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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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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5,349회 작성일 08-02-16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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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의자
진석순



라면 한 박스를 이고 컨테이너 박스로 가는데 글쎄 나무들이 울면서 통째로 떠내려 오더라.

우우거리면서 쓸려 가는데 별안간 네 생각이 나지 뭐니.

너도 거기서 그렇게 울고 있을 것만 같더라.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꽁꽁 묶어놓은 것처럼 엄마의 목소리는 아득했다.

전화할 때마다 엄마는 나름대로 내가 납득할만한 이유를 만들었다.

내가 사는 곳에 버스사고가 났다는데 혹시 내가 거기에 타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해서, 오랜만에 집으로 외삼촌이 놀러 왔는데 한참 동안 내 얘기만 하다가 가셔서, 청소를 하는데 오래전에 내가 잃어버렸다고 속상해하던 머리핀이 나와서.

심지어는 밖에 바람이 부는데 자꾸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만 같아서 전화를 하신 적도 있었다.

그래서 지금 어디서 지내고 있는 거예요?

어디긴, 떠내려간 집 위에 임시로 마련해준 곳에서 지내고 있다.

안이 찜통이라 들어가 있진 못해도 없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니.

집 떠내려가고 이 더운 날씨에도 네 애비는 잘도 들어가 낮잠을 잔단다.

그래도 사람 안 다친 게 다행이지.

누구 다녀간 사람 있어요?

다녀가긴 누가 다녀가니.

자식이라곤 달랑 너 하난데.

여긴 연일 건조할 뿐이었다.

나는 엄마의 눅눅한 목소리를 낯설게 받아들었다.

어느 날은 계란말이를 하는데 맛소금이 없었다.

된장이며 고추장에 간장까지 챙겨주던 엄마는 굳이 가방 안에 굵은 소금까지 챙겨주었다.

여기서 마트까지 나가려면 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 했다.

때문에 보통은 주말에 필요한 것을 한꺼번에 사오는 편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굵은 소금을 꺼내 손가락 끝으로 잘게 부수어 계란을 푼 그릇에 넣었다.

그러다가 손끝이 아려서 보니 살짝 피가 돋아 있었다.

그 사이 굵은 소금이 꾸둑꾸둑 말라 있었던 것이다.

연일 건조한 날씨 때문에 굵은 소금에 손까지 베었다.

물기 있는 엄마의 목소리를 병에 담아두고 싶다.

아직은 좀 그래.

아버지도 건강하지? 엄마도.

그래.

너무 걱정 마라.

내가 괜한 소리 했나 보네.

여기 자원봉사자들이 수두룩하니까.

네 애비는 종일 자는 게 일인 사람인데 건강하고 말고 할 게 어디 있겠니.

그래도 언제고 한 번 여기 들러라.

장마 지나간 뒤로 너무 변했어.

한창 공사하는데 너 올 때쯤엔 예전 모습이 하나라도 남아있을지 모르겠다.

집이라도 못 찾으면 어쩌니.

엄마의 목소리엔 금방이라도 곰팡이가 꽃처럼 피어나고 불규칙한 무늬들이 돋아날 것만 같았다.

며칠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촘촘하게 비가 내리고 강물이 불어났다고 했다.

곧 전기가 끊어지고 수도가 끊어지고 비가 그치길 기다리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긴 날들.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안전한 초등학교 체육관으로 피신했다.

아버지는 그때도 구석에 웅크리고 곤하게 주무셨다.

마을에서 급히 떠나온 사람들은 집에서 귀중한 것들을 챙겨 나왔다고 했다.

사람들이 죄다 그걸 하나씩 들고 나왔더라.

하긴 그게 제일 중요하다면 중요하지.

전화를 끊자 물기가 고일 것 같던 바닥이 금세 말랐다.

나는 엄마에게 여기는 너무 건조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엄마는 이 계절에 건조한 곳이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엄마가 누진 옷들을 말리기 위해 보일러를 틀 때면 나는 가습기를 주기적으로 작동시켰다.

바닥에 물을 쏟아도 걸레를 찾아 빨아서 오면 온데간데없이 물기가 사려졌다.

아무런 무늬도 남기지 않고 증발해버린 것이다.

뭐든 아무런 무늬를 남겨놓지 않고 허공에 붕 뜰 것 같은 나날들.

세탁기 안에 밀어 넣었던 빨래들을 도로 빼냈다.

더 이상 동전은 들어가지 않았다.

투입구 안쪽으로 꾸역꾸역 채워진 동전들이 보였다.

도열해 있는 기계들이 죄다 그랬다.

아무도 동전을 거둬가지 않으니 더 이상 세탁기를 쓸 수 없었다.

빨래방은 며칠 동안 이런 상태로 고여 있었다.

세탁기 안은 세제들이 말라붙어 있었고 섬유 유연제를 판매하는 자판기는 텅 비어 있었다.

바구니 안으로 빨랫감들을 아무렇게나 담았다.

거긴 빨래를 해도 금방 마르겠구나.

여기는 아침에 널은 네 아버지 팬티가 해가 질 때까지도 마르질 않는구나.

마르는가 싶으면 또 비가 내리기 시작해.

젖은 팬티를 입는 것과 더러운 팬티를 입는 것 중에 뭐가 더 나쁜 거라고 생각하니.

세탁기를 들여놓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

엄마는 세탁기가 없는 집에 사는 나를 안쓰러워했다.

잔뜩 따라놓았던 물은 전화하는 사이에 한 모금 정도가 줄어들었다.

엄마는 내 옆을 뚜벅뚜벅 걸어 다니는 건조함을 잔뜩 미화하곤 전화를 끊었다.

내가 물기 있는 엄마의 목소리에 대해 부러워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바닥을 밟을 때마다 뿌옇게 솟아오르는 흙먼지들과 퍼석하게 말라버린 짐승의 배설물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눈물은 뺨에 흐르기도 전에 말라버렸다.

엄마는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는데도 눈물을 흘리는 거 같다고 했다.

닦아보면 그것은 빗물이라고 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우산 하나씩은 끼고 다닌다.

저 사람은 우산이 없어 어쩌나, 하고 시선을 주다 보면 건물에서 나올 땐 가방에서 여지없이 우산을 꺼내 경쾌하게 펼치곤 한다.

그런 계절이다.

우산을 펼치는 소리만 가볍게 튀어 오르는 계절.

처음엔 예전에 살던 방에 들러 물건을 챙겨 엄마에게 내려가 볼 생각이었다.

전기세와 가스요금을 납부해야 했고 주인집에 수도세를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기차를 타고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터미널에 들러 엄마에게로 갔다.

엄마는 없던 길들이 생겨나고 있던 길들이 하룻밤 사이 사라진다고 했다.

멀쩡한 길이 강이 되어 흐르고 집 한 채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아직 시외버스가 다닐 때 가야했다.

엄마에게 다녀오고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비가 내리고 있다.

아직 복구공사가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다시 비가 내려 안타까움을 더해준다는 앵커의 목소리가 공중을 누렇게 떠다닌다.

이렇게 비가 쏟아질지 누가 알았겠니.

엄마는 목줄을 풀어놓지 않아서, 개집에 물이 들어찰 때까지 꼼짝없이 묶여있던 누렁이 시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버지는 모종삽을 들고 산으로 가려고 했었다.

하지만 복구공사 중이라 산을 오를 수 없었다.

오랜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던 아버지는 곧 다시 누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창 더울 때 잡아먹는 건데 말이야.

모로 누운 아버지는 부러 큰 소리를 냈었다.

터미널 매점 여자는 깊숙한 곳에서 우산을 꺼내준다.

가방에는 조악한 꽃무늬 양산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어떤 우산을 드리냐는 물음에 내가 했던 대답은 심드렁했다.

그냥 아무 거나요.

여자는 수북이 쌓인 우산들 중에서 맨 아래에 있는 것을 빼준다.

손의 움직임이 제비뽑기를 할 때처럼 사뭇 진지하다.

아래에서 우산을 빼내자 빽빽하게 쌓인 우산들이 흐트러진다.

그러는 사이 빼낸 자리가 메워진다.

우산 하나를 빼낸 자리는 이제 티도 안 난다.

여자는 장마 동안 우산을 다 팔 수 있을까.

아무런 무늬도 없고 두 번밖에 접혀지지 않아 핸드백에 넣을 수도 없는 우산을 쓰고 예전에 살던 방으로 왔다.

사람들은 조금만 조밀해지면 저마다 우산을 번쩍 들었다.

나도 덩달아 우산을 높이 들었지만 사람들 얼굴에 닿기 일쑤였다.

우체통에 고지서 용지가 반도 넘게 삐져나와 있다.

나는 화장실 안에서 줄기차게 노크소리를 듣고 있을 때 화장지를 풀어내듯, 신경질적으로 고지서 용지를 그러쥔다.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발자국 소리가 과장된다.

멀리 누군가가 내가 걷고 있는 만큼만 나에게 다가오고 있는 듯하다.

나는 걸음을 딱 멈춘다.

현관문 앞에는 젖은 박스가 놓여있다.

밑에는 물이 고여 있다.

물기들이 박스를 타고 올라와 무늬를 만들어놓았다.

이 안에 뭔가 들어갈 수 있을까.

내 허리까지 올라오고 한 아름이 넘는 박스는 눅눅하다.

덕지덕지 붙여놓은 테이프도 쉽게 뜯겨나간다.

주소에는 내 이름이 정확하게 쓰여 있다.

혹시라도 잘못 보내질까 힘을 주어 반듯반듯하게 쓴 글씨체다.

엄마가 보낸 것이었다.

이제 엄마와 아버지의 집에는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완전히 떠나온 것이다.

테이프를 뜯어내고 흐물흐물해진 박스 안을 열어본다.

아직 여독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을 하고 회전의자가 돌고 있다.

나는 맹렬하게 돌고 있는 회전의자를 세운다.

등받이까지 물방울이 송골송골 돋아나있다.

나 무 꼭대기에 훌라후프가 걸려 있었다.

멀리서 봤을 땐 가지들이 동그랗게 휘어져 있나 했었는데 가까이 와서 보니 훌라후프가 걸려있는 것이었다.

그것 말고도 젖은 옷가지들과 책가방, 줄넘기, 국자나 고무장갑 같은 것들이 열매처럼 주렁주렁 걸려있었다.

마치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 하나가 휘우듬하게 서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다가가자 나무 옆에 꼿꼿하게 서 있던 여자 둘은 마스크를 벗었다.

둘은 쌍둥이 같아 보였다.

번들거리는 얼굴을 하고선 목에 건 수건으로 연방 땀을 닦고 있었다.

나무 앞에서 굴착기가 장마에 쓸려 내려온 토사물을 거둬내고 있었다.

둘은 굴착기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좇고 있었다.

나도 함께 서서 굴착기의 움직임을 따라가고 있었다.

엄마 말이 맞았다.

길들이 사라지고 흙에 파묻혀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었다.

오던 길에 이층집이었던 벽돌집이 층 하나를 없애버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까이 와보니 일층 전체가 흙에 파묻혀 있는 것이었다.

내가 딛고 있는 곳은 허공으로 붕 떠있는 지점이었다.

날씨가 줄기차게 더웠다.

땀이 흐를 때마다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다가 아예 한 손에 쥐고 걸어왔다.

무른 땅은 밟을 때마다 구두굽이 푹푹 들어갔다.

왔던 길을 되돌아보니 땅에 구멍을 하나씩 뚫어주면서 온 것 같다.

아버지가 누워있을 집을 가늠하다가 여자 둘 중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내 앞을 지나쳐 부리나케 달려갔다.

자원봉사자는 여자에게 뭔가를 건네주었다.

여자는 그것을 받아들고 다시 부리나케 서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뭐니?

이번엔 은수저.

젓가락은 어디 갔을까? 다음엔 언니 차례야.

여자는 뒤에 놓인 바구니에 자원봉사자에게 건네받은 은수저를 담아놓았다.

둘은 다시 마스크를 쓰고 꼿꼿하게 서서 굴착기의 움직임에 시선을 꽂았다.

바구니에는 은수저를 비롯한 더럽혀진 책들과 아령, 장난감 자동차나 파리채 같은 것들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러는 사이 이번엔 언니라는 여자가 자원봉사자에게 달려갔다.

은수저는 아버지 거예요.

무슨 상을 받으셔서 받아온 건데 아끼고 아끼다가 결국 저걸로 식사를 한 번도 못하셨어요.

그깟 은수저 아낄 게 뭐 있다고.

그나저나 나오라는 건 안 나오고 계속 쓸데없는 것들만 나와서 큰일이네요.

언니가 자원봉사자에게 받아온 것은 슬리퍼 한 짝이었다.

여자 둘은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슬리퍼를 이리저리 뒤집어 보고 흙을 털어내기도 했다.

둘은 일단 바구니 안에 슬리퍼를 넣어두었다.

이게 내건 지 언니건 지 구분이 안 가요.

게다가 하나뿐이니.

여자 중 하나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부러 설명해주었다.

둘이 다시 마스크를 쓰고 목에 건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굴착기의 움직임을 좇고 있었다.

종일 그렇게 서 있을 생각인 거 같았다.

흙이 덜어질 때마다 지붕이 살짝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붕 끄트머리가 드러나자 둘은 손을 잡았다.

이제 곧 나올 거 같아요.

꼿꼿하게 서 있는 나무는 훌라후프가 걸린 나무뿐이었고 풀들이 물결무늬를 그리며 쓰러져있었다.

길이 아닌 곳으로, 어쩌면 길이었을 곳으로 방역차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여자는 천천히 마스크를 내렸다.

하얀 마스크는 때에 절어있었다.

잠깐 서 있었는데도 몸이 노곤해졌다.

그래도 여자는 미동도 없이 서 있다가 자원봉사자가 흙더미 안에서 뭐가 나왔다고 하면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리곤 물건을 들고 내게 다가와 그것에 대한 일화들을 나열했다.

여자는 지붕이 반쯤 드러나자 언니와 손을 붙잡고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중요한 게 아직 안 나왔나 봐요.

뭐가 더 나올 게 있어요?

아버지요.

아버지는 내가 동전 하나를 없애봤을 때 간장종지를 던졌다.

다시 한 손에서 숨겨뒀던 동전을 보여드렸을 때에도 수저로 내 머릴 치시려고 하셨다.

종이컵 안에서 동전이 두 개가 되자 다시 식사를 하셨다.

아버지에게 마술사는 건물 한 채를 통째로 없애는 존재가 아니라 맨땅에도 우물을 만들어내는 의미였다.

내가 아버지에게 보여드렸던 두 번째 동전은 아버지의 것이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동전 하나가 생긴 줄 아셨다.

컨테이너 박스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 앞으로는 세간들이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었다.

서랍장이나 항아리들이 위태롭게 쌓여 있었고 바퀴가 없는 자전거도 버리지 못하고 일단은 문 옆에 세워두고 있는 듯했다.

곧 자전거 바퀴 하나쯤 건져낼 수 있을 것이다.

문이란 문은, 창문이란 창문은 죄다 열어놓고 있었다.

문 옆에 세워진 선반에는 신발들이 칸칸이 채워져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온전하지 못하고 마른 흙이 달라붙어 있었다.

엄마 이름을 말할 땐 고개를 갸우뚱하던 사람이 아버지 이름을 말하자 단번에 알아챘다.

끝에서부터 여섯 번째 컨테이너 박스.

모두 똑같이 생겨서 나는 몇 번이고 수를 헤아리는 데 실패했다.

하나하나 손으로 짚어가며 여섯 번째 컨테이너 박스에 도달했을 땐, 밖으로 터져 나온 세간들이 우리 집의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활짝 열린 문 안으로 아버지의 발이 보였다.

단정하게 겹쳐진, 거무스름한 발이 분명 아버지의 것이었다.

땀을 흘리면서도 곤히 주무시고 계셨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으로 자꾸 닫히려는 문 앞에 구두를 벗어놓았다.

문은 더 이상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열려있었다.

선풍기 한 대가 툴툴거리며 돌아가고 있었지만 컨테이너 박스 안은 밖과 다를 것 없이 후텁지근했다.

선풍기가 아버지 쪽으로 고정되어 있어서 아버지 쪽으로 몸을 틀었다.

선풍기 바람이 아버지를 지나서 내 목덜미에 끼얹어졌다.

야아, 네는 언제 왔어?

방금 왔어.

찾느라 혼났어.

그런데 여기가 어디쯤이야? 도통 모르겠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과수원 뒤쯤이 아닐까 한다.

영철이네 집 파묻힌 게 저쪽에 있으니.

언제 비가 왔냐 싶게 하늘이 이래 맑네.

엄마가 젖은 수건으로 몸을 툭툭 털어낼 때마다 먼지가 났다.

내가 선풍기를 엄마가 있는 쪽으로 향하려는데 엄마는 됐다며 손짓을 했다.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는 부탄가스와 라면 몇 개, 간단한 그릇과 모기향과 옷 몇 가지가 전부였다.

엄마는 쌀 한 봉지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았다.

오늘 배당받은 거 같았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몸이 고단해졌다.

게다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컨테이너 박스들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질 않았다.

챙겨온 건 이게 다야?

뭐 챙겨 나올 틈이나 있었니.

잠만 자던 네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서 나온 건만도 다행이지.

신발도 어쩜 그렇게 한 짝씩만 건져내는지.

뭐 하나 제대로 신을 수가 있어야지.

여자 둘은 해가 지기 전에 아버지를 건져낼 수 있을까.

밖이 일순 시끄러워지면서 먼지가 일었다.

자원봉사자들이 컨테이너 박스 한 가운데 퍼런 방수천을 펼쳐놓았다.

그리곤 각자 가져온 물건들을 쏟아 부었다.

젖은 것이 건조해지면서 불은 책들과 깨지지 않은 그릇들과 커다란 여행가방, 한쪽 팔이 없는 인형들이 선물처럼 쏟아졌다.

어디서 그렇게 사람들이 몰려왔나 싶게 사방에서 수재민들이 몰려들었다.

방수천 사이를 빙 둘러싸고 본인의 것이라고 짐작되는 물건들을 가져갔다.

엄마도 한쪽 발엔 슬리퍼를 한쪽 발엔 아버지 운동화를 꿰어 신고 나갔다.

나도 구두를 신고 엄마를 따랐다.

엄마를 따라 몇 발자국 디뎠을 때 컨테이너 박스의 문이 쿵하고 닫혀버렸다.

서로 자기 것이라고 싸우기도 하고 서로 자기의 것이 아니라고 싸우기도 했다.

동네에 하나뿐인 초등학교 체육복이 나왔을 땐 서로 자기 아들의 것이라고 우겼다.

결국 자기 아들을 데려와 억지로 입혀본 아줌마의 것이 되었다.

몸에 죄어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아이는 아무 소리 없이 냉큼 컨테이너 박스로 들어갔다.

엄마는 팔을 걷어붙이고 열심히 찾았다.

자식이 받은 개근상장을 찾고 울음소리를 내는 남자도 있었다.

상장은 코팅을 해놓아서 멀쩡했다.

옆에서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아이들이 받아온 걸 모조리 코팅해 놓을 걸, 하는 여자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결국 엄마는 우리 집의 물건을 한 개도 찾지 못했다.

없구나.

이번에도 없어.

왜 그걸 챙길 생각을 못했을까.

바보같이.

제일 중요한 건데.

뭘 두고 나왔는데? 통장?

아니, 앨범 말이다.

앨범.

앨범을 들고 나왔어야지 엉뚱한 걸 들고 나오지 말고.

엄마가 말했던, 사람들이 죄다 들고 나왔다던 것은 앨범이었다.

나는 정말 한순간에 집을 빠져나와 다시는 들어갈 수 없게 된다면 무엇을 들고 나와야 할지 생각해봤다.

아무 것도 중요한 게 없다가도 전부 중요하게 생각되기도 했다.

일어나 컨테이너 박스로 갔다.

그렇게 큰 소리로 문이 닫혔는데도 아버지는 잘 주무시고 계셨다.

얘, 얘! 이거, 여기 네 것 있다.

엄마의 목소리가 뒤통수를 잡아당겼다.

멀리 엄마가 나를 향해 소리치며 달려오고 있었다.

나중에 햇빛이 걷히고 자세히 봤을 때는 그것이 달려오는 것이 아니라 굴러오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건 분명 내 것이었다.

이제는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은 그거 하나뿐이었다.

엄마는 득의만면하게 내 앞까지 왔다.

한 밤중이 되었는데도 열기는 가시질 않았다.

끈적끈적하게 내 몸에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았다.

컨테이너 박스는 세 사람이 눕자 관처럼 딱 맞았다.

누운 자리를 빼고 나면 디딜 곳도 마땅치 않았다.

엄마가 몸을 뒤척일 때마다 덩달아 나도 몸을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배에 두른 차렵이불이 들썩였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덮지 않고 곤하게 주무셨다.

어쩜 이 날씨에 땀 한 방울 안 흘리시고 잘 주무실까.

아침에 보급받은 웃옷은 한 벌 뿐이었다.

낮에 엄마가 입었던 웃옷을 아버지께 덮어드렸다.

목 밑까지 덮어드리다가 나는 숨은 쉬시나 싶어 아버지의 코끝에 검지를 가져다댔다.

엄마가 내 손등을 탁 내리쳤다.

내 손이 아버지의 얼굴에 닿을 뻔했다.

자는 게 일인 양반이야.

그래도 이럴 때 없는 거보다는 나아.

엄마는 다시 들썩이며 모로 누웠다.

그리곤 이불을 내 쪽으로 밀어주셨다.

열어놓은 창으로 바람 한 점 없었다.

목 밑으로 굵은 땀들이 고여 들기 시작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있는데도 밤이나 낮이나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서로 마주쳐도 고개만 숙일 뿐이지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앨범을 찾거나 들고 나온 사람들만이 종일 앨범을 넘기며 시간을 보냈다.

회전의자는 플라스틱 서랍장 위에 올려놓았다.

세 사람이 자려면 회전의자를 바닥에 부려놓을 수 없었다.

다리를 오므리고 자는 한이 있더라도 회전의자를 내려놓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결국 회전의자를 서랍장 위에 올렸다.

밖에 두면 누가 가져갈지도 모르고 흙먼지를 뒤집어쓸 거라고 했다.

회전의자는 언제든지 쓰러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목덜미에 땀을 닦는 횟수가 잦아들었다.

누군가가 의자에 앉아 엄마와 나와 아버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엄마와 내가 몸을 뒤척일 때마다 회전의자를 돌려 시선을 조정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저것 좀 밖에 내놓으면 안 돼? 아니면 바닥에 내려놓던지.

바닥에 내려놓으면 우리 셋이 어떻게 눕는다니? 그리고 밖에 내다 두면 지금 먼지 뒤집어 쓰기 딱 좋구만.

저거라도 찾아서 얼마나 다행이냐.

아버지는 내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회전의자를 사주셨다.

책상도 아니고 달랑 의자 하나를 사주셨다.

시내에서 제일 비싼 걸로 사신 것 같았다.

하지만 짙은 고동색의 낡은 책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의자 높이를 제일 낮게 맞추어도 책상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나는 이미 제일 높게 조절한 회전의자에 앉아도 발이 바닥에 닿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기숙사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 책상에 앉을 기회는 좀처럼 없었다.

가끔 엄마는 회전의자에 빨래를 널어놓거나 문이 닫히지 않도록 받혀놓았다.

고추를 널어놓을 때도 쓰고 손이 닿지 않는 찬장에서 물건을 꺼낼 때도 몸을 흔들거리면서도 굳이 회전의자를 밟고 올라섰다.

아버지에게 어떻게든 회전의자가 집에서 잘 쓰이고 있음을 보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어느 날은 내 방에서 흐릿하게 엄마의 웃음소리가 났었다.

엄마의 목소리라고 생각되지 못할 만큼 가느다란 것이었다.

마치 먹이사슬의 가장 낮은 단계 생물이 내는 소리 같았다.

방문 앞까지 갈 때까지도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거기서 엄마는 회전위자에 앉아 물색없이 웃고 있었었다.

발로 가볍게 바닥을 튕기며 회전의자를 돌렸다.

발을 한 번 구를 때마다 회전의자가 서너 바퀴 돌았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힌 엄마는 끊임없이 웃었다.

회전이 멈췄을 때 엄마는 다리를 움직여가며 회전의자를 끌고 곤충처럼 방안을 샅샅이 돌아다녔다.

끄트머리까지 갔다가 벽을 차고 반대편까지 미끄러져 갔다.

그때마다 구슬이 또르륵 구르듯이 웃었다.

그러다가 나를 발견한 엄마는 의자에서 일어나 후다닥 나갔다.

내가 뭐라고 말을 걸 틈도 없이, 신발도 제대로 꿰어 신지 못하고.

그래도 회전의자에 앉아서 몇 바퀴 돌고 나면 그래도 좀 견딜만한 힘이 생기는 거 같았지.

뭔가 내 맘대로 되는 것도 같고 말이지.

엄마의 등이 들썩였다.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떠내려간 회전의자를 찾았다고 해도 의자를 타고 그때처럼 움직일 수는 없을 것이었다.

좁은 컨테이너 박스 안엔 늘 아버지가 누워있었고 밖은 장마 뒤라 바닥이 성한 데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들썩이는 엄마의 등은 우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머리맡에 있는 손전등을 켰다.

밋밋한 천장에 커다란 무늬가 생겼다.

엄마는 모로 누웠던 몸을 바로 해서 천장을 쳐다봤다.

울고 있었는지 웃고 있었는지 가늠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왜 화장실 가려고? 아버지 깨지 않으시게 조심해라.

아버지는 내가 옆에서 노래를 불러도 안 깨실 텐데, 뭐.

그게 아니라 일어나봐.

덮고 있었던 차렵이불을 바닥에 깔았다.

엄마와 나는 일어나 마주 보고 앉았다.

손을 펴서 앞뒤로 엄마한테 보여줬다.

엄마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내 손을 봤다.

앞뒤로 돌려가며 비어 있는 손바닥을 보여줬다.

엄마는 건성으로 내 손동작을 따라했다.

그게 아니라 내 손을 잘 보라고.

곱구나.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엄마한테 보여줬다.

엄마는 받으려고 했지만 나는 손에 동전을 쥐고 엄마한테 다시 보여줬다.

왼쪽 엄지가 동전을 쥔 오른손 사이로 교차하면서 동전이 사라졌다.

꽃처럼 편 왼손에도 동전은 없었고 가만히 있던 오른손에도 동전은 없었다.

건성으로 보던 엄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엄마 귀 뒤로 오른손을 가져가 동전을 꺼냈다.

엄마는 연방 귀 뒤를 쓰다듬었다.

미심쩍은지 귀 뒤를 오래 쓰다듬고 앉아 동전을 바라보았다.

내 귀에 언제 그런 게 있었다니.

다시 한 번 꺼내봐라.

마술은 뭔가를 없애고 만들어내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참 찾던 것들을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발견하는 것도 마술이었다.

너는 생각보다 아주 대단한 일을 하고 있었구나.

어두운 방안에서 천장을 향한 손전등 불빛은 마치 크고 흰 꽃이 돋아난 것 같았다.

그림자 진 엄마의 얼굴이 처음인 듯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고 이것도 없앴다가 다시 귀 뒤에서 나오게 할 수 있냐고 했다.

아니면 수저라도 그것도 아니라면 서랍장도 회전의자도, 네 아버지도 너도 그리고 나까지도… 너는 마음대로 없앴다가 아무 때나 맘 내킬 때 꺼낼 수 있겠니.

처음으로 아버지가 몸을 뒤척이셨다.

회전의자가 불현듯 기울었고 난데없이 창가에서 가느다란 바람이 스며 들어왔다.

굵은 땀이 고인 목덜미가 시원해졌다.

나는 두터운 손바닥에 위태롭게 쥐고 숨겨놓았던 동전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동전은 바닥을 굴러 손전등 불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아득히 사라졌다.

엄마는 손전등을 끄고 다시 몸을 뉘었다.

천장에 돋아났던 꽃의 잔상이 잠이 들 때까지 남아있었다.

다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던 장마는 다시 도드라졌다.

아침쯤 세간 건질 게 남아있는지 집에 가보려던 엄마는 다시 컨테이너 박스 안으로 들어왔다.

지방도로가 완전히 유실되어서 오랫동안 왕래가 없었던 고개로 구조물품이 드나들었다.

하지만 험준한 산길이고 흙이 무뎌져서 지원해주는 물품들은 양초나 라면이 고작이었다.

하나 둘 세워지던 전신주는 다시 쓰러지기 시작했다.

흙더미 속에는 감자나 양파들이 함부로 나뒹굴기 시작했다.

거멓게 썩은 것들은 벌써 첨예한 악취를 내기 시작했다.

개중에 멀쩡한 것들을 골라 서로 가져갔다.

굵직한 빗방울들이 촘촘해지기 시작했다.

마을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컨테이너 박스에서 고개를 내밀면 멀리 지붕들만 비죽하게 보였다.

마치 흙탕물 위에 꽃잎을 몇 개 던져놓은 듯했다.

마을 한가운데에 버스정류장이 통째로 박혀있었다.

입구에 있던 정류장이 물을 타고 마을 한 가운데까지 들어선 것이었다.

마을회관이 반쯤 부수어져 속이 다 드러났고 정갈하게 심겨졌던 과실수가 흩어졌다.

아마 나무에 훌라후프가 걸렸던 자리만큼 다시 물이 찰 것이었다.

아버지의 잠은 오래 이어졌다.

아버지는 보급된 옷을 단정하게 입고 계셨다.

엄마는 그릇들을 죄다 밖에 내놓고 빗물을 받기 시작했다.

밥공기에 빗물이 금방 찼다.

나는 쉴 새 없이 빗물을 받아 대야에 부어놓았다.

그럴 때마다 얼핏 아버지는 빗소리에 장단을 맞추는 듯 고개를 까닥이는 것도 같았다.

함지에 물이 가득 차자 엄마는 주전자에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뜨거운 물을 식혀 물병에 담아 한 곳에 모아두었다.

그 중 한 병은 아버지 머리맡에 두었다.

엄마도 고개를 까딱거리는 아버지를 본 것 같았다.

전신주가 여기저기 쓰러져있기 때문에 나갈 때는 무릎까지 오는 고무장화를 신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감전될 수도 있었다.

엄마는 야무지게 고무장화를 신었다.

구호물품을 주는 곳까지 가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었다.

여기서 아버지랑 좀 있어라.

구호물품 받아올 테니까.

같이 갈게.

하나는 아버지 옆에 있어야지.

둥그렇게 둘린 컨테이너 박스에서 샛노란 우비를 입은 사람들이 하나씩 나왔다.

긴 줄을 허리에 묶고 일렬로 서서 걷기 시작했다.

엄마가 사라지는 길까지 나가보려 했지만 내겐 양산뿐이 없었다.

돌아가는 길에 터미널에 들러 우산을 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장마가 끝날 때쯤엔 아버지도 일어나서 몸을 움직이고 음식을 먹고 내 마술을 보며 돈을 좀 만들어달라고 하실까.

아버지 옆에 몸을 뉘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곤하게 주무셨다.

누군가 손가락으로 내 뺨을 꾹꾹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엄마가 왔을까.

어슴푸레 눈을 떴을 땐 이미 잔뜩 어두워져 있었다.

컨테이너 박스 위에 비가 새고 있었다.

얼굴에 물기가 가득했다.

손전등을 천장으로 켰다.

천장에 돋아난 흰 꽃 사이에서 물이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빈 그릇을 찾아 아래에 받혀놓았다.

밖은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들리는 빗소리에 급한 발자국 소리가 섞여들기 시작했다.

멀리서부터 천천히 목소리가 다가왔다.

아마 누군가가 컨테이너 박스를 돌며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엄마는 언제 오는 것일까.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올수록 받혀놓은 그릇에도 빗방울들이 빠르게 고이기 시작했다.

컨테이너 박스에 난 창이 열렸다.

창은 반쯤도 열리지 않았다.

밖에 있는 사람은 전혀 알아볼 수 없었고 단지 목소리만 들렸다.

지금 여기도 위험합니다.

중요한 물건 챙겨서 어서 나오세요.

아버지는 여전히 주무시고 계셨다.

나는 컨테이너 박스 안을 돌아보았다.

무얼 가져가야 할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엄마는 아직 안 온 것일까.

엄마라면 무엇을 챙겼을지 생각해봤다.

나는 서랍장 위에 위태롭게 얹힌 회전의자부터 바닥에 부려놓았다.

회전의자는 생각보다 꽤 무거웠다.

의자 바퀴가 아버지의 왼팔을 건드렸다.

잠을 자던 아버지가 몸을 움찔했다.

밖엔 떠날 채비를 하는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창 너머로 보니 다들 앨범 하나씩을 옆구리에 끼고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모로 누웠다.

나는 집에서 나올 때 사람들이 왜 앨범을 챙겨 나오는지 알 것 같았다.

종 일 열어두던 창으로 빗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구호품을 받으러 나간 엄마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양산을 꺼냈다.

양산이라도 쓰고 엄마를 찾으러 나가볼 심산이었다.

창으로 빗물이 덩어리째 들어왔다.

누군가 창을 향해 컨테이너 박스 안으로 물을 한 바가지씩 퍼붓는 것 같았다.

무작정 양산을 펼쳤다.

내 몸 하나 가리기에도 작은 것이었지만 컨테이너 박스 안이 양산에 새겨진 꽃무늬로 가득 차는 것 같았다.

차렵이불도 서랍장도 부탄가스도 아버지도 조악한 꽃무늬가 덮어버렸다.

양산을 펼치고 사방을 둘러보면 온통 꽃이었다.

문이 있던 자리로 걸음을 디디었다.

발밑에서 찰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물은 이미 발등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빗물이 떨어지던 자리에 받혀놓았던 그릇도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위는 온통 꽃인데 바닥은 흙탕물이 고여 세간이 떠다녔다.

아버지는 귀밑까지 물이 찼는데도 일어나지 않으셨다.

엄마는 어디쯤 왔을까.

나가는 문을 열려고 했다.

문은 밖에서 누가 잡아당기고 있는 것처럼 열리지 않았다.

나는 양산을 집어던졌다.

물이 고인 바닥에 떨어진 양산은 누운 아버지의 얼굴을 완전히 가려주었다.

이번엔 두 손으로 힘껏 문을 열었다.

완강한 문은 잘 열리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힘을 쓰는데 별안간 뒤에서 손이 겹쳐졌다.

아버지였다.

아버지와 겹쳐진 손으로 손잡이를 당겼다.

문은 그제야 쉽게 열렸다.

열린 문으로 흙탕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컨테이너 박스 안에 순식간에 흙탕물이 들어찼다.

뒤에 서 있던 아버지는 돌아볼 틈도 없이 휩쓸려 갔다.

컨테이너 박스가 통째로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재빨리 떠다니는 회전의자를 타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밖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회전의자를 타고 나무와 컨테이너 박스들과 함께 떠내려갔다.

다리를 이리저리 휘저어 봤지만 회전의자는 다만 물결을 따라 흘러갈 뿐이었다.

회전의자는 정신없이 돌아 시선이 제멋대로 바뀌었다.

고개를 뒤로 젖히자 두꺼운 울음이 장마처럼 쏟아졌다.

눈물과 빗물이 뒤범벅되었다.

회전의자를 타면서 엄마가 냈던 소리는 웃음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소리를 내봤지만 내 귀에서조차 빗소리뿐이었다.

얼마 내려가지 않아서 멀리 라면 한 박스를 이고 올라오는 엄마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끝〉




심사평



힘든삶에서 우러나오는 유머와 페이소스

최종심에서는허남화의 ‘죽은닭고기요리법’과 권영란의 ‘극락조’ 전석순의 ‘회전의자’가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당선작의 선정에 다소 어려움이 있었는데 작품 의특징은 서로 확연히 구별되면서도 수준에서는큰차이가없었기때문이었다.

우선 ‘죽은닭고기 요리법’은 레시피라는 다소 이질적인 요소를 소설속 에 끌어들여 이야기의 근간으로 삼은 시도가 돋보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극적으로 설정된 상황이 요리법의 제시와 서로 잘 어울리지못하여 설득력을 발휘하기에 부족했다.

추천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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