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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도의 진실-1(뻘밭에 집을 세우는 마음)/조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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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희순
댓글 1건 조회 4,481회 작성일 04-09-16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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뻘밭에 집을 세우는 마음


(상략)
아무튼 고생이 뭔지, 인내가 뭔지 모른 요즘 사람들에게 그래도 나는 몇 토막이나마 들려줄 이야기를 갖고 있다는 게 여간 다행스러운 게 아니다. 고희가 넘도록 그런 얘깃거리 하나 없이 살아왔다면 얼마나 부끄러울까 하는 점에서 그런 생각이 든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어려웠던 때의 기억이 오래 남는 법이다. 내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시작할 때부터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혔던 오마도 공사가 고희를 넘긴 지금까지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다.

오마도 공사는 거대한 자연에 맞서 한없이 나약한 사람들이 인내와 의지를 시험한 장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거대한 우주의 한낱 미물에 불과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열정과 도전욕, 그리고 인내의 한계를 시험했던 장이었다.
성치 않는 사람들이 돌멩이 하나씩을 주워나르며 바다에 던져  었던 오마도 공사는 작은 일에도 쉽게 성내는 세상을 향해 던지는 일종의 작은 경종 같은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당시 작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공사에 경험이 전혀 없었던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나 역시 토목이나 건설에 관한 지식이라곤 전혀 없었다.
토목기사도 아닌 내가 바다를 메울 계획을 세웠으니 당연히 주위에서 여러 가지 말이 나온 것은 당연했다. 과연 그 힘든 간척공사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애정 어린 우려가 있었는가 하면 문둥이들을 바다에 몰아넣으려는 수작이 아니냐는 끔찍한 말까지 빗발쳤다. 그러나 내가 간척공사를 하게 된 이유는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당시 소록도에는 5,000~6,000명 가량의 나환자들이 입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 절반인 2,500~3,000명 가량은 당장 사회에 나가더라도 일반인들과 하등 다를 게 없는 건강한 몸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나이가 젊은 충이었다.
이들은 가끔 휴가차 고향에 가곤 했지만 사회에서는 물론 그들의 가족들조차 받아주질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소록도로 돌아와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들이 머물 곳이라곤 오직 소록도 한 군데뿐이었다.
그렇게 쓸쓸하게 돌아온 청년들과 말을 나누다가 어느 날 나는 "자네들 소원이 뭔가?" 하고 물은 적이 있다. 그들의 대답은 이랬다. 우리는 이제 병이 나았지만 사회에서의 냉대와 박해는 아직까지도 계속되는 상태이므로 섬 밖으로 나가서 살기도 힘들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소록도에서 살자니 이제 문둥이도 아닌데 문둥이로 살아야 하는 게 안타깝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차라리 어디 먼 나라에 이민이라도 보내주면 좋겠다는 말을 농담반 진담반으로 했다.
나는 그때 생각했다. 젊은 사람들의 소원이 대통령이나 장군은 아니더라도 큰 제물을 모으겠다든가 어느 방면의 대가가 되겠다는 게 아니고 고작 이민을 가겠다는 것이니 참 한심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한심스러운 게 아니었다. 막상 내가 그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니 막막하기까지 했다. 살 땅이 없다는 것, 그건 정말 중요한 문제였다. 당장 살 땅도 없는데 무슨 재물을 모으고 대가가 되겠다는 꿈을 꿀 수가 있겠는가. 그런 일어서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뛰지 못한다고 질책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발붙이고 살아갈 땅이었다. 가정을 꾸미고 자식을 낳고 땅을 일궈 능력껏 먹고 살 수 있는 터전이 이들에게는 필요했다. 생각은 그랬지만 그런 터전을 어떻게 만들어주어야 하는지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보금자리를 틀고 평생 살아가기에 소록도는 너무나 비좁았다.
"원장님 요 옆에 오마도라는 섬이 있는데 거기에 둑을 쌓으면 좋은 천답이 생깁니다. 일정 때도 그걸 막으려고 계획을 세웠던 적이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직접 한번 시찰해 보시지요."
나는 그때 번쩍, 하고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처음 소록도에 부임할 때 고흥반도를 지나면서 본 썰물시의 장관이었다. 그때 한없이 넓게 펼쳐진 뻘밭은 끝이 안 보였다. 더구나 일제 때도 그런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면 전혀 터무니없는 말은 아닐 듯했다. '일본인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그들은 근거 없는 일에는 절대 대들지 않는 민족이 아니던가. 뭔가 실마리를 잡은 나는 박수남 부장과 함께 배를 타고 오마도로 갔다.
산꼭대기로 올라가 밑을 내려다보니 마침 썰물 때라 방대한 검은 뻘밭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도 모르게 탄성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이내 '이런 좋은 땅이 바로 소록도 옆에 붙어 있었는데 왜 여태 모르고 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나는 놀라움과 기쁨이 뒤범벅이 되어 그 넓은 뻘이 벌써 다 땅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콜롬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 어땠는지는 몰라도 그때 내 기분이 그랬다. 하지만 콜롬부스는 온전한 땅덩어리를 발견했지만 나는 그게 아니었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뻘밭을 메워 육지로 만들어야 하는 작업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아직 육지는 아니지만 '우리들의 땅'을 가질 수 있다는 미래의 청사진 하나는 가질 수 있었으니 나는 앞으로 그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얼마든지 이겨낼 것만 같았다.
오마도의 뻘밭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한없이 솟아오르는 감격을 누르지 못했다. 바다를 메우는 시련의 작업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아예 제쳐두고 그저 땅을 얻었다는 기쁨에 도취해 있었다. 내게 새로운 목표가 주어졌다는 사실 앞에서 이렇게 흥분되었던 적은 없었다. 머릿속에는 당장이라도 차에서 뛰어내려 오마도로 다시 달려가 며칠이고 몇달이고 돌과 흙을 쏟아부어 바다를 메워버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허허, 나이롱 의사/외길도 제 길인걸요?』(조창원 지음/명경출판사.1998년)
제2장 「바다를 이겨야 살 수 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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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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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순님의 댓글

황희순 작성일

  오마도 공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고 한다.<br />
조창원 씨는 이청준 소설 &lt;당신들의 천국&gt; 실제 주인공이다.<br />
오는 10월 11일 국회에서 오마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로 했단다.<br />
조창원 씨는 1926년 평안도 출생으로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br />
군의관으로 복부하다가 1961년 소록도병원장에 자원하여 부임,<br />
나환자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와 편견을 바로잡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br />
그러나 나환자들의 생활 터전을 만들기 위해 오마도 간척사업을 추진하던 중<br />
정치적인 외압으로 소록도병원장직을 강제로 사임하게 되었고,<br />
그 뒤 1971년 소록도병원장에 재부임하였다.<br />
<br />
*[동아일보 기사]<br />
《‘실미도 사건’과 함께 역사 속에 묻혀 있던 대표적 인권유린 사건인 ‘오마도 사건’의 진상 규명 작업이 시작된다. 대한변호사협회는 ‘한센병 인권 소위원회’를 구성해 이 사건의 진상 규명과 보상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추진 중이라고 23일 밝혔다. 오마도 사건이란 40여년 전 전남 소록도에 수용돼 있던 한센병(나병) 환자들을 동원해 고흥군 도덕면 오마도 북쪽 바다를 메워 330만평의 농지를 조성한 대규모 간척사업의 완공을 앞두고 당국이 한센병 환자들을 배제한 뒤 지역 주민들에게 간척지를 나눠준 사건. 대한변협은 이를 ‘권력이 사회적 약자였던 나환자들을 착취 유린한 대표적 사건’이라고 보고 국회에 관련법 제정을 요청키로 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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