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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2004 신춘문예 당선 영화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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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가족의 도상학을 위하여
임상수의 '바람난 가족'(요약)
박지숙
1. 가족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
영화가 인간의 삶을 전방위적으로 훑고 지나가는 시대에 가족이라는 견고한 성역도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있음을 목도하게 된다. 그동안 수많은 영화에서 다루어 왔던 가족의 모습은 갈등과 대립 그리고 화해의 형태로 나타났지만, 오늘 우리가 만나게 되는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은 서로에 대한 무관심에 익숙해진 일가족의 모습을 통해 가족이란 무엇인가? 라는 정체성의 문제를 제기한 영화이다. 가족이란 인간에게 존재의 근원이자 삶의 토대라는 점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핏줄이라는 선택할 수 없는 운명은,이제 임상수가 만들어내는 영화라는 공간을 통해 그 실체를 드러낸다.
사실 가족은 그 운명적 만남의 관계로 인해 부모라는 수직선과 자식이라는 수평선이 끊임없이 충돌하면서 서로의 경계를 확인시키려고 한다. 유교적 가치체계가 뿌리 깊은 한국사회에서는 특히 권위와 복종이라는 것이 낯설지가 않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현실,그 이면에 그러한 관계를 전복시키고자 하는 모종의 음모가 숨어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가족은 당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구현하는 가장 안전한 조직이라는 점에서 공권력의 레이더망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가족을 전복시키고자 하는 어떠한 형태의 움직임도 공권력의 레이더에 포착되고,그 즉시 무장해제 된다.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임상수는 공권력에 대항하여 전면전을 펼치는 방법 대신 우회로를 선택한다. 가족이라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흠집을 내는 수단으로써 성에 대한 담론을 이끌어 낸다. 그럼으로써 일단은 공권력의 레이더망을 피하는 것에는 성공했다. 감독은 가족의 정체성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가족 구성원들이 성을 교환하는 방식,즉 섹슈얼리티의 형태를 빌어 표현하고 있다. <바람난 가족>에서 섹슈얼리티가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그러한 성을 교환하는 방식의 기저에 가족의 현실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이해와 믿음과 사랑의 상징이었던 가족의 모습을 임상수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 대신 주영작 일가족의 성적 욕망을 리얼하게 그려낸다. 욕망의 거푸집에 갇혀 헉헉대면서 삶의 무미건조함으로부터,가족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은 안쓰럽다 못해 슬프기까지 하다. 바람난 가족의 이야기가 그리 특별할 것은 없다. 너도 나도 바람피우는 것에 대해 암묵적인 동의가 이루어지고 아무런 죄의식 없이 자유롭게 섹슈얼리티를 교환한다. 이러한 섹슈얼리티의 교환은 시장의 논리에 입각해서 이루어진다. 구매욕을 충족시켜주는 제품이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으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삶을 존재의 대상에서 소유의 대상으로 치환시켜 버리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가족의 정체성은 도마 위에 오른다. 정체성은 소멸과 생성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변증법적 특성을 내포하는 것이지만,<바람난 가족>에서는 소멸이 생성을 잉태하지 못하고 죽음으로 이어진다. 즉 이 영화에서는 바람난 가족의 섹슈얼리티는 사랑을 잉태하지 못하고 욕망을 생산할 뿐이다. 따라서 가족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구성원의 삶은 제각기 각자의 코드를 가지고 진행될 뿐 소통할 수 없는 일방통행의 상태에 놓여 있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 소통방식인 섹슈얼리티가 일방통행인 상태에서 원초적 결합체인 가족은 소멸과 생성을 진행시킬 수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가족이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가 도출된다.
임상수는 영화에서 결혼과 혈연에 기초한 가족의 융합된 가치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그 분열된 양상을 클로즈업 시키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가족 구성원 사이의 인간관계와 개인적 섹슈얼리티의 문제가 어떻게 얽혀 있는가를 탐색한다. 감독은 그동안 입소문으로 무성하게 떠돌던 바람난 가족을 스크린 위로 끌어올림으로써 바람의 진원지로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는 가족의 정체성과 섹슈얼리티의 문제가 단순한 사적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공적영역과 깊은 관계라는 것을 암시할 뿐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가족의 현주소를 점검해보려는 영화적 탐구는 의미 있는 작업임에 틀림없으며,가족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확산시키는 밑거름이 되기에 충분하다.
2. 가부장제의 와해, 여성상의 변화
한국사회에서 가족이 사회적 제도로 작동하기 위한 시스템 중에서 가장 위악적인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가부장제이다. 가부장제는 호주제를 모태로 남성인 가부장이 가족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권력을 행사한다. 따라서 가부장과 그의 가족 구성원은 지배와 피지배 관계에 놓인다. 이것이 엄연한 한국사회의 가족의 현실이다. 그러나 가부장제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것은 아니다. 가부장제가 한민족의 역사의 궤적을 같이 해 온 모계사회의 전통과 비교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가족을 지배해 왔던 가부장제는 이제 가족 구성원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흔들리고 있다. 권위적이고 비민주적인 제도와 권력은 결코 저항의 칼날을 빗겨갈 수 없음을 본다.
증세가 심해져 친구 병원에 입원하게 된 아버지의 몸을 통나무 닦듯이 문지르는 영작에게 아버지가 구석구석 살살 닦으라고 말하자,영작은 아버지가 직접 닦으라고 수건을 내던진다. 영작과 어머니가 담배를 피우자 아버지가 자기도 달라고 한다. 그러자 어머니는 빨리 죽으라며 남편에게 담배를 던진다. 그 후 피를 토하면서 자신의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당부하는 아버지를 가족들은 멀뚱거리며 바라보고, 손발이 묶인 침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며 죽음을 맞이한다.
이들에게 가부장은 권위의 상징이거나 두려움의 존재가 아니다. 자신들을 성가시게 하는 걸림돌일 뿐이며,그래서 무시하고 빨리 죽기만을 바란다. 가부장이 다치고 병들고 죽어가도 슬프거나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화풀이를 해대고 무시하고 냉정을 잃지 않는다. 이러한 가족들의 모습 속에서 늪으로 곤두박질치는 가부장제의 현실이 드러난다. 이러한 가부장의 추락하는 이미지는 가부장이 가족 구성원에게 존경받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영화에서 가장의 역할이 어떻게 수행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또한 가부장 스스로 자신의 삶을 변호하지도 않는다. 일방적으로 가족 구성원에 의해 수세에 몰릴 뿐이며, 가장의 권위를 회복할 대안도 가지고 있지 않다.
가족이 그 어떤 공동체보다 평등한 인간관계에 기초하여 성립되지 않는다면,임상수가 그려낸 가족처럼 결국 파탄에 이르게 된다. 가부장제의 뿌리가 흔들린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가부장제하에서 강제적인 삶을 감내해 온 여성이 그동안 억눌려 있던 욕망을 표출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그동안 가부장제는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을 구분 짓는 비민주적이고 억압적인 방식으로 존재해 왔다. 그러나 임상수는 변화하는 여성상을 성역할의 해체를 통해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섹슈얼리티에 대한 개방적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성적표현의 자유를 만끽하는 여성상을 제시한다.
영작의 아내 호정과 어머니 병한 그리고 영작의 애인인 김연이라는 세 여성은 30대, 60대, 20대라는 세대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르가즘을 향한 집착을 보여 준다. 영작과의 섹스에서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하는 호정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을 하고, 풋내기 고등학생과의 신선하고 자극적인 여상상위 체위로 오르가즘을 느낀다. 60대인 병한은 초등학교 동창과의 섹스에서 생애 처음으로 오르가즘을 느낀 후 오르가즘 예찬론자가 된다. 영작의 애인 김연은 영작과의 섹스를 주도하며,여성상위 체위를 즐겨한다. 또한 영작에게 침 뱉기와 엉덩이 때리기를 요구하며 오르가즘을 추구한다.
이 세 여성에게 오르가즘은 현재의 지리멸렬한 삶을 벗어나게 해주는 탈출구이자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하는 희망의 전령사처럼 여겨진다. 문제는 이렇듯 격정적인 육체의 희열을 맛볼 수 있는 대상인 남성이 비합적인 관계에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기존의 성도덕에 관한 통념을 전복시키는 이들의 행동은 섹슈얼리티를 통해 빼앗긴 자신들의 육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 오르가즘만 느낄 수 있다면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듯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맹목적인 세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남성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도구에서 벗어나 스스로 욕망의 주체로 변화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과정이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라는 점에서 남근 중심주의의 전철을 밟게 될 위험이 크다. 오르가즘에 대한 집착과 탐닉은 결국 상대방을 오르가즘의 도구로 전락시킬 수밖에 없음을 간과하지 말자.
임상수는 오르가즘을 추구하는 세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해 그동안 억눌려 있던 여성의 성적욕망을 분출시키고자 한다. 마치 여성의 자아실현을 위한 수순 밟기의 과정으로 비춰지기도 하지만,거꾸로 여성의 자아실현을 섹슈얼리티의 영역으로 한정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실은 아직 여성에게 냉혹하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이 아직 수동태에 머무르고 있는 현실에서,여성 자신의 삶을 지켜낼 의지와 힘을 갖지 못한 지금 세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한낱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세 여성이 보여준 섹슈얼리티는 여성의 현실이 농축된 일상의 리얼리티를 재현하지 못함으로써 자신들의 일상과는 동떨어진 환타지를 꿈꾸게 한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지 못했던 호정은 바람을 피워 임신을 하게 되고,병한은 애인과 함께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고 김연은 유부남과 남자친구와의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이렇듯 임신,여행,삼각관계라는 일상을 벗어난 사건과 행동을 설정함으로써 일상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일상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보여준다. 따라서 임상수가 보여준 여성의 모습은 섹슈얼리티에 대한 욕구불만을 가시화 한 것이긴 하지만 여성의 성역할과 결합되지 못함으로써 성 정치학의 지평을 여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가부장의 권위와 통제로부터 벗어난 영작의 가족은 가장을 무시하는 행동의 표피적인 측면만 드러날 뿐, 그러한 행동을 유발시킨 삶의 조건에 대한 문제제기가 취약하다. 또한 호정과 병한 그리고 연이라는 세 여성의 일상이 섹슈얼리티에 잠식당함으로써, 가부장제의 와해와 여성상의 변화가 가족 구성원의 구체적인 삶에 대한 이해와 요구에서 출발하지 못하고 즉발적인 행동을 통해서 전개된다. 가부장제는 여성의 성역할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유지되기 힘든 제도라는 점에서 여성의 성역할이 해체되고 양성평등에 기초한 삶의 방식을 추구하지 않는 한,오히려 영화적 소재주의로 흐를 수 있으며 가상과 실재라는 영화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힘들 것이다. 임상수가 보여준 가부장제의 와해와 여성상의 변화는 개별적으로 진행되는 독자적인 영역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과 사회의 구조가 맞물려 있는 유기적 관계에 있다. 따라서 가족과 사회에 대한 내적 성찰이 요구된다.
3. 배타적인 인간관계, 개방적인 섹슈얼리티
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가족은 그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을 그대로 떠안을 수밖에 없다. 배타적인 인간관계와 개방적인 섹슈얼리티라는 문제는 이미 한국사회에 만연된 현실이며, 그러한 현실을 반영한 영화가 <바람난 가족>이다. 자본과 물질 중심의 세계에서 인간관계는 자본과 물질이 유통되는 경로를 따라 움직인다. 따라서 그러한 세계에서는 결혼과 혈연에 의한 가족 공동체일지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다. 임상수가 바람난 가족으로 설정한 영작의 가족은 상류층 가족이다. 상류층 가족은 특히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대변한다. 감독은 영작의 가족을 통해서 가족 구성원의 배타적인 인간관계와 그들이 가정 밖에서 보여주는 개방적인 섹슈얼리티를 동시에 보여준다. 영작의 가족은 상류층으로써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개방적인 섹슈얼리티를 통해 기득권을 적극적으로 향유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지배 이데올로기의 구심점인 상류층 가족의 이중성이 드러난다.
영작은 법과 질서의 충실한 심복답게 행동한다. 유가족의 변호인으로서 영작은 정의의 사도처럼 유가족의 입장을 대변하는 연설을 늘어 놓는다. 그러나 실제 학살 현장을 발굴하는 과정과 유가족을 대하는 태도는 냉소적이고 사무적이다. 유가족과 심정적인 교감이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영작 자신의 삶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할아버지,아버지,어머니,아내,아들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는 영작은 자기중심적인 인물의 전형을 이룬다. 영작은 자기중심적일 뿐만 아니라 이중적인 인간이다. 영작은 애인의 오럴 섹스에 정신을 잃고 중앙선을 침범해 마주오던 우편배달부의 오토바이를 들이 받는다. 사고책임을 술 취한 우편배달부의 과실로 경찰에 이야기하는 영작의 행동은 결국 복수심에 불타는 우편배달부에 의해 자신의 양아들을 잃게 되고,우편배달부를 자살에 이르게 함으로써 하층 가족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영작의 사고 장면은 가족과의 유대감을 상실한 영작이 도피처로 선택한 바람피우기가 가족의 유대감을 복원시켜 주기는커녕 오히려 양아들과 가장인 우편배달부의 죽음으로 이어지면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아 간다. 양아들의 죽음으로 결국 영작과 호정은 자신들의 가족을 해체하고 다른 길을 선택한다.
호정은 상류층 전업 주부답게 자신의 삶을 즐기며 살아간다. 영화 속에서 친정 식구들은 전혀 등장하지 않고, 시댁의 일원으로 나오지만 역시 형식적인 며느리의 위치에 머무른다. 남편인 영작에게서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하는 호정은 불만이 가득 차 있고, 입양한 아들에 대해서도 엄마로서의 의무적인 행동을 할 뿐 모성애의 친밀함은 보여주지 않는다. 또한 입양한 사실을 아들에게 말해주며 아들의 감정적 동요와 혼란스러움에 대한 배려 없이 자신의 시각을 아들에게 강요한다. 호정 역시 영작과 마찬가지로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런 그녀가 옆집에 사는 고등학생을 꼬드겨 바람을 피운다. 오르가즘의 황홀경을 찾아 과감히 가족의 굴레를 벗어던진다. 그녀가 춤추러 다니는 무용학원에서 정사를 벌이는 호정은 마치 매매춘 여성이 숯 총각을 다루듯 완전한 우위를 차지하며,남편의 육중한 살덩이에 눌려 있었던 자신의 육체에 대한 주도권을 행사하면서 파트너인 고등학생을 오르가즘의 도구로 사용한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러한 호정의 개방적인 태도는 결국 가족 구성원,특히 남편과 일체감을 느낄 수 없는 단조로운 삶을 벗어나기 위한 도피의 수단이었다는 점에서 영작의 행동과 다르지 않다.
영작과 호정은 가족의 결속력과 유대감을 이끌어 내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가족은 삶의 위안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존재가 아니다. 영작과 호정은 사랑과 믿음을 가지고 서로를 감싸주는 안식처로서의 가족을 만들기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그 대신 스스로 가족을 포기하고 배신하는 쪽을 선택한다. 가족 구성원 간의 배타적인 인간관계를 극복하기 위해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인 세계에 함몰되어 욕망의 배설구만 찾아 헤매는 영작과 호정의 개방적인 섹슈얼리티는 그들과 관계 맺는 인간을 대상화 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영작의 어머니 병한은 남편 창근의 장례식을 치른 후 가족들과 잠자리에 누워 남자 친구 이야기를 꺼낸다. 죽은 남편에 대한 자기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지킬 줄 모르는 병한은 당당하게 자신이 생애 처음으로 느낀 오르가즘의 환희와 지난 결혼생활에 대한 억울함을 토로하며 결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건넨다. 병한은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에게 인생은 솔직하게 살아야하는 거라고 이야기한다. 병한이 말한 솔직함은 그녀의 육체가 60대가 되도록 경험하지 못했던 오르가즘을 체험한 자신의 감각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솔직함이 가족에 대한 배려와 상충된다면 그 솔직함이란 것이 자기중심적인 감정은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병한은 평소에 가족들에게 따뜻한 아내,어머니,할머니의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측면에서 시어머니인 병한과 며느리인 호정은 닮아 있다. 호정은 시어머니의 선택에 동조하며 지지를 보낸다. 왜냐하면 자신도 시어머니처럼 남편과 양아들 사이에서 충만 된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병한이 이야기한대로 솔직함은 자기애의 영역에 속하므로 가족마저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병한은 재산을 정리해서 애인과 떠나고 호정은 남편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후 남편에게 결별을 선언하고,영작은 호정에게 함께 살기를 청해보다 호정이 거절하자 웃으며 떠나간다. 이렇듯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세 사람은 각자의 길을 떠난다. 하지만 세 사람이 선택한 삶은 불투명해 보인다. 세 사람이 그동안 보여 주었던 배타적인 인간관계를 극복하지 않는 한 어느 곳에서 누구와 함께 하더라도 똑같은 현실이 되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이 뿌리내렸던 가족과 그 근거지를 벗어나더라도 삶이 지속되는 한 또 다른 인간관계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개방적인 섹슈얼리티에 대한 솔직함만으로 삶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영작과 호정과 병한에게 가족이라는 인간관계는 족쇄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세 사람은 또 다른 족쇄를 차고 살아가야 한다. 솔직함이라는 자기에의 배려와 인간관계에 있어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서로 상생하게 될 때 진정한 삶의 오르가즘에 도달하게 되지 않을까.
4. 새로운 가족의 도상학을 위하여
현실이 너무나도 암울하고 냉혹하다 할지라도,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임을 당하더라도 여전히 지상의 거처를 비추고 있는 태양처럼 언제나 그렇게 존재하기를 바라는 것이 가족이며 또한 영화가 아니겠는가. 관객은 영화가 현실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갈증을 채워 줄 영화에 대한 목마름은 더해 만 간다. 삶에 지친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어미의 자궁 속 같은 어둠 속에 앉아 빛으로 그린 그림을 통해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되새기게 된다.
전쟁과 분단이라는 비극의 역사 속에 잃어버린 뿌리를 찾기 위해 애쓰는 가족이 있는가 하면,가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가족이 있다. 이러한 양극단의 가족 사이에서 전개되는 임상수의 영화는 가능성과 위험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감독은 땅 속 깊이 잠자고 있던 억울한 죽음을 끄집어내어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고 단절된 가족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휴머니즘의 문제를 제기하면서도,한편으로는 영화의 긴장감과 무게감을 떨어뜨리는 섹슈얼리티라는 코드를 과도하게 사용함으로써 영화의 의미와 재미를 적절히 조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의 영화는 휴머니즘과 섹슈얼리티라는 각기 특성과 존재방식이 다른 세계를 오가며 좌충우돌한다.
이제 임상수의 영화는 비극의 역사가 만들어 낸 단절된 가족과 가족 구성원의 성적 욕망에 의해 분열된 가족의 모습을 들춰내는 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그러한 현상의 기저에 깔린 본질을 명확히 인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역사로부터 단절된 가족의 뿌리 찾기는 올바른 역사 인식과 실천력을 갖추어야 하며,섹슈얼리티는 기본적으로 욕망의 전유물이 아닌 나와 타자와의 인간관계라는 조건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랬을 때 감정의 과잉상태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는 투명성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임상수가 보여 준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감정의 과잉상태에서 질척거리고 있다. 그렇게 흘러 넘치는 감정은 가족에게로 스며들지 못하고 타인에게 쏟아지며 위태로운 곡예를 펼친다. 그리고는 익사 당한다.
어쩌면 임상수는 오늘날 가족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현실을 영화라는 공간 속으로 불러들여 각기 다른 처지와 그에 따른 주장을 펼칠 수 있는 계기를 통해, 관객과 감독 자신에게 가족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우리의 사회 현실에서 가족의 문제는 카타르시스를 통해 해결 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있다. 현실적인 대안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물론 임상수의 영화는 가족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영화를 통해 평등한 인간관계를 담보할 수 있는 가족의 형태에 대한 논의는 진행시킬 수 있을 것이다. <바람난 가족>은 남성의 횡포에 대한 여성의 분노를 섹슈얼리티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여성의 자기중심적이고 몰염치한 행동은 그동안 지배와 피지배 구도 속에 고착된 가족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뒤바뀐 설정이다. 이것은 그동안 유지되어 왔던 가족의 구도를 전복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임상수가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가족을 통해 쏟아내는 전언은 그 내용과 방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국 새로운 가족의 도상학을 위한 출발점이 되어 줄 것이다.
<심사평>
30여 편의 글을 읽는 동안 내내 즐거웠다. 예년에 비해 비평적 안목과 글쓰기가 한결 심화되어 있었고 열정 또한 뜨거웠다. 꼼꼼하게 다시 읽은 글이 14편이었고,세 번째 읽은 것도 7편에 이르렀는데,대부분이 수준급이었다. 그런데도 한 편만을 선정해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지만,영화 글쓰기에 관한 담론의 장이 이처럼 비약적으로 성숙해졌다는,따라서 영화비평의 르네상스가 도래하고 있다는 설레는 마음으로 자위하면서 거듭 읽기를 반복했다.
박지숙의 '새로운 가족의 도상학을 위하여-임상수의 '바람난 가족''은 그처럼 화려한 꽃동산 한쪽에 담담하면서도 청초한 자태로 서 있었다. 삶에서 우러나온 육성이 텍스트에 흩뿌려져 있는 가능태들을 담백하면서도 물 흐르듯이 갈무리하고 있었다. 이론은 비평의 원리이자 여건이고 비평이 해석적 실천이라면,장황한 이론에 포획되거나 현란한 수사에 유혹당하기보다는 소박하지만 체화된 글쓰기를 통해 내면의 온후한 공력을 환기시키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박선영의 '살인의 추억'과 이송이의 '과잉과 부재의 미학'. 그리고 공진희의 '생의 절정,유혹하기' 등도 같은 관점에서 뛰어난 글이었다. 반면에 이재한의 '질투는 나의 힘'과 이도연의 '차이와 반복',김희진의 '유령과 함께 거주하기' 등은 정확한 방법론적 틀과 치밀한 분석 모두에서 탁월한 평문이었으며,김미경의 '2003 스캔들'은 새로운 비평적 성찰이 돋보였다.
이들 중 어느 글을 당선작으로 추천해도 무방했을 것이다. 모쪼록 모두의 정진을 바라마지 않는다./영화평론가·중앙대 교수
<당선소감>
삶을 떠난 글쓰기는 언어의 유희에 지나지 않음을 저에게 가르쳐 주신 사랑하는 부모님께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바칩니다. 이 자리를 빌려 언제나 믿음을 가지고 나의 심장이 녹슬지 않도록 갈고 닦아준 화연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절망에 쌓여있던 고등학교 시절 영화가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해 주었듯이,이제 영화에 대한 나의 글쓰기가 누군가의 절망을 끌어안을 수 있는 작업이 되기를 바랍니다.' 만인이 자유로울 때 내가 자유이다'라고 한 시인 김남주의 말을 떠올리며,그렇게 이 땅에서의 자유로운 삶을 위해 애쓰는 모든 이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새로운 세상은 형이상학적인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두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 위에 있음을,또한 굴종과 모욕의 삶을 살아가는 소수자의 삶 속에 세워져야 하겠지요. 이러한 삶을 두루 살피는 영화를 기대하며 나눔의 삶을 실천하는 글쓰기에 정진하렵니다.
△1968년 전남 순천 출생 △1990년 순천대 축산학과 졸업 △2000년 경일대 산업대학원 사진영상학과 졸업 △2002년 제4회 사진비평상 평론부문,제5회 좋은 방송을 위한 시민의 비평상 수상 등.
임상수의 '바람난 가족'(요약)
박지숙
1. 가족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
영화가 인간의 삶을 전방위적으로 훑고 지나가는 시대에 가족이라는 견고한 성역도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있음을 목도하게 된다. 그동안 수많은 영화에서 다루어 왔던 가족의 모습은 갈등과 대립 그리고 화해의 형태로 나타났지만, 오늘 우리가 만나게 되는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은 서로에 대한 무관심에 익숙해진 일가족의 모습을 통해 가족이란 무엇인가? 라는 정체성의 문제를 제기한 영화이다. 가족이란 인간에게 존재의 근원이자 삶의 토대라는 점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핏줄이라는 선택할 수 없는 운명은,이제 임상수가 만들어내는 영화라는 공간을 통해 그 실체를 드러낸다.
사실 가족은 그 운명적 만남의 관계로 인해 부모라는 수직선과 자식이라는 수평선이 끊임없이 충돌하면서 서로의 경계를 확인시키려고 한다. 유교적 가치체계가 뿌리 깊은 한국사회에서는 특히 권위와 복종이라는 것이 낯설지가 않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현실,그 이면에 그러한 관계를 전복시키고자 하는 모종의 음모가 숨어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가족은 당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구현하는 가장 안전한 조직이라는 점에서 공권력의 레이더망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가족을 전복시키고자 하는 어떠한 형태의 움직임도 공권력의 레이더에 포착되고,그 즉시 무장해제 된다.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임상수는 공권력에 대항하여 전면전을 펼치는 방법 대신 우회로를 선택한다. 가족이라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흠집을 내는 수단으로써 성에 대한 담론을 이끌어 낸다. 그럼으로써 일단은 공권력의 레이더망을 피하는 것에는 성공했다. 감독은 가족의 정체성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가족 구성원들이 성을 교환하는 방식,즉 섹슈얼리티의 형태를 빌어 표현하고 있다. <바람난 가족>에서 섹슈얼리티가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그러한 성을 교환하는 방식의 기저에 가족의 현실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이해와 믿음과 사랑의 상징이었던 가족의 모습을 임상수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 대신 주영작 일가족의 성적 욕망을 리얼하게 그려낸다. 욕망의 거푸집에 갇혀 헉헉대면서 삶의 무미건조함으로부터,가족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은 안쓰럽다 못해 슬프기까지 하다. 바람난 가족의 이야기가 그리 특별할 것은 없다. 너도 나도 바람피우는 것에 대해 암묵적인 동의가 이루어지고 아무런 죄의식 없이 자유롭게 섹슈얼리티를 교환한다. 이러한 섹슈얼리티의 교환은 시장의 논리에 입각해서 이루어진다. 구매욕을 충족시켜주는 제품이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으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삶을 존재의 대상에서 소유의 대상으로 치환시켜 버리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가족의 정체성은 도마 위에 오른다. 정체성은 소멸과 생성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변증법적 특성을 내포하는 것이지만,<바람난 가족>에서는 소멸이 생성을 잉태하지 못하고 죽음으로 이어진다. 즉 이 영화에서는 바람난 가족의 섹슈얼리티는 사랑을 잉태하지 못하고 욕망을 생산할 뿐이다. 따라서 가족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구성원의 삶은 제각기 각자의 코드를 가지고 진행될 뿐 소통할 수 없는 일방통행의 상태에 놓여 있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 소통방식인 섹슈얼리티가 일방통행인 상태에서 원초적 결합체인 가족은 소멸과 생성을 진행시킬 수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가족이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가 도출된다.
임상수는 영화에서 결혼과 혈연에 기초한 가족의 융합된 가치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그 분열된 양상을 클로즈업 시키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가족 구성원 사이의 인간관계와 개인적 섹슈얼리티의 문제가 어떻게 얽혀 있는가를 탐색한다. 감독은 그동안 입소문으로 무성하게 떠돌던 바람난 가족을 스크린 위로 끌어올림으로써 바람의 진원지로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는 가족의 정체성과 섹슈얼리티의 문제가 단순한 사적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공적영역과 깊은 관계라는 것을 암시할 뿐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가족의 현주소를 점검해보려는 영화적 탐구는 의미 있는 작업임에 틀림없으며,가족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확산시키는 밑거름이 되기에 충분하다.
2. 가부장제의 와해, 여성상의 변화
한국사회에서 가족이 사회적 제도로 작동하기 위한 시스템 중에서 가장 위악적인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가부장제이다. 가부장제는 호주제를 모태로 남성인 가부장이 가족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권력을 행사한다. 따라서 가부장과 그의 가족 구성원은 지배와 피지배 관계에 놓인다. 이것이 엄연한 한국사회의 가족의 현실이다. 그러나 가부장제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것은 아니다. 가부장제가 한민족의 역사의 궤적을 같이 해 온 모계사회의 전통과 비교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가족을 지배해 왔던 가부장제는 이제 가족 구성원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흔들리고 있다. 권위적이고 비민주적인 제도와 권력은 결코 저항의 칼날을 빗겨갈 수 없음을 본다.
증세가 심해져 친구 병원에 입원하게 된 아버지의 몸을 통나무 닦듯이 문지르는 영작에게 아버지가 구석구석 살살 닦으라고 말하자,영작은 아버지가 직접 닦으라고 수건을 내던진다. 영작과 어머니가 담배를 피우자 아버지가 자기도 달라고 한다. 그러자 어머니는 빨리 죽으라며 남편에게 담배를 던진다. 그 후 피를 토하면서 자신의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당부하는 아버지를 가족들은 멀뚱거리며 바라보고, 손발이 묶인 침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며 죽음을 맞이한다.
이들에게 가부장은 권위의 상징이거나 두려움의 존재가 아니다. 자신들을 성가시게 하는 걸림돌일 뿐이며,그래서 무시하고 빨리 죽기만을 바란다. 가부장이 다치고 병들고 죽어가도 슬프거나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화풀이를 해대고 무시하고 냉정을 잃지 않는다. 이러한 가족들의 모습 속에서 늪으로 곤두박질치는 가부장제의 현실이 드러난다. 이러한 가부장의 추락하는 이미지는 가부장이 가족 구성원에게 존경받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영화에서 가장의 역할이 어떻게 수행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또한 가부장 스스로 자신의 삶을 변호하지도 않는다. 일방적으로 가족 구성원에 의해 수세에 몰릴 뿐이며, 가장의 권위를 회복할 대안도 가지고 있지 않다.
가족이 그 어떤 공동체보다 평등한 인간관계에 기초하여 성립되지 않는다면,임상수가 그려낸 가족처럼 결국 파탄에 이르게 된다. 가부장제의 뿌리가 흔들린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가부장제하에서 강제적인 삶을 감내해 온 여성이 그동안 억눌려 있던 욕망을 표출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그동안 가부장제는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을 구분 짓는 비민주적이고 억압적인 방식으로 존재해 왔다. 그러나 임상수는 변화하는 여성상을 성역할의 해체를 통해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섹슈얼리티에 대한 개방적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성적표현의 자유를 만끽하는 여성상을 제시한다.
영작의 아내 호정과 어머니 병한 그리고 영작의 애인인 김연이라는 세 여성은 30대, 60대, 20대라는 세대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르가즘을 향한 집착을 보여 준다. 영작과의 섹스에서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하는 호정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을 하고, 풋내기 고등학생과의 신선하고 자극적인 여상상위 체위로 오르가즘을 느낀다. 60대인 병한은 초등학교 동창과의 섹스에서 생애 처음으로 오르가즘을 느낀 후 오르가즘 예찬론자가 된다. 영작의 애인 김연은 영작과의 섹스를 주도하며,여성상위 체위를 즐겨한다. 또한 영작에게 침 뱉기와 엉덩이 때리기를 요구하며 오르가즘을 추구한다.
이 세 여성에게 오르가즘은 현재의 지리멸렬한 삶을 벗어나게 해주는 탈출구이자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하는 희망의 전령사처럼 여겨진다. 문제는 이렇듯 격정적인 육체의 희열을 맛볼 수 있는 대상인 남성이 비합적인 관계에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기존의 성도덕에 관한 통념을 전복시키는 이들의 행동은 섹슈얼리티를 통해 빼앗긴 자신들의 육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 오르가즘만 느낄 수 있다면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듯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맹목적인 세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남성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도구에서 벗어나 스스로 욕망의 주체로 변화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과정이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라는 점에서 남근 중심주의의 전철을 밟게 될 위험이 크다. 오르가즘에 대한 집착과 탐닉은 결국 상대방을 오르가즘의 도구로 전락시킬 수밖에 없음을 간과하지 말자.
임상수는 오르가즘을 추구하는 세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해 그동안 억눌려 있던 여성의 성적욕망을 분출시키고자 한다. 마치 여성의 자아실현을 위한 수순 밟기의 과정으로 비춰지기도 하지만,거꾸로 여성의 자아실현을 섹슈얼리티의 영역으로 한정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실은 아직 여성에게 냉혹하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이 아직 수동태에 머무르고 있는 현실에서,여성 자신의 삶을 지켜낼 의지와 힘을 갖지 못한 지금 세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한낱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세 여성이 보여준 섹슈얼리티는 여성의 현실이 농축된 일상의 리얼리티를 재현하지 못함으로써 자신들의 일상과는 동떨어진 환타지를 꿈꾸게 한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지 못했던 호정은 바람을 피워 임신을 하게 되고,병한은 애인과 함께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고 김연은 유부남과 남자친구와의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이렇듯 임신,여행,삼각관계라는 일상을 벗어난 사건과 행동을 설정함으로써 일상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일상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보여준다. 따라서 임상수가 보여준 여성의 모습은 섹슈얼리티에 대한 욕구불만을 가시화 한 것이긴 하지만 여성의 성역할과 결합되지 못함으로써 성 정치학의 지평을 여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가부장의 권위와 통제로부터 벗어난 영작의 가족은 가장을 무시하는 행동의 표피적인 측면만 드러날 뿐, 그러한 행동을 유발시킨 삶의 조건에 대한 문제제기가 취약하다. 또한 호정과 병한 그리고 연이라는 세 여성의 일상이 섹슈얼리티에 잠식당함으로써, 가부장제의 와해와 여성상의 변화가 가족 구성원의 구체적인 삶에 대한 이해와 요구에서 출발하지 못하고 즉발적인 행동을 통해서 전개된다. 가부장제는 여성의 성역할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유지되기 힘든 제도라는 점에서 여성의 성역할이 해체되고 양성평등에 기초한 삶의 방식을 추구하지 않는 한,오히려 영화적 소재주의로 흐를 수 있으며 가상과 실재라는 영화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힘들 것이다. 임상수가 보여준 가부장제의 와해와 여성상의 변화는 개별적으로 진행되는 독자적인 영역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과 사회의 구조가 맞물려 있는 유기적 관계에 있다. 따라서 가족과 사회에 대한 내적 성찰이 요구된다.
3. 배타적인 인간관계, 개방적인 섹슈얼리티
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가족은 그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을 그대로 떠안을 수밖에 없다. 배타적인 인간관계와 개방적인 섹슈얼리티라는 문제는 이미 한국사회에 만연된 현실이며, 그러한 현실을 반영한 영화가 <바람난 가족>이다. 자본과 물질 중심의 세계에서 인간관계는 자본과 물질이 유통되는 경로를 따라 움직인다. 따라서 그러한 세계에서는 결혼과 혈연에 의한 가족 공동체일지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다. 임상수가 바람난 가족으로 설정한 영작의 가족은 상류층 가족이다. 상류층 가족은 특히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대변한다. 감독은 영작의 가족을 통해서 가족 구성원의 배타적인 인간관계와 그들이 가정 밖에서 보여주는 개방적인 섹슈얼리티를 동시에 보여준다. 영작의 가족은 상류층으로써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개방적인 섹슈얼리티를 통해 기득권을 적극적으로 향유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지배 이데올로기의 구심점인 상류층 가족의 이중성이 드러난다.
영작은 법과 질서의 충실한 심복답게 행동한다. 유가족의 변호인으로서 영작은 정의의 사도처럼 유가족의 입장을 대변하는 연설을 늘어 놓는다. 그러나 실제 학살 현장을 발굴하는 과정과 유가족을 대하는 태도는 냉소적이고 사무적이다. 유가족과 심정적인 교감이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영작 자신의 삶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할아버지,아버지,어머니,아내,아들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는 영작은 자기중심적인 인물의 전형을 이룬다. 영작은 자기중심적일 뿐만 아니라 이중적인 인간이다. 영작은 애인의 오럴 섹스에 정신을 잃고 중앙선을 침범해 마주오던 우편배달부의 오토바이를 들이 받는다. 사고책임을 술 취한 우편배달부의 과실로 경찰에 이야기하는 영작의 행동은 결국 복수심에 불타는 우편배달부에 의해 자신의 양아들을 잃게 되고,우편배달부를 자살에 이르게 함으로써 하층 가족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영작의 사고 장면은 가족과의 유대감을 상실한 영작이 도피처로 선택한 바람피우기가 가족의 유대감을 복원시켜 주기는커녕 오히려 양아들과 가장인 우편배달부의 죽음으로 이어지면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아 간다. 양아들의 죽음으로 결국 영작과 호정은 자신들의 가족을 해체하고 다른 길을 선택한다.
호정은 상류층 전업 주부답게 자신의 삶을 즐기며 살아간다. 영화 속에서 친정 식구들은 전혀 등장하지 않고, 시댁의 일원으로 나오지만 역시 형식적인 며느리의 위치에 머무른다. 남편인 영작에게서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하는 호정은 불만이 가득 차 있고, 입양한 아들에 대해서도 엄마로서의 의무적인 행동을 할 뿐 모성애의 친밀함은 보여주지 않는다. 또한 입양한 사실을 아들에게 말해주며 아들의 감정적 동요와 혼란스러움에 대한 배려 없이 자신의 시각을 아들에게 강요한다. 호정 역시 영작과 마찬가지로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런 그녀가 옆집에 사는 고등학생을 꼬드겨 바람을 피운다. 오르가즘의 황홀경을 찾아 과감히 가족의 굴레를 벗어던진다. 그녀가 춤추러 다니는 무용학원에서 정사를 벌이는 호정은 마치 매매춘 여성이 숯 총각을 다루듯 완전한 우위를 차지하며,남편의 육중한 살덩이에 눌려 있었던 자신의 육체에 대한 주도권을 행사하면서 파트너인 고등학생을 오르가즘의 도구로 사용한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러한 호정의 개방적인 태도는 결국 가족 구성원,특히 남편과 일체감을 느낄 수 없는 단조로운 삶을 벗어나기 위한 도피의 수단이었다는 점에서 영작의 행동과 다르지 않다.
영작과 호정은 가족의 결속력과 유대감을 이끌어 내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가족은 삶의 위안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존재가 아니다. 영작과 호정은 사랑과 믿음을 가지고 서로를 감싸주는 안식처로서의 가족을 만들기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그 대신 스스로 가족을 포기하고 배신하는 쪽을 선택한다. 가족 구성원 간의 배타적인 인간관계를 극복하기 위해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인 세계에 함몰되어 욕망의 배설구만 찾아 헤매는 영작과 호정의 개방적인 섹슈얼리티는 그들과 관계 맺는 인간을 대상화 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영작의 어머니 병한은 남편 창근의 장례식을 치른 후 가족들과 잠자리에 누워 남자 친구 이야기를 꺼낸다. 죽은 남편에 대한 자기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지킬 줄 모르는 병한은 당당하게 자신이 생애 처음으로 느낀 오르가즘의 환희와 지난 결혼생활에 대한 억울함을 토로하며 결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건넨다. 병한은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에게 인생은 솔직하게 살아야하는 거라고 이야기한다. 병한이 말한 솔직함은 그녀의 육체가 60대가 되도록 경험하지 못했던 오르가즘을 체험한 자신의 감각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솔직함이 가족에 대한 배려와 상충된다면 그 솔직함이란 것이 자기중심적인 감정은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병한은 평소에 가족들에게 따뜻한 아내,어머니,할머니의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측면에서 시어머니인 병한과 며느리인 호정은 닮아 있다. 호정은 시어머니의 선택에 동조하며 지지를 보낸다. 왜냐하면 자신도 시어머니처럼 남편과 양아들 사이에서 충만 된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병한이 이야기한대로 솔직함은 자기애의 영역에 속하므로 가족마저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병한은 재산을 정리해서 애인과 떠나고 호정은 남편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후 남편에게 결별을 선언하고,영작은 호정에게 함께 살기를 청해보다 호정이 거절하자 웃으며 떠나간다. 이렇듯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세 사람은 각자의 길을 떠난다. 하지만 세 사람이 선택한 삶은 불투명해 보인다. 세 사람이 그동안 보여 주었던 배타적인 인간관계를 극복하지 않는 한 어느 곳에서 누구와 함께 하더라도 똑같은 현실이 되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이 뿌리내렸던 가족과 그 근거지를 벗어나더라도 삶이 지속되는 한 또 다른 인간관계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개방적인 섹슈얼리티에 대한 솔직함만으로 삶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영작과 호정과 병한에게 가족이라는 인간관계는 족쇄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세 사람은 또 다른 족쇄를 차고 살아가야 한다. 솔직함이라는 자기에의 배려와 인간관계에 있어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서로 상생하게 될 때 진정한 삶의 오르가즘에 도달하게 되지 않을까.
4. 새로운 가족의 도상학을 위하여
현실이 너무나도 암울하고 냉혹하다 할지라도,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임을 당하더라도 여전히 지상의 거처를 비추고 있는 태양처럼 언제나 그렇게 존재하기를 바라는 것이 가족이며 또한 영화가 아니겠는가. 관객은 영화가 현실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갈증을 채워 줄 영화에 대한 목마름은 더해 만 간다. 삶에 지친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어미의 자궁 속 같은 어둠 속에 앉아 빛으로 그린 그림을 통해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되새기게 된다.
전쟁과 분단이라는 비극의 역사 속에 잃어버린 뿌리를 찾기 위해 애쓰는 가족이 있는가 하면,가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가족이 있다. 이러한 양극단의 가족 사이에서 전개되는 임상수의 영화는 가능성과 위험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감독은 땅 속 깊이 잠자고 있던 억울한 죽음을 끄집어내어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고 단절된 가족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휴머니즘의 문제를 제기하면서도,한편으로는 영화의 긴장감과 무게감을 떨어뜨리는 섹슈얼리티라는 코드를 과도하게 사용함으로써 영화의 의미와 재미를 적절히 조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의 영화는 휴머니즘과 섹슈얼리티라는 각기 특성과 존재방식이 다른 세계를 오가며 좌충우돌한다.
이제 임상수의 영화는 비극의 역사가 만들어 낸 단절된 가족과 가족 구성원의 성적 욕망에 의해 분열된 가족의 모습을 들춰내는 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그러한 현상의 기저에 깔린 본질을 명확히 인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역사로부터 단절된 가족의 뿌리 찾기는 올바른 역사 인식과 실천력을 갖추어야 하며,섹슈얼리티는 기본적으로 욕망의 전유물이 아닌 나와 타자와의 인간관계라는 조건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랬을 때 감정의 과잉상태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는 투명성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임상수가 보여 준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감정의 과잉상태에서 질척거리고 있다. 그렇게 흘러 넘치는 감정은 가족에게로 스며들지 못하고 타인에게 쏟아지며 위태로운 곡예를 펼친다. 그리고는 익사 당한다.
어쩌면 임상수는 오늘날 가족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현실을 영화라는 공간 속으로 불러들여 각기 다른 처지와 그에 따른 주장을 펼칠 수 있는 계기를 통해, 관객과 감독 자신에게 가족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우리의 사회 현실에서 가족의 문제는 카타르시스를 통해 해결 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있다. 현실적인 대안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물론 임상수의 영화는 가족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영화를 통해 평등한 인간관계를 담보할 수 있는 가족의 형태에 대한 논의는 진행시킬 수 있을 것이다. <바람난 가족>은 남성의 횡포에 대한 여성의 분노를 섹슈얼리티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여성의 자기중심적이고 몰염치한 행동은 그동안 지배와 피지배 구도 속에 고착된 가족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뒤바뀐 설정이다. 이것은 그동안 유지되어 왔던 가족의 구도를 전복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임상수가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가족을 통해 쏟아내는 전언은 그 내용과 방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국 새로운 가족의 도상학을 위한 출발점이 되어 줄 것이다.
<심사평>
30여 편의 글을 읽는 동안 내내 즐거웠다. 예년에 비해 비평적 안목과 글쓰기가 한결 심화되어 있었고 열정 또한 뜨거웠다. 꼼꼼하게 다시 읽은 글이 14편이었고,세 번째 읽은 것도 7편에 이르렀는데,대부분이 수준급이었다. 그런데도 한 편만을 선정해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지만,영화 글쓰기에 관한 담론의 장이 이처럼 비약적으로 성숙해졌다는,따라서 영화비평의 르네상스가 도래하고 있다는 설레는 마음으로 자위하면서 거듭 읽기를 반복했다.
박지숙의 '새로운 가족의 도상학을 위하여-임상수의 '바람난 가족''은 그처럼 화려한 꽃동산 한쪽에 담담하면서도 청초한 자태로 서 있었다. 삶에서 우러나온 육성이 텍스트에 흩뿌려져 있는 가능태들을 담백하면서도 물 흐르듯이 갈무리하고 있었다. 이론은 비평의 원리이자 여건이고 비평이 해석적 실천이라면,장황한 이론에 포획되거나 현란한 수사에 유혹당하기보다는 소박하지만 체화된 글쓰기를 통해 내면의 온후한 공력을 환기시키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박선영의 '살인의 추억'과 이송이의 '과잉과 부재의 미학'. 그리고 공진희의 '생의 절정,유혹하기' 등도 같은 관점에서 뛰어난 글이었다. 반면에 이재한의 '질투는 나의 힘'과 이도연의 '차이와 반복',김희진의 '유령과 함께 거주하기' 등은 정확한 방법론적 틀과 치밀한 분석 모두에서 탁월한 평문이었으며,김미경의 '2003 스캔들'은 새로운 비평적 성찰이 돋보였다.
이들 중 어느 글을 당선작으로 추천해도 무방했을 것이다. 모쪼록 모두의 정진을 바라마지 않는다./영화평론가·중앙대 교수
<당선소감>
삶을 떠난 글쓰기는 언어의 유희에 지나지 않음을 저에게 가르쳐 주신 사랑하는 부모님께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바칩니다. 이 자리를 빌려 언제나 믿음을 가지고 나의 심장이 녹슬지 않도록 갈고 닦아준 화연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절망에 쌓여있던 고등학교 시절 영화가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해 주었듯이,이제 영화에 대한 나의 글쓰기가 누군가의 절망을 끌어안을 수 있는 작업이 되기를 바랍니다.' 만인이 자유로울 때 내가 자유이다'라고 한 시인 김남주의 말을 떠올리며,그렇게 이 땅에서의 자유로운 삶을 위해 애쓰는 모든 이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새로운 세상은 형이상학적인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두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 위에 있음을,또한 굴종과 모욕의 삶을 살아가는 소수자의 삶 속에 세워져야 하겠지요. 이러한 삶을 두루 살피는 영화를 기대하며 나눔의 삶을 실천하는 글쓰기에 정진하렵니다.
△1968년 전남 순천 출생 △1990년 순천대 축산학과 졸업 △2000년 경일대 산업대학원 사진영상학과 졸업 △2002년 제4회 사진비평상 평론부문,제5회 좋은 방송을 위한 시민의 비평상 수상 등.
추천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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