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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장
댓글 0건 조회 3,887회 작성일 03-01-04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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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소설의 심상지리와 병리적 개인의식의 현상학

김영찬



1. 한국의 근대와 김승옥 소설의 현재성

김승옥은 흔히 가장 ‘60년대적’인 작가로 일컬어진다. 그것은 김승옥이 그의 소설을 통해 1960년대 시대정신의 한 국면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또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런 측면에서 김승옥의 소설은 1960년대 한국 사회의 일면을 보여주는 징후이면서, 동시에 그 사회를 살아가는 자의식적인 개인의 삶과 의식의 기록이다.

그러나 김승옥 소설의 의미는 단지 ‘60년대적’이라는 수식어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소설이 아직까지도 깊은 울림과 매혹의 근원지로 남아있는 것은, 현재에도 우리가 스스로 물을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질문과 고민의 언저리를 뛰어난 감수성과 문체로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질문이란 물론 한국의 근대를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개인의 자의식과 관련된 것이다. 1960년대 근대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의식과 그것을 통해 비치는 작가 김승옥의 자의식의 경개(景槪)는 모두 우리의 그것과 그리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 김승옥의 소설은 어떤 방식으로든 한국의 근대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근대 시민 주체의 자의식을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으며, 그 지점에서 그의 소설은 ‘1960년대’라는 시대적 경계를 넘어 현재와 공명한다.

이 글의 목적은 김승옥 소설의 그러한 문제 설정을 근대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다시금 헤아려보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이 글이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김승옥 소설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시골/서울’이라는 공간적 토픽이다. 지금까지 많은 논자들은 김승옥의 소설을 관통하는 그러한 토픽에 주목해왔지만, 그것이 갖는 의미는 아직 설득력 있게 밝혀진 바 없다. 시골/서울의 공간적 토픽을 근대화의 문제와 관련지어 전근대와 근대의 이분법적 대립으로 의미화하는 한편, 전근대(시골)에서 근대(서울)로의 이동을 도시로 대표되는 근대세계로의 입사(入社)를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그로 인한 개인의 갈등 양상과 개인의식의 특성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이 그간 이 문제를 다루었던 대부분 논의의 기본 관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무엇보다도 김승옥의 소설에서 ‘시골/서울’이라는 공간적 토픽은 단순한 대립관계에 의해 규정될 수 없다. 특히 김승옥의 소설에 나타나는 시골을 순수 혹은 재생의 공간으로, 반면 서울을 위악의 공간으로 규정하는 것이나 나아가 그것을 전근대/근대의 대립으로 바라보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시각이다. 김승옥의 소설에서 나타나듯 서울을 모방하거나 도시에 의해 침범당한 시골의 모습을, 시골을 식민화하면서 진행되는 근대화의 국면을 반영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크게 다르지 않은 전제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김승옥의 소설에서 시골/서울이라는 토픽의 의미는 단순히 사회경제적인 ‘근대화’라는 표지에 의해 규정되고 계열화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회경제적 근대화를 포함하여 1960년대 한국의 근대를 구성하는 여러 갈래의 역사적·사회적 하위텍스트가 응축되고 펼쳐지는 하나의 형식이다. 그런 측면에서 김승옥 소설에서 시골/서울이라는 토픽에는 이미 1960년대 한국의 근대가 안고 있는 모순적인 실존조건과의 관계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시골과 서울에 대한 소설 속 인물들의 의식과 태도는 김승옥이 그 근대를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또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보여주는 척도라 할 만하다. 따라서 시골/서울의 토픽을 핵심적인 구성원리로 하여 펼쳐지는 김승옥의 소설은 그것을 통해 한국적 근대의 모순적인 실존조건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자의식적인 개인의 존재방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김승옥 소설의 핵심적인 문제 설정은 1960년대 한국적 근대의 특이성과 관련하여 다시 재구성될 수 있을 것이며, 그의 소설에서 키워드로 논의되는 ‘자기세계’의 의미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러한 작업은 물론 근대사회에서 지식인의 존재방식을 다시금 문제삼는 질문의 형식이 될 것이다.

2. 두개의 시골, 불안과 욕망

김승옥 소설의 주인공은 대부분 시골에서 상경하여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거나 졸업하고 도시생활을 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이 인물들의 이력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시골/서울의 토픽은 그들의 의식 한가운데서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그 중에서도 시골/서울의 토픽이 비교적 표면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소설은 [환상수첩],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무진기행] 등이다. 이 소설들에서 그것은 실제로 시골과 서울을 오가며 겪는 인물의 의식의 전개를 통해 구체화된다. 그렇다면 이 작품들 속에서 토픽의 한 축인 시골은 인물들의 의식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에 대해 그들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이 물음은 단순히 시골이라는 공간적 표상에 대한 것으로만 향하는 것은 아니다. 김승옥 소설에서 ‘시골’은 지리적 공간으로 나타나는 한편, 빈번히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여성인물과 자연의 이미지로 치환되어 표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여성인물과 자연을 표상하는 방식과 그에 대한 주체의 반응양식은 그대로 시골에 대한 주체의 상징적 관계의 특성을 비춰주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김승옥 소설에서 시골에 대한 인식과 반응은 이 두개의 축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김승옥 소설에서 시골의 의미는 흔히 짐작하듯 단순히 태어나 자라난 ‘고향’, 입사(入社)를 위해 그곳을 떠났기에 부채의식을 유발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내밀한 향수를 자극하는 공간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소설에서 시골은 어느 하나로 환원할 수 없는 여러 가닥의 의미망을 안고 있으며, 그에 대한 인물의 반응도 복합적이다. 우선 김승옥 소설의 인물에게, 그가 태어나 자라난 원초적 공간이라는 의미에서 안온함과 위안의 정서를 안겨주는 편안한 공간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떠올리는 시골은 어두운 기억과 결합되어 있다.

[무진기행]에서 서울에서 출세한 뒤 고향인 무진을 찾은 윤희중에게, 무진의 기억은 ‘거꾸러져 있는 나’와 결부되어 있다. 그에게 무진은 “항상 자신을 상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과거의 경험”을 상기시킨다. 즉 무진은 자기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무진이 유발하는 연상이 “머리를 풀어헤친 광녀(狂女)의 냉소”와 “시체가 썩어가는 듯한” 냄새처럼 광기와 죽음의 이미지로 이어지는 것이나, 실제로 무진에서 약을 먹고 자살한 여자를 “내 몸의 일부”처럼 여기게 되는 것도 자기상실 혹은 자기소멸의 공간으로서의 무진의 의미를 강화하는 대목이다. “무진에서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쩌고 하는 게 아니라 어떤 생각들이 나의 밖에서 제멋대로 이루어진 뒤 나의 머릿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듯했었다”는 화자의 진술 역시 이러한 무진의 의미망과 결부되어 있는 진술이다. 무진에서 ‘나’는 생각하는 주체가 아니라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생각이 ‘밀고 들어오는’ 텅빈 장소가 된다는 것, 이는 주인공에게 시골이 자기상실의 공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승옥 소설에서 시골의 자연이 돌연 공포의 대상으로 나타나는 순간도 이 자기상실 혹은 자기소멸에 대한 공포와 관련되어 있다. 그의 소설에서 자연은 어느 순간 주체를 위협하는 낯선 사물(事物)로, 아니면 죽음을 환기시키고 소멸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 돌변한다.

[무진기행]에서 무진 시절의 ‘나’는 나무를 ‘시커멓게 웅크린 채’ 금방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 듯한 위협적인 사물로 경험하며, [환상수첩]에서 파도 소리는 ‘생명이 물러가는’ ‘무서운 소리’로 받아들여진다. 이처럼 자연은 ‘나’를 위협하며 달려들면서 식은땀을 흐르게 하고 몸을 가눌 수 없게 만드는 낯선 공포의 대상이다. 이렇게 자연을 공포의 대상으로 경험하는 순간은 주체성의 형식으로서 사물에 대한 이성적 판단과 성찰의 거리가 무화(無化)되는 순간이며, 사물이 주체의 우위에 서게 되는 순간이다. 이는 주체의 자기상실의 국면에 그대로 대응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공포스런 자연 이미지에서 은밀히 작동하고 있는 것은 시골을 자기상실 혹은 자기소멸의 공간으로, 그래서 자기를 정립하고 보존하기 위해서는 벗어나야만 하는 공간으로 인지하는 무의식이다. 비록 자연이 공포의 대상으로까지 나아가지는 않더라도, 김승옥 소설에서 자연은 흔히 온전한 ‘주체’와는 대립되는 이성 이전의 감각의 세계, “영원의 토대를 장만할 수” 없는, ‘자기’의 패배를 안겨주는 세계로 의미화된다.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에서처럼 그것은 이성적 판단보다는 “숲속의 짐승들”처럼 “세상을 느끼고만 싶어하는” “감각만으로” 살아가는 삶을 떠안기고, 그래서 “항상 종말엔 패배를 느끼”게 만드는 그런 대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주인공들이 이미 벗어나 있는 시골은 자기세계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나’에게는 하나의 온전한 주체로 설 수 있기 위해서는 벗어날 수밖에 없었던 공간으로 나타난다. 서울의 위악적인 생활에 지쳐 귀향한 [환상수첩]의 ‘나’가 시골에서 결국 자살하는 것도 단순히 서울과 별다르지 않은 시골에서의 생활에서 “도피의 어리석음”을 깨달은 데서 비롯되는 것만은 아니다. ‘나’(이정우)가 쓴 수기의 끝에서, ‘나’는 “고향의 친구라는 어휘가 주는 어감”에 가장 충실한, 눈이 멀어 자살을 꿈꾸는 친구 형기가 순천만의 염전에서 미쳐서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기 힘든 말을 계속해서 웅얼”거리는 것을 보며 비명을 지른다. 여기서도 이미 ‘나’의 고향은 ‘자기’의 상실(이는 순수한 고향의 이미지와 연계되어 있는 형기가 눈이 멀어 있다는 것과 미치게 된다는 것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 암시되고, 그것은 ‘나’에게 비명을 지르게 하는 하나의 공포다. 따라서 서울생활의 상처를 씻고 재생하여 서울로 다시 떠나지 못한 ‘나’가 시골에서 “새로운 생존방법”을 찾지 못하고 결국 자살하게 된다는 것은 공포스럽게 다가오는 자기소멸의 공간으로서 시골의 의미를 스스로 연출하고 확인하는 행위다. 이는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내야 한다는” 의지는 오히려 서울의 위악(僞惡)을 모방하는 수영에게서 나오고 있다는 데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물론 그것이 다는 아니다. 인물들의 의식 속에서 시골은 분명 서울생활의 상처를 위안해주리라 기대하거나 그리워하는 공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가령 시골은 [무진기행]에서처럼 서울생활에 비틀거릴 때 찾게 되는, “관념 속에서 그리고 있는 어느 아늑한 장소”이며,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에서처럼 서울에서 입은 누이의 상처를 핥아주는 곳이고, [환상수첩]에서처럼 위악적인 서울생활과는 무언가 다른 희망이 있으리라고 기대하게 되는 곳이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시골은 분명 재생의 공간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재하는 공간이다. 현실 속에서 이미 그러한 재생은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고, 어떤 ‘아늑한 장소’로서 시골은 현실이 아닌 관념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무진기행]의 ‘나’가 그리고 있는 무진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는” 관념 속의 공간일 뿐이며, 서울을 “떠난다고 해도 이미 갈 곳은 없다”고 인식하는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의 ‘나’의 의식 속에도 시골은 이미 돌아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시골에서 ‘새로운 생존방법’에 대한 희망을 찾으려 했던 [환상수첩]의 ‘나’의 기대 역시 환멸과 죽음으로 귀결된다.

이렇게 본다면, 인물들의 의식 속에 나타나는 위안과 재생의 공간으로서 시골은 마치 잡으려고 애쓰지만 잡을 수 없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시골의 의미는 언뜻 시골/서울의 토픽과는 무관해 보이는 [생명연습]에서 ‘생명’의 이미지와 결부되어 있는 자연 이미지와 은연중 공명한다.

‘나’의 유년을 장식했던 ‘화사한 왕국’을 가득 채우는 평화로운 자연 이미지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의식하려고 애쓰”면서 찾아 헤매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그 평화로운 자연이 유년의 삶 속에도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듯이, ‘아늑한 장소’로서 시골은 이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부재를 일깨움으로써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김승옥 소설에서 시골은 두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자기소멸의 공포를 환기시키는 공간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서울생활의 상처를 위안받고자 안타깝게 찾아 헤매지만 처음부터 이미 존재하지 않는 환상 속의 공간이다. 그렇게 본다면, 김승옥 소설에서 시골은 불안의 대상인 동시에 부재하는 욕망의 대상이다. 즉 시골은 타자와의 경계가 흐려지거나 주체로서의 ‘자기’의 존립을 위협하는 미분화된 공간으로서 불안을 야기하는 공간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그 불안의 장소는 주체의 은밀한 욕망이 향하고 있는 곳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시골의 의미망은 언뜻 보기에 모순되고 분열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모순과 분열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 그것은 김승옥 소설에서 그려지는 이른바 ‘자기세계’의 이면에 존재하는 의식적·무의식적인 심리적 토대로 작용하면서 그 자기세계의 특이한 성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3. 강박신경증적 가학(加虐)과 가면의 삶김승옥의 인물들에게, 시골은 그처럼 불안을 환기시키는 대상인 동시에 불가능한 욕망이 향하는 대상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에 어떻게 대응하는가? 이는 단지 시골에 대해서만 해당되는 물음이 아니다. 그 대응방식은 곧 서울에 대한 인식과 태도에, 나아가 1960년대의 근대적 삶에 대한 그것에 그대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김승옥 소설에서 시골은 1차적으로는 하나의 지리적 공간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서울의 가치와 대립되는 여러 가치와 표상들을 집약하고 있는 상징적 공간이기도 하다. 외면적으로는 시골/서울의 토픽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생명연습]과 [건]에서 그 토픽은 유년세계/자기세계라는 대립구도로 변주된다. 이 소설들에서 유년세계는 곧 그 의미구조상 시골이라는 공간적 표상과 동일한 의미연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유년세계라는 시간적 좌표상의 한 지점을 매개로 시골이라는 공간이 포섭하고 있는 의미구조에 수렴되는 대표적인 표상이 바로 여성인물이다.

흔히 근대적 사고 속에서 여성은 근대의 분열적 경험과 대립되는 미분화된 자연의 영역에 위치해 왔듯이, 이는 김승옥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의 소설에서 여성은 성인의 삶 혹은 근대적 삶 이전에 존재하는 미분화된 경험의 영역을 대표하는 형상이다. 위악을 몸에 익히기 전 아이들의 세계가 언제나 여성인물과 결부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피하려고 애쓸 패륜”이나 “그것의 온상을 만들어주는 고독”도 없는, “한 오라기의 죄도 섞여 있지 않은” 비밀의 왕국에서 “생명을 생각”하는 ‘나’는 “누나의 한 손을 꼭 쥐고” 있으며([생명연습]), [건]의 ‘나’의 유년세계에는 “가슴 뛰는 놀이”를 함께 하며 껴안아주었던 미영이와 “뜨거운 이마에 손을 얹어”주면서 빨치산의 시체를 목격한 뒤의 충격과 ‘피로’를 위안해줄 것으로 기대하는 윤희 누나가 있다.

김승옥 소설에서 이러한 여성인물들은 어린 ‘나’의 은밀한 욕망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무엇보다도 이 여성인물들은 갈등과 분열이 없는 미분화된 조화의 세계를 환기시켜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여성인물들이 욕망의 대상이라는 점은 상상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다. 그 점은 어린 ‘나’와 여성인물과의 사이에 항시 성적인 코드가 개입되어 있다는 점에서 뚜렷하다. 그것은 [생명연습]의 ‘나’와 누나와의 관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거기에 은밀하게 숨겨져 있은 것은 ‘나’와 누나와의 근친상간의 코드이지만, 그것은 “한 오라기의 죄도 섞여 있지 않은” ‘평안’과 ‘생명’을 환기시키는 것으로 새삼 강조되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인물은 성장하기 이전의 원초적 공간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인물들이다. 따라서 그들을 향한 욕망은 상징적 질서 이전의 “용궁처럼 신비스러운” 미분화된 원초적 공간을 향한 욕망과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건]에서 분명하게 그려지듯이 어린 ‘나’는 이 ‘신비로운’ 공간에 스스로 “먹칠을 해”버림으로써 그곳을 등진다. [생명연습]에서도 형을 살해하려는 ‘패륜’과 ‘죄악’의 음모를 실행하는 것을 통해 성장하는 과정은 곧 누나와 만들었던 비밀의 왕국을 등지는 과정이다. 그 점에서 이 공간은, 이미 등졌지만 욕망의 시선이 향하는 부재하는 공간으로서의 시골의 의미장 안에 있다. 이는 김승옥의 소설에서 ‘성장’과 탈향(脫鄕)이 거의 동일한 의미로 그려지고 있다는 데서도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무진기행]에서 보듯 “책임도 무책임도 없는” 미분화의 영역에서 개인의 ‘책임’만이 존재하는 곳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의미화되는 서울로의 이동은, 말 그대로 그 자체 이미, 미분화된 원초적 질서를 버리고 상징질서를 내면화하는 성장의 과정과 상동성을 갖는 것이다.

문제는 그 어린 ‘나’가 그 미분화의 공간을 어떤 방식으로 등지는가 하는 것이다. 그 방식의 핵심은 ‘나’가 여성인물을 상상적·실제적으로 희생시키는 것이다. “벌써부터 그런 부탁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듯 윤희 누나를 윤간하려는 형과 그 친구들의 음모에 자발적으로 가담하는 [건]의 ‘나’의 행위는 그러한 대응방식을 집약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음모 실행의 장소가 미영의 빈집이었다는 데서도 드러나듯, 그것은 곧 “용궁처럼 신비스러운 곳”과 얽혀 있는 미영의 기억을 스스로 더럽히려는 충동이기도 하다.

주체가 상징질서 속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상상계적 질서와 연계되어 있는 내적 자연을 억압해야만 하며, 그것이 근대 시민 주체의 운명이다. 아도르노(Adorno)가 말하듯, “그는 자신의 꿈을 지불하는 대가로만 살아남을 수 있다.” 김승옥의 어린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의 꿈을 대가로 지불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김승옥의 소설에서 그러한 시민적 주체 확립의 과정, 즉 성장의 과정은 능동적인 자기계몽의 과정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의지(意志)”에 짓눌린 과잉방어의 산물이다.

여성인물을 희생시킴으로써 상징질서를 내면화하는 어린 ‘나’의 선택이 위악적인 가학(加虐)의 가면을 쓰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한 ‘나’의 가학적인 행동은 [환상수첩]에서 선애에 대한 ‘나’의 태도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된다.…

선애와 성관계를 가진 후 ‘나’는 선애에게 마음과는 달리 그것을 한낱 ‘성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잔인하게 말하여 선애를 울린다. 그 이후 ‘나’는 선애를 사랑하면서도 여자친구를 맞바꾸자는 친구 오영빈의 제안에 동조하여 그에게 넘기고 끝내 자살로 이끌어간다. [건]의 ‘나’의 가학적 행위가 ‘무시무시한 의지’의 공포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과잉의식(儀式)이었듯이, [환상수첩]에서 선애에 대한 이러한 ‘나’의 가학적 행위 역시 서울생활에서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한 과잉방어의 산물이기는 마찬가지다. 이러한 가학이 스스로 욕망하는 여성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여성과 연계되어 있는 순진무구하고 미분화된 공간을 향한 욕망을 스스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수행적(performative)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여성과의 감정적 유대 나아가 그에 대한 욕망의 실현 가능성을 가학적으로 제거하는 행위는 욕망의 대상을 스스로 불가능한 대상으로 만드는 강박신경증적 행위다.

이처럼 욕망의 대상을 가학적으로 부정함으로써 욕망의 충족을 스스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강박적 행위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물론 ‘성장’ 혹은 상징질서의 내면화가 일단 그 대답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기에는 어떤 불안이 개재되어 있다. 그 불안은 ‘나’를 가까스로 유지하게 하는 가면(假面) 밖으로 걸어나가고자 하는 내면의 충동에 대한 방어의 산물이다. [건]에서 ‘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누나, 하고 부르고 싶은 충동”과 성애적 접촉에 대한 충동(“어딘가 조용한 곳으로 날 데리고 가서 나의 뜨거운 이마에 손을 얹어주었으면.”)을 느끼는데, 그것은 빨치산 시체에 대한 공격적인 애도작업(돌팔매질)을 매개로 한 과잉방어를 통해 애써 모방한 어른의 삶에서 퇴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가 “온몸 속에 강하게 남아”있는 그 충동을 억누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환상수첩]에서 ‘나’가 선애를 잔인하게 “육체적으로 정복”하게 되는 계기도 선애가 가면(위악)의 삶과는 다른 ‘진짜’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오는 “무서움”과 “경원심(敬遠心)”이다. 이 공포와 경원심이 그 ‘진짜’를 향하는 ‘나’의 충동을 억압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여성에 대한 ‘나’의 불안은 이곳에서 생겨난다. 그들은 위악의 ‘가면’을 쓰고 가까스로 내면화한 상징적 질서에 적응하고 정착한 ‘나’의 위치를 분열시키고 해체하는 실재(the Real)의 얼룩이기 때문이다. 여성인물에 대한 가해(加害)는 이 주체 분열의 불안을 방어하고 자기를 보존하기 위한 상징적 행위다.

이 지점에서 여성인물에 대한 불안은 주체 소멸의 공간으로서 시골에 대한 불안과 교차한다. 시골이 주체 소멸의 공포를 야기한다 할 때, 그 시골의 이미지는 이미 현재 위치에서 구성된 것이다. 이러한 시골의 이미지는 역으로 서울살이가 상징하는 근대적 삶 속에서의 주체 위치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욕망의 사후적 산물인 것이다. 여성인물에 대한 태도는 이러한 시골에 대한 태도에 정확히 대응한다. 타자(여성)를 가해함으로써 그에 대한 욕망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행위는 가면을 쓰고서라도 상징질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주체의 자기보존의 길이라는 인식을 스스로 확인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강박신경증 환자에게 욕망의 대상은 불가능한 대상이 되었을 경우에만 다시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듯이, 시골(혹은 여성)에 대한 안타까운 욕망은 스스로 그것을 불가능한 기표로 만들어놓은 후에야 다시 생산된다. [환상수첩]의 ‘나’가 스스로 등지고 떠나온 그 공간(시골)에 대해 “막연한 필요성 때문에 도망하는 듯한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처럼, [건]의 ‘나’가 유년의 원초적 공간을 등지면서 느끼는 것 역시 일종의 “섭섭함”이다. 서로 다른 그 두 공간에 대한 ‘현재’의 욕망은 모두 그 안타까움과 섭섭함 속에서 ‘사후적으로’ 생산되는 것일 뿐이다. 여성인물과의 감정적 유대로 채워지는 유년의 원초적 공간, 그리고 시골이라는 지리적 공간은 모두 공통적으로 그것을 등진 후 사후적으로 생산하는 불가능한 욕망이 고정되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원초적 공간으로서 시골은 단순히 전근대의 공간이 아니다. 김승옥 소설의 심상지리(imaginative geography) 속에서, 시골은 서울살이로 상징되는 근대적 삶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투사되는 대상이다. 그것은 환멸스럽지만 어찌 됐든 적응하지 않을 수 없는 서울에서의 근대적 삶을 시민적 주체가 서야 할 공간으로 확인하는 동시에 거기에서 비롯된 죄의식과 불안을 봉합하는 하나의 서사적 장치로 기능하는 것이다.


4. 병리적(病理的) 자의식, 괴물 안에서 살아남는 방법

김승옥 소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1960년대 한국의 근대를 살아가는 시민 주체의 의식의 현상학을 펼쳐 보인다. 이때 시골이라는 지리적 공간의 의미장 안에 배치된 자연과 여성으로 집약되는 타자에 대한 태도는 그 자체로 ‘법’(대타자)에 대한 상징적 관계와 태도를 비추어 보여주는 거울이다. 이때 법 혹은 대타자(the Other)란 물론 1960년대 근대 한국의 상징질서 그 자체와 다른 것이 아니다. 김승옥이 그려 보이는 인물들의 ‘자기세계’는 이 상징질서 속에서 자기를 보존하기 위한 일종의 자기조작적 “생존방법”의 산물이다. 그 ‘자기세계’의 실체 속에는 근대적 삶과 그 안에서의 주체 위치에 대한 김승옥적 인물들의 인식과 태도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자기세계’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생명연습]에서 ‘나’는 ‘자기세계’는 “분명히 남의 세계와는 다른 것으로서 마치 함락시킬 수 없는 성곽과도 같은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때 자기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자질은 ‘분명히 남의 세계와는 다른’ 어떤 지점이다. 즉 자기세계는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닌 나만이 지니는 어떤 것이며 ‘기막힌’ 과정을 거쳐서만 형성되는 무엇이다.

그것은 ‘번득이는 철편(鐵片)’과 ‘눈뜰 수 없는 현기증’, ‘끈덕진 살의’와 ‘마음을 쥐어짜는 회오(悔悟)’와 같은 복합적인 감정의 격랑을 겪고서야 만들어진다. 그 과정을 통과하여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내부”를 “무관심한 표정으로 가려버리는 법”([환상수첩])을 터득했을 때 비로소 자기세계는 완성되는 것이다. 즉, 자기세계는 자기가 지닌 본원적인 감정 혹은 본래의 ‘나’를 은폐하거나 제거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현기증과 살의, 회오(悔悟)는 그 은폐와 제거가 야기하는 갈등과 쟁투의 부산물이며, 자기세계는 그것을 이겨내고 마침내 ‘무관심한 표정’으로 조작된 ‘자기’를 체화(體化)했을 때 얻어진다. 따라서 그 자기세계의 ‘자기’는 조작된 ‘자기’이자 본래의 자기를 부정하는 가면(假面)이라 할 수 있다. 그랬을 때만이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분명히 남과는 다른’ 어떤 자아의 성곽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김승옥의 인물들에게 있어 어떤 조작을 통해서, 혹은 가면을 쓰고서라도 ‘자기’를 세우려는 의지는 하나의 강박처럼 작용하고 있다. 그러한 강박적인 욕망의 이면에는 분명 ‘자기’에 대한 집착을 강박적인 것으로 만드는 불안이 은폐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타자에 대한 가해(加害)가 애써 만들어낸 이 조작된 자기가 해체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대한 과잉방어이듯이, 그 자기보존의 욕망이 역으로 시골에 대한 불안을 생산하듯이, 이 자기세계는 불안을 생산하고 동시에 억압하면서 존재하는 세계다. 문제는 그 조작된 ‘자기’ 혹은 ‘자기세계’를 만들어내는 원천 역시 모종의 불안이라는 점이다. 그 불안이 비롯되는 지점은 서울, 바로 그곳이다. [서울 1964년 겨울]에서 다음과 같은 ‘나’의 진술은 그 불안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를 역으로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를테면 낮엔 그저 스쳐지나가던 모든 것이 밤이 되면 내 시선 앞에서 자기들의 벌거벗은 몸을 송두리째 드러내고 쩔쩔맨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의미가 없는 일일까요? 그런, 사물을 바라보며 즐거워한다는 일이 말입니다.”

이 진술에는 말하면서도 말하지 않는 여백이 있다. 여기서 ‘나’가 침묵하고 있는 그것은 바로 서울(도시)에 대한 불안이다. ‘나’는 “모든 것이 밤이 되면 내 시선 앞에서 자기들의 벌거벗은 몸을 송두리째 드러내고 쩔쩔”맬 때 즐거워하고 ‘의미’를 발견한다. 밤이 되면 ‘나’는 “사물의 틈에 끼어서가 아니라 사물을 멀리 두고 바라보게” 된다. 이렇듯 도시의 사물을 자신의 시선 아래 굴복시키고 통제할 수 있는 때는 밤뿐이고, 이때에야 비로소 “모든 것에서 해방된” 감정을 느낀다. 아니,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느낀다.” 이는 역으로 말하면 ‘나’에게, 밤과는 달리 모든 것이 분명히 드러나는 환한 대낮의 도시는 자신을 억압하면서 거리를 두고 시선의 권력으로 통제할 수 없는 사물(das Ding)로 다가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차나 한 잔]에서 표현되는 것처럼, 서울은 개인이 통제할 수 없고 정체를 알 수도 없는 어떤 “회색빛 괴물”인 것이다. 이때 서울은 개인의 지각의 한계를 벗어나는 어떤 괴물 같은 전체(tout)다. 불안은 바로 그 괴물에 짓눌려 자아의 경계를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렇듯 개인의 지각의 한계를 넘어서는 전체에 대한 불안의 원천이 비단 서울(도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 [건]에서 그려지는, “적갈색과 자주색이 엉켜서 꺼끌꺼끌한 촉감의 피부를 가진 괴물”의 존재를 상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시무시한 의지(意志)”를 환기시키는 그것은 빨치산의 시체를 응시하는 벽돌더미의 이미지이지만, 거기에는 개인이 알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6·25로 대표되는 역사의 집단적 폭력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투사되어 있다. 전쟁의 시간은 개인의 의지와 지각을 무력하게 만들고 개인을 소멸시키는 어떤 집단적 역사의 전체성이 행사되는 시간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 시간은 자아의 지각을 압도하는 어떤 괴물 같은 전체성으로서 서울이라는 공간과 의미론적으로 겹쳐진다. 불안은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공간이 겹쳐지는 이 지점에서 과잉결정(overdetermination)된 것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이때 그 불안의 원천을 단지 경제적 근대화에서 비롯된 개인의 소외에서 찾는 것은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 불안은 6·25에서 경제개발로 이어지는 한국적 근대성의 경험에 휘말려 영문도 모르고 수동적으로 떼밀려가는 무기력한 개인의 정서구조가 그대로 재연(再演)된 것이다. 그것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개인을 압도하고, 그래서 자아의 지각을 혼란시키고 자아와 대상의 경계를 뚜렷이 세우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비가시적인 총체로서의 근대에 대한 불안이다. 따라서 그 불안은 이질적이고 낯선, 그리고 폭력적인 전체의 사물적 의지 속에서 스스로 어디로 휩쓸려가는지도 모른 채 자신의 존재감각을 위협받는 상황, 즉 6·25와 인구이동, 경제개발의 혼란 등으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한국적 근대의 경험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정체를 알 수 없고 공포스러운 괴물 같은 집단의 ‘의지’로 다가왔던 6·25의 경험구조가 개인을 압도하는 괴물 같은 서울의 이미지 속에서 겹쳐지고 반복된다는 것에서 우리는 과잉결정된 근대의 불안을 발견한다. 6·25의 트라우마(trauma)가 징후로 회귀하고 반복되는 그 지점에 1960년대 근대는 존재하는 것이다.

[무진기행]의 서두를 장식하는 안개의 이미지가 환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근대의 불안이다. 뚜렷이 존재하면서도 “손으로 잡을 수 없”고, 사람들을 에워싸지만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 없는”, 모든 것의 경계를 흐려버리고 개인의 지각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안개의 이미지에는 앞서 밝힌 근대에 대한 불안이 그대로 투사되어 있는 것이다. [무진기행]은 비록 “심한 부끄러움”에 잠시 얼굴을 붉히면서도 ‘조작된 자기’로 살아가는 자기기만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불안을 회피하고 ‘안개’를 헤쳐가는 이야기다. 근대의 불안과 그에서 비롯된 불안정한 ‘자기’의 위기를 복제하고 그것을 다시 봉합하는 공간으로서 시골의 의미는 이곳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되는 셈이다.

이렇게 볼 때, [서울 1964년 겨울]에서 다른 사람이 아닌 ‘나’만이 알고 소유할 수 있는 쇄말적인 사물에 집착하는 ‘나’와 김의 모습이 감추고 있는 의미는 분명히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이러한 불안에 맞서 그 괴물 같은 서울에서, 그리고 알 수 없는 역사의 의지 속에서 ‘나’만이 소유하고 지배할 수 있는 사물을 찾아냄으로써 대상의 재현(representation)을 통해 자아의 경계를 세우려는 강박적인 노력이다. 무릇 대상에 대한 명료하고 변별적인 표상(재현)은 세계와 자아를 구획하는 경계선을 세우는 데 필수적이며, 그것을 통해서만 자아는 자율적인 실체로서 구성될 수 있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자아를 압도하는 괴물과 같은 전체성은 그러한 재현의 위기를 초래하는 것이며, ‘나’는 알 수 없고 소유할 수 없는 전체를 회피하고 ‘나’만이 알고 있고 재현할 수 있는 쇄말적인 세부를 열거하고 전유함으로써 그러한 재현의 위기를 허구적으로 봉합하고 수동적으로 자율적인 주체의 경계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때 세워진 ‘자기’는 불안과 위기를 은폐하면서 회피하는, 그것을 통해서만 가능한 조작된 ‘자기’가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김승옥적 인물들의 ‘자기세계’는 불안의 징후이자 동시에 그 불안을 봉합하려는 과잉방어의 산물이다. 달리 말해, 그것은 곧 자기 존재감을 위협받는 불안과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 내적 자연을 억압하고 가면의 삶을 선택하는 자기소외를 통해 애써 근대에 적응하려는 자의식적인 개인의 자기보존의 제스처다. 자기 소멸의 공포를 야기하는 시골/여성에 대한 불안은 근대에 대한 불안이 투사된 것이며, 그들은 그 시골/여성을 스스로 불가능한 욕망의 대상으로 만들거나 가학함으로써 근대의 불안을 봉합하고 상징질서를 내면화한다. 문제는 바로 이곳에 있다. 왜냐하면 시골/여성은 다른 한편으로 ‘자기’ 안의 순수한 내적 자연의 표상이며, 또한 냉혹하고 차가운 근대적 상징질서 바깥을 향하는 은밀한 욕망의 시선이 고정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시골과 여성에 대한 부정과 가학은 곧 자기 자신을 겨냥하는 자학(自虐)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그들은 원래의 자기를 억압하고 자해(自害)하며 자기소외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근대의 삶에 적응해가는 셈이다.

김승옥의 인물들은 그렇게 근대를 앓는다. 그들의 근대적 정체성의 한가운데에는 혼란과 자기분열, 자기소외와 자기기만, 자학과 자기연민 등 복잡미묘하고 다층적인 감정의 혼란과 뒤섞임이 있고,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병리적(病理的) 개인들이다. 이처럼 한국의 근대성의 경험이 야기하는 불안과 공포를 회피하면서 근대적 상징질서라는 대타자의 호명에 순응적으로 이끌려가는 그 지점에서, 그러한 병리성(病理性)은 개인주의적인 근대 시민 주체의 정체성의 한가운데서 그것을 완결시키는 외상적(外傷的) 중핵으로 자리잡는 것이다. 김승옥 소설의 문제성은 한국의 근대를 살아가는 그러한 근대 시민 주체의 병리적 자의식을 뛰어난 감수성으로 포착한 데 있다.


5. 불편한 자기세계와 세상의 길

이 지점에서 문제는 다시 작가 김승옥에게로 돌아온다. 그는 그러한 인물들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

김승옥은 어디선가 자기 소설은 윗세대에 대한 비판으로 쓴 것이라는 발언을 한 바 있다. 그럼으로써 그는 자신의 소설이 이른바 4·19 세대의 전세대에 속하는 전후세대의 부정적인 삶과 의식에 대한 비판적 보고서로 읽히기를 의도했던 셈이다. 그러나 김승옥 소설의 진정한 의미는 오히려 겉으로 내세우는 그러한 작의(作意)에서 벗어난 다른 곳에 있다. 가령 [무진기행]의 창작 모티프가, 어려울 때면 시골을 찾는 자신의 심리와 윗세대의 부정적인 형상을 결합시켜 본 데 있다는 작가의 진술을 굳이 참조하지 않더라도, 김승옥의 거의 모든 소설에서 나타나는 인물들의 부정적인 형상에는 작가 자신의 자화상이 항시 겹쳐진다. 그의 소설 곳곳에서 돌출하는, 공감과 정서적 환기력을 이끌어내는 자기연민의 정서는 거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요컨대 김승옥의 소설에는 1960년대 한국의 근대를 경험하고 살아가는, 작가 자신을 포함한 4·19 세대의 자기의식이 스며 있는 것이다. 김승옥이 그의 인물들을 통해 그려내는 병리적 자의식을, 한국의 근대를 살아가는 또 그 질서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작가 자신의 불편한 자의식의 투사로 볼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달리 말한다면, 김승옥 소설의 인물들의 병리적 자의식은 1960년대 한국의 근대를 살아가는 자기 자신의 혼란과 동요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며, 개인주의적 의식을 통해 형성된 자기 자신의 근대적 정체성 내부에 웅크리고 있는 외상적(外傷的) 얼룩이다. 김승옥은 그렇게 스스로 자기 내부의 부정성을 우회적으로 의식화한다. 그렇게 김승옥이 의식화하는 병리적 자의식은 버먼(Marshall Berman)이 저개발의 모더니즘의 특징이라고 말했던 것, 즉 격렬한 자기혐오와 자조로 뒤범벅되어 있는 ‘불편한 자기세계’의 한국적 판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승옥은 그 ‘불편한 자기세계’를 객관화하고 의식적인 비판의 무대로 올리지 않는다. 그가 택하고 있는 전략은 오히려 인물들의 병리적 자의식을 그저 거리를 두고 응시하면서 거기에 자기 자신의 그것을 슬그머니 겹쳐놓는 것이다. 김승옥 소설의 공감의 폭과 정서적 환기력은 상당 부분 그러한 미적 전략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바깥으로 걸어나가지 않는 그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도르노(Adorno)에 따르면,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사회 구성원에게 성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어린아이로 남을 것인가 하는 치욕적인 양자택일을 강요하며, 그것은 지식인이 처한 심각한 딜레마이기도 하다. 김승옥의 소설은 성인의 길로 순응적으로 이끌리면서도 못내 그러한 딜레마를 떠안고 가는 내면의 동요와 자기분열을 고통스럽게 응시하면서 혼란스럽고 폭력적인 괴물 같은 근대를 앓았던 근대 지식인의 초상을 보여준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세상의 길’(프랑코 모레티)을 따라가는 폐쇄적인 개인의 내면 바깥으로 걸어나가지 않은 그의 한계야 그대로 남는 것이지만, 우리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이렇게 묻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근대 지식인이 맞닥뜨리는 그 딜레마에서, 나아가 작가 김승옥이 갇혀 있는 아픔과 한계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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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박제된 평가’ 비판적 극복 돋보여


올해 경향 신춘문예 평론부문에는 이례적이다 싶을 정도로 많은 62편이 응모되었다. 그러나 응모작들의 상당수는 대학 국문학과나 대학원에서의 기말리포트 수준을 크게 넘지 못하고 있다. 대상작품에 대한 해설의 수준에 가까스로 도달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대강 10여편의 응모작이 눈에 들었으며 강경석의 ‘백민석, 무중력 실험실의 매니멀’과 김영찬의 ‘김승옥 소설의 심상지리와 병리적 개인의식의 현상학’, 그리고 김진아의 ‘식탁 위의 성정치, 불륜의 형식’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세 편 모두 당선작으로 손색 없는 수작들이었다.
‘백민석, 무중력 실험실의 매니멀’은 대상작가와의 동세대적 공감이 짙게 깔린 비평으로 백민석의 문제작 ‘목화밭 엽기전’을 일반적인 성숙의 서사와 하위-충동 서사를 양극점으로 하는 타원구조를 지닌 소설로 보는 독특한 관점을 보기 드물게 자신감과 생동감이 넘치는 비평문체 속에 담아냄으로써 신세대 문학에 대한 적극적 해명과 옹호를 시도했다.
‘김승옥 소설의 심상지리와 병리적 개인의식의 현상학’은 60년대 작가 김승옥을 2000년대에 다시 호출해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의 문제를 동요와 자기분열 속에서 혼란스럽고 폭력적인 괴물같은 근대를 앓고 있는 한국의 근대인 일반의 문제로 성공적으로 되살려내고 있다. 한편 ‘식탁위의 성정치, 불륜의 형식’은 당대 여성작가들의 작품들을 넓게 섭렵하면서 식욕과 성욕으로부터 소외되어온 여성 현실을 통해 여성성이 어떻게 가부장적 가족중심성 위에서 구축되어 왔는가, 또 그 현실에 대해 여성의 몸이 어떻게 공모하거나 저항하는가를 풍부하게 규명함으로써 우리 시대 페미니즘 비평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비평이다.
이 중에서 당선작으로 김영찬의 ‘김승옥 소설의 심상지리와 병리적 개인의식의 현상학’을 선택했다. 패기나 발랄함에서는 다른 두 편에 비해 조금 덜하지만 김승옥이라는 60년대 작가에 대한 박제화된 평가를 비판적으로 극복하여 그를 다시 현재의 중심적 문제의 하나로 호출해내는 문학사적 감각을 높이 산 결과다. 현학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외국이론을 생경하게 드러내는 대신 그것들을 자신의 비평언어로 소화하는 노력을 해 줄 것을 당부하면서 그의 비평가로서의 앞날에 축하와 격려를 보낸다.
강경석의 ‘백민석, …’의 경우 이를테면 전(傳)을 전(殿)으로 치환하는 등의 유치한 자의성이나 생경한 외래어의 노출 등을 포함해서 전반적으로 자신에게 쏟아질 것 같은 비평적 속도에 완급을 부여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았고, 김진아의 ‘식탁 위의…’의 경우 너무 많은 작품들을 끌어오는 대신 한 두 작품에 대해서라도 조금 더 깊은 비평적 조명을 가하는 ‘문학내적 작업’을 우선 중심에 두고 글을 펼쳐나갔다면 훨씬 더 좋은 평론이 나왔으리라 생각된다. 이 두 편 역시 거의 당선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좋은 평론들임에는 이론이 없다. 이들을 이대로 다시 만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 평단의 불행이 될 것이다.
〈김병익 (사진 왼쪽·문학평론가)/김명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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