍질이 보기 흉하게 군데군데 벗겨진 문 하나짜리 옷장은 4인 식구가 옷을 걸어놓기엔 퍽 빡빡할 듯싶다. 그 옆에 검게 움푹 들어가 보이는 공간이 그 칭찬 자자한 화장실이라는데 나는 들여다 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때 제일 구석에 자리 잡은 할머니 한 분이 심심하니 TV나 보자며 말을 시켰지만 선뜻 동전을 꺼내는 이는 아무도 없다. TV와 제일 가까이 있는 억울함을 예의 삼아 바지 주머니를 뒤적여 오백 원짜리 동전 한 개를 꺼내들고 TV상자 입구멍에 들이미니 신기하게도 검게 죽어 있던 화면에 화색이 돈다. 돈을 먹어야 살아나는 그 놈의 TV 낯짝에는 눈에 익은 여자 앵커가 등장해 하루 동안의 험한 뉴스들을 뱉어낸다. 요사이는 온통 안 좋은 소식들뿐이라며 불만스레 뱉어내는 옆 자리 40대 아저씨의 말 한 마디에 다른 이들도 맞장구를 치며 거든다. 오늘도 아니나 다를까 30대 초반의 여인의 사체 일부를 발견했다는 환경 미화원의 목격담이 무심히 화면을 채우고 있는 게 아닌가. 살인 사건 뉴스를 듣는 동안 환자와 가족들은 어떤 몹쓸 놈의 짓이냐, 저 여자 내연의 남자가 배신한 걸 거다,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고 살인범도 어디 죽어 있는 거 아니냐 등등 한 마디씩 추리를 해대고 있다. 자기들이 무슨 애가사 크리스티나 되는 냥 심각하게 추리를 해대는 꼴이라니…나의 오백 원이 이 시끄러운 군중을 이끄는 원천이었다는 게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없이 그저 화면만 멍하니 보고 있더니 갑자기 손짓을 해대며 그만 가라고 연신 나를 밀어댄다. 제 기분을 감추지 못하는 내 얼굴에 짜증의 기운이 역력했나 보다. 아내가 없어졌는지 아직 모르는 어머니는 그동안 아내의 눈치만 보던 내가 안타까웠는지 얼른 아내에게나 그만 가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어미 병원비 한 푼은 못 얻어도 좋으니 밥이나 거르지 않고 얻어먹을 요량이면 눈치껏 행동하라는 어머니의 얄궂은 눈짓을 아무 것도 모르는 타인들에 들킬까 더 민망한 나는 얼른 이내 순진한 미소로 목례를 하며 병실을 나섰다.

 차가운 보도블록 사이로 금방 비라도 내렸는지 물기가 흐른다. 초겨울 비라 그리 달갑지가 않다. 요즘 같아선 눈이라도 내리면 좋겠는데 이 시기에 이곳에서 눈을 기대하는 건 어쩌면 과욕일지도 모른다. 가슴이 답답할 이유는 없는데도 자꾸만 일상이 답답하다. 어차피 버리고 싶던 1년을 이리 쉽게 버릴 수 있는데 가슴이 아플 이유나 답답할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잘못된 만남을 이제라도 원점으로 돌려놓겠다는데 내가 미안할 이유는 없는 게 아니던가. 애초부터 그것이 잘못인 줄 알았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게다. 누가 의심스런 눈초리로 그녀와 잘 살 수 있겠느냐고 귀띔을 해 주었더라면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보았을까 싶지만….

 아니었을 게다. 어리고 예쁜 아내를 맞아 잘 지내는가 싶던 동창 녀석이 얼굴이 밥 먹여주진 않더라고 술에 취해 전화해 왔을 때도 나는 아내자랑이냐며 시답지 않은 말 집어치우고 잠이나 자라고 핀잔을 주곤 했다. 그것이 그 친구에게는 아픔을 나누고 싶은 단 한 가지 방법이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그 녀석의 진심을 읽어내지 못하고 외면하고 무시해 왔던 것이다. 친구가 세상을 떠나던 날 조차도 나는 그 녀석의 울부짖음을 듣지 못했다. 착한 아내 괴롭히지 말고 집이나 꼬박꼬박 들어가라고, 흐느끼는 듯한 그의 말소리에 오히려 사내 녀석 답지 못하다고 그저 또 술주정이려니 핀잔을 주곤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한 마디라도 진심으로 그 입장이 되어 호응해 주었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가 그 녀석을 묻던 날에야 밀려들어 왔다.

 베트남에서 어렵게 들여왔다는 수입품 어린 아내는 친구 녀석이 차가운 흙더미에 갇혀 떠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알고 보니 결혼한 지 1년이 지나자 갑자기 그 녀석의 알뜰한 살림을 모두 챙기고 떠났다는 게 아닌가. 그녀와 잘 살려고 신의의 뜻으로 그녀에게 모든 재산과 살림을 맡겨둔 녀석은 악착같이 돈을 아껴 모아 그녀 이름의 작은 집까지 장만했다 한다. 죽어버린 놈에게 무엇이 소용 있겠는가 싶지만 돌아보면 사랑에 눈먼 한 사내의 죽음이 모두의 무관심 속에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어이없을 뿐이다.

 그 친구를 떠올리고 있자니 또 찬 기운이 비로 뚝뚝 내린다. 오늘은 비가 하루 종일 오락가락한다던 기상캐스터의 말이 갑자기 떠오른다. 오락가락 하는 것이 어디 빗줄기뿐이겠는가. 내 인생 꼴도 오락가락 해온 터에 하는 생각이 입가에 쓴 웃음을 짓게 한다. 서늘해진 기운에 나는 하나뿐인 감색 점퍼의 깃을 들어올린다. 점퍼의 깃을 들어올린다고 찬 겨울비의 감촉이 가려지기는 만무하지만 흉한 느낌 잠시 감출 수 있다면 짧은 목선에서 턱 언저리까지 가리는 일에 만족하는 것도 그리 나쁜 일도 아닌 듯싶다. 아내의 밍크코트의 깃만큼 따스할 리 없겠지만 요란스레 동물의 가죽을 벗기거나 그 털 뭉치를 숭숭 뽑아내는 역한 일을 필요로 하지 않는 나의 단벌의 점퍼가 사실 더 따뜻하지 않겠는가. 하기는 내가 그 동물들의 털을 뽑는 일에 내 몇 달치 월급을 투자했으니 나도 아내와 공범인 셈이지만. 그렇지, 공범! 나는 아내를 사랑한 죄로 많은 죄를 함께 저지른 범죄자 아닌 범죄자지.

 빗줄기가 점점 거세져 나는 급한 맘에 택시를 불러 세웠다. 빗줄기를 가르며 달리는 네 바퀴의 몸놀림에 취할 즈음에는 택시는 이미 아파트의 주차장에 다가와 있었다.

아내도 숨기좋아하는 널 닮은 걸까

"돈을 못벌면 빨래정리라고 해야지"

고함소리를 자장가 삼아 자야 했다

이런! 꿈쩍도 않던 녀석이 어디론지 숨어 제 긴 몸을 감춰버렸다.

숨기 좋아하는 너의 습관을 닮아 아내도 돌아오지 않는 걸까. 아쉬울 것도 없다더니 아내의 등장을 내심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헛웃음이 새어나온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네가 좋아하는 밤이 된다. 그때쯤 슬슬 네 모습을 드러낼 테지.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춰뒀지. 그전보다 더 환한 전등을 여러 개 달아 두었으니 너도 어쩔 수 없을 게야. 너는 습성에 따라 다시 숨을 곳을 찾겠지만 거기까지 기어갈 수 있을지 의문이구나. 계속 숨어 있어보았자 너는 내 손에 서서히 죽어갈 게야. 네 주인이 돌아오지 않는 한 너는 내게 꽤 괜찮은 볼모역할을 해야 하거든.

 너를 볼모로 삼은 지 벌써 2주째다. 너를 애완동물이라며 아끼던 너의 주인은 절대 다시 너를 찾지 못할 게야. 내가 원치 않는 일이니까 말이야. 너를 애완용으로 아끼는 애정 따위는 애시 당초 내게는 없던 일이야. 그동안 아내의 말에 따라 고분고분 너의 뒤처리를 해주고 너의 먹이를 잡아주고 너의 그 작은 공간에 물안개를 만들어 주었던 것은 나에게는 역겨움 그 자체였어. 내가 어찌 너의 하인 역할을 해야 하느냐 말이야. 무엇이 두렵고 아쉬워서? 이제 너는 버림 받은 존재야. 나? 나는 아니지. 나는 버림받은 게 아니라 그녀를 내가 버린 거거든. 어떻게 버렸냐고? 오호~그건 가르쳐 줄 수 없어. 내가 너에게 그것을 알려줄 이유는 없거든.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말이야.

 염려할 건 없어. 너는 자신이 죽는 지도 모르고 서서히 죽어갈 테니. 죽는 날을 모르는 건 너도 나도 네 주인도 다 마찬가지야. 신이 정해준 삶을 네 맘대로 네 의지대로 전복시키는 일은 아마 없을 테니까 말이야. 만약 있더라도 네 주인이나 너에게는 불가능하지. 나는 그래도 착하게 살아 왔으니 신의 아량이 베풀어질 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착한 이에게 해당되는 거거든. 생각해봐. 너는 살아있는 존재를 갈기갈기 찢어 놓는 놈이거든. 네 옆에 동거자를 흔적도 없이 먹어치우는 악질이라고. 또 그 치명적인 독은 어떻고. 독 있는 놈이 어떻게 착한 존재일 수 있겠느냐 이 말이야. 네 주인도 너와 같은 존재였지. 내 가슴을 치명적인 독설로 후벼 파고 내 심장을 갈가리 찢어발긴 후에 그것도 모자라 내 정수리를 날마다 걷어차고는 했지. 벌레 보다 못한 인생이라더니 그 벌레가 40년간 일궈온 재산도 명예도 흔적 없이 먹어치운 주제에, 네 주제 운운 하던 꼴만 생각하면 그 역겨운 눈동자를 파먹고도 남을 일이야.




 베푼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나 아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무척 많이 베푼 사람이야. 그건 알아둘 필요가 있어. 그녀가 저지른 악행들에 비하면 나는 정말 많이 베푼 사람이지. 암 그렇고 말고. 착한 얼굴과 몸매 하나로 나를 꼬였지만 내가 순진해서 그냥 넘어갔을 뿐 사랑 따윈 어차피 허울 좋은 가식이었던 거야. 나? 나는 사랑했지. 아니 그렇다고 믿었지. 그 가랑이 사이로 생전 처음 느끼는 희열인양 내 온몸을 받아들이며 행복해 하는 그녀의 신음 소리에, 자꾸만 내 몸 위에서 흐느적거리며 탄성을 연발하던 여린 그녀의 허리 위로 오르다가 끝내 마구 흔들리던 가슴에도 사랑이 넘쳤다고 믿었지. 다음 날 아침이면 어리광 섞인 콧소리로 어젯밤이 힘들었다며 투정부리는 아내에게 더 자라고 볼에 키스하곤 집을 나설 때면 아침밥을 거른 배고픔 따윈 내게 사치인 것 같았지. 나는 그게 사랑이라고 믿었거든. 그 사랑에 나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다 베풀었지. 살아줌에 고마워서 언젠가 내 아이를 가질 그녀의 몸에 고마워서 내가 벌어다준 돈을 알뜰히 모아두고 미래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또 한 번 고마워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녀에게 베푼 거야. 베푼다는 게 그렇게 고맙고 행복한 것이기에 난 주저하지 않고 그녀에게 내 몸과 마음과 돈을 베풀었어.

 아직도 숨어서 내 눈치를 살피는 거라면 그만두는 게 좋아. 이제 난 너의 주인에게처럼 베풀 생각이 전혀 남아 있지 않거든. 너의 주인이 날 이렇게 만들었어. 네가 주인만 잘 만났더라도 너는 나에게 사랑받고 있었을 텐데 말이야. 너에게 날마다 물안개의 습진 그늘을 만들어 주고 살아있는 맛있는 먹이를 사서라도 갖다 주었을 거고 그러면 네가 배고픔의 유혹에 빠져 네 동족을 잡아먹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헛, 동족상잔의 비극이란 말이 이 때 어울리는 말이었나.

 지금은 숨어 있는 네 꼬리를 찾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작정이야. 나는 지금 무척 배가 고프거든. 비가 갑자기 내리는 바람에 밖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걸 깜빡했거든. 아내가 사라진 2주일 동안 부엌은 그대로야. 그녀가 없으니 내가 살림하느라 부엌을 드나드는 일 따윈 할 필요가 없었거든. 오랜만에 냉장고를 보니 적이 반갑네. 밑반찬 통 몇 개쯤은 건질 만할 거야. 염장처리가 잘된 마늘장아찌나 오징어 젓갈 같은 것을 내가 만들어 둔 기억이 있거든. 아참, 밥이 있나? 있다 해도 먹을 수 없을 테지? 밥통 속에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먹다만 밥알 몇 방울만이 누런 알갱이로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군. 새 밥을 지어 맛나게 식사를 해야겠군. 신나게 밥을 지어야겠어. 2주일간 먹어온 바깥 밥이 지겹던 터에 제 집에서 밥을 먹는 일이 더 즐거울 것은 당연한 일. 신나게 쌀을 씻을 일이야. 신나게….



이 새끼야. 밥이 넘어가니, 넘어가? 돈을 못 벌면 빨래 정리라도 똑바로 해야 될 거 아냐? 도대체 뭐하면서 먹고 살래? 이 밥버러지야."

 아내 말에 따르면 난 인간이 아니라 벌레였다. 아내가 벌어오는 돈을 축내는 밥 한 톨 먹을 자격도 없으면서 야금야금 아내의 목숨을 파먹는 인간 모습을 한 이상한 신종벌레. 실직한 지 석 달째부터 나는 아내의 고함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자야했고 때론 곁에 가서 자려다가 가차 없이 그 유쾌한 발길질에 정수리를 엇박자로 걷어 채이곤 하는 신세였다. 돈을 못 벌어오니 아내의 아랫도리를 탐하는 일은 금지되는 것이 당연한 처사라는 것이었다. 처음 얼마간은 함께 살 길을 찾자며 아내는 나의 실직을 탓하지 않았지만 평소에 씀씀이가 헤펐던 아내는 점점 가난해지는 상황에 환멸을 느끼는 기색을 하며 나의 무능함을 신랄하게 탓했다.

 무엇인가 하고 싶었지만 15년 동안 경직된 샐러리맨 생활은 나의 재기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에게 치이고 잘 나가는 동창 놈한테 치이고 이리저리 채이던 나는 상처투성이 발바닥에서 쉰 냄새가 나도록 걷고 또 걸었지만 결국 아무 소득 없이 서슬 퍼런 아내의 눈초리를 기웃거리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 즈음 아내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다며 밤이면 집을 나서고 아침이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아내 말대로 살기 위한 일이니 아내의 야행성 외출을 나는 뻔뻔하게도 용납해야 했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노래방 도우미 일을 한다니 나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일이 얼마나 험한 일인지는 직장 생활을 하며 간간히 그런 곳을 찾아본 내가 모를 바 아니지만 그 때 본 여자들 중 이제 내 아내가 섞여 있을 생각을 하니 내 몸이 더럽혀진 느낌이었다.

 욕탕에 뜨건 물을 가득 채워 벗겨 내도 벗겨 내도 나의 수치심은 쉬이 벗겨지지 않았다. 아내의 전갈들을 처음 맞았을 때 느꼈던 굴욕이 또 한 번 나를 밀고 들어왔다. 새벽녘에야 들어서는 아내는 취한 목소리로 잠들어 있는 내 엉덩이를 걷어찼다. 치사한 놈이라고, 밥버러지라고, 잠버러지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면 나는 어느새 거실로 쫓겨나와 있기 일쑤였다. 속상하고 미안한 마음에 아침에는 처음으로 콩나물 해장국이라는 걸 끓였다. 오후 늦게야 일어난 아내가 이것도 국이라고 끓였냐며 똑바로 하는 게 하나도 없다며 또 밥버러지 욕을 한다.

 11월의 찬바람에 나는 낙엽과 함께 한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도대체 나의 추락은 어디까지일까? 그래도 디딜 땅바닥이라도 있는 낙엽이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비록 쓰러져 그 흔적 흩어지더라도 이듬해 새 잎을 키울 능력이라도 있는 그 삭혀지는 낙엽이 부러웠던 것이다. 나를 삭혀 내가 밥버러지에서 벗어난다면 나를 기꺼이 삭힐 터이지만 내 몸은 죽어 삭혀지더라도 그냥 죽은 밥버러지가 아니겠는가. 아내를 미워할 자격도 없으니 죽은 듯 눈치나 보며 하루하루 견딜 수밖에 없다고, 함께 사는 어머니마저 내게 눈치를 준다. 어머니는 몸이 안 좋아서 거의 누워 사는 게 일이다보니 아내에게 밥 빌어먹는 일조차 감사해야 하는 건 어머니도 나도 당연한 일이라는 거였다. 그래도 작은 건설회사 부장 급 남편 월급으로 제 몸 가꾸는 일에 돈을 다 쏟아 붓던 아내가, 너 하나 행복하게 해 주는 게 어렵냐며 큰소리 텅텅 치며 데려온 S라인 몸매의 싱싱한 여인인 아내가, 돈이 아쉬워 제 몸 힘들어도 나와 어머니 부양할 뜻으로 낯선 남자들의 돈을 꺼내고자 갖은 애교 다 떨고 있을 텐데. 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 화라도 내겠나 싶지만 속상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부장, 미안하지만 회사 경영상 어쩔 수가 없네. 자네만이 아니야. 대대적인 숙청이라고. 콩고물이라도 건지려면 그냥 반항 없이 받아들이게."

 15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제 집보다 더 살뜰히 관리해 온 직장인데 나에게 아무런 의견도 물어본 적 없었다. 이쯤에서 쉬는 건 어떠냐는 권고조차도 없었다. 그냥 회사를 살리기 위해 희생하라는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을 강조하는 현실이 있을 뿐이었다. 까마득했다. 내가 그 대를 위한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 사실을 받아들이기에는 내 삶의 현실이 까마득했다. 아내에게 그렇게 큰 소리 치며 청혼하고 이제 겨우 1년을 살 맞대며 살았는데 돈 돈 하는 아내한테 나의 실직을 알린다는 건 스스로 죽겠다는 말밖에 더 되겠는가.

 그렇다고 죽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인데 나는 벌써부터 아내의 예쁜 미소가 서슬 퍼런 칼을 품은 독기어린 눈빛으로 변해버리는 지독한 악몽에 시달렸다. 아닐지도 모르는데 그리 무서운 여자가 아닐지도 모르는데. 나는 두려운 생각을 떨쳐버리고 싶었다. 스스로를 위안하는 것이 나의 마음을 진정시킬 작은 묘안이라고 여기며 나를 최면하기에 이르렀다. 한동안은 숨길 수 있으니 숨길만큼 숨기고 그동안 새 일을 찾아보면 되지 않겠느냐고 나를 안심시키려 애를 썼다. 하지만 아내를 얻기 위해 큰소리치며 빌린 아파트의 대출금 이자에 어머니의 병 구환에 들어가는 돈만 해도 거의 월급의 절반이 아니던가. 나머지 돈을 다 그녀의 손에 내어맡긴 후 나는 용돈도 겨우 타 쓰는데 그녀가 그 돈을 지금까지처럼 다 써버리면 곧 우려는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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