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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문학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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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4,589회 작성일 08-02-16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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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의 서사와 주체의 귀환  - 최윤론



허병식

  

1. 정체성의 경계들

최윤은 지금까지 모두 세 편의 장편소설을 발표하였다. 그 세 편의 장편은 모두 주체는 어떻게 주체로 구성되는가라는, 정체성의 구성과 그 경계에 대한 일관성 있는 질문을 담고 있다. 이를테면, 그의 첫 번째 장편인 ‘너는 더 이상 너가 아니다’의 등장 인물 박철수는 낯선 사내로부터 아버지의 사망을 알리는 전화를 받고 아버지가 살던 도시로 가는데, 그 도시에서 그는 아버지의 죽음 혹은 실종을 둘러싼 문제와 그의 옛 애인이었던 나영희와 관련된 문제에 얽혀들게 된다. 그 두 가지 문제가 대변하고 있는 것은 한 인간의 정체성이란 어떻게 형성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 보자.

‘너는…’의 서두에서 주인공 박철수의 신원을 밝히는 서술이 한자의 표상을 선명하게 각인하며 보여주는 것처럼, 그는 ‘流嶺 朴氏 璟軒公波 磨村 子孫’의 삼십칠대 손이다. 그는 어느 날 낯선 자로부터 전화를 받고 아버지가 살고 있는 도시로 가서 유령 박씨의 삼십육대 손인 아버지의 행적을 추적한다. 그의 아버지는 고가를 복원하는 일에 평생을 전력하여 재산을 탕진하고 삶을 파탄에 이르게 한 인물이다. 아버지가 구입하여 수리하려던 고가들은 “끊임없이 수리를 요구하고 한 곳을 고치면 다른 곳이 무너져 내리고”, 그와 더불어 박철수의 가족도 해체되는 위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 가족의 해체는 이미 예고되어 있던 것이다. 박철수가 유령 박씨라는 것은 그의 정체성이 놓인 위치를 알려주는 알레고리와도 같다. 그는 ‘유령’을 선조로 삼고 있으므로, 족보에 의해서 그의 정체성을 파악하려는 것은 무망한 노력에 가깝다. 인간이 혈통 속에서 정체성의 기원을 발견하는 것은 유령을 선조로 삼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 그 알레고리에 숨은 전언이다. 가족이나 출생의 기원을 넘어서 자아를 스스로 형성하겠다는 정체성의 기획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평생 동안 간직한 고가의 수리와 관련된 서류를 넘겨주면서 그가 “단! 마형과 내가 저 종이다발을 처음부터 끝까지 몽땅 다시 쓴다는 조건하에서!”(p.202.)라고 말하고 있는 대목은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아버지와 전통의 유산 속에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구성을 통해서 발견해 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박철수의 옛 애인인 나영희와 관련된 사건들도 정체성의 구성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녀는 늘 “익명의 인파 속에 익사하는” 것을 좋아하는 존재이다. 그녀가 그녀의 고유한 이름을 불편하게 생각하고 익명의 인파가 쫓는 욕구에 순응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그녀의 정체성이 놓인 위기를 대변한다. 그녀는 “익명의 얼굴 없는 다수가 몰리는 곳에서만 평화를 찾”고 “익명의 인파의 무수한 발길이 다져놓은 땅 위에서만 공고한 안정을 확인”(p.184.)한다. 그녀는 대중의 욕망을 모방하기 위해서 물질에 대한 욕구로 자아를 대신하려 하고 소비의 욕망 속에 정주하는 삶을 산다. 그녀는 단순히 타인만이 아니라 그녀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숨기는 좀 더 심오한 형태의 자기 소외에 놓여있다. 그녀가 ‘익명의 그, 익명의 그녀’로 화하길 원하였으므로, 그녀는 더 이상 자아를 만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녀가 자아의 해체를 상징적으로 완성하기 위해서 금강석을 입에 넣고 분수대로 돌진하는 서사의 마지막 장면은 정체성의 위기와 그 파탄에 대한 상징적인 함의를 지닌다.

정체성이라는 용어는 항상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과 그 대상이 표상하는 바의 관계에 대한 물음을 갖도록 만든다. 정신분석학을 비롯한 현대의 이론들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주체가 자신을 자명하다고 느끼는 것은 어떠한 이미지나 이데올로기적 형상 속에 자신을 복속시킨 결과이다. 알튀세에 의하면 인간은 자아에 대해 앎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자아에 대한 상상적 오류 속에서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축됨으로써 주체로 형성되는 것이다. 주체는 언제나 하나의 상징 질서 속에서, 어떤 이데올로기에 전적으로 종속되는 한에서만 주체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것이든 집단적인 것이든, 관념이든 실체이든 간에 어떤 대상의 정체성을 탐구하려면 먼저 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 구성되었는가를 돌아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최윤의 작품은 낯선 형식의 강렬함과 상상적인 비전을 가지고 자아와 세계 간에 놓인 긴장을 탐구한다. 자아를 구성하는 정체성의 경계를 탐구하는 최윤의 글쓰기는 그의 다음 장편들에서 더욱 깊어지고 더욱 세련된 주제로 구성된다. ‘겨울, 아틀란티스’와 ‘마네킹’에는 내면의 상처를 지닌 인물들이 어떻게 그것을 이겨내고 자아를 되찾게 되는가의 서사가 하나의 흥미로운 소설론으로 펼쳐지고 있다.

2. 두 개의 산책, 글쓰기의 기원

제라르 주네트가 명시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서술물이 하나 혹은 여러 가지의 사건을 다루는 언어의 산물이기 때문에, 문법적인 의미에서 ‘나는 걷는다’와 같은 하나의 동사를 발전시킨 형태로 볼 수 있다면, ‘겨울,…’은 ‘한진영은(이학은) 걷는다’가 발전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겨울,…’에서 한진영과 이학이 행하는 산책은 서사와 담론의 양 측면에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행하는 산책의 층위는 각기 상이하다. ‘겨울,…’의 이야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러므로 두 사람이 동시적으로 행하는 각각의 산책을 상이한 독법으로 뒤따라가는 것이 요구된다.

중년의 성악가 한진영은 매일 한 두 시간씩 거리를 걷는다. 그녀는 그 산책이 호흡연습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잃어버린 자신의 자아를 회복하는 일과 관련이 있다. 그녀가 서울 외곽에 위치한 K산장에 머물며 하는 일은 오전의 산책과 오후의 독서,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 두 가지는 모두 그녀의 기억을 회복하기 위한 방편이 되고 있다. 그녀가 행하는 독서의 대상은 모두 장기영이라는 작가의 책이며, 그녀는 그의 책에 자신의 과거가 서술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장기영의 여섯 권의 장편 속에는 그녀가 그녀의 옛 애인인 고진과 경험한 사소하고 내밀한 사건들, 그래서 그들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들이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한진영의 기억 속에 등장하는 고진이란 어떤 인물인가. 그녀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무명의 소설가였으며, 그녀와 만나던 이 년여에 걸친 기간동안 모든 것을 포기하는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다가 홀연히 사라진 인물이다. 서사상의 현재에 한진영이 묵고 있는 K산장은 과거에 고진과 그녀가 네 달 동안이나 사랑의 도피처로 삼았던 장소이며, 한진영이 매일 조금씩 경로를 바꿔 걷는 산책로는 이전에 그들이 걸었던 길들이다. 그러므로 그녀에게 산책과 독서는 등가적 행위이며, 그 산책-독서 행위의 내면에는 고진이라는 기억 속 인물의 흔적이 자리하고 있다. 한진영이 산책을 통해 그 흔적을 찾고자 하는 인물이 ‘고진’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작가 최윤이 즐겨 구사하는 언어유희의 일종이라고 생각된다. ‘고진’이란 이름을 길을 가는 사람, 즉 ‘行人’의 일본어식 발음(こうじん)으로 생각한다면, ‘行人’의 흔적을 확인하는 방법은 그의 뒤를 따라 걷는 길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진의 흔적을 찾아가는 한진영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녀가 하나의 문학작품을 해석하는 방식이다. 그녀는 장기영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그녀와 고진의 이야기에 밑줄을 그어가며 독서를 하고 있지만, ‘나는 사실은 이 책들을 읽고 있는 것은 아니예요’(p.151)라는 그녀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에게 장기영의 작품은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녀의 독서 행위는 하나의 작품에서 의미를 생산하는 단 하나의 지점, 작품의 기원이 되는 단 하나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해석자의 태도를 드러낸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장기영의 텍스트가 아니라 그의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는 고진이라는 개인주체이다. 고진이란 작품의 단일한 주체인 ‘個人’(こじん)이기도 한 것이다.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는 단일한 ‘개인’으로서의 저자를 상정하는 것은 문학에 관한 근대적 신념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데리다가 말한 바와 같이 책이 하나의 진리를 담고 있다는 것, 책에는 그 진리의 저자가 있으며, 저자의 자기 영혼과의 대화, 자기 진술의 가치에 의해서 책의 진위가 결정된다는 것, 그리고 책은 영혼을 모방한다는 신념들이다.

한진영의 산책-독서 행위가 단일한 주체를 상정하는 근대적 책의 관념에 바탕하고 있다는 점은 그녀가 읽는 세계라는 책의 기원이며 저자인 고진이라는 인물의 돌연한 실종이 그녀에게 스스로의 자아와 기억의 상실이라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이유가 된다. 그녀의 산책은 그 기원의 장소, ‘모든 일이 일어난 장소’를 발견하기 위한 행위이다.

그보다도 더 불확실한 곳이예요. 모든 일이 일어난 장소, 그런데 무슨 일이 언제, 어떻게 일어났는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그곳이 어딘지 모르기 때문에 나머지 얘기들이 결국 자리를 찾지 못하고 흩어지는 거죠. 사람들은 흔히 멀리 있는 곳이라서 그렇다고 하지만, 어떻게 알아요, 그곳이 바로 내가 걷고 있는 이곳일지. (p.185)


한진영은 ‘기원에 대한 향수’를 통하여, 기원의 실존을 기억함으로써 자아의 순수성을 되찾으려 하는 근대적 주체이다. 그녀는 자신의 산책을 ‘내 몸이 기억하는 길’을 따라 걷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는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을 스스로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자신의 산책-독서 행위를 수행하게 된다. 그녀는 이학이 한 달 가량의 미행 기간이 지난 후에 그녀에게 처음으로 말을 건네면서, 최모와의 계약을 파기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매우 실망한 표정을 보인다. 그러한 그녀의 반응은 그녀가 자신의 산책의 동반자로서의 이학을 진정으로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또한 자신의 산책-독서 행위에 대한 독자로서 이학의 도움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한진영의 산책-독서행위가 ‘이야기꾸미기’의 형태로 전환될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처럼 들리는 그녀의 이름이 암시하듯이, 이학은 이야기의 운명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최모와의 계약을 통해 이학에게 주어진 임무는 한진영의 뒤를 따라 걷는 것, 즉 한진영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한진영의 좋은 독자가 되지 못한다. 산책의 층위에서 이학은 한진영의 뒤를 따라 걷는 것을 조금씩 게을리하기 시작하며, 독서의 층위에서 그녀는 처음부터 한진영의 이야기를 경청하지 않는다. 그녀는 한진영의 주장에 대한 반론으로 창작과 실제에 대해서, 작가의 경험과 그 소설적 변용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의견을 전한다. 이학은 한진영의 주장을 전적으로 믿지는 못하면서도, 그녀의 요구에 따라 그녀가 밑줄을 그어가며 읽은 장기영의 여섯 권의 소설책을 읽어가기 시작한다.

장기영의 텍스트에서 이학이 발견하는 것은 현실과 허구, 창조와 모방이 뒤섞이는 경계선이다. 그리고 그 경계선에서 이학은 실재하는 것, 현실의 참모습들이 모래 위에 지어진 성곽처럼 공허하다고 느낀다. 텍스트의 진리를 보장해 주는 진짜 작가, 작품의 가치를 입증하는 의미의 기원으로서의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텍스트의 직물 속에서 쓰여진 것이다, 텍스트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한진영과 장기영의 이야기를 읽는 이학의 해석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명백하게 해체론이 가르쳐 준 텍스트 읽기를 닮았다. 이학의 독서행위는 텍스트와 의미, 그리고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의식을 지닌 자아에 대한 믿음이 주는 안정감의 토대를 의심하고 일관성 있고 자율적인 주체라는 개념을 심문한다.

이학의 명백하게 해체적인 텍스트 읽기는 한진영의 책읽기와 대척적인 지점에 놓이지만, ‘겨울,…’의 서사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학의 텍스트 읽기가 한진영의 그것을 보충하고 꾸며주는 방식으로 그녀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이학은 한진영의 책읽기를 ‘그렇게라도 짓지 않으면 안 되는 기억의 성’(p.214)으로 이해한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과거를 존재하게 만드는 전략이며, 그것을 통해 현재의 자아를 구성하기 위한 근거를 마련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이학은 한진영에게 한진영 자신의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이야기는 장기영의 텍스트 읽기의 과정에서 이학의 머리 속에 떠오른 문장들을 엮어 짜서 이루어낸 또 하나의 텍스트이다. 그리고 그 텍스트 속에서 이학과 그녀의 사라진 애인인 Z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 각색되어, 한진영과 고진의 이야기 속으로 스며든다.

이학이 한진영을 위해 꾸며주는 그들의 이야기 속에 두 사람 각자의 연애가 섞여 들어가는 사실이 암시하듯이, 그녀들은 서로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이다. 최모가 증언하듯이 실제로 그녀들의 외모는 쌍둥이처럼 닮았으며, 그녀들은 또한 동일한 상처와 기다림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들은 서로의 이야기에 대한 독자들이고 그들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서로를 독자로서 필요로 한다. 자신에 대해 안다는 것은 해석하는 일이고, 자신에 대해 해석하는 것은 이야기 속에서, 그리고 여러 다른 기호와 상징들 속에서 특별한 매개를 발견함으로서 가능해지는 것이라면(리쾨르), 한진영은 자신의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서 산책이라는 이야기하기의 행위를 수행하였고 이야기를 꾸며주는 이학의 도움을 필요로 했던 것이며, 이학은 한진영을 통해 글쓰기의 기원에 대한 탐색을 시작하게 된다. 이학이 이야기를 들려주던 밤의 산책길의 끝에서, 한진영은 이학이 만들어준 자신의 이야기를 만나기 위해, 잃어버린 고진을 만나기 위해 밤의 다리를 건너 홀로 걸어간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이학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의미를 깨닫는다.

그녀가 그렇게 다리 저쪽으로 건너가 버린 그날 밤으로부터 충분히 멀어진 후에야 나는 내게 일어난 일의 크기를 알아차렸을 뿐이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가끔 마른 흐느낌을 만들면서 내 몸을 흔들 그런 아름다운 일이 내게 일어났던 것을. 아마도 한 작가의 작품이 한 개인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 바로 한진영에게 베풀어졌고, 한진영은 그 일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내게 나타났다고 생각할 정도로.

(pp.226-227)

하나의 이야기가 한 개인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도록 도와주는 일일 것이다. 잃어버린 기억을 꾸며주고, 상처를 해석하여주며, 모호한 기다림의 대상을 구체화시켜주는 것, 그것은 장기영의 작품을 통해서, 더불어 이학의 이야기를 통해서 한진영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겨울…’의 결말에서 한진영이 성악가로 재기하여 독창회를 갖는 장면이 보여주듯이, 이학의 ‘이야기꾸미기’는 한진영의 자아를 회복하게 해 주었으며, 그로 인해 한진영은 “질서와 일관성으로 가득찬 세상”(p.226) 속으로 걸어들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한진영의 주체 구성담이 보여주는 것은 자아가 글쓰기의 효과라는 관점이다. 현대의 서사이론들이 증언하는 것처럼, 자아는 글쓰기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글쓰기가 정체성의 서사적 형성을 탐색하고 문제화한다. 자아는 텍스트에 선행하지 않고 오히려 텍스트를 통해 자신의 기원을 요구하고 창출한다. 그러므로, ‘겨울,…’에서 보다 흥미로운 것은 한진영의 자아 회복이 아니라 이학의 정체성의 기획이다. 이학은 한진영이 남겨 놓은 밑줄이 쳐진 문장들을 읽으며, 그 문장들의 전후에 존재하였을 다른 문장들을 상상하는 방식으로 독서를 수행해 간다. 그녀가 장기영의 책 속의 밑줄들을 옮겨 적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부재하는 기원을 대리하고 보충하기 위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녀만의 글쓰기가 시작될 것임을 예고한다. ‘한진영은 걷는다’로 시작된 ‘겨울…’의 서사는, ‘이학은 작가가 되었다’라는 언표의 확장이라는 국면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겨울…’의 서사를 ‘이학은 작가가 되었다’라는 언표를 확장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의 심층 주제를 이학의 자아구성담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작품의 주체가 되는 저자, 동일성을 간직한 자아가 아니라, 무수한 기원 없는 욕망들의 흔적으로 남는 분열된 자아를 구성하는 글쓰기의 차원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자기동일성을 확신하는 기억을 넘어서고, 현존과 부재의 대립을 넘어서는 전복적인 글쓰기의 시작을 알리는 표지이다. 기원이 부재하는 그 글쓰기는 무한한 텍스트의 연속성에 의해 대체되며, 따라서 텍스트의 의미는 항상 새롭게 생겨나고, 스스로로부터 거리를 취하게 된다. 텍스트의 유희에 의해 생산되는 진리가 이데올로기의 결과인 것처럼, 텍스트에서 생산되는 주체는 텍스트의 효과에 불과하다는 것이 이학이 최종적으로 하고 싶은 말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글쓰기의 심연 속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해저 깊은 곳으로 잠겨간 아틀란티스의 운명처럼, 작품의 주체와 글쓰기의 기원은 푸른 미궁 속으로 사라진다. 사라진 섬 아틀란티스에 대한 사람들의 원망처럼 글쓰기의 기원을 찾으려는 노력도 무망한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이야기는 존재하는 ‘글쓰기의 기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없는 기원을 찾아가는 글쓰기, 이야기의 기원을 발명하고 고안해내는, ‘기원의 글쓰기’의 시작이다. 불변하는 과거의 기억 속에서 진짜 자아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를 통해 자아의 창출을 추구하는 것, 그것은 루소가 창안했던 진정성의 기획과 다른 것이 아니다.

3. 진정성의 서사학

단일한 주체의 구성을 유도하는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체계를 전복하려는 움직임은 정체성의 서사가 지닌 근본적인 자원의 하나이다. 그것은 주체의 이중성과 유한성에 대한 재현을 통해서만 가능해지는 위반의 양상이다. 그러나 자아가 텍스트의 효과에 불과하다는 인식은 자아를 구성하는 권력에 대한 전복이나 인간의 소외에 대한 적시를 넘어, 그 소외의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정치적 자원을 제공하려는 기획과 만나야 한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우리가 아는 모든 것, 우리 자신을 구성하는 모든 것을 파괴하려 위협하는 환경에 처한다는 것”(버먼)은 탈근대성이 제기하는 주제가 아니라 이미 근대성 자체에 내재한 인간생존의 조건이다. 주체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말하는 것과 동일한 바로 그 사실들이 주체성들과 비판적 사유를 그것들 자체의 구성이라는 새로운 과제로 향하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자아의 다른 모습인 유령의 상태를 벗어나서 어떤 형태로든 ‘자아’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현대의 인간이 놓인 소외의 상태를 극복하려 하는 작가에게는 여전히 문제적인 주제가 된다. 자아를 인식하고 상상하는 작업은 또한 유령을 넘어서 인간 실존의 윤리를 기억하고자 하는 작가에게는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마네킹’은 그러한 자아의 허구적 구성을 파국 없이 넘어서는 방식에 대한 하나의 서사를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네킹’의 서사가 조우한 위기의 정체성을 지닌 존재는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어려서부터 광고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지니라는 소녀이다. 그녀는 호적상의 이름을 잊고 ‘지니’라는 예명으로만 불려지고 있다. 자아의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타자가 부여하는 정체성 없이는 기호화되지 않는다. 그녀의 수입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살아가는 가족들이 그녀의 실종 소식을 듣고 “지니가 자기의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은 그애가 지니라는 이름이 통하지 않는 세상 어느 구석으로 사라져버렸다는 불길한 징조니까.”(p.28.)라고 말하는 장면은 그녀가 직면하고 있는 소외의 양상을 대변한다. 그것은 카프카적인 불길한 세계의 면모이다. ‘갑충’보다도 한층 더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것으로 보이는 얼굴 없는 마네킹이라는 사물이 그녀의 자아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보자면 그녀의 상황은 카프카보다 한층 더 불길한 것인 듯하다. 카프카의 소설에서 갑충으로 변신한 존재에게 그의 아버지가 사과를 던졌던 것처럼, 가족들은 한밤중에 지니의 목을 졸라서 그녀의 목소리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부재하는 존재와도 같은 그녀는 마네킹과 같은 ‘타자’의 영역으로 물러난다. 사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또한 고유한 이름으로 불리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그녀와 다를 바 없이 주체를 상실한 존재들이다. 주로 바다생물들의 이름으로 불리는 그들의 호칭은 하나의 동일성을 지닌 인격의 표지가 아니라, 분열하는 무수한 욕망들의 삶을 지칭하는 기호이다.

지니가 광고 모델로 이름을 알리면 알릴수록, 그녀의 실재하는 정체성은 거짓 위에 자리를 잡고, 비진정성 위에서 번창한다. ‘지니’라는 이름과 그것이 지시하는 삶의 모델은 궁극적으로 그녀 자신을 기만하고 파괴할 위험에 처하게 만든다. 그것은 규정된 사회적 역할에 맞게 그녀를 주조하고, 그녀의 자연적 개인성을 파괴하고, 그녀를 자신이 아닌 것이 되도록 강제한다. 한 사람이 그의 개인으로서의 자연적 정체성을 다시 얻을 수 있고 그의 진정한 자아가 될 수 있는 것은 그에게 주어진 사회적인 지위, 사람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사회적 역할을 포기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사람들이 체계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없다면, 체계에 반하여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니가 하루 여섯 시간씩의 긴 훈련과 무수한 반복 연습들, 그리고 장식과 의상을 실험해 보는 반복되는 시간들을 벗어나기로 결정하고 집을 나설 때 대면한 마네킹, 그것은 그녀가 벗어던진 ‘허구의 정체성’ 바로 그것이다.

지니가 집을 떠나서 떠돌게 되면서부터, 그녀는 자신을 통제하는 세력에 반해서 자신의 내면의 삶을 사용하는 법을, 타자의 통제를 비정하게 넘어서서 내면의 삶을 사용하는 법을 배운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존재할 수 있는 곳에서 ‘살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무언가를 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녀가 자신을 알아 갈수록 그녀는 자신의 인식을 위한 투쟁 속에서 생생하고 자연적인 원천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춤이라는 육체성의 양식으로 다가온다. “그녀가 거의 잊고 있었던 어떤 상태를 되찾는 과정에서 그녀의 표정이나 걸음걸이, 몸짓과 안색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조금씩 변모하기 시작”(p.116.)하는 경험은 자아 발견의 시작을 알리는 ‘변신’의 양상이다. 그것은 오래도록 익혀온 몸의 규율에서 해방되어 자아의 육체성을 되찾아가는 과정을 적시한다. “가장 단순하고, 가장 깊은 희열 속에 모든 사건, 모든 기억이 하얗게 산화해 흔적도 없이 우주 저 멀리로 날아가버릴 때까지”(p.144.) 춤을 춘 그녀는 허구적 정체성이라는 어두운 성의 기억을 조용히 벗어나고 있다.

지니가 추는 춤은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도 작은 변화를 만들어 낸다. 그녀의 춤을 본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슬픔을 느끼게 되고, “오래된 불순물이 몸 안에서 빠져나가고 난 다음의 개운해진 표정을 하고”(p.203.) 자리를 떠난다. 그리고 오래도록 그녀를 찾아다니던 솔배감팽은 그녀를 발견하고 그녀의 춤을 본 후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라는 고백을 한다. ‘마네킹’에서 어떤 형태로든 자아를 발견하는 인물은 지니 외에도 여럿이지만, 솔배감팽의 자아구성담은 특히 인상적이다. 바다 속의 세계를 탐색하는 스쿠버 다이빙 동호회의 회원인 그에게 바닷속의 세상은 “절대적인 평화, 마치 육체가 완벽히 투명해지는 듯한 상태”(p.18.)를 안겨주는 경험이다. 바다란 모든 것이 흘러들면서 나누어지지 않고 구별되지 않는, 항상 자기 그대로인 정체성의 상징이 아닌가. 그 바닷속 세상에서 솔배감팽은 지니를 만나게 된다. “바다색과 거의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의 얇은 청색 천으로 된 슈트를 입고 여자는 아기가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그렇듯이 몸을 구부리고 우리를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p.21.)라고 그가 묘사하는 지니와의 첫 만남은 그에게 갑작스러운 절대성의 출현, 세계와 융합된 자아의 환상이라는 에피퍼니를 제공한다. “D도 나도 우리가 그날,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것을 보았음을 알아차렸다.”(p.48.)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특히 미적인 것이 제공하는 초월에 대한 감각은 그러한 ‘자아’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 주는 특별한 경험으로 작동한다. 지니는 미적인 세계로의 여행에 사람들을 강제로 인도하는 불가사의한 사신과도 같은 존재이다.

지니가 춤의 형식과 사랑의 경험을 통해 자아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고 자연의 정체성으로 돌아가는 죽음을 맞이할 때, 그녀의 소멸을 묘사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은 그녀가 발견한 정체성이 고정되고 단일한 정체성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바람은 가끔 생명의 자연스런 부패에서 그녀를 보호하려는 듯 건조하게 불어와 주위를 배회하고, 자라기를 멈춘 채 풍성하게 펼쳐진 머리카락을 날리게 하며, 강인하게 굳어진 그녀의 몸의 이곳저곳을 실로폰처럼 두드리다가, 마침내 그녀가 단단한 세계에서 유연한 세계로, 형체에서 추상으로, 유채색에서 무채색으로 그렇게 멀리, 마침내 액체나 기체 혹은 그 어느 것도 아닌 무형으로 세상 깊이 스며드는 일을 돕는다. (p. 278-279.)

그것은 더 이상 자신의 ‘이상적’ 자아, 즉 문화적으로 형성된 에고와 일치하지 않는 정체성의 탄생을, 단단한 것을 모두 허공 중에 날려 버리고 유연함을 획득한 정체성의 탄생을 증언하고 있다. 삶에서 자신을 단단하게 고정시켜 주체화할 수 없으며, 형체를 갖는 것이 거울 이미지의 심연으로 빠져드는 것을 의미한다면, 분명하게 완성된 정체가 아니라, 고정된 본질의 구체화가 아니라, 지속적이고 활동적이며 종결 없는, 무한한 성장을 담은 정체를 상상하는 것이 하나의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주체의 곤경을 증언하는 모더니즘이 이미 우리에게 가르쳐준 약속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네킹’의 서사가 증언하는 정체성 확인의 도정에 대한 서술은, 그 도정의 각 단계에 대한 묘사에는 충실하지만 그러한 단계로 자아가 나아가는 계기를 알려주는 데는 허술한 측면이 많다. 이를테면 지니가 집을 나서게 되는 계기로 제시되는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새벽에 집 문을 나서는 자신의 영상”이 매일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는 정보이지만, 지니는 그것을 소급적으로 확인하고 있을 뿐이어서 그것이 그녀의 자아구성을 향한 열망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지니에게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존재라는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그녀의 자아구성담이 인격의 범위를 넘어서 신성으로까지 나아감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위에 인용한 동일한 구절이 소설의 첫 대목에서는 “마침내 세상에서 멀어지는 것을 돕는다.”(p.16)라고 변주되어 제시되었던 것은 ‘마네킹’의 서사가 처한 곤경에 대한 예시는 아닐까. 절대성이나 신성으로의 초월을 암시하는 그 서사는 허구적인 정체성을 넘어서기 위해 공들여 획득한 자아의 육체성과 인물의 인격까지도 초월해 버릴 위험 또한 안고 있다.

4. 주체의 귀환

대중매체와 상품으로 넘쳐나는 도시에서의 생존은 욕망과 감각의 확대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그것은 더 심원한 인간의 소외를 불러오기도 하였다. 도시의 삶은 자아를 자아가 아닌 다른 것으로 만들고 그 허구의 정체성을 욕망하고 소비하라고 유혹한다. 그러므로 자아에게 이 세계가 얼마나 억압적이고 얼마나 심원하게 낯선가를 인식하는 것은 그러한 도시의 유혹에 저항하기 위한 출발지가 된다. 자아가 본래의 자아로부터 얼마나 멀리 벗어나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것은 진정성을 향한 탐색의 원천을 제공한다. 자신을 문화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여기고 자아를 낯설게 체험하는 것은 더 넓은 우주적 질서 속에서 그 자신과 진실하게 접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예시하는 역설을 안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근대와 탈근대의 접경지대에서 여전히 유효한, 모더니티의 역설이다. 루소의 고전적인 언급처럼, 진정성과의 대면은 “사람들의 다수가 그들 자신과 매우 다르고, 종종 그들 자신을 다른 사람 속으로 변형하는 것으로 보이는” 세계에 필수적인 경험이다.

최윤 소설의 인물들은 모두 도시에서의 삶을 통해 정체성의 위기를 맞는 경험을 한다. ‘너는…’에 등장하는 유령의 후손인 박철수는 자아가 해체되는 위기에 놓이고, ‘겨울…’의 한진영은 자아를 상실한 채 유령과도 다를 바 없는 고진의 흔적을 끊임 없이 추적하고 있으며, ‘마네킹’의 지니는 유령과도 같은 목 없는 마네킹이 되기를 끊임없이 요구받고 있다. 그 인물들은 또한 자신을 대체할 수 있는 또 다른 자아의 앞에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위기에 빠진다. ‘너는…’의 나영희와 나영화는 쌍둥이 자매이고, ‘겨울…’의 이학은 젊은 날의 한진영을 빼닮았으며, ‘마네킹’의 불가사리 또한 지니를 대체할 정도로 닮아 있다. 자신을 닮은 그 존재들은 자아라는 친밀한 것의 이면에 있는 두렵고 낯선 타자를 대면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자아’가 지닌 이중성에 대한 인식은 결국 스스로의 주체적 위치가 갖는 허위성을 일깨우게 된다. 거울과도 같은 타자와 대면한 자아는 언제나 긴장을 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자아는 결코 통일된 정체성 속에 안주할 수 없고 자아와 타자와의 순수히 상상적인 균형은 항상 근본적인 불안정의 표식을 지니고 있다. 주체란 실체가 자신을 ‘이질적인’ 어떤 것으로서 지각하는 공허한 자리를 가리키는 이름인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닮은, 또 다른 자아인 유령과 조우하고 있다.

유령과 조우하는 것은 주체성의 위기를 직시하고 자아의 이미지를 스스로 창조해 내야할 사명을 주체들에게 부여한다. 인간의 현전에 대한 기억이고 인간이 경험하는 주체성의 역사에 대한 기억인 유령을 반추하는 것은 자아의 이미지를 구축하려는 자에게 주어진 소명이다. 주체성의 위기를 기억하는 것은 위기의 바깥이 아니라 그 위기의 내부에 새로운 주체성의 자유로운 공간을 구축할 것을 요구한다. 최윤의 장편들은 자아의 다른 모습인 유령의 상태를 벗어나서 어떤 형태로든 ‘자아’의 모습을 인식하고 상상함으로써 현대의 인간이 놓인 소외의 상태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그것이 최윤의 소설이 보여주는 진정성의 정치학이다. 특히 진정성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마네킹’에 등장하는 지니의 존재는 최윤의 문학에서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는다. 물신의 형식 속에 자신의 자아를 상실한 존재였다는 점에서 그녀는 ‘너는…’의 나영희의 또다른 자아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지니가 육체성의 양식을 통해 자신의 정체를 회복하면서 한 소녀를 만나는 장면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소녀는 “무수한 사람들이 그랬듯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장례도 치르지 못한”(p.213) 도시에서 아버지와 오빠를 잃어버린,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의 바로 그 ‘소녀’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소녀의 상체를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눕혔다. 그리고는 소녀의 입에 자신의 입을 대고 그녀에게 오려고 죽음을 무릅쓰는 힘을 얻기 위해 소녀가 삼켰을 것이 분명한, 쓰라리고 독한 냄새의 액체를 빨아들였다. 그녀는 소녀에게 필요한, 소녀가 아마도 태어나서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그런 입맞춤을 주는 자세로 여러 번에 걸쳐 아직은 소녀의 몸 안에 스며들지 못한 채 겉돌던 액체를 거두어주는 데 그녀의 힘을 모았다. (p.263.)


자신의 데뷔작이었던 작품에 등장했던 바로 그 소녀가 죽음을 무릅쓰고 지니의 동굴을 찾아오고, 지니가 소녀를 안아주는 위의 장면은 최윤이 자아를 상실하고 떠도는 자신의 소설 속의 인물들을 위로하기 위해 마련한 제의와도 같다. 그 장면을 통해서 ‘너는…’의 나영희와 ‘꽃잎’의 소녀는 구원을 얻는다. 아니 그들뿐만이 아니다. ‘마네킹’의 다른 인물들도, ‘겨울,…’의 한진영도, 그러한 기획을 통해 경계 속으로 희미하게 어른거리던 자아와 조우하는 경이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 그 체험은 각각의 인물들에게 현재의 자아를 부정하고 넘어설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최윤은 자아에게 현대 세계가 얼마나 억압적이고, 얼마나 심원하게 낯선가를 보여주었다. 그의 소설들은 또한 유령을 넘어서 인간 실존의 윤리를 기억하고자 하는 소명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 최윤의 장편들과 더불어 위기의 현재를 사는 주체들은 귀환하고 있다




심사평


비평적 개념에 대한 정확하면서도 깊이 있는 이해와 논지의 일관성에 바탕을 둔 체계적인 서술능력은 비평가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덕목이다. 이와 함께 논의의 대상이 될 텍스트를 선택하는 안목과 텍스트 해석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사하는 능력 또한 응모작들의 비평적 역량을 가늠하는 주요한 심사기준이었다. 대상 텍스트를 선택하는 안목에 문제가 있어 보이거나 텍스트에 대한 기존의 비평적 평가를 답습하는 글들, 혹은 비평적 글쓰기와 독서 감상문의 차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보이는 대부분의 응모작들 가운데서 심사위원들이 최종적으로 골라낸 것은 허병식의 ‘서사의 진정성과 주체의 귀환’과 한상철의 ‘‘흙’의 기억, ‘나무’의 상상’이었다.
‘‘흙’의 기억...’은 무엇보다 유려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문장으로 눈길을 끈다. 적(赤), 황(黃), 흑(黑) 등의 색채 이미지에 착안해 문태준의 시들을 분석하는 발상도 흥미로웠다. 그러나 문장에 지나치게 멋을 부린 흔적이 있다거나 텍스트 분석에 대한 의욕이 넘쳐 간혹 자의적 해석이나 과잉 해석이 드러나 보이는 점은 결함으로 지적되었다. ‘서사의 진정성...’은 주체이론이라는 이론틀을 적용해서 최윤의 작품들을 분석한 글이다. 이러한 관점이 최근의 비평적 논의에서 비교적 익숙해진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긴 했으나, 이 글이 보여주는 텍스트에 대한 치밀하고도 설득력 있는 논의는 글쓴이의 비평적 역량에 충분한 신뢰감을 갖게 했다. 개념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짜임새 있는 논지 전개능력도 이만하면 수준급이었다. 앞으로의 의욕적인 활동을 기대한다.

/ 이남호·박혜경




당선소감


당선에 대한 소감을 쓰는 일은 짐작했던 것 이상으로 난감하다. 고마운 분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이 그 난감함으로부터 나를 구해줄 것임을 알고 있다. 둘째 아들이 가는 길을 지지해 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믿음을 가지고 지켜봐 주신 광장동 아버님 어머님께 감사드린다. 태영이네 가족들과 동생, 그리고 근모네와 종빈이네 처가 식구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문학 해먹고 살 팔자라는 영광스런 촌평으로 연구자의 길로 인도해 주신 홍기삼 선생님, 학부 시절부터 보잘 것 없는 글을 읽어 주시고 내 글쓰기에 대한 믿기 어려운 기대를 늘 보여주신 한용환 선생님, 대학원 시절 내내 보살펴 주시고 엄정한 비평의 정신에 대해 가르쳐 주신 황종연 선생님께 엎드려 절한다. 대학원 국문과 선생님들과 결함 많은 글을 선정해 주신 두 분 심사위원께 감사드린다. 자신들의 일처럼 기뻐해 준 선후배들과 친구들에게 소주 한 잔 사겠다는 진부한 약속으로 고마움을 대신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내 삶의 가장 아름다운 독자인 아내 이형선과 태어나자마자 맞게 된 힘든 시간들을 씩씩하게 잘 견뎌준 성욱이에게 사랑을 전한다.

처음 문학이 나에게 다가왔던 순간을 분명하게 기억한다. 고백컨대 그 시간 이후로 한 번도 문학 바깥의 삶을 꿈꾸어 본 적이 없다. 세상의 모든 기쁨들을 알게 해 준 것이 문학이듯, 세상의 모든 환멸과 비애 또한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내게 기억되고 있다. 문학에 도취되어 홀린 듯 살던 어렸던 시절의 순정한 마음을 잊지 않는 것만이 문학이 내게 가져다 준 기쁨과 환멸을 견뎌내는 원천이 되어 줄 것이다. 그러니 내 마지막 고마움은 문학의 몫이다.




■ 약력

1970년 부산 출생

동국대학교 독문과 졸업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현재 동국대 강사

추천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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