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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대한매일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중복 투고로 취소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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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장
댓글 0건 조회 5,423회 작성일 03-01-05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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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저녁

오재원
  


아버지는 알테미아가 든 실린더를 다시 손에 들었다. 자정이 넘어선 이후, 일곱 번째였다. 나는 막 찰흙을 떼어내려던 손을 멈추고 아버지 등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버지의 등은 지팡이를 짚고 있는데도 심하게 굽어 있었다. 두세 걸음쯤 옮겼을까. 아버지의 몸이 점점 낮아지는가 싶더니 금세 바닥으로 주저앉아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실린더의 알테미아를 쏟을까봐 힘을 준 손가락 사이로 위액이 흘러내렸다. 아버지는 화장실로 가지 않았다. 두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 수조 쪽으로 갔다. 비틀거리며 겨우 몸을 일으킨 아버지는 검지를 구부려 수조 유리를 톡톡 쳤다. 해마들이 머리를 치켜들고 아버지 쪽으로 몰려들었다. 아버지는 실린더를 기울여 수조 안으로 먹이를 넣어 주었다. 이미 여러 번이나 먹이를 준 탓에 수조 속 물은 탁해질 대로 탁해져 있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개의치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먹이를 다 먹지 않았다고 불평을 했다.

아버지는 쓴 물이 채 가시지 않았을 입을 벌려 수조 유리에 갖다댔다. 유리 너머 해마들이 아버지 입 주변으로 와서 대가리를 주억거렸다. 아버지는 입을 뻐끔거렸고, 가끔은 침묵의 눈빛이 되었다. 아버지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 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마들은 마치 그런 아버지의 말귀를 알아듣기라도 하듯 몸을 일자로 세우고 오도카니 서 있었다. 놈들 중에 한 놈이 긴 주둥이를 내밀고 조금 더 앞으로 다가섰다. 아버지는 그 놈 주위 수조 유리에 손을 얹고 서서히 어루만졌다. 손자국이 뿌연 얼룩을 만들어갔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아버지는 수조에서 마지못해 손을 떼고는 의자로 돌아와 웃옷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얼른 나오려무나. 얼른.

해마 두 놈 중 한 놈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한 것을 알게 된 것은 아버지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서부터였다. 하지만 나는 두 놈 중 어느 놈이 임신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었고 그 놈이 그 놈 같아서 암컷과 수컷을 구별하지도 못했다. 희래의 말로는 벌써 여덟 번째 임신으로 낳은 새끼만도 천 마리가 족히 넘었지만 번번이 한 놈도 건지지 못했다고 했다. 새끼에게 줄 먹이를 구하지 못한 게 그 이유였다. 연구소에서 매번 죽어 나가는 새끼들을 보며 아버지는 무척이나 침통해 했었고, 치어의 먹이인 식물성 플랑크톤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도 했었다고 했다. 사뭇 진지하고 심각하게 설명하는 희래의 표정에도 불구하고 나는 좀체 진지해지지도 심각해지지도 않았었다. 아버지가 연구소 문을 닫으면서 그곳 집기들과 함께 들여온 수조 때문에 좁은 거실이 더욱 좁아졌고 그로 인해 내겐 하루하루 불만만 쌓여갔다. 놈들의 먹이인 알테미아를 부화시키기 위해 밤새도록 켜놓은 불빛 때문에 한밤중에 눈이 부신 것도 못마땅했다. 그런 내가 놈들과 마주하고 앉아 작업이 될 리 만무했다. 게다가 한 시간이 멀다하고 먹지도 않는 알테미아를 계속해서 쏟아 부으며 헛구역질을 해대는 아버지라니.

나는 서랍을 뒤져 담뱃갑을 꺼냈다. 마음을 좀 가라앉힐 요량이었다. 이번 작품이 좋은 평가를 얻게되면 그 보수로 미국에서의생활이 좀 더 편안해질 수 있을 터였다. 이 일이 경력이 되어 어쩌면 빈튼사에서의 견습 생활을 연장시킬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학비를 벌어가며 공부를 더 하는 쪽도 고려해볼 만한 것이고… 나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담배 연기로 도너츠를 만들었다. 도너츠 속으로 위액이 묻은 아버지의 손가락들과 그 손가락들이 쓰다듬고 있는 검은 배가 들어왔다. 아버지는 마치 임신한 여자가 배속의 아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다시 입안에 담배 연기를 가두고 혀끝으로 가운데 구멍을 만들어 허공으로 쏘아 올렸다. 연기는 아버지의 배꼽 부분에서 흩어졌다. 이번엔 해마 쪽으로 방향을 바꿔 조준을 하듯 한쪽 눈을 감았다. 몇 번의 불발이 있었다. 하지만 위치를 잘 잡고 연기를 내뱉자 명중하기 시작했다. 장전하고, 조준하고, 발사하고. 다시 또 장전. 둔한 헤엄질로 흰 산호초 가닥 주변을 천천히 맴돌고 있는 놈이 도너츠 구멍 안으로 들어왔다. 확실히 다른 한 놈보다 배가 불룩 솟아 있었다. 투명한 연겨자 빛의 놈을 처음 대하던 날 받았던 인상에서 더도 덜도 아닌 꼭 그만큼의 낯섦으로 그 놈의 배는 불러 있었다.

나는 담배꽁초를 비벼 끄고 작업대 앞으로 회전의자를 돌려 앉았다. 여전히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거의 완성된 인형에 얼굴 표정만 마무리하면 되는 것이었지만 좀체 맘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일을 맡긴 회사측의 요구대로 표정이 나와주지 않았던 것이다. 온통 찰흙 천지인 책상 위에는 양궁선수의 얼굴이 나를 비웃으며 일그러져 갔다. ‘기술이 생명입니다’라고 멘트를 해야 할 양궁선수는 마치 ’네 기술이 내 생명을 망치고 있다’는 얼굴이 돼 버렸다. 기쁨의 눈물을 흘려야 할 그녀는 아까 낮에 걱정의 말을 흘리던 의사의 입술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나는 인형 입술을 만지며 다시 또 담뱃갑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때 갑자기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화난 얼굴로 말했다. 애한테 안 좋아. 담배 연기는.

나는 담뱃갑을 가지러 가던 손을 멈춰 찰흙덩이를 앞에 갖다 놓았다. 얼굴 선을 다듬으면서 내내 그 안에 들어가야 할 눈과 코와 입 모양을 생각했다. 신경은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졌고, 집중력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눈이 침침해지고 따가웠다. 거기다가 부화장치 불빛은 하필 내 눈 높이에서 반사돼 고개를 들 때마다 짜증이 났다. 인형 옆에 놓인 비행기 티켓까지 내 심사를 뒤틀고 있었다. 낮에 희래가 두고 간 것이었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양쪽 눈을 번갈아 비비다가 벌떡 일어나 아버지를 향해 사납게 소리쳤다.

“아버지, 날이 밝기 시작했어요. 이젠 제발 위층으로 좀 올라가세요.”

아버지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중얼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말을 흘렸다.

“애 낳을 때가 다 되어서 그런지, 뱃가죽이 땅기는 것도 같고 아프….”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아버지는 다시 헛구역질을 했다. 내가 휴지를 내밀었지만 아버지는 받지 않았다. 대신 배를 보라는 눈짓을 했다.



아버지가 구토를 동반한 기억상실증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한 달 전부터였다. 수시로 토악질을 해대는 아버지에게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보면 모르겠다고만 했다. 동네 병원의사도 답답했던지 시내의 한 종합병원으로 친히 전화까지 걸어 MRI사진을 찍게 했다. 일주일 전에 해놓은 종합검진 결과를 보기 위해 아버지와 나는 같은 차를 탔다. 어느 한 곳으로 한 차를 타고 외출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병원으로 가는 동안 아버지는 차창에 시선을 붙박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병원에 도착해서도 우리는 따로 앉았다. 아버지는 신경외과 진료실 앞에 앉았고, 나는 바로 옆 소아과 쪽 의자에 앉았다. 나는 아버지가 앉은 채로 몸을 구부리거나 손으로 입을 틀어막을 때마다 옆눈질을 했다. 혹시나 아버지가 병원 바닥에 아침 먹은 것을 토해놓으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강현삼 씨 들어가세요.”

간호사가 이름을 호명하자 아버지는 진료실 쪽으로 비적비적 걸음을 떼어놓았다. 아버지가 지팡이에 힘을 줄 때마다 오른쪽 어깨가 경사지게 기울었다. 진료실로 들어선 아버지는 의사에게 목례를 했다. 나는 아버지 뒤쪽 의자에 앉았다. 의사는 아버지의 MRI 사진을 걸었다. 그러고 나서 우리 쪽을 쳐다보며 증세를 다시 한번 말해보라고 했다.

“구토증세가 심해졌고 가슴 언저리가 체한 것처럼 답답하다고.”

나는 하마터면 입덧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뻔했다. 의사는 의료용 플래시를 들고 아버지의 눈동자를 살핀 다음, 청진기를 가슴과 등에 갖다댔다. 진찰을 끝낸 의사는 알아보기 힘든 글씨로 계속 뭔가를 종이에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나는 거꾸로 보이는 글씨를 읽어보려고 애쓰다가 눈을 돌려 벽에 걸린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읽어 내려갔다. 아버지는 그냥 멍하게 앉아 있었다. 눈도 멍했고, 팔 다리도 멍해 보였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거의 다 읽어갔을 때쯤 아버지의 처진 어깨 너머로 희미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애들을 잘 낳아야 할텐데, 아무 일 없이. 아버지가 웃옷이 젖혀져 드러난 배에 손을 얹고 쓸어내렸다. 의사는 글씨를 쓰던 손을 멈추고 알아듣지 못할 아버지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 방금 뭐라고 했냐고 물었다. 아버지가 애들을 잘 낳아야 할 텐데, 라고 말하며 다시 배를 쓸어내렸다.

의사가 아버지에게 이것저것을 묻는 동안, 나는 진료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나오면서 담배가 들어 있는 바지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무의식중에 일어난 습관이었다. 땀이 고인 손으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라이터를 찾아 주머니 이쪽 저쪽을 더듬던 나는 아버지 이름을 불렀던 간호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의 말없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얼른 알아차렸다. 입에 물었던 담배를 빼서 얼른 주머니에 넣고 밖으로 나왔다. 제대로 알아듣기 위한 의사의 집요한 질문과 여전히 알아듣기 힘든 아버지의 답변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나는 진료실이 보이는 쪽, 병원문 밖에서 네 대의 담배를 피웠다. 두 대를 연달아 피우고 나서 나머지는 담배 연기로 도너츠 모양을 만들었다. 초조하고 불안했다. 담뱃불을 끌 때마다 바짝바짝 타 들어가는 입으로 중얼거렸다. 곧 어떻게 될 병은 아닐 거야. 이삼 일치 약을 타다 먹으면 곧 나을 그런 잔병일 거야. 그럴 거야. 그래야 했다. 그래야 담담하게 나의 유학소식을 알릴 수 있을 것이고, 그래야 부자지간이라는 천륜에서도 조금은 소원해질 수 있는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내뱉은 도너츠 구멍 사이로 아버지 얼굴이 보였다. 아버지는 엉덩이를 문지르며 주사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처방전을 기다리기 위해 진료실로 들어가기 전에 앉았던 각자 자리로 가서 다시 앉았다.

“강현삼 씨 보호자분 진료실로 들어가 보세요.”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자 간호사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다시 한번 말했다. 강현삼 씨 보호자분 들어가시라구요. 나는 무엇에 흠칫 놀란 사람처럼 굳은 얼굴로 간호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간호사의 눈과 입술에 그늘이 진 것처럼 보였다. 그 그늘을 막 벗어난 ’보호자’는 내 귓가에서 공회전을 하는 엔진처럼 윙윙거리고 있었다. 보호자라고? 아버지와 단 둘이 살면서, 한번도 떠올려보지 않던 말이었다. 그 말은 나보다 아버지에게 더 어울리는 말이었다. 스물 네 살의 나이에 부모의 보호자가 되는 건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자신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처지인데…. 빌어먹을, 예감이 좋지 않았다. 경찰서나 병원에서 사람을 다시 불러들일 때는 뭔가 찜찜한 일이 남아 있는 것이다.

내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의자에 앉자, 의사는 종이를 다시 꺼내놓고 펜을 들었다. 나는 마른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눈으로 왜 불렀냐는 표정을 지었다. 의사는 환자가 가끔 기억을 놓치는 일이 없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나이 칠십 중반이면 그럴 만도 하지 않느냐고 대꾸했다. 보호자라는 말에 너무 민감해 있다보니 말투가 곱지 않게 나왔다. 가슴 한 켠에 슬슬 불안과 걱정이 쌓여가고 있던 것도 이유라면 이유였다. 아버지가 앓고 있는 병 때문이라기 보다 내 유학준비에 차질이 생길까 봐서였다. 내 손은 어느새 주머니 속 담뱃갑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의사는 아버지의 뇌에 노인성 석회화와 뇌실 확장 현상이 일어나 있으며, 해마의 부피가 줄어들어 있다고 설명했다.

“해마의 손상은 기억력의 급격한 소실과 치매의 주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구토 증세는 치매가 진전되면서 뚜렷한 병이 없이도 일어날 수 있는 착각 증세인 것 같습니다.”

몇 개의 영어 단어를 더 섞어가며 설명을 이어가던 의사는 내가 잘 알아듣지 못하자 등뒤에 있던 두부(頭部) 모형을 책상 위에 갖다 놓았다. 의사가 가져다 놓은 두부(頭部) 모형은 마치 호두속살처럼 복잡하고 굴곡이 심했다. 의사는 가늘고 끝이 뾰족한 막대기로 해마라는 부분을 짚어 보였다.

의사가 말한 대로 그 부위는 정말 해마(海馬)모양을 하고 있었다. 긴 대가리를 치켜들고 꼬리를 내려뜨린 영락없는 수조 속 해마였다. 책상 위 두부(頭部) 모형만큼이나 복잡하고 굴곡 심한 것들이 눈앞엣 것들을 제치고 그려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수조에서 물고기들을 꺼내 변기에 담아놓고 바라보던 일이며 그 안에 고인 물로 세수를 하던 일이었다. 그것들은 살다보면 있을 수도 있는 예삿일이 아니라 ’큰일’이었던 것이다.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병인 줄은 몰랐었다. 의사는 부모님께 말씀드려 입원을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그는 나를 손자로 본 모양이었다. 물론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 앞에서 나는 아버지가 나이 오십에 어머니의 외도로 얻은 자식이며 어쩔 수 없이 이 땅의 단 하나 뿐인 그의 보호자라고 늘어놓을 수는 없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만 두어 번 끄떡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무표정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사가 뭐라고 하더냐고 한 두 마디쯤 물어 봄직도 한데 도통 딴 사람일처럼 무관심이었다. 삼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말수가 현저하게 줄어든 것이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도 지금보다 나을 것은 없었다. 나는 무겁게 내려앉은 거실 공기에 반항이라도 하듯 소리를 내며 잡다한 집기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힘없이 일어나 수조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검지로 수조를 두드렸다. 물고기들의 눈을 살피고 비늘 상태를 살피고 한데 어울려 잘 노는지도 찬찬히 살핀 후 먹이를 꺼냈다. 작은 알갱이들이 물 속으로 번지자 물고기들이 몰려와 뻐끔거렸다.

“오늘 애비가 어디 갔다 온 줄 알아? 에고, 이 불쌍한 새끼들. 어쩔거나......”

아버지는 오만하게 지느러미 짓을 해대는 블랙엔젤 피쉬와 황금빛 꼬리를 살랑대는 골든 엔젤, 그리고 검은 색과 갈색의 비단 무늬를 갖은 마블 엔젤, 이름처럼 야성미가 넘치고 때론 포악하기도 한 지브라 엔젤을 차례대로 불러 주었다. 그리고 수조 주위를 빙빙 돌며 눈가를 훔쳐냈다. 아버지는 더 이상 서 있기가 힘들었는지 나더러 지팡이를 가져오라고 했다. 해마 수조 쪽으로 걸음을 옮긴 아버지는 이번엔 그것들과 눈을 맞추려고 애썼다. 해마들이 움직이는 곳을 쫓아 작고 주름진 손이 유리 위를 따라다녔다. 한참을 그렇게 놈들을 응시하고 있던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조 속 해마들도 새 부리 같은 긴 대가리를 주억거렸다. 밀어를 속삭이는 연인들처럼 아버지와 해마는 수조 유리를 사이에 두고 무언가를 주고받는 눈치였다. 그들의 눈빛이 교차하는 물 속 어디쯤에서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만의 암호 같은 언어가 둥둥 떠다니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어쩌면 아버지와 물고기들이 같은 종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두 다리를 천천히 접어 붙이고 꼬리지느러미를 펼치면서 빠르고 힘있는 헤엄질을 하는, 양팔을 높이 들어 등지느러미로 바꾸고 온 몸에 비늘을 더덕더덕 붙인 채 입을 벙긋거리는 아버지를 가끔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여기가 더 한갓질 것 같구나.”

열두 시가 조금 넘었을 즈음, 아버지가 1층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낮에 병원에 다녀온 뒤, 아버지는 저녁도 먹지 않고 거실 한 귀퉁이에서 등을 돌린 채, 계속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저녁을 드시고 하라고 몇 번 말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아버지 앞으로 가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화투로 같은 그림들을 맞추고 있거나 아니면 바다에 관련된 신문 기사를 뒤지고 있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도 저도 아니고 알테미아 부화장치를 손질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다 손질된 장치를 하나하나 내 작업실로 옮겨오기 시작했다. 나중엔 해마들까지 작은 수조에 담아서 갖다 놓았다.

“아버지, 여태껏 위층에서 하시던 일을 왜 지하로 가져오셔서 이러세요? 저, 아침까지 이 일 다 끝내야돼요. 날 새워서 작업해야 된다구요.”

“저 녀석들 아침거리가 없다.”

아버지는 그 말 한 마디 이후로 더 이상은 내 질문과 불만에 대꾸하지 않았다. 많고 많은 자리 중에 하필 내가 작업하는 맞은 편에 집기들을 늘어놓느냐고 몇 번을 말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수조 설치를 끝낸 아버지는 실린더에 냉동 건조된 알테미아를 집어넣고 물을 부은 다음, 백열등을 켜고 그 앞에 앉았다.

“아버지, 그렇게 앉아 계시지 말고 올라가서 주무세요. 그냥 저대로 놓아두어도 부화는 되잖아요.”

“불안해서 그러지.”

“뭐가 불안하신데요. 아버지가 지키지 않으면 제가 저 물을 마셔버리기라도 할까봐서요? 뭣 때문에 그렇게 집착하세요? 저것들이 개나 고양이처럼 주인을 알아보기라도 한대요? 오로지 입만 뻐끔거릴 줄 아는 단순저능의 것들이에요.”

“그래도 그것들은 살아 있잖아. 그러는 너는 생명도 없는 흙덩이에 왜 그렇게 죽고 못 사냐?”

“생명이...... 생명이 없긴 왜 없어요. 실사는 아니더라도 제 혼이 들어간 반실사예요. 그냥 흙덩이가 아니라구요. 저 놈들은 저를 통해 생명을 얻어요.”

“그렇다면 간단하구나. 이 애비가 왜 그렇게 저 놈들한테 애정을 갖고 있는지.”

“......”

“나도 저 놈들과 한 몸이라고 생각한다. 영영 손(孫)을 못 볼 줄로만 알았다. 내 능력 밖의 일이니. 그건 불가능한 일인 줄만 알았어. 그런데 봐라, 내 뱃속에는 생명이 꿈틀대고 있어. 이거 봐, 배 나온 것 좀 보라구.”

아버지는 웃옷을 걷고 오랜 바다 생활로 검고 거칠어진 배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나는 담배를 뽑아들고 라이터의 불을 붙였다. 아버지가 나를 쏘아보았다. 할 수없이 담배를 내려놓고 대신 찰흙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흙덩이 한쪽 귀퉁이에서부터 흙을 조금씩 떼어내기 시작했다. 떼어낸 흙을 모아 다시 뭉쳐 놓았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흙덩이를 또 조금씩 떼어냈다. 어차피 인형의 얼굴 표정도 아버지와의 대화도 더 이상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만 대화하기를 포기한 나와는 달리 아버지는 기운 빠진 혀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햇빛 대신 전구로 빛을 쪼여주는 거야. 해마는 살아 있는 알테미아만 먹으니까, 매일 같이 부화시키는 일을 해야 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매일.”

아버지가 단호하게 힘을 주어 매일, 매일을 발음했다. 그것은 마치 절대로 거역해서는 안 되는 명령처럼 들렸다.

“숫놈이 육아낭을 갖고 태어나는 걸 보면 참 신기해. 암놈한테 난자를 받아 제 뱃속에서 키우는 일을 숙명처럼 알고 있어. 한 번 연을 맺으면 평생 절개를 지키는 기특한 종이야. 배신이나 책임회피를 모른다는 얘기지. 미물 같아 보여도 말이야. 사람도 하기 힘든 일인데.”

나는 아버지 말에 대꾸하지 않았고 대답하지 않았다. 딱히 아버지가 내 대답을 바라면서 물었던 말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버지에 대한 일종의 반항이고 불만이었다. 파닥거리는 알테미아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등과 굳은 찰흙을 반죽하는 내 등 사이에 얼음처럼 차가운 침묵이 방향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떼어낸 흙을 뭉쳐 올림픽 때 금메달을 딴 양궁선수의 활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활대의 둥근 곡선을 만들고 나서 그 활대를 쥘 손가락들을 만들 흙을 떼어냈다. 활시위를 당기면 당장이라도 화살이 튕겨져 나갈 것만 같은 힘있고 생동감 느껴지는 그런 손가락이어야 했다. 나는 떼어낸 찰흙에 적당량씩 칼집을 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칼끝이 흙덩이를 무디게 갈라냈다. 다듬고 매만진 후에도 알맞은 각도로 구부러지지 않은 인형 손가락들 위로 아버지의 낮은 목소리가 지나갔다.

“애들을 잘 낳아야 할텐데...... 아무 일 없이.”

희래의 전화를 받은 건 새벽 4시 무렵이었다. 자정이 넘어선 이후, 아버지가 수조 속에 네 번째 먹이를 집어넣고 막 자리에 앉은 다음이었다.

“뭐해? 안 자고.”

“너야말로 이 시간에 웬일이냐?”

“아버지한테 말씀드렸어?”

“아니, 아직. 상태가 안 좋으셔. 갑자기 부화장치를 내 작업실로 갖고 오셨어. 계속해서 수조 속에 알테미아만 집어넣고 계셔. 아무래도 오늘은 안 될 것 같고, 기회 봐서 내일쯤......”

나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잠시 잊고 있던 ’아버지에게 드릴 말씀’ 을 그녀가 생각나게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정말 하고 싶은 공부를 하기 위해 외국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고 말을 해야했다. 자리 잡히면 틈을 내서 한번 찾아오겠노라고 입에 발린 인사를 하며, 몇 해를 이웃해서 같이 살다 이사가는 사람처럼 아주 담담하게 말이다. 그녀는 며칠째 이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확인 전화를 하고 있었다.

희래는 아버지 연구실에 채용돼 2년 남짓 아버지를 도왔던 생물학과 출신의 연구원 겸 비서였다. 말이 연구고 비서였지, 그녀의 일이란 게 거의 허드렛일에 가까운 것이었다. 가끔 아버지가 그렇게도 목 메이게 찾아다니던 대왕오징어를 먹어버린 고래를 발견했다는 신문기사나 인터넷기사를 찾아내는 정도가 그나마 일다운 일의 전부였다. 희래가 집에 와서 가끔 집안 일을 해줄 때도 있었다. 오랫동안 여자 손길이 닿지 않던 부엌에 들어가 음식을 만들어 주거나 집 안 곳곳을 청소할 때면 집안에 생기가 돌았다. 희래가 만든 음식을 먹으며 아버지와 나는 평소보다 배나 많은 말수로 식사시간이 길어졌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일도 아니었다. 희래가 우리 집에 오는 횟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연구소에서 할 일이 없었다는 얘기였으니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관상어보다는 생선에 더 관심이 많았고, 대왕오징어의 존재나 신비성보다는 오징어의 요리법에 돈을 더 많이 투자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버지의 연구실은 문을 닫게 되었다. 손바닥만한 연구실의 임대료도 제대로 내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연구실 집기를 집으로 옮기면서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 일을 거들던 희래는 몇 달치 월급도 못 받은 상태였다. 그녀는 일자리를 잃은 뒤, 두어 군데 회사의 면접을 다녀왔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는지 유학을 가겠다고 했다. 그런 그녀의 결심은 내가 견습생 자격으로 윌 빈튼사를 지목한 것과 무관하지 않은 일이었다.

얼마 전, 나는 H전자로부터 클레이 애니메이션으로 그 회사 제품광고에 쓸 찱흙 인형을 제작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인터넷 홈페이지에 클레이 애니매이션이란 어떤 것인가의 설명과 작품 몇 개를 올려놓은 것을 그 업체 간부가 본 것이었다. 물론 요구한 작품을 1차로 본 다음에 계약을 맺는 조건이었다. 우리 나라에서 찰흙으로 인형을 만들어 애니메이션화하는 것은 아직까지 생소한 분야이다. ’월레스와 그로밋’이 개봉될 당시만 해도 많이 보편화된 시기였다. 그보다 훨씬 몇 년 전, 나는 AFKN 에서 우연히 클레이 애니메이터를 소개하는 프로를 보게 되었고, 그 뒤로 궁색한 자료를 찾아가며 독학 중이었다. 미국에 있는 윌 빈튼 스튜디오에 몇 번 전화를 걸어 궁금증을 해갈해 보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더욱 커진 궁금증으로 심한 몸살을 앓아야 했다. 나는 그곳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뜻을 끊임없이 내비쳤고 마침내 넉 달 전, 그곳 사장으로부터 6개월간의 견학 허가서를 얻어낼 수 있었다.

전화 저편에서 희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질러진 작업대 위에 양궁 선수는 일그러진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었고, 아버지는 알테미아 통을 가지러 또 다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무의식중에도 자꾸 손이 눈가로 갔고, 비비고 나면 따가운 기가 더욱 심해졌다. 나는 눈을 비비다 말고 들고 있던 전화기를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해마들이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지도 5일이 지났다. 병원에 다녀온 뒤, 이틀 동안 아버지는 더 심하게 구토를 했고, 더 많이 해마를 걱정하다가 숨을 멈추었다. 아버지의 장례가 치러지는 동안, 희래가 놈들을 돌보았다. 겉으로 보아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매일 같이 수조 옆에 딱 붙어 잔잔한 얘기를 들려주던 아버지의 부재를 그것들이 알 턱이 없다. 차마 손으로 어루만져줄 수가 없어서 애꿎은 수조 유리에 손자국만 그리며 훑어가던 아버지의 손길을 기억할 리도 없다. 아버지 없이도 놈들은 아침마다 서로의 꼬리를 휘감으며 열정적인 춤을 춰댈 것이고, 절대 다른 상대를 택하지 않는 놈들만의 사랑을 확인할 것이다.

나는 몇 시간째 해마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고민하고 있다. 누구에게 주던지 아니면 버리던지. 그 어느 것이라도 내 눈앞에서만 사라지면 홀가분해질 것 같다. 해마들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서로를 주시하고 있다. 집안은 하루종일 숨막힐 것 같은 정적 속에 잠겨 있다. 나는 맞은편 텅 빈 물고기 수조로 눈길을 돌린다. 그리고 아버지가 죽던 날 새벽에 변기 안에서 희멀건 눈을 뜨고 입을 벌린 채 둥둥 떠 있던 관상어들을 떠올린다. 아버지의 치매 기가 벌려 놓은 일이었는지, 조금이나마 내게서 짐을 덜기 위한 배려였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때 변기 앞에 쪼그리고 앉아 관상어들을 한 놈 한 놈 건져 올렸었다. 겨우 건져 올린 놈들은 마치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손안에서 빠르게 미끄러져 나갔다. 그것들을 건져내면서 왜 어머니가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눈을 뜨고, 입을 벌린 채 죽은 어머니의 얼굴 때문인 것 같다. 이름도 모르는 바다로 연구랍시고 떠나는 아버지로부터 방치돼 살아온 서러움과 남의 씨를 들여와 키우던 죄책감이 뒤엉킨 얼굴이었다.

희래가 부화시켜 놓고 간 알테미아를 수조에 부어준다. 숫놈은 먹이를 먹으려 하지 않는다. 놈이 아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희래에게 전화를 걸어 해마들을 맡아줄 마땅한 사람을 찾아봐 달라고 부탁한다. 희래는 선뜻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다시 한번 부탁한다. 나는 그 부탁을 끝으로 그만 해마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그것으로 이미 내 할 도리는 다 했다고 믿으면서.

희래와의 통화를 끝내고 얼마 안 있어 전화벨이 울린다. 광고주의 전화다. 울고, 웃는 두 가지 표정이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할 인형이 기쁨의 빛이 드러나지 않은 채, 완전히 우는 얼굴이 돼 버렸다는 것이다. 인형을 DHL로 보내고, 도착할 시간에 맞춰 전화를 하는 것이라고 한다. 광고주는 장례가 끝난 바로 뒤, 이런 전화를 하게 됐음을 사과하고, 이틀간의 여유밖에는 더 줄 수 없다고 말한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마지막에 네, 라는 대답을 하고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배달된 상자를 열고 추레하게 누워 있는 인형을 꺼내놓는다. 활대를 잡은 손가락에 내 손때가 묻은 것이 보인다. 사람들 눈에는 잘 띄지 않을 만큼의 미미한 자국이지만 나는 알 수 있다. 그 애처로운 손가락들. 활대를 잡다 힘없이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말 것 같은 불안한 손가락들. 아버지가 알테미아 부화법을 멍하게 앉아 설명하고 있을 때 떼었다 붙였다 해가며 만들던 곳이다. 나는 인형의 손가락들을 떼어내 손에 쥐고 해마 수조 쪽으로 간다. 산호초에 기댄 채 꼼짝도 하지 않는 숫놈의 뱃가죽이 조금 쳐져 보인다. 놈은 왜 암컷들이나 겪는 고통을 대신하고 있는 걸까? 아마 아버지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입을 둥글게 하고 물 속으로 말을 띄웠을 테고, 그것을 알아들은 놈들이 대꾸했을 테니 말이다. 벌써 놈은 몇 시간째 자리를 이동하지 않고 있다. 암놈이 가끔 와서 건드려 보지만 그저 대가리를 약간 돌려 기척에 답해줄 뿐이다. 나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숫놈을 바라본다. 그저 바라볼 뿐이다. 나는 아버지처럼 놈과 소통할 수 있는 말 따위를 구사할 수 없다. 놈들의 눈빛, 생각, 몸놀림 그 어느 것 하나 알아챌 수도, 공감할 수도 없다.

작업대 의자에 앉기는 했지만 흙덩이에 선뜻 손을 대지 못한다. 눈 안엣 실핏줄이 터질 정도로 아파 온다. 안구 건조증이 심해져 가고 있는 증거다. 이 상태로는 작업을 계속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잠을 좀 자 둬야 할 것 같다. 나는 눈을 감아버린다. 따가운 눈 속으로 먼지처럼 작은 것들이 떠다닌다. 그것들은 주황색으로 보이다가 점점 갈색으로 바뀐다.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오늘까지는 어떻게 버티겠는데 내일 아침 해마가 먹을 먹이가 없어, 암놈도 암놈이지만 임신한 숫놈이 더 걱정이야. 희래의 말이 부유하는 것들 속으로 끼여든다. 나는 안대를 찾아 두르고 침대로 가서 눕는다.

시한 폭탄의 초침처럼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의식 속으로 작고 희미한 소리가 들린다. 미미한 울림이고 떨림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다. 칼로 베인 상처처럼 아주 잠깐 차가운 무엇이 머릿속에 머물렀다 빠져나간다. 장례가 치러지는 동안 잠을 자지 못해 생긴 환청일 거라 생각하며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돌아눕는다. 예의 그 소리가 점점 간격을 좁혀가며 다시 들려온다. 움직임이 느껴지는 소리다. 요란하거나 경박하지 않은 움직임. 물소리다. 물이 움직이는 소리, 그것도 빠르게.

나는 안대를 벗고 건조한 눈을 치켜 뜬다. 몸을 일으켜 천천히 수조 앞으로 걷는다. 바람처럼 너울대는 푸른 해초 사이로 숫놈의 육아낭이 조금씩 벌어지고 있다. 숫놈은 아랫쪽 배에서 비어져 나오는 치어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놈의 고통스런 얼굴은 수조를 통해 굴절된 상태로 고스란히 내게 전해진다. 어쩌면 희열에 들떠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치어들이 구부렸던 몸을 펴고 물 속으로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한다. 암놈은 꼬리를 구부렸다 폈다하면서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눈물이 비어져 나온다. 안구 건조증 때문인지 해마의 출산을 지켜보다 흥분돼 흐르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나는 수조 유리에 손을 얹고 입을 둥글게 해서 갖다댄다. 새끼들을 품고 있는 동안, 무게만큼 부피만큼 아프지 않았느냐고. 그래서 포기해 버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느냐고 물어보고 싶다.

흐르는 눈물 위로 아버지의 얼굴이 보인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 기뻐서 울고 있는 아버지. 얼굴 뒤쪽으로 지느러미를 파르르 떨며 육아낭을 열어 놓고, 웃고 있는 아버지. 나는 수조를 어루만지며 아버지의 웃고 우는 얼굴을 바라본다. 아버지는 물 속으로 떠오르는 치어들의 어설픈 움직임을 바라보며 육아낭을 천천히 좁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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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황폐한 우리시대 단면 형상화
  

최종심의 대상이 된 작품은 ‘낭떠러지에서’ ‘작은섬’ ‘하니 드롭스게릴라협회’ ‘심장무게 달기’ ‘아버지의 저녁’ 다섯편이었다.
‘낭떠러지에서’는 산행을 통한 두 인물의 갈등을 다루고 있으나 정제되지 못한 묘사체계와 깊이있는 내면화의 성취를 얻어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작은섬’은 장애아를 가진 어머니의 관점을 보여준 작품이나 보편적인 상상력에서 더 깊이 나아가지 못한 것과 결말의 처리가 너무 안이하다는 점에서, ‘하니 드롭스게릴라협회’는 유니크한 서술방식으로 우리 시대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으나 지나치게 서술방식에 의존함으로써 소설보다 보고서에 가깝게 읽힌다는 점에서 안타깝게 제외됐다.
최종적으로 남은 두편 ‘심장무게 달기’와 ‘아버지의 저녁’을 놓고 진지한 토론이 있었다. ‘심장무게 달기’는 우연한 뺑소니사고를 모티브로 죽음과 삶의 아이러니를 드러낸 작품으로서 상당히 세련된 기교와 문장을 구사했으나 고대 벽화 등을 통한 죽음에서의 은유가 소설구조와 밀도있게 접합하지 못해 작위적이라는 점이 지적됐고, ‘아버지의 저녁’은 세련된 문체로 ‘불임의 시대’를 극적으로 형상화한 소설로 ‘해마’라는 특이한 소재를 끌어들여 무리없이 황폐한 우리 시대의 단면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받았다.
마지막 당선작을 ‘아버지의 저녁’으로 결정하는데 심사위원 사이의 이견은 없었다. 새로운 작가의 내일을 기대해본다.
(소설가 김원일·박범신)
추천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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