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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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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 더 레인보우
양혜영
몽근진 먹장구름이 지나가면서 반편밖에 남지 않은 해를 마저 가린다. 아파트 단지를 끼고 앉은 조그만 놀이터 모래 위에 기다란 그늘이 진다. 한바탕 비라도 쏟아질 기세다. 베란다 문이 열리고 얼굴들이 튀어나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른다. 아이들은 모래가 묻은 손을 바지에 비벼대며 집으로 뛰어간다. 모래가 섞인 아이들의 발자국 소리가 계단을 지나 내 머리 위로 올라간다.
어디선가 고등어 졸이는 냄새가 난다. 아마 내가 사는 504호 바로 아래에 있는 304호에서 올라오는 냄새일 것이다. 그 집의 사내는 유난히 생선을 좋아했다. 아파트 앞 마트에서 마주치는 301호 여자의 쇼핑백에는 늘 눈이 퀭한 고등어 대가리나 기다란 갈치 꼬리가 툭 튀어 나와 있었다.
마침내 한 줄기씩 유리창을 지치고 있는 빗줄기를 피해 창문을 닫으려다 문득 멈춘다. 아이들이 사라진 놀이터에. 빗줄기가 내리기 시작하는 놀이터에 아직도 한 아이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아이는 두 어깨를 다리 사이에 가두고 앉아 모래에 글을 쓰고 있다. 아니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섯 살쯤이나 되었을까? 가끔씩 비를 쳐다보느라 이곳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얼굴이 해멀겋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아직도야?”
언제 다가왔는지 리의 축축한 손바닥이 내 엉덩이를 쥐었다 논다. 샤워를 한 리의 덜 마른 머리에서 라벤다향이 풍긴다. 리는 천천히 내 등줄기를 쓰다듬는다.
“또 담배를 피운 거야?”
리가 아직 채 빠져나가지 못한 담배냄새를 맡았는지 코를 벌렁거린다. 리의 눈썹 사이에 길고 가는 줄이 하나 그어진다.
“아 참. 베란다에서 피우지 말라니까!”
리가 화가 난 몸짓으로 창을 벌컥 연다. 그 바람에 창문 바로 옆에서 하늘거리고 있던 네펜데스의 가느다란 포충엽이 하나 뚝 떨어진다. 며칠 전 새로이 돋아 연둣빛이 선명한 이파리가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며 리는 다시 한번 얼굴을 찌푸린다.
“가뜩이나 공기도 오염되어 있는 데….”
리는 여전히 창에 붙어 서 있는 내게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지며 분무기를 찾는다. 분무기를 흔드는 리의 어깨 근육에 있는 얇은 종잇날처럼 그어진 허연 상흔들이 움틀거린다. 얇은 종잇날에 베인 것 같이 가늘고 길게 이어진 상흔들은 그가 지금 물을 주는 식물의 가는 잎사귀와도 닮아 있다. 리가 기르는 식물의 정식이름은 네펜데스 미라빌리스다. 처음 리가 푸른 싹이 올라온 화분을 들고 와 매일 아침저녁으로 물을 줄 때는 물론. 푸른 이파리들이 올라와 덩굴을 이루었을 때에도 나는 그 미라빌리스가 음흉하고 흉측한 주둥이를 숨기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한 달이 지나 미라빌리스가 마침내 그 흉한 포충낭을 드러냈을 때 나는 그때까지 매일처럼 물을 주고 영양비료까지 고사하며 가꾸던 리의 엉큼한 미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리가 뿌리는 물줄기 아래에서 네펜데스는 마치 샤워를 즐기는 사람이 콧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흔들거린다. 작은 안개막이 덮이듯 축축한 기운이 네펜데스 화분 다섯 개가 차례대로 진열된 화분대를 지나 내가 서 있는 이곳까지 엄습해온다. 네펜데스의 빨갛게 달아오른 포충낭이 그 입술을 한껏 벌리고 리가 주는 물을 받아 마신다. 벌컥벌컥. 지금쯤 고인 물줄기를 모아 소화액을 만들어내고 있는 포충낭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저 소화액에서 조금만 지나면 강한 유혹의 향이 올라오리라. 리는 하루에도 수차례 저렇게 분무기를 들고 네펜데스 화분에 물을 주었고. 그때마다 네펜데스는 유혹적인 향을 내뿜어 그를 반겼다. 지금도 물을 주고 있는 리의 팔목 근처에서 네펜데스의 향을 맡은 날파리 한 마리가 빙빙. 마치 욕정에 빠진 수컷처럼 주위를 맴돌고 있다. 네펜데스는 그런 날파리의 모습을 보고 있는 양 바늘모양으로 뻗은 잎맥에 돋은 빨간색 갈고리에 끈적끈적한 점액을 발라 유혹한다. 리는 손가락을 뻗어 네펜데스의 붉은 빛이 도는 점액을 슬쩍 만진다.
“오호. 똑같은 걸. 흐흐흐.”
리의 웃음이 무얼 의미하는지 눈치 챈 나는 얼굴이 붉어진다. 리와 네펜데스에게서 시선을 돌리는 내 등 뒤에서 리의 웃음소리는 더욱 높아진다. 끝이 호탕하게 올라가는 리의 웃음은 이 아파트 전체에 훈훈하게 퍼진다. 어느새 따뜻해지는 기분. 이런 게 사는 거구나 싶어진다. 웃음이 머무는 곳이야말로 진짜 집일 것이다.
리가 오기 전의 이곳이란 얼마나 삭막하고 외로운 공간이었던가. ‘독립’이란 단어로 실상은 쫓겨나다시피 이 곳에 들어와 나는 굴속의 곰과도 같은 생활을 해야 했다. 손수 가방을 꾸려 주시며 등을 미는 어머니의 손끝에서 나는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는 강한 언질을 받았다. 그 일이 생기고 난 이후의 식구들의 반응은 비단 어머니뿐이 아니라 모두가 태냇고향인 그 곳에 소문이 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그래서 내가 언제 어디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주길 바라는 그런 모습들이었다. 그들은 나를 힘주어 밀어내고는 물로 씻어 내리는 오물처럼 내몰았다.
모니터의 푸른 발광이 리의 얼굴을 푸르게 물들인다. 컴퓨터 옆에 달린 원통 스피커에서는 미성의 오버 더 레인보우가 흘러나온다. 벌써 4시간째 리는 컴퓨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오른 검지로 마우스를 끌었다 놓았다 하는 단순한 작업만을 하면서도 리의 얼굴은 사뭇 진지하다. 화면 속에서는 붉은 마름모꼴의 커서가 깜빡이며 리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천천히 꿈틀대며 지나간다. 커서가 지나는 모눈칸에는 커서의 붉은 색이 채워진다.
리는 날개가 달린 소년천사를 그리고 있는 중이다. 리가 그리려 하는 날개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걸치지 않은 젖살의 소년은 일곱 빛깔의 무지개 위에서 작은 날개를 파닥이며 이리저리 날아다니게 될 터이다. ‘오버 더 레인보우’라는 인터넷 카페이름과 어울리는 플래시 디자인을 찾기 위해 리는 몇 날밤을 고심했다. 그렇게 어렵게 소년천사를 정하고서도 모니터 상에다 리의 가슴에 품은 소년의 이미지를 재현시키는 일이 녹록지 않아 리는 벌써 몇 명의 소년을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하고 있다. 소년의 형상이 완성되고 날개까지 붙여 완성하는가 싶으면 다시 지워버리고 다시 그리는 일이 반복된다. 때문에 리의 손에서 그려진 15센티미터가 채 안 되어 보이는 소년들은 벌써 한자릿수를 웃돌게 삭제되었고 소년들이 삭제될 때마다 리의 이마엔 잔주름이 한 개씩 늘어간다. 저렇게 진지하고 단호하게 입술을 악물고 있는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낯설다. 지난 밤 나의 하얀 엉덩이를 끌어당기던 장난기 어린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만큼 오버 더 레인보우를 향한 리의 애정이 각별한 탓일 것이다.
‘오버 더 레인보우’는 리가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다. 회원수가 100여 명이 되지 않는 작은 소모임에 불과하지만. 리는 그 어떤 퀴어 사이트보다 우월하다고 자부한다. 그가 꾸민 자료실에는 이 나라에서 퀴어가 느끼는 삶의 무게가 고대로 담겨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처음 오버 더 레인보우에 가입했을 때. 자료실에 남긴 그의 글들을 보고 많은 눈물을 흘렸다. 세상에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존재하고 있다는 안도감과 친밀감은 내가 가족에게서도 느끼지 못 했던 것이었다.
무언가에 몰두할 때의 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위험하고 순수하다. 하나를 향한 끝없는 집중 때문에 누군가가 옆에 있는 것을 못 견뎌 했다. 그제 소년의 초반구상을 하고 있는 리에게 무심코 농담을 걸었다가 대뜸 욕설을 듣고 말았다. 좀처럼 내게는 화를 내는 일이 없는 그가 내뱉은 시발. 이란 욕 때문에 난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멍하게 서 있는 내게 리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다시 자신의 작업에 몰두했다. 그 날 구상을 마치고 나서야 리는 나에게 미안하다며 자신은 일을 하고 있을 때 방해가 된다고 느껴지면 험해진다고 진정으로 사과를 했다. 자신의 성격이 외골수라서 하나밖에 할 수가 없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리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끔 거실로 나와 텔레비전을 켠다. 저녁뉴스에 며칠 앞으로 다가온 명절로 인한 교통대란 예고기사가 나온다. 지난 명절. 고속도로를 꽉 메우고는 멈춰있는 차량들과 입석까지 매진된 열차들이 화면을 가득 메운다. 저렇게 고생을 할 줄 알면서도 사람들은 명절이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려 애를 쓴다. 마치 귀향본능으로 무작정 날아오르는 철새들 마냥. 나는 돌아갈 곳이 없다. 한 시간도 되지 않는 거리에 내 가족들이 분명 살고 있건만 갈 수가 없다. 궁금해진다. 이 세상에서 가족이란 이름을 처음으로 만든 이는 대체 누구일까? 답답한 차 안에서 몇 시간이고 갇혀 대소변마저 참아내며 찾아가는 가족이란 건 대체 누가 어떻게 만들어 낸 것일까? 혼인과 혈연으로 맺어진 만남만이 가족이 될 수 있는 건가. 그렇다면 서로 사랑하지만 혼인을 할 수 없고. 혈연을 맺을 수 없는 리와 나는 영영 가족이란 이름을 갖지 못 하게 되는 걸까? 나를 드러냄으로써 첫 가족에게서 외면을 당한 나는 다시는 가족이란 울타리를 가질 수 없게 되는 건가?
소금물에서 반나절 해감한 홍합을 꺼내 솔로 껍질을 문지른다. 앙다문 홍합의 주둥이 새로 삐져나와있는 거친 수염을 검지로 잡아끈다. 홍합을 다듬을 때마다. 홍합의 껍데기를 벌리고 볼록한 홍색의 속살을 끄집어낼 적마다 나는 그 미끈거림과 자극에 나도 모르게 팔소름이 돋는다. 리가 좋아하는 것만 아니라면 사실 나는 그 세로로 길게 째진 틈이며 그 속에서 삐져나온 거친 수염이며 미끈거리는 속살의 느낌 때문에 홍합을 손질하는 일이 싫었지만. 리는 무척이나 홍합을 좋아했다. 홍합을 입에 넣었을 때의 묵직한 속살이 툭 터지는 느낌이 좋다고 했다. 다른 조개와 달리 질기거나 너무 작아 녹아버리는 느낌이 아니라 진짜 뽀얀 속살을 씹는 것과 같은 느낌이 너무 좋다고.
그래서 나는 일부러 마트에서 손질이 된 홍합살이 아닌 재래시장에서 큼직큼직한 놈으로 사온다. 오늘과 같은 크림스파게티를 할 적에는 반드시 홍합을 넣어야한다. 리가 크림스파게티와 함께 마실 와인을 사러 마트에 간 동안 나는 홍합을 손질하고 스파게티면을 삶는다. 우윳빛 생크림을 끼얹은 스파게티와 와인이라. 나는 마냥 설렌다.
스파게티면에 막 크림소스를 끼얹었을 때쯤. 리가 들어오는 기척이 들린다. 나는 물기가 묻어 있는 손을 허리에 두른 앞치마에 문지르며 현관으로 향한다. 하지만 붉게 상기된 얼굴로 현관을 들어선 리의 손에는 마땅 있어야 할 쇼핑봉투 대신 눈물범벅이 된 여자아이가 있다. 한 네다섯쯤 되었을까. 아이는 낯선 환경에 두리번거리며 리의 손을 꼭 부여잡는다.
먼 길을 달려오기라도 한 듯 리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아이는 앞치마를 두르고 서 있는 나를 보고는 흠칫 뒤로 물러나 리의 등 뒤로 몸을 숨긴다.
“마트 앞 주차장에서 울고 있잖아. 기다려봐도 부모란 사람은 코빼기도 뵈지 않고. 혹시 버려진 거나 아닌 지 몰라.”
후. 리는 거친 숨을 몰아쉰다.
“미아신고는 한 거야?”
“…그…그럼. 했고말고. 근데 그 미아관리소란 데가 늙다리 노인네 혼자 앉아 인상만 쓰고 있잖아. 분위기도 썰렁하기 그지없고. 그래서 데리고 있는 다고 했지. 연락해 달라고. 근데 그 노인이 그러는 데 그렇게 마트에 버리고 가는 애들도 있다네. 연락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낼부터 명절인데 명절을 그런 철창 같은 데서 보내게 할 수 있어야지….”
아이는 흘린 눈물 탓에 얼굴에 얼룩이 조금 묻어 있을 뿐. 깨끗한 칼라의 원피스와 흰 스타킹의 상태를 보아 버려진 것으로는 보이지는 않는다. 리의 말대로라면 미아관리소에서 곧 연락이 올 것이다. 그러나. 쓸데없이 반복되고 두서없이 이어지는 리의 설명이 왠지 맘에 걸린다.
“정말 신고한 거지. 연락처도 제대로 남기고?”
“아…그렇다니까! 했다니까!”
리의 음성이 높아진다. 리가 화를 내는 것으로 안 아이가 다시 훌쩍이기 시작한다. 그런 아이의 어깨를 어르며 리가 새치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힐책하는 리의 차가운 눈초리. 그래. 리의 말대로 명절인 데 잠시라도 따뜻한 곳에 두고 싶어 데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그새 퉁퉁 불어버린 스파게티면을 전자레인지에 데운다. 빨갛게 달아오른 레인지 안에서 스파게티 위에 엉겨 있던 치즈들이 먹음직스럽게 흘러내린다. 아이는 배가 고팠는지 제 접시에 얼굴을 박고 부지런히 먹는다. 리가 그런 아이의 모습을 따뜻한 기운이 흐르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탁탁딱딱다다닥. 절구공이가 찧어대는 소리가 벽을 타고 울린다. 작고 둥근 공이 끝에 짓이겨져 있을 마늘에서 퍼지는 독한 냄새가 이곳까지 퍼진다. 젓국이 끓어가는 비릿함. 기름기가 지글거리는 육류의 노린내. 생선살 타들어가는 비린내까지. 마치 전신이 음식 위에 떠 있는 것 같다. 게다가 계단을 마구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발자국소리와 굽이 뾰족한 하이힐에서 울리는 공명까지. 이 작고 낡은 아파트는 어느 것 하나 걸러내지 못하고 마치 생중계라도 하듯 생생하고 잔인하게 보여준다.
이번 명절도 역시 전화 한 통 없다. 어머니와 누이. 혹은 그 사건들을 모르는 친지 누구한테서라도 한번쯤 전화가 걸려오지 않을까 전화기 주변을 서성거린다. 반나절을 기다리다 어쩜 내가 먼저 하기를 바라는가 싶어 전화를 걸어보지만. 수화기 너머에서 다른 가족들의 웃음이 시끄럽게 번지는 걸 듣는 순간 나는 입술 한 번 떼지 못하고 수화기를 내려놔 버린다. 내가 없으면 집안이 화목할 거라는 어머니의 마지막 음성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구름이 짙게 깔린 놀이터는 오늘따라 한적하다. 모두 명절을 지내러 어디로 떠난 버린 것일까. 이른 아침의 소요가 마치 장난이었던 것처럼 지금은 적요함만이 주위를 메우고 있다. 구름이 지나가면서 놀이터의 모래 위에는 그림자가 생겼다 지워진다. 아이 하나가 바람꽃을 일으키며 나타난다. 언젠가 보았던 얼굴이 해말갛던 아이다. 해말간 얼굴과 달리 아이가 입은 옷은 낡은 체크무늬 바지다. 바짓단이 발목 위로 껑뚱 올라가 한눈에도 너무 오래된 바지. 아이는 모래 위에 쪼그리고 앉아 그림을 그린다. 저 아이는 항상 혼자다. 아니 놀이터에 아이들이 없을 때에만 나온다.
며칠 전 아이에게 모래를 뿌려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아이는 제 주변을 빙빙 돌면서 뿌려대는 모래에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었다. 나는 창을 열고 아이들에게 모래를 뿌리지 말라고 했지만.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아이들은 여전히 모래를 뿌려 괴롭히고 아이는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있었다.
왜 손을 들어 저지하거나 맞대응하지 않는 걸까? 나는 가슴속에서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을 애써 손으로 눌렀다. 당장 내려가서 아이를 구해내려고 신발을 신는 내게 리가 말했다.
“놔둬.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저렇게 약해빠진 놈은 도울 필요없어!”
구해줄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겠지만 내게는 살아갈 필요가 없다. 함께 할 필요가 없다는 그런 말처럼 들렸다.
“너는 너무 약한 게 흠이야!”
리에게서 질책이 이어졌다. 그렇다. 그게 리와 나의 차이인 것이다. 리는 그렇게 살아왔다고 했다. 중학교 시절에 이미 커밍아웃을 해 동급생들로부터 집단 따돌림과 린치를 당해도 늘 당당했다고. 선생님과 부모님까지 알면서도 쉬쉬하는 통에 리의 몸엔 늘 동급생들이 만들어주는 상처로 뒤덮였지만. 한번도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거나 매달려 본 적이 없다고. 실제로 리의 몸에는 중학교때 동급생 누군가가 더러운 호모새끼라며 커터칼로 그어놓은 칼 자국이 팔목과 어깨 곳곳에 흰 서캐처럼 박혀 있다. 그런 그에 비해 나는 늘 숨어 있기 바빴다. 끌리는 마음을 숨기고. 심지어는 내 자신의 감정이나 욕구를 들킬까봐 호모로 찍힌 동급생을 함께 구타한 적까지 있었다. 비록 주먹에서 힘은 뺐지만 나는 지금도 가끔 악몽 속에서 집단으로 구타를 당하며 노려보던 그 동급생의 눈을 만날 때가 있다. 그게 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더없이 한심하고 미안해지지만 그때는 그랬다. 학교에서건 집에서건 감추기에 급급했다. 만약 집에서 그 사건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도 내 성을 감추고 예전처럼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네펜데스의 이파리 끝이 노랗게 변했다. 대궁 안을 들여다보자 물기가 없이 메말라 있다. 네펜데스는 물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 나는 분무기를 찾아 물을 채운다. 아직도 리의 방에선 아무 기척이 없다. 오늘 새벽에도 아이가 잠을 설치는 지 자꾸 칭얼거렸다. 아이가 칭얼거리는 소리에 거실에서 자던 나는 몇 번이나 잠을 깼다. 리에게 이야기하자 아이가 잠자리가 불편해서 그러는 거라고 리는 말했다. 조금만 참으라고.
아이가 오고 난 뒤 리는 변했다. 살을 맞대어 지내는 사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변화란 너무 미미해서 더 차갑게 느껴지는 걸까. 이젠 아침이 되어도 나의 단잠을 깨워주는 리의 달콤한 입맞춤을 받을 수 없다. 그의 따스한 숨결이 사라져버린 이부자리는 더 이상 따뜻하지도 안락하지도 않다. 포근한 그의 품안이 그리워 잠에 들 수가 없다. 그렇다고 밤마다 칭얼대는 아이를 사이에 두고 잘 수도 없는 일이다. 아이는 무슨 일인지 밤중에 갑자기 깨어나 울곤 했다. 가끔은 새벽녘까지 이어지는 아이의 긴 울음과 아이를 어르는 리의 나직한 음성이 적요한 어둠을 뚫고 공포로 들려온다. 차라리 함께 깨어있으면 나으려나 싶어 리의 방으로 가볼까 하다가도 나를 보면 더욱 울어 대는 아이의 얼굴이 떠올라 뜬눈으로 천장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네 눈이 무섭대.”
어쩌다 거실이나 욕실에서 마주칠 적마다 리의 등 뒤로 숨어버리는 아이를 대신해 리가 말했다. 리의 입가에는 잔잔한 웃음이 번지고 있었지만 나는 그 말이 조금도 우습게 들리지 않았다.
아이는 리의 말대로 나를 정말로 무서워하는지 좀체 리의 방에서 나오려 들지 않았다. 어쩌다 거실에 나올 적에도 내가 있는지 없는지 방문을 열고 얼굴을 빼죽이 내밀어 확인까지 했다. 그런 때엔 얼마나 밉상인지. 생각같아선 아이를 처음 발견했다는 쇼핑센터에 가서 다시 버려두고 싶은 생각까지 든다. 그런 아이 때문에 리까지 자신의 방에서 좀체 나오지 않았다. 리가 아이와 떼어져 있을 때는 화장실 갈 때와 하루에 한번 운동을 나갈 때뿐이었다. 그건 어떤 일이 있어도 운동을 거르지 않는 리의 성격탓일거다. 리는 주로 아이 낮잠 시간을 이용해 근처 헬스타운을 다녀온다.
하지만 이런 나의 심정을 알 길이 없는 리는 불쌍한 아이를 두고 시기를 한다며 내게 핀잔을 준다. 불쌍한 아이라. 경찰서에서 연락이 오면 어차피 돌려보내야 할 아이를 두고 너무 정을 쏟는 게 아닌 지 걱정이 된다. 리가 그렇게 아이를 좋아했었나? 하긴 언젠가 자신에게는 동생이 없어 어린 아이들을 볼 때면 가슴이 뛴다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다.
‘오버더레인보우’ 카페 자료실에서 어린 시절의 리를 본 적이 있다. 지극히 평범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모습이었다. 지금의 리는 운동덕에 적당히 튀어나온 근육을 소유하고 있는 데 반해 어린 리는 갈비뼈가 살 위로 드러날 정도로 마르고 얼굴이 하앴다. 차렷자세로 서 있는 리 옆에 남자가 역시 차렷자세로 서 있다. 누구일까? 남자의 얼굴 부분에 검은 색으로 칠을 해 알아볼 수가 없게 해 놓았다. 남자라는 건 입고 있는 옷차림이 둔해보이는 낡은 작업바지에 건장한 윗몸이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뿐 실은 여자일지도 모른다. 그 사람의 얼굴에 먹칠을 해 놓았다는 건 리가 싫어하는 사람이거나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겠지.
리는 어린시절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고교시절에 커밍아웃을 통해 겪은 에피소드들은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가족사나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통 해본 일이 없다. 가족들에게 쫓겨난 나에 대한 배려인걸까? 내가 술에 취할 때면 늘 어머니와 누이에 대한 섭섭함을 드러내 운다는 걸 리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약한 사람에겐 동정할 필요가 없다는 리의 평소 생각대로 리는 절대 나를 위로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고개를 저으며 술주정 하는 나를 바라볼 뿐이다.
“쉬! 쉬이!”
컴퓨터에 몰두하느라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나는 문득 옆에 다가와 있는 아이를 보고 깜짝 놀란다. 아이는 바지 가랑이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선 발을 동동 구른다. 요의를 참느라 빨갛게 질린 아이를 얼른 욕실로 데려간다. 아직 아이가 혼자 앉기엔 변기가 높다. 아이 바지를 급히 내리고 변기에 앉히자 오줌이 쏟아진다. 옷을 반쯤 내리고 있는 아이를 마주보고 있기가 멋쩍어 나는 욕실을 빠져 나온다. 아이가 급하게 나오느라 열어놓은 리의 방에는 그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운동을 나간 모양이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떼어 베란다로 향한다. 창을 열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허공을 향해 뻗어나가는 담배연기는 배배 꼬여 열린 창문 새로 나가서는 흔적없이 사라져버린다. 아직 아이들이 귀가하기엔 이른 시각. 발 아래 놀이터는 텅 비어 있다.
“이거… 빨간색….”
방안으로 들어가버렸을 거라 생각했던 아이가 어느새 옆에 와 있다. 아이의 작고 가는 검지가 가리키는 곳에는 네펜데스의 새빨간 포충낭이 바람을 타고 슬금슬금 느리게 흔들리고 있다.
“벌레 이쪄… 벌레….”
아이는 네펜데스의 촉수에 걸려 있는 날파리를 보고 떼어내려 손을 내민다. 벌레가 네펜데스를 갉아먹는다고 여기는 눈치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것을 모르는 아이의 행동에 절로 웃음이 나온다.
“이 꽃은 벌레를 먹고 살아.”
아이에게 말을 건네자 아이의 눈이 동그래진다.
“벌레 먹어?”
나는 아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네펜데스의 포충낭 안을 보여준다. 입술 모양으로 생긴 주둥이 옆에 바늘처럼 돋은 갈고리에 걸린 벌레들이 녹아서 네펜데스의 식량이 되어가는 과정을 설명해 준다. 아이는 내 설명에 반신반의하는 눈치지만 네펜데스 포충낭 아래에 고인 노란액체에 잠겨 있는 날벌레의 모습과 빨간 포충낭의 자태가 너무 신기한지 시선을 옮기지 못한다. 네펜데스 앞에 쪼그리고 앉아 포충낭에 갇힌 날파리가 죽어가는 모습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아이를 보며 문득 아이와의 첫대화라는 사실이 떠오른다. 언제나 리와 함께 다니고 리의 옆에만 달라붙어 있어 말을 건네 본 적도 건네 온 적도 없는 아이였다. 그 아이가 지금 내 옆에서 내 눈을 바라보며 소리내어 웃는다. 물론 네펜데스 때문이지만. 그 모습이 너무 예뻐 나는 분무기에 물을 반 정도 담아 아이에게 건넨다.
“이 꽃은 물을 굉장히 좋아한단다. 자. 네가 한 번 물을 줘 봐.”
아이는 금세 볼이 터져 나갈 듯 환하게 입을 벌리며 물 조리개를 건네받는다. 한 손으로 손잡이를 꼭 쥐고는 다른 한손으로 열심히 펌프질을 한다. 쉬익쉬이익. 시원스레 뻗어나오는 물줄기 아래에서 네펜데스가 기분좋은 춤을 춘다.
“이 꽃은 물을 자주 줘야 해. 앞으로 네가 매일 물을 줄래?”
아이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웃는다. 여기에 온 이래 가장 밝은 모습이다. 나는 아이가 돌아갈 때까지 네펜데스에게 물 주는 일을 시켜야지 생각을 하다 아차 싶다. 하루라도 아이를 빨리 보내야 된다고 조금 전까지 생각을 하지 않았나. 정이 들기 전에 아이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왜 아직 아이들의 가족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는 걸까?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잃어버린 가족들의 심정은 과연 어떨까? 리가 오면 다시 한 번 이야기해 봐야겠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난다. 리의 발자국 소리가 울린다. 바닥을 지치듯 끄는 발자국 소리. 아이가 슬그머니 일어난다. 어느새 분무기를 바닥에 내려놓고 리를 향해 걸어간다. 마치 뭐에 홀린 듯 걸어가는 뒷모습이 어딘지 불안정해 보이는 건 내 기분탓일까? 리는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나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아이를 번갈아 바라본다. 아이가 나와 함께 있는 모습이 이상하다는 눈치다. 리는 아이를 번쩍 들어올린다. 리의 양손이 아이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혔는지 까르르 아이의 웃음이 터져나온다.
“잘 있었어?”
마치 며칠 아이를 남겨두고 여행이라도 다녀온 듯한 말투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서 있는 베란다 창 아래 놓인 네펜데스 화분을 가리킨다.
“아. 저 꽃을 보고 있었어? 크크크!”
리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웃는다. 뭐가 그리 우스운 걸까? 리는 그네를 태우듯 아이를 양팔에 가두고 좌우로 흔든다. 아이는 그네를 타듯 리의 가슴에서 미끄러진다. 방금 운동을 마친 리의 몸에서 흐르는 땀냄새가 이곳까지 퍼지는 기분이다.
“오빠. 목욕 할 건데 같이 할까?”
리는 아이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그네를 태운 채로 아이를 욕실로 데려간다. 뒤이어 샤워기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그들의 목소리마저 감춰 그들과 나를 단절시키는 기분이 든다. ‘뭐야. 난 안중에도 없구.’ 숫제 내가 존재하는 것마저 잊어버린 것 같은 리의 일방적인 태도가 맘에 들지 않는다. ‘아이도 리가 있을 땐 나는 본체만체 관심도 안 보이구.’ 잠시라곤 하지만 집주인인 내게 한마디 말도 없이 아이를 데리고 들어온 것부터 시작해서 마치 자신의 소유물인 양 아이를 독점해 다니는 모습하며. 가슴 속에서 괜한 심술이 올라온다.
아이가 두고 간 분무기를 들어 네펜데스 화분에 물을 뿌린다. 수십 개의 작은 바늘구멍을 뚫고 쏟아지는 물줄기가 네펜데스의 붉은 포충낭을 두드린다. 이미 물이 충분히 주어져 더 이상 줄 필요가 없음에도 어쩌면 너무 많은 수분을 감당하지 못하고 뿌리가 썩어 문드러져 버릴지도 모르는 데 나는 분무를 멈추지 않는다.
낡은 아파트 벽면을 타고 들려오는 라디오 음악에 그나마 들었던 선잠이 확 깨어버린다. 눈을 뜨니 이미 차가운 냉기가 흐르는 침대.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옆 자리는 더욱 차가운 기운에 잠겨 있다. 이르긴 하지만 보일러라도 틀 요량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더 슬픈 건 어쩌면 이 냉기가 나에게만 국한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 아이와 리 사이에는 붉은 계열의 온풍이. 내 주변에는 마치 동화속 거인처럼 차가운 바람이 맴돈다는 유치한 생각을 하면서 거실로 나간다. 방문이 닫혀 있어 못 들었던 걸까? 아이가 울고 있다. 밤에 가끔씩 깨어 우는 일이 흔한 아이였지만. 이렇게 마치 이불을 얼굴로 덮고 우는 것처럼 끅끅 우는 것은 처음 듣는다. 오히려 앙앙 소리내어 우는 것보다 더 슬프고 기괴하게 들리는 울음에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리는 잠이라도 들어버린 걸까?
방문에 귀를 대 보지만 끅끅대는 아이의 울음만 들릴 뿐 리의 기척은 들리지 않는다. 나는 조심스레 손잡이를 돌린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에 마침 구름이 비껴간 달빛이 들어온다. 아이는 시트를 움켜쥔 채 울고 있다. 하지만 내게서 등을 돌려 누워 있는 리는 잠이 든 게 아니다. 달빛에 드러난 리의 손이 아이의 허리를 타고 오르내리고 있다. 이미 속옷마저 벗어버린 리의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짐작하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흐으음. 깊은 한숨이 누군가에서 흘러나온다. 나였는지 혹은 애무에 빠져 있던 리가 낸 만족의 소리였는지는 모르겠다. 그 짧지만 깊고 명료한 한숨이 아이의 울음을 멎게 하고 리를 벌떡 일어서게 한다.
덜덜덜 내 몸이 떨린다. 마치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떨린다. 오히려 태연한 건 리다.
“왜. 노크도 없이….”
“…….”
“그런 눈으로 보지마. 씨발”
달빛에 내 눈동자가 힘을 발휘라도 한 건가. 나는 여전히 말을 못하고 있는데 리는 시트로 제 몸을 둘둘 감고는 휙휙 화난 걸음으로 다가온다.
“너도 해 봤으니까 알 거 아냐. 어린애 속살이 얼마나 달콤한 지...왜 나 혼자 즐겼다고 그러는 거야. 이제라도 함께 하면 될 거 아냐.”
“나……나…가….”
내 말에 리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나가! 나가라구! 씨발.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확 나가! 이 더러운 호모새끼야!”
내 입에서 욕설이 나온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러 봇물 터지듯 쉴 새 없이 주절거리는 욕설. 이 욕설은 내가 들었던 말이기도 하다. 금방 목욕을 마친 사촌동생의 몸을 참지 못하고 더듬었던 어느 밤에. 처음이 아니었다는 사촌동생의 이야기에 식구들은 모두 경악을 했다.
“나가. 나가라구. 이 더러운 호모새끼야!!”
꼼짝도 않는 리에게서 몸을 돌린 나는 거실로 나가 전화기를 잡는다. 삑삑삑. 다이얼을 누를 때마다 기계음이 쇳소리로 울린다. “안내 34호입니다.” 라는 안내원의 기계음이 들릴 때쯤 리의 손이 전화기를 거칠게 움켜 잡는다. 곧이어 번쩍 얼굴에서 터지는 붉은 불빛. 내 눈가와 이마를 강타한 전화기가 거실 바닥에 떨어진다. 내 얼굴 바짝 가까이 갖다댄 리의 입술에서 거친 숨소리가 새어나온다. “감히. 감…히… 나한..테….” 리의 손아귀에 잡힌 목구멍에서 가르르 숨 넘어가는 신음이 흘러나온다. 이대로 쓰러져 버렸으면. 머릿속에서 하얀 새떼가 화르르 날개를 펴며 날아간다. 점점 확대되어 다가오는 새떼의 부리가 나의 심장을 무섭게 쪼아댄다. 하악하악. 이대로 끝이 나는 걸까? 아무 소리도 아무 느낌도 전해지지 않는 카오스의 세계.
뒷걸음치며 내뻗는 손길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진다. 물 속에 잠겨 있는 서늘한 한기가 실날밖에 남지 않은 정신을 깨운다. 무엇인지도 모르고 휘두른 물체에서 후두둑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뭔가가 쏟아져 내린다. 아악! 비명을 지르는 리의 얼굴에서 붉은 물이 흘러내린다. 화분 쪼가리에 찢긴 상처에서 샘솟는 핏줄기로 짓이겨진 네펜데스 포충낭이 더욱 선연하게 피어오른다. 한 번 두 번. 쉬지 않고 내려치는 기세에 포충낭은 폭풍을 만난 듯 처참히 찢겨져 나간다.
하악 하악. 의식을 잃은 리의 얼굴 위로 땀방울이 떨어진다. 마치 잠이 든 사람처럼 의식을 잃은 리의 얼굴은 더없이 평온해 보인다. 그때까지도 침대에 웅크려 있는 아이를 일으켜 옷을 입힌다. 불빛에 비친 아이의 몸에 피멍이 길게 나 있다. 주로 젖가슴과 엉덩이 부근에 반점처럼 돋아 있는 멍들을 보자 울컥 눈물이 솟는다. 덜덜덜 전기충격을 받은 듯 떨리는 손으로 아이에게 옷을 입힌다. 이 곳을 나가야만 한다. 손의 떨림이 등을 타고 뒷머리까지 올라간다. 좀체 진정이 되지 않는다. 무작정 밖으로 나온다.
어디로 가야하는 걸까? 아이의 손이 내 손을 찾아 꼭 쥔다. 나는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눈물과 바람에 엉클어진 머리칼이 손끝에 걸린다. 그 엉겨버린 타래를 손으로 빗어 내린다. 아이를 돌려보내야 한다. 아이가 원래 있었던 자리를 찾아서…. 아이를 처음 만났다던 쇼핑센터는 네 블록 너머에 있다. 그 곳에 가면 아이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아이 손을 힘주어 잡고 그곳을 향해 걸음을 내딛기 전 뒤를 돌아본다.
파리하게 물든 신새벽 하늘을 머리에 인 아파트 건물이 보인다. 눈으로 더듬어 층을 오른다. 내가 머물렀던 504호의 창문이 환히 열려 있다. 중간에 이가 빠진 네펜데스 화분들이 보인다. 다시 저 곳에 갈 수 있을까? 다시 흐릿해지는 시야 속으로 네펜데스 화분들이 하나씩 툭툭 떨어지는 모습이 환영처럼 보인다. (끝)
당선소감
남들보다 천천히, 더 오래
한라산 자락의 백설이 비가 되어 거리에 내립니다. 미처 우산을 준비 못한 이들의 바쁜 걸음 탓에 거리는 분주해지는데. 저 혼자만이 더딘 발걸음을 한 발씩 내딛습니다. 적지 않은 나이에 문학의 꿈을 꾸면서. 저는 속으로 늘 되뇌었습니다. ‘남들보다 천천히. 더 오래오래….’ 재능이 부족한 저로서는 그저 오래 앉아 많이 읽고 쓰는 일만이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저는 그 일밖에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안개 속에서 익숙한 정류장을 찾은 듯 감격스러운 지금. 그리운 얼굴이 있습니다. 많은 시간 속으로만 삼키고 그려야 했던 얼굴. 차마 입 밖에 내어 부르지 못하고 그렇게 염원하던 등단이란 걸 하게 된다면 꼭 불러보고 싶었던 이름. 어디에선가 별이 되어 반짝이는 고운 아이 혜림에게 오늘의 이 영광을 바칩니다. 그녀가. 그녀를 향한 그리움이 저를 항상 지탱해 줍니다.
그리고 제게 기회를 열어준 경남신문사와 제 부족한 글을 끝까지 읽어주시고 당선의 영광을 안겨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절 대단한 작가로 믿어 주는 가족들과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회원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제가 처음 소설에 입문할 때 지도해 주신 이순원 선생님과 은사이신 나기철 시인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더욱 천천히 오래 쓰는 작가가 되겠습니다.
■약력
△ 1972년 제주 출생 △제주산업정보대학 유아교육과 졸업 △2002 제주작가 신인상 소설부문 수상 △학원강사
심사평
독특한 구조 참신한 소재
26편의 응모작이 다 나름대로 특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품이 회고조의 시간 설정과 이에 따른 일방적인 화자의 설명적 진술이 소설을 에세이조로 이끌어가고 있다. 문장으로 볼 때 현대소설의 한 특징은 장면. 묘사를 많이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독자를 긴장하게 하고 작가와 더불어 작품으로 완성케 하는데 상상력을 발동케 하고 작품으로 끌어 들일 수 있다.
당선작 <오버 더 레인보우 designtimesp=6074>는 이미 소설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사람의 글솜씨이다. 표현이나 내용이 다 독특한 구조와 명료한 문장 그리고 참신한 소재이다. 이 소설의 구조상 특성은 동성애자들의 삶과 파탄을 네펜데스라는 식물의 생태와 결부시켜 효과적으로 구조화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 다원화한 문화와 가치의 문제는 이미 동성애까지도 공공연하게 대중의 의식에 자리하게 하였으며 문학의 소재로서도 등장하게 하고 있다. 이 소설의 제목처럼 화려한 ‘무지개 너머’에 있는. 쾌락의 다음에 있는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 소설은 우리에게 동성애 문제가 가져다주는 행복의 의미를 되물으며 진정한 의미의 결혼이란 무엇인가 등의 문제를 생각해 보게 한다. 동성애가 주류는 아닐지라도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는 사회 풍속과 윤리. 우리들의 새로운 인식의 문제가 되고 있음은 사실이다.
사람들은 남녀 성과 관계없이 서로 좋아하고 가까이 하면서 어린 시절을 지나왔다. 등장인물인 ‘리’나 ‘나’처럼 사회화하는 가운데 동성애적 애정이 자연스럽게 해소되지 못하고 심하게 억압되면 심리적인 장차 장애를 초래하게 된다. 이것이 아동 성학대에처럼 왜곡되어 나타날 수도 있다. 이러한 윤리적 문제에 대한 작가의 나름의 해결은 이 소설을 동성애자의 위선과 허위. 죽음으로 매듭짓게 하였다. 작가의 결말처리가 상투적인 흠을 가진 것이 바로 이 윤리성 문제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결말부의 문장은 다소 긴장미가 떨어진다.
이러한 문제들이 있음에도 단단한 결구(結構). 간결하고 명료한 문장. 긴장으로 이끄는 의식과 무의식의 변주 등이 이 작품이 문학적 성공의 가능성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심사위원: 김인배(소설가) 명형대(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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