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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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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마리아
남편이 들어왔을 때는 고물 수집차가 검은 연기를 한 움큼 내뿜으며 막 지나간 뒤였다. 차 안에 온갖 물건들이 가득 실려 있었지만 왠지 무덤처럼 음산한 바람을 뿌려놓았다.
양손 가득 물건들을 든 그가 구부정한 어깨로 현관문을 유유히 들어선다. 그의 구둣발 소리가 좀 사납게 들려온다. 마치 바닥을 걷어차는 듯하다. 광대뼈가 도드라진 그의 얼굴이 오늘따라 유달리 이물스러워 보인다. 역겨운 냄새가 내 코 끝에 감겨온다. 그의 출현과 더불어 신경이 팽팽히 당겨진다. 나도 모르게 거울에 비친 그의 두툼한 손아귀에 눈길이 멎는다. 야성이 꿈틀대는 큰손, 나를 거머쥐던 그의 악력, ‘그’라는 존재의 언저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급기야 몽롱한 상태로 빠져든다. 마치 박제된 동물이라도 된 기분이다.
나는 정신을 추스른다. “걸어다니는 폭발물 같으니라고!” 여주인공의 마지막 대사를 귀에 담으며 비디오 리모컨을 재빨리 집어든다. 그가 무척이나 싫어하는 영화인 까닭이다. 쇳소리 같이 갈라지는 목소리만 들리면 내 몸은 오그라들고 만다. 그를 향해 질러져 있는 마음의 빗장이 더욱 단단히 조여진다. 나의 생을 친친 휘감는 칡넝쿨 같은 그를 향해 눈은 독기를 뿜어낸다. 반면 햇빛 한 줄기 흘러들지 않는 공간에 묻혀 지낸 탓에 허연 석고상과 흡사한 시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두 눈을 희번덕거리다, 그의 손에 들린 물건에 시선을 떨군다. 잔뜩 굳어 있던 그녀의 몰골이 환히 펴지는 순간이다. 그가 믿음직스러운 듯 입가엔 설핏 미소가 묻어난다.
‘옛날 도자기라……. 그 촛대, 값이 꽤 나가겠군.’ 그의 표정을 훔쳐보던 시어머니가 거실 한 귀퉁이에다 물건을 내려놓는 그를 향해 혼잣말처럼 주절댔다. 내 시선은 어느새 그를 거쳐 시어머니의 움푹 파인 눈자위에 달라붙는다. 물건이 들어차 있음에도 집 안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꼬리를 사려감은 짐승처럼 웅크리고 나는 잠시 불길한 평화로움을 음미한다. 그의 콧김에 불빛마저 할딱거리며 사위어드는 듯하다. 그는 한동안 기생충처럼 내게 빌붙어 살아가더니 어느날 동면에서 깨어난 듯 다시 그 일을 재개했다.
나는 눈을 끔벅여 본다. 언뜻 허공 가운데로 날아다니던 황금빛수레가 사라지는가 싶더니 이내 낡은 우마차로 변신한 까닭이다. 종종 어디론가로 한없이 끌려가는 환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남의 집 앞을 지나가다가도 그는 탐욕스런 눈으로 물건들을 집어든다. 골목골목을 헤젓고 다닐 때마다 굶주린 사람처럼 눈알을 굴린다. 단독 주택, 상가, 어느 곳이나 주저함 없이 닥치는 대로 물건을 주워온다. 그는 맨홀뚜껑과 심지어 길 거리에 세워놓은 우체통까지도 뜯어와 담벼락 옆에 커튼 자락으로 덮어두었다. 마치 훈장처럼 자랑스러운 듯 지나다니면서 커튼을 들춰보기도 했다. 작업을 재개하고 처음 얼마 동안은 나를 앞세워 다녔다. 이젠 그에게 워낙 이력이 쌓이고 행동이 민첩해 내가 거치적거린 모양이다. 천만다행히도 나와의 동행을 그가 오히려 싫어하는 눈치다. 수법이 뛰어난 데다 좀도둑인 탓인지 좀체 그물망에 걸려들지 않는다. 그 일에 베테랑이 된 그는 물건들을 끌어모으고 골라내 팔아먹는 일만큼은 남다른 재주를 가졌다.
돈푼이나 되는 물건이 수중에 들어오는 날이면 아이는 어김없이 팔려나갔다. 첫째 아이 땐 재봉틀을, 둘째 아이가 팔려갈 적엔 그는 유모차와 어린이용 자전거를 끌고 들어왔다. 아이 침대와 그네를 집어와 집 안에다 쌓아둔 것은 셋째 아이가 팔려나갈 때였다. 복잡한 입양절차를 꺼려해 손쉽게 아이를 입양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그는 용케도 찾아냈다. 내 명치 끝이 저려온 것은 첫아이를 팔아넘기던 날부터였다. 내게 심적인 충격이 오고 자괴감마저 몰려왔다. 속에서 쓴물까지 게워냈는데도 헛구역질은 그치지 않았다. 몸 안에 내상이라도 생겨 곪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위가 어두워지자 시어머니는 어두컴컴한 동굴 같은 방에서 나와 마루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간다. 관절염이 악화되면서 아예 기어다니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다. 그녀의 눈동자는 어느새 절구통에 붙박여 있다. 돼지털처럼 센, 흰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리고 침침한 마루에 쌓아둔 물건 더미를 헤집고 다니다가 아무데서나 몸을 뻗고 누워버리는 시어머니에게 그처럼 나도 무심한 편이다.
“……암, 닳고 고장난 건 내버려야 하고 말고.”
그의 목소리가 다시 튄다. 한동안 미동조차 없던 시어머니가 움직이느라 부스럭거리자 물건들이 굴러떨어져 쿵쾅거리는 소리에 선잠이 깬 그는 제 불편한 심기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만다. 그럴 때면 기능을 다해버린 퇴물처럼 그녀가 정말이지 끔찍스럽다는 표정이 그의 얼굴에 고스란히 담겨진다. 시모가 눈앞에서 알짱거리면 그는 금세 험악스런 눈빛으로 돌변한다. 도피처로 도망치듯 물건 더미 옆에 귀기스러운 짐승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 그녀에게서 음습한 냄새가 스멀스멀 풍겨나온다. 밤에 출현하는 도둑 고양이마냥 어둠이 짙어지면 다시금 물건들을 헤적이기 시작한다.
“개구멍이여, 온 동네 잡놈들이 드나든 구녕 말이여.” 시모가 귀중한 물건을 파손시키면 그의 입에서 가차 없이 쏟아져나오는 말이었다. ‘그려, 이놈아! 그 구녕으로 너가 나왔는데도…….’ 그럴 때마다 그녀의 눈빛은 그렇게 내쏘고 있는 듯하다. 둘이 그런 식으로 싸워온 게 벌써 십 년이 훨씬 넘었다.
어쨌든 그들 모자의 관계는 애매하기만 하다. 그가 시어머니의 핏줄을 이어받았는지, 아니면 주워다 키웠는지 시모가 정확한 정보를 털어놓지 않는 까닭이다. 혈연 관계가 어떠하든 현실적으로 제 어미에게 타박을 줄 때면 내 시선은 그의 탁한 눈에 머물곤 했다. 문득 억지로 짜맞춰진 퍼즐조각이 연상된다.
“이곳저곳 전전하던 고물상인과 개구녕 사이에서 어찌어찌 생긴 아이를 유산시키려 했으나 때를 놓쳐 어쩔 수 없이 세상에 내놓았던 게지.” 그의 주장은 억지만은 아닌지도 모른다. 어쩌면 별생각 없이 저지른 살인미수의 대가를 시어머니는 지금 그로부터 고스란히 받고 있는 게 아닐까. 시모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질긴 생명력을 지닌 탓에 세상에 내던져졌다는 그는 제 기분이 하강곡선을 탈 때면 물건들을 파헤치는 시모를 두들길 기세였다. 분풀이라도 하듯 그땐 제 어미가 아닌 살인미수의 죄인을 대하는 것 같다. 처음엔 시모가 고물상인인 줄만 알았는데 한때 인근의 창녀촌에서 생활했다는 소문을 들은 것도 바로 그로부터였다. 하지만 이따금 횡설수설하는 바람에 그의 말이 고스란히 다 믿기지는 않는다.
산기가 있어 나는 서둘러 병원에 도착한다. 아이에게 유별난 관심을 가져온 그가 헐레벌떡 병원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잠시 후였다. 사내 아이가 태어나자 황금덩이라도 얻은 듯 그가 실로 오랜만에 활짝 웃는 모습을 나는 곁눈질로 살펴본다. “내 꿈을 파먹는 괴물이라도 바라보듯.” 불현듯 음울한 표정을 지으며 내뱉던 영화 속 여주인공의 실루엣이 눈에 잡힌다.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처럼 아이에게 향한 그의 눈빛이 유난히 번뜩인다. 한편 내가 정말 아이를 출산한 것인지 꿈만 같아 현실감이 없다.
다섯 번째 아이는 뱃속에서 죽어버렸다. 그는 아이를 살려내려고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사산돼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게 되자, 절망스런 얼굴로 제 머리를 감싸쥔 채 한참이나 주저앉아 있었다.
네 명의 아이가 팔려나간 뒤에도 나는 여섯 번째 아이를 또 가졌다. 시어머니는 병원비가 아까운지 나를 병원에 가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피가 비치고 통증이 시작됐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몰래 동네 산부인과로 달려갔다. 상태의 심각성을 안 동네병원측에서 나를 D병원으로 보내주는 바람에 난생 처음 큰병원에 들어오게 된 셈이다.
“진짜 물건이 손에 들어올 테니까 기다리라구.” 나지막한 그의 말에 내가 깨어나자 그는 황급히 핸드폰 폴더를 닫아버린다. 순간 내 온몸의 털이 곤두선다. 철판을 연상시키는 그의 등판에다 증오의 화살을 쏘아 보낸다. 나는 이번 아이만은 꼭 낳아 기르고 싶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에게 심상찮은 기미가 엿보여 내겐 심란한 상념이 교차한다. 아이를 무사히 낳아야 그가 뜻을 이룰텐데 내가 또 하혈을 쏟아내자 그의 불만이 극에 달한다. 나를 노려보던 그는 잠시 허공을 쏘아본다.
‘미미클럽’에서 일을 마치고 밤늦게 돌아오면 나는 먼저 집 안 구석구석을 휘둘러본다. 마치 꿈에서나 본 듯한 어떤 고물상에라도 들어앉아 있는 착각에 빠져들곤 한다. 또다시 어디선가 웅웅거리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마루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낯선 물건들이 내 시선을 잡아당긴다. ‘상처와 결핍으로 인한 정신적 장애가 저렇게 나타나는 것일까.’ 낯선 물건이 집 안에 하나씩 쌓일 때마다 내 안에 숨어 있는 의구심이 되살아난다.
그가 수동 카메라를 골라내 내다팔고 돌아온 날, 고개를 외틀고 눈 감고 누워 있는 내 곁에서 지폐를 세고 있었다. 인사동 단골집에다 다양한 칼 종류와 촛대 세트를 팔고온 날에도 탐욕스런 눈에 빛을 발하며 그는 몇 번이나 돈을 세고 또 세었다. 혼자 히죽거리며 코에다 돈뭉치를 갖다대고 향수마냥 냄새를 흡흡 맡기도 했다. 순간 내 콧속으로 독풀 냄새가 훅 달려들었다. 그와 나 사이엔 천년 빙괴라도 가로놓여 있는 듯 나는 자꾸 숨이 턱 막히고 만다. 내 삶이 쓰레기 더미 속에 파묻혀 함몰돼 버린 것 같다.
아이를 낳아도 내 마음대로 키울 수 없기에 나는 아이를 세상에 내놓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시어머니와 그에게 복수하는 길은 아이를 낳아주지 않는 것이었다. 저항하고 싶은 마음에 비밀리에 중절수술을 받는다. 내 몸에서 들어내어진 석 달짜리 태아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 병원을 드나들며 본 일들, 나 같은 여자들이 떼어낸 태아들까지도 눈에 어른거려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그가 집을 비울 때면 시어머니는 강력한 적군으로 돌변한다. 그녀는 물건 더미를 향해 헤앵, 하며 암호 같은 욕설을 뱉어내는가 하면, 째진 눈을 가늘게 치뜨고서 내 얼굴에다 코를 바짝 갖다대고 듬성듬성 박힌 길쭉하게 내뻗은 이빨을 드러내며 주문처럼 독설을 토해내기도 한다. 한번 작정하면 으르렁거리는 맹수마냥 시어머니는 목청도 크다. 어찌 보면 그녀의 행동은 자신이 엄연한 시모라는 사실을 내게 거듭 알리려는 경고의 몸짓 같기도 하다.
“제는 이걸 먹으면 애가 잘못 될 게 틀림없어…….” 시어머니가 닭 튀김을 배달해 먹을 때였다. 물건들 옆에 쭈그리고 앉아 누르스름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닭다리를 입에 물고 구시렁거렸다. 그녀의 쉰 듯한 목소리는 음습한 분위기마저 자아냈다. 걸신들린 괴귀처럼 시어머니는 그와 마주앉아 힐끗힐끗 나를 쳐다보며 닭 튀김을 어둑한 터널 속으로 쉴새없이 집어넣었다. 먹을 때만은 둘 사이가 무슨 의리 있는 동지나 되는 양 더없이 다정스러워 보였다. 불현듯 그들의 몸 속을 헤집고 다니는 상한 닭고기의 세균들이 현미경에 수천 배로 확대되었다간 축소되는 장면이 내 시야에 달려든다. 잠시 뒤 둘의 모습이 조각조각 분해되는가 싶더니 구름처럼 흩어져버린다. 나는 그때마다 현기증을 느낀다.
“얼굴이 거무죽죽한 녀석이라도 나오면 곤란하잖아.” 순대덩이를 입에 집어넣을 때였다. 시어머니는 음산한 눈빛을 띠며 그에게 읊조렸다. 노을마저 사위고 창 밖은 온통 먹빛 어둠뿐이다. 어둠 저편에서 뭔가가 꾸무럭거리는가 싶더니 쏟아지는 자동차 불빛에 영상은 이내 사라진다.
얄망궂은 시어머니도 그도 내겐 나날이 더 생경스럽게 느껴진다. 자갈투성이의 이 집 안에서 나는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부유하는 기분이다. 햇빛마저 차단되어 고갈돼버릴 것만 같다. 물건 더미 속에서 비위 상하는 냄새마저 풍겨와 내게 자꾸 욕지기가 치민다. 내 시선은 어느새 베란다에서 꾸룩꾸룩 말라 죽어가는 관엽식물에 머문다.
아이가 사산된 이래로 그의 매서운 눈초리가 내 몸을 찔러오곤 한다. 그가 내쏘는 칼날 같은 눈빛에 나는 소스라치고 만다. 이따금 그의 괴팍한 성깔이 여지없이 발산될 때면 숨소리를 죽이며 고스란히 감당해내야 한다. 면도칼로 내 목덜미를 위협하거나 이상스런 짓을 하는 횟수가 점점 더 늘어난다. 내 일상의 순간순간은 마치 살얼음 위를 걷는 기분이다. 그는 어쩌다 원하던 물건을 움켜쥐지 못하면 내 탓인 양 나를 묶어놓고 고문을 가하기도 한다. 마치 그 안에 악마성이 요동치기라도 한 듯. 그럴 때면 내 안에 적의가 팽팽해진다. 나도 모르게 예리한 칼날로 그의 목을 살짝 그어 피어나는 붉디붉은 피꽃을 연상한다.
“날개 같은 털을 뽑아내야 해. 그래야 날려고 버둥거리지 않거든. 사랑하는 네 혼까지 다 빼먹고 말고.” 음모를 하나씩 뽑으면서 그는 그렇게 내뱉었다. 그가 내뿜는 험악한 기운에 나는 흠칫 몸을 떤다. 갸름한 내 연못에다 이물질을 집어넣기도 한다. 마치 명성 높은 연구팀에 소속된 연구원이라도 되듯 내 음모에다 돋보기를 갖다대고 들여다보거나 음모를 잘라 조사하거나, 털을 태우기도 한다. 내다팔 물건을 고르듯 내 몸 구석구석을 면밀히 살핀다. 사내의 흔적투성이 내 흙탕물 연못에다 뜨거운 물을 붓고 털을 뽑으며 바늘로 찌르면서 얼을 홀딱 빼놓기도 한다. 내게 성적인 학대를 할 때면 그에겐 묘한 쾌감마저 엿보인다. 나는 마치 오지에 위치한 수용소에 갇힌 듯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그의 상판을 마구 할퀴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이내 가라앉힌다. 마음 한구석에선 시퍼런 칼날이 번득거린다. 부풀어오르는 살의를 잘근잘근 곱씹곤 한다.
‘저 인간도 주워온 폐품처럼 분해돼 팔려나갔으면…….’ 섬뜩한 한기가 사라지고 나서야 목구멍까지 기어올라온 그 말을 신음처럼 흘렸다. 나 자신을 위로하다가도 어느새 탄식의 한숨을 몰아쉰다. 그런 위태로운 의식이 거행되는 밤이면 나는 밤새 악몽에 시달리다 깨어난다. 숱한 상념에 끌려다니다 문득 담벼락에 쌓아둔 재활용 쓰레기를 불도저로 밀어내던 간밤의 꿈을 떠올린다.
“개구녕이 일 나가면 난 이집 저집에 물건처럼 내맡겨져야 했지. 물건 취급당하며 사는 수모를 알기나 하냐구. 깨진 탁구공 같은 신세 말야.” 나를 학대하는 그가 비정상적 심리를 가진 것은 어쩌면 과거로 거슬러올라갈 것이다. 시어머니는 그를 어려서부터 물건처럼 마구 내돌리며 키운 게 틀림없었다. 그가 남의 집에 맡겨진 어느 날이었다. 그 집에 도둑이 들어 돈과 귀중품을 잃게 되자 만만한 그가 도둑으로 몰려 옷이 홀랑 내벗긴 채 쫓겨나고 말았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품고 있던 그는 홧김에 남의 집 가게 물건을 훔치게 되었다.
주술처럼 혼잣말을 줄줄 내흘리는, 드세기 짝이 없는 시어머니지만 그의 정확한 출생만은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무성한 입소문을 늘 내게 옮겨주는 사람은 그다. 옮겨준다기보단 혼잣말로 구시렁댄다. 한때 시어머니가 고물상 뜨내기와 동거했고 그래서 그가 그의 자식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그는 얼굴만 좀 검을 뿐 생긴 것은 꼭 시모를 닮아 있었다. 포주 노릇을 하던 중늙은이의 자식이라는 소문을 들은 것은 두 달 전이었다. 하지만 정확한 사실은 허깨비 같은 그녀 이외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런 어수선하고 진흙탕 같은 환경에서 시어머니가 학대받는 과정을 보고 자란 탓인지 그의 몰인정에 나는 번번이 혀를 내두르고 만다.
“도둑년이거나 개구녕받이 출신일걸…….” 이어받았는지 아닌지, 확실치도 않은 제 어미의 피를 탓하며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기에 급급했다. 그녀의 더러운 피를 물려받은 까닭에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돌출 행동을 자제할 수 없다며 투덜거리던 그가 생뚱맞게 읊조린다.
“이 집안의 가장을 믿어주세요.” 나직이 내뱉은 그 얼굴에 음산한 웃음기가 번지고 있다. 어리둥절한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를 타인처럼 서먹서먹하게 쳐다본다. 그는 자신을 믿어달라는 말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물건들을 집 안에 쌓아올린다. 궁색한 집 구석구석에 물건들이 가득 들어차 있어 마치 인적이 드문 쓰레기 처리장을 방불케 한다.
살기가 빠져나가고 소용돌이치던 광기의 물결이 가라앉으면 그는 전혀 딴 사람으로 변한다. “오늘은 너가 달콤한 솜사탕 같구먼.” 술기운이 오르고 기분이 썩 괜찮은 날엔, 예민한 육감을 지닌 사람처럼 뜨거운 입김을 쏟아내며 내 몸을 핥아댄다. 징그러운 벌레라도 몸에 붙어앉은 듯 나는 눈살을 모으며 몸을 잔뜩 움츠린다. 어둠의 힘을 빌려 검은 형체를 노려보며 마음의 칼날로 난도질을 해댄다.
“요즘 이 일, 영계사업이란 거 몰라? 이 몸 옆에 있는 걸 천만 번 감사하라구. 얘가 지 꼬라지를 모르고……. 폐기처분 해도 시원찮을 년!”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물건들을 뒤적이다 갑자기 뇌까렸다. 그가 돌변한 것은 순간적이다. 그의 이상증상이 다시 도진 탓인지, 아니면 이따금 발작하는 성의 불협화음 때문인지, 어느새 내 왼쪽 눈썹 위가 터져 있다. 발그레한 기운이 피어나던 내 얼굴에 기미와 주근깨가 덮씌워져 있다. 그가 만개한 꽃처럼 탐내던 내 몸이지만 혹사당하고 무리한 탓에 균형미가 사라져버렸다. 육감적인 매력을 풍기던 몸매가 기계처럼 마모돼 자꾸 일그러져간다. 군더더기살 하나 없던 몸에 쌓이는 스트레스로 지방이 끼고, 살덩이는 축 처져 내가 봐도 흉한 모습이어서 이 바닥에선 그야말로 나는 퇴물 취급을 받는다.
“너, 입구멍은 뒀다 뭐해? 밥만 축내냐.” 이젠 나이가 들고 몸매마저 망가져 전처럼 창녀 생활을 하기가 어려워지자 그는 내게 마지막 수단인 ‘오랄’ 카드를 이용할 것을 강요한다. 차라리 성매매 단속이라도 있는 날은 운이 터지게 좋은 날이라는 생각이 절로 솟구친다.
“창녀만도 못한 년! 수세미로 거길 북북 문질러버릴 테야.”
내 몸값이 떨어지자 그 말을 입에 달고서 구박을 일삼는다. 그의 목소리는 탁한 데다 날이 서 있다. 그가 내뱉은 말은 내 마음을 마구 할퀸다. 말꼬리를 물고 맞대적하고 싶은 생각도 잠시뿐 그의 말을 귓전으로 흘려버린다. 이젠 웬만큼 면역이 된 탓인지 그의 행동에 분노가 치밀지만 묵묵히 참아낸다. 다시금 내 안에서 그에 대한 살의가 꿈틀거린다.
“너, 딴 생각 했다간 늙은 개구녕처럼……. 그걸 확 드러내버릴 거여.”
눈을 부릅뜬 그는 살인미수자를 겨냥하면서도 내게 노린 효과를 의식해서인지 그의 독기 어린 시선은 이미 나를 내리훑고 있다. ‘날 지배하려 들지 마. 이젠 더는 못 참아.’ 영화 속 여주인공처럼 나도 모르게 그 말을 되뇌어보았다. 그 이물감을 견딜 수 없어 패악이라도 떨고 싶지만 나의 반란은 언제나 머릿속에서만 일어날 뿐이다. 또다시 약기운이 발동하는 탓인지 생각과는 달리 내 입이 도무지 움직여주질 않는다. ‘너, 왜 이렇게 살고 있니?’ 거울에 비친, 텅 빈 내 동공을 향해 하루에도 수십 번 그 말이 솟구쳐 오르지만 나는 삼켜버리기가 일쑤다. 버거운 현실을 짊어진 채 이따금 마음의 철통 속에 갇힌 꿈을 꺼내본다. 척박한 현실 앞에 내 꿈은 고갈돼 좀체 싹틀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꿈속의 나는 파닥이는 나비가 되기도 하고 잿빛 구름이 되기도 한다.
‘내 인생을 더 이상 폐광처럼 매몰시킬 순 없어.’ 이 말을 곱씹으며 불도저 같은 그에게 짓밟혀버린 꿈을 찾아 달아난 적도 있었다. 이 동네를 떠나는 것이 소원이었던 나는 조금 모아둔 돈과 옷가지를 들고 도망을 쳤다. 그러나 멀리 가기도 전에 그는 내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그의 왼손에 들린 칼날이 내 눈앞을 몇 번 스치자 급기야 정신을 잃은 채 질질 끌려왔다. 택시를 타려고 길가 정거장에 서 있다 붙잡혀와 개처럼 두들겨 맞은 것으로 두 번째의 도망도 허사가 되었다. 두 차례 도망으로 심한 폭행을 당한 내 몸은 골병이 들고 말았다. 그 일이 뇌리에서 지워지기는커녕 골수에 박혀 나날이 또록또록 되살아난다. 언제쯤 그의 손아귀에서 풀려날 수 있을까. 그러나 약물의 후유증은 점점 깊어만 간다.
지금도 멀리서 기적 소리가 들리면 내 마음은 어느새 플랫폼에 서성이다 열차에 실려 달아나곤 한다. 그럴 때면 하이힐을 신고 발을 헛디뎌 자꾸만 뒤뚱거리는 나를 발견한다. 꿈속인지 현실인지 기차가 지나고 나면 사위는 무덤 속처럼 적막해진다. 척박한 현실이기에 마음만이라도 떠나고 싶어 내 시선은 기차 뒤꽁무니에 매달려간다. 나의 간절한 소망이 몰고온 환상 때문인지, 언제부턴가 환상통에 시달리고 있다.
이따금 거미줄을 쳐놓고 숨어 있는 왕거미를 떠올려 본다. 나일론줄 같은 질긴 덧줄로 내 온몸을 휘휘 감아놓아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없다. 끈적끈적 달라붙는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열망이 다시금 내 안에서 소용돌이친다. 지금도 밤이면 검은 그림자가 악착같이 내 뒤를 쫓아오는 악몽에 시달리곤 한다. 괴력을 지닌 듯한 그가 꿈속에서 내 앞에 불쑥 모습을 드러낼 때면 나는 뒷걸음질치다가 풀썩 주저앉고 만다.
그는 자신의 사업을 위해서 외출 중에도 카메라를 쉬임없이 작동시켜 내 행동을 꿰뚫고 있었다. 그에게 넌더리가 나지만 이젠 ‘도주’라는 단어가 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맴돌뿐 더 이상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여태껏 묶여 지내고 있다. 싫어서 내팽개치고 떠나온 곳으로 되돌아가기 싫은 탓도 있을 것이다.
‘잔혹한 계모 밑에서의 생활보단 낫겠지.’ 희망을 키우며 나는 하루하루를 등 떠밀 듯 보낸다. 제 피가 눈곱만큼도 섞이지 않은 나에 대한 계모의 광란의 몸짓에도 무심히 지나쳐버리는 아버지가 점점 싫어져갔다. 언제부터인가 아버지의 나직한 음성이 계모의 혼탁한 목소리에 묻혀버리고 집 안에 계절을 가리지 않고 폭풍우가 휘몰아치곤 했다. 우중충한 기억의 파편들이 아픔으로 다가온다. 이따금 눈앞에 어른거리는 시골집 근처, 언덕배기 억새풀, 폭풍에도 꿋꿋이 견뎌내는 그 억새풀이 그리워진다. 어디선가 억새풀들이 바람에 서걱대는 소리가 밀려오는 듯하다.
바람이 불면 내 머릿속은 그 시절로 되돌아간다. 잔뜩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왔을 때가 16살이었다. 그때 역전 골목에서 낯선 사내가 내게 불쑥 다가오지만 않았어도 내 꿈이 삭아들진 않았을 것이다. 그가 꼬드겼을 때 내가 흘깃 쳐다보자 뭐라고 웅얼거렸다. 그러다가 이내 우람한 사내의 거무죽죽한 얼굴에 희뿌연 웃음이 언뜻 스쳤다. 그게 화근이었다. 그땐 왜 입을 헤벌리고 웃는 그가 어리숭하다 못해 순박하게 보였을까. 어째서 나는 사내에게서 지금과 같은 맹수의 위협적인 인상을 간파해내지 못한 걸까. 모지락스럽게 뿌리치지 못한 게 두고두고 한이 되었다. 내 앞, 뒤태를 매섭게 꼬나보던 그의 사나운 눈빛이 지금에서야 생생하게 감지된다. 운명의 덫에 걸려들던 그때가 내 인생에 쇠락의 그림자가 깔리는 순간이었음을 깨달은 것은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상경해 첫출발부터 팡파르가 펑펑 터지길 기대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꿈의 한자락을 부여잡길 열망했다. 그때 나를 골방으로 끌고들어가 이상한 약만 먹이지 않았어도 나는 아무리 센 팔의 완력이라도 거뜬히 물리치고 그에게서 도망쳤을 것이다. 약 기운에 정신을 거의 잃다시피 해 바둥거리진 않았을 것이다.
먼저 나와 관계를 깔아놓은 뒤 그는 턱수염 사내를 내게 소개해주었다. 절박감에 떠밀려 그가 시키는 대로 턱수염을 따라나섰다. 내가 얼마간 머문 곳은 기지촌이었다. 굳이 과거 행적을 들출 필요는 없겠지만 동두천 등지를 전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곳으로 온 지가 19 년째로 접어든다. 턱수염 사내가 밤에 급사한 때문이었다. 차오르던 그의 숨소리가 잠시 되살아난다.
‘미미클럽’이 살아남기 위해 내가 오롯이 희생양이 돼야 한다. 처음 사내를 상대하던 날, 나는 진땀을 뺐다. 그 짓은 내게 고문과도 같았다. 하룻밤에도 여러 사내들을 감당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바닥에선 별의별 변태성욕자들까지도 받아낼 줄 알아야 한다. 멍든 꽃잎 같은 일상에 견디다 못해 사내를 거부하는 날이면 술병이 날아다니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만다. 내 몸엔 푸른 꽃이 수없이 피어났다 사그라들곤 한다. 마음속 깊이 새겨진 푸르무레한 꽃무늬가 쓰디쓰게 통증을 일으키며 몰려온다.
‘미미클럽’엔 늘 퀴퀴한 냄새가 떠다닌다. 그런 클럽이 어쩌다 썰렁하면 그는 제 삶의 궤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쌍소리의 볼륨을 한껏 높이며 모든 원인을 내 탓으로만 돌린다. 저녁이 되면 내 주위를 얼쩡거리며 나를 감시하는 눈치다. 그가 자리를 비우면 그의 ‘오른팔’이 그 일을 대신한다.
누구의 피가 섞였는지도 모르는 첫애를 팔아먹은 것은 바로 그였다. 아니, 오히려 시어머니의 영향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그 뒤 창녀로 지내면서 내가 임신을 하자 처음엔 낙태를 시킬 생각도 했지만 아이를 한 번 팔아먹은 재미를 아는 터라 좋은 가정에 양자로 주거나, 하다 못해 앵벌이로 내보내는 게 더 짭짤한 수입이 된다고 판단한 까닭인지 망설이던 그는 내게 아이를 낳게 했다. 임신을 해도 내가 일을 못할 때까지 부려먹다가 애를 낳으면 삼일 만에 또 창녀 생활로 몰아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병원 응급실에 누워 있었다. 구조대에 실려 병원에 온 것이 네 번째였다. 아랫배가 뒤틀리며 아파 버둥거리다 그만 정신을 놓친 모양이었다. 언뜻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재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그는 아이보다 나를 먼저 살리라고 의사에게 당부하는 희미한 소리가 내 귓속을 파고든다. 산모를 위해 어쩔수 없이 뱃속에 든 죽은 아이를 토막 쳐서 끄집어내야 한다. 나 자신에게 최면을 걸 듯, 내가 아이를 키우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한 탓인지, 세상 구경을 하기도 전에 아이의 숨은 이미 끊어져 있었다. 지난번에 아이가 죽어서 그가 손해를 봤는데 일곱 번째 아이마저 죽게 되자, 묘책이라도 모색하는 듯하다.
“당신 병원에 와서 애가 잘못됐잖소.” 입에 게거품을 문 그는 막무가내였다. 아이를 원상태로 꿰매달라고 욕지거리를 섞어가며 협박까지 한다. 병원측은 견디다 못해 꿰매주는 병원을 소개해준다. 맞붙어 상대했다간 골치만 아플 것 같아 빨리 해결하고 싶은 심정임에 틀림이 없다.
몇 토막을 내서 꺼낸 아이를 다시 원상태로 복원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병원측에서는 뛰어난 성형외과 의사를 물색했다며 아이의 시신을 원상태에 가깝게 넘겨주었다. 그는 병원측에서 사인한 서류를 위조했는지 아이 출생신고를 해서 정부의 지원금까지 받아챙겼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병원에 봐달라는 사정과 협박을 거듭해 병원비도 지불하지 않았다. 희생된 아이에 대한 연민은커녕 온통 돈벌이에만 정신이 쏠려 있었다.
“의사놈 집에 가서 떼어온 거라구.” 덩치 큰 그는 이번 일에 관련된 담당 의사 집에 가서 은근히 겁을 주다 협박까지 한 모양이다. 며칠 전 의사의 집 대문에 매달린 편지함을 안고 오더니 이번엔 초인종 벨까지 뜯어왔다. 의사의 딸아이와 다니는 학교 이름이 적힌 메모지가 그의 주머니에서 발견되었다. 학교 약도까지 그려져 있었다. 머리엔 벙거지를 뒤집어쓴, 험상맞은 그는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끝엔 날카로운 갈고리 모양을 단 쇠꼬챙이를 내 앞에서 흔들어댄다.
급기야 병원측은 아이의 장례식을 치러주겠노라고 제의를 해온다. 그가 돈을 요구하는 눈치를 알아챈 것인지 좋게 합의하자고 연락을 준 게 벌써 두 번째였다. 그냥 합의 보면 재미가 없다며 잔머리를 굴려 줄다리기가 필요하다는 생각까지 연구한 모양이다. 담당 의사를 좀더 괴롭혀야 무엇이라도 조금 더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리라. 무쇳돌 같은 그의 머리에서 어떻게 그런 생각이 떠올랐는지 나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호적상 시어머니와 아무런 연관이 없지만 함께 살고 있는 그들의 관계는 내 입장과는 정반대인 셈이다. 내 손에서 사라진 아이들, 그의 손에 의해 팔려간 아이들의 이름이 아직도 호적에 덩그마니 남아 있다. 마치 그 혼자만의 소유물인 양 물건처럼 팔려나간 아이들 생각만 해도 내 가슴이 저며오곤 한다.
‘거리에 비 내리듯 내 마음에도…….’ 언젠가 어머니가 남긴 책에서 본 시 구절이 아직도 내게 생생하게 남아 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엄마가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나지만 않았어도, 젊은 새엄마가 싫어 동생 둘을 남겨둔 채 집에서 뛰쳐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그때 동생들 생각을 하면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엄마처럼 나도 초등학교 선생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내가 사내에게 꿰차이는 일만 없었더라도 내 삶을 저당 잡혀 마침내 꿈의 날개를 싹둑 잘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꿈은 변색된 파편 조각으로 남아 내게 내상을 주곤 한다. 엄마 생각만 하면 내 마음의 서글픈 별이 떠오른다. 꿈속에서 날개 잘린 새는 잘도 날아간다. 꿈에서만이라도 빛을 발하는 나의 꿈을 찾아나서고 싶다. 엄마와 함께 거닐던 강가 옆 억새풀의 물결이 다시금 눈앞에 일렁인다. 엄마의 잔영이 물안개처럼 가물거린다. 그림 같은 장면이 깜박깜박 점멸하며 내 시선을 끌어당긴다. 기억의 갈피에 늘 머뭇거리는 어머니, 나를 다독여주던 그 손길, 어느새 눈에 고인 눈물을 훔친다. 목마름에 허덕이던 나는 생의 위험을 감지하고서 희망을 수혈받기 위해 끊임없이 SOS를 보낸다. 다급하게 ‘엄마’를 부르며 탈출하다 그에게 붙잡히는 악몽에 시달리다 깨어나면 허탈감에 휩싸이고 만다. 꿈속에서의 내 절규가 지금도 공명이 되어 울려온다. 폐물 속으로 무참히 사라져버린 내 꿈, 이젠 그 꿈마저 사그라든다.
그는 한동안 질질 끌다가 마침내 합의를 받아들이기로 마음 먹는다. 버텨 봐야 더 돌아올 것이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워낙 보기 드문 기이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파악한 듯, 병원측은 그에게 전례 없는 호의를 베풀어준다.
그림 한 점에 또다시 바늘을 내리꽂는다. 그가 내버리려고 모아둔, 나무판자에 싸잡혀 있던 물건 더미에서 내가 골라내 장롱 안에 감춰둔 야수파 그림이다. 전에 엄마와 함께 미술 전시회에 다녔던 그때를 떠올려 본다. 매일 바늘 자국이 하나씩 늘어간다.
시계에서 눈을 뗀 나는 서둘러 아이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회색빛 하늘에 우울한 그림자마저 드리워진 날이다. 화장이 끝나자 유골상자만 남는다. 눈물샘마저 다 말리버린 탓인지 내겐 더 이상 솟아나올 눈물이 없다. 내 꿈을 깡그리 접어둔 채 무의미하게 태워버린 지난 나날, 습자지처럼 구겨진 삶을 비로소 찬찬히 들여다본다. 마치 다 파먹힌 광산과도 같이 폐허가 된 삶 앞에 다시금 소스라치고 만다. 퇴색되고 찢겨져버린 내 꿈의 잔흔들이 잿가루처럼 흩어져내린다.
과거 속을 헤매던 축축한 눈길을 거두고 나는 아이 장례식 장면으로 돌아온다. 유골상자에 시선을 떨군다. 나의 남루한 생도 아이와 함께 태워버렸으면 하는 생각을 할 찰나 문득 언젠가 친구가 일하던 ‘재활용품 분리센터’가 뇌리를 스친다. 분리된 캔, 병, 스티로폼, 의자 등이 공장으로 실려가 다시 재활용되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더니 한 사내의 몸뚱이가 부분부분 분리 수거돼 재생되는 모습이 그 위로 겹쳐진다.
집 앞에서 고물 수집차를 발견한 것은 아이의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올 때였다. 물건처럼 실려가는 낯 익은 얼굴을 얼핏 본 듯도 하다. 넋을 놓고 고물차 뒤꽁무니를 오래도록 응시한다. “저 기계를 내가 수리할 수만 있다면…….” 불현듯 영화의 여주인공 음성이 내 귓전을 두드린다. 나는 조각조각 기워져 새로운 몸으로 묻힌 아이를 떠올린다. 순간 눈앞이 새하얘진다. 내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아가야, 잘 가!”
죽은 아가가 실리기라도 한 걸까. 밭은기침을 해대면서 나는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며 멀어져가는 쓰레기차에 대고 그 말만 뇌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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