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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장
댓글 0건 조회 3,842회 작성일 03-01-05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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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손님』論  

오홍진
  


1. 죽음에서 삶으로

황석영의 ‘손님’꺝은 죽음을 통해 삶을 말한다. 한 인물(한영덕)의 죽음을 계기로,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분단의 상처와 기억을 현실로 불러내는 ‘한씨 연대기’의 경우처럼, ‘손님’에서 죽음은 불화의 존재들을 현실의 광장으로 불러들이는 중요한 모티브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손님’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류요한’이라는 인물이 지닌 상징적 맥락이다. 기독교 장로로서, 이데올로기적 갈등의 한 주체로서 자리매김되는 류요한은 그가 겪은 실존적 고투 이상의 역사적 고통을 온몸으로 체현하는 인물이다. ‘신천 인민 학살’을 비롯하여, 기독교-우익 세력에 의해 자행된 ‘살육’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 인물이 류요한의 인물상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그의 죽음이 갈등의 해소, 곧 화해의 길로 들어서는 모티브로 설정되고 있는 점은 무엇보다도 ‘손님’에 내포된 역설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여기서 작가가 화해의 중심에 류요한을 세운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6·25 전쟁을 전후하여 그가 벌인 악마적인 행동의 기원을 해명하는 문제와도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손님’이라는 작품 속에서 류요한의 죽음은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타자들의 삶을 역사화하는 모티브로 작용한다. 류요한이라는 개인이 죽음으로써 타자들의 기억은 현재화되고, 죽은 자들은 산 자들의 세계로 회귀한다. 삶과 죽음이, 이승과 저승이 류요한의 죽음을 통해 현실세계를 구성하는 틀로 전경화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손님’에서 표명되는 죽음의 영역은 삶의 영역과 교차한다. 죽음이 화해의 길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거론되는 까닭은 그것이 지닌 삶과의 연계성 때문일텐데, 황석영은 이 죽음의 모티브와 직접적으로 대면함으로써 지난(至難)했던 민족 근대사의 두 주체세력들이 화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죽어서야 가슴 속에 맺힌 ‘한들’을 풀어헤칠 수 있다는 인식은 그만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가, 화해의 장과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음을 암시한다. ‘손님’의 시대적 배경인 50년대 초의 분단모순이 50여년이 지난 ‘지금 이곳’에서도 그대로 통용되는 모순구조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손님’을 관통하는 죽음의 의미를, 그리고 작가 스스로 샤먼으로 변신하여 죽은 자들을 위한 진혼곡을 부르는 이유를 우리는 새삼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살아 있는 존재들이 죽은 자들의 ‘한들’을 망각할 때, 죽은 자들의 ‘한들’은 역사 속으로 묻힐 수밖에 없다. 그렇게 역사 속으로 묻혀버릴지도 모를 ‘한들’을 현실세계로 불러들이는 것, ‘손님’은 그렇게 죽음의 사상과 연결되고 있다 하겠다.



2. 떠도는 기억들

‘손님’의 전작(前作)인 ‘오래된 정원’(창작과 비평사, 2000)에서도 죽음은 역사적 기억을 불러들이는 기호로 작용한다. 암으로 죽은 한윤희의 흔적들(편지, 노트)이 주인공 오현우의 역사적 기억을 현실로 매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죽음-기억은 과거의 이미지가 아니라 현실로 들어가기 위한 계기이다. 한윤희에 대한 기억이, 그리고 그녀에 대한 시대적 의미부여가 ‘일상과의 투쟁’이라는 현실적인 조건과 접맥되는 것도 죽음-기억이 지닌 현실적 근거 때문이다. ‘손님’에서 류요한의 죽음을 통해 전경화되는 류요섭과 박명선의 기억이 갖는 의미는 이처럼 흔적으로 남은 기억들의 현재화가 화해의 길로 들어서는 전제라는 점과 관련된다. 특히 이 두 개의 기억이 한 맺혀 죽은 영혼들의 기억만큼이나 작품 속에서 ‘떠도는 기억들’이라면, 그 기억들이 떠돌 수밖에 없는 이유, 그리고 그 떠도는 기억들을 의미화하는 근거를 찾는 일은, 화해의 길목으로 가기 위해서는 한번쯤 거쳐가야 할 사유의 길일 것이다.

‘손님’의 전체적인 정조가 죽음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박명선의 기억을 지배하는 정조 역시 죽음에 대한 이미지와 연관된다. 가족의 죽음이라는 그 강렬한 이미지 앞에서 시간성은 사라지고 공간성만이 이미지화되어 그녀의 기억을 지배한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따진다면 그녀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살해자’로서의 류요한의 모습은 가족의 죽음과 관련된 이미지에서 파생된 ‘류요한’이다. 여기서 우리는 박명선의 기억이 화해의 길로 나올 수 없는 구체적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박명선은 그녀의 가족이 살해되는 정황을 살펴보기 이전에 죽음 자체의 이미지에 함몰된다. 때문에 그녀에게 과거는 기억하기도 싫은 이미지로 가득찬 과거이다. 류요한이 철저한 ‘악’으로 판별되는 것은 이 때문인데, 작가는 죽음으로 감싸여진 박명선의 기억 역시 화해의 길로 가는 가능성의 영역에 포섭하고 있다. 비록 현실적 삶의 세계에서는 화해가 불가능하겠지만, 죽음의 세계에서는 이들 역시 화해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박명선의 이미지화된 기억처럼 류요섭의 기억 역시 이미지화된 기억이다. 류요섭의 기억을 지배하는 것은 홍정숙과 강미애라는 ‘인민군 여전사’들의 죽음이다. “나는 키가 작고 몸집도 작은 소녀같은 강미애 누나를 분명히 좋아하고 있었다”(235쪽)라는 류요섭의 고백처럼, 변성기에 접어든 소년에게 그녀들이 있는 세계는 모든 것을 다르게 보게 만드는 세상이었다. 시대가 전쟁(6·25)의 시기였고, 또 형 류요한이 기독교 계열의 우익으로 활동하고 있더라도, 류요섭에게 그녀들은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사람들이었다. 순수함이 지배하는 원초적인 세계, 타자가 사물화되지 않는 공존의 세계, 이러한 류요섭의 기억의 세계를 깨뜨린 사람이 류요한이었다. “당시에는 그저 남에게 들키지 않게 소리없이 처치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243쪽)는 류요한의 회상에도 드러나는 바, 류요한에게 동생의 순수함은 이데올로기 이후의 문제였다. 인민군 여전사는 ‘적’일 뿐이며 적은 당연히 ‘처치’해야 할 대상이다. 류요섭에게 인민군 여전사들이 타자였다면, 그리하여 사물화가 적용될 수 없는 ‘인간(타자)’이었다면, 류요한에게 그들은 사물화된 대상일 따름이었다. 타자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차이가 결국은 류요섭의 기억의 세계를 가능하게 한다. 류요섭의 기억에는 박명선과 같은 압도적인 죽음의 이미지는 없지만, 그 대신에 잃어버린 순수함의 기억이 존재한다. 순수함은 깨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순수함이 깨지면서 류요섭이 잃은 것은 인간에 대한 신뢰, 정확하게 말하면 형에 대한 신뢰였다.

박명선의 기억이든, 류요섭의 기억이든 그들의 기억 속에는 죽음으로 표상되는 고통이 있다. 그런데, 기억 속의 고통은 욕망을 통해 해소되지 않고 그 밑에 잠재하여 주체의 삶을 규정한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류요섭의 북한 고향 방문은 단순한 고향 방문일 수 없다. 그것은 차라리 ‘상처’와 ‘고통’으로 이미지화된 기억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이며, 한편으로 죽은 자들의 영혼과 산 자들이 만날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다. 요컨대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은 그들의 고향에서 ‘다시’ 만난다. 실로 50년만의, 그것도 산 자보다는 죽은 자들이 많은 이들의 만남이 성사됨으로써 ‘손님’에서 떠돌던 기억들은 이제 그 기억의 주체-타자들과 비로소 만나게 되는 것이다.



3. 타자들, 공존할 수 없는

이제 우리는 문제의 시대 중심으로 들어선다. 박명선과 류요섭이 중심의 외부에서 이유도 모르는 고통을 당한 타자들이라면, 시대의 중심에 선 인물들, 그러니까 류요한, 이찌로(박일랑), 순남이 아저씨, 소메 삼촌 등은 자신들이 선택한 세계에서 행동한 주체들이며 타자들이다. ‘신천 대중 학살’이라는 뚜렷한 사건이 ‘손님’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지만, 일단 우리는 ‘신천 대중 학살’을 역사적으로 의미화하기에 앞서 그 ‘학살’의 근원을 찾아나서야 한다. 근원에 대한 탐색은 달리 말하면 타자에 대한 탐색이 될 터인데, 그런 탐색 과정을 통해 당대 주체들의 타자인식이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황석영이 ‘손님’에서 쟁점화하는 사안은 기독교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 사이의 갈등이다. 이데올로기 문제와 삶(생활)의 문제가 중층적으로 복합되어 있는 이들의 갈등은 그 때문에 격렬한 양태로 현상화될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타자)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면 나(주체)의 삶의 기반이 파괴된다. 주체가 삶의 기반을 지키려면 타자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은 타자를 동일자로 환원시켜야만, 곧 공산주의자(사탄)를 기독교도로 개종시키거나, 아예 말살시켜야만 가능하다. 이러한 점은 공산주의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터, ‘지주계급’을 대표하는 기독교도가 공산주의자들의 정책에 동조하지 않는 한 기독교도는 영원한 ‘반동’으로 남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두 세력의 담론에는 공존할 틈이 보이지 않는다. 자신들이 인정하는 세계만이 유일하고 가능한 세계일 뿐이라는 이 주체 중심의 인식구조는 그런 만큼 타자의 타자성을 배제하지 않을 수 없는 한계에 직면한다.

그리하여 인식의 차이에서 연유하는 행동의 차이가 이들에게는 도덕적인 선·악의 문제로 돌변한다. 타자가 인정되지 못하는 이유도, 도덕이라는 문제는 원천적으로 가치판단을 내포하는 문제인데, 이들은 자신들의 세계에서만 유효한 조건을 도덕적 가치판단의 선험조건으로 내세우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선험적 가치판단으로서의 도덕주의가 ‘권력욕망’으로 통하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이다. ‘신천 대중 학살’을 비롯하여 소설 곳곳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살육은 타자에게 인정받기 위한 주체-동일자의 인정투쟁의 결과였다. “그날 십팔일하구 이튿날 십구일, 또 이십삼일꺼디 우리넌 모두 미체 있댔다”(225쪽)는 소메 삼촌의 말대로, 인정투쟁은 주체가 자신의 행동에 ‘미쳐야만’ 이길 수 있는 투쟁이다. 이 ‘미침’의 궁극점이 ‘신천 대중 학살’이며, 류요한과 조상호 사이에 벌어진 ‘가족 살해’ 역시 주체의 인정투쟁, 즉 권력욕망이 부정적으로 작동할 때 초래되는 비참한 결과를 예증한다 하겠다.

이렇듯 선험적 도덕주의가 권력욕망으로 변할 때 타자의 타자성은 배척된다. 그리고 타자가 다만 ‘인정욕망’의 ‘대상’으로만 비쳐질 때, ‘신천대중학살’과 같은 역사적인 살육은 하나의 잠재태가 되어 언제나 현실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는다. 황석영이 ‘신천 인민 학살’의 죽음 이미지를 다소 치밀하게 묘사하는 까닭은 이러한 죽음 이미지의 충격 속에서 “우리”가 저지른 타자의 살육을 직시하자는 의미일 것이다. 이렇게 타자가 부재하는 동일자의 세계 속에서 화해는 타자를 타자로서 인정하는 데서 시작할 것이다. 류요한을 포함한 여러 타자들의 죽음이 새로운 시작일 수 있는 것은, 죽음의 세계는 “아무 편두 아닌”(51쪽) 세계이며, 더불어 “구원받지 못할 영혼은 없”(143쪽)기 때문이다. 죽어서야 대화가 가능한 세계라는 소설적 모티브는 그만큼 현실세계에서의 화해라는 것이 거짓 화해일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황석영이 추구하는 화해의 세계가 그만큼 뿌리깊은 곳에 닿아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겠다.



4. 대화의 장(場)에서

타자들의 대화는 삶과 죽음의 접점, 곧 굿판에서 이루어진다. 이 대화의 장(場)으로서의 굿판은 여러 인물이 여러 목소리를 내는 다양성의 공간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선험적인 진리도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중심으로서의 ‘주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잠재성의 공간이며, 모든 타자들이 자신들의 ‘한’을 자유롭게 발설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이 잠재성의 공간에서, 죽은 자들은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다. 작가는 그 태어남을 “한이 없이 가야 떠돌디 않구”(119쪽)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한이 없는 영혼’을 위해 작가가 준비한 것이 바로 한바탕의 굿판이라 하겠다. 이 굿판에서 죽은 자들은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는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인 바, 이야기를 통해 삶을 풀어헤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을 규정했던 근원적 억압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는 바탕을 얻는다. 이러한 잠재성의 세계를 지배하는 원칙은 따라서 소메 삼촌의 말대로 “나타나문 보아주구 말하문 들어주는”(174쪽) 것 이외에는 있을 수 없다. 그렇게 대화의 주체들은 열린 대화의 장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의미화한다. 그렇게 의미화된 말은 다른 대화자(타자)들의 의미화된 말과 공명하면서 새로운 대화의 장을 형성한다. 그것은 그러니까 ‘말들’의 릴레이이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말들’의 잔치이다.

다양한 ‘말들’이 공존하는 이 같은 세계에서 산 자와 죽은 자들의 대화를 규정하는 준거는 다름 아닌 살육-죽음이다. 류요한이 이찌로(일랑)와 순남 아저씨를 죽이고, 봉수(요한과 상호의 친구)가 “빨개럴 벗긴 남자 두 사람”을 “휘발유”로 태워 죽인다. 그리고 방공호 속의 사람들을 “까소린”과 “휘발유”로 태워 죽이면서 “군내 총인구으 사분지 일이 죽”(226쪽)는 “신천 대중 학살”이 일어난다. 대화자들이 이야기하는 죽음의 이미지-사건은 끝이 없다. 죽이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처럼 그들은 죽이고 죽임을 당한다. 그러면서도 대화는 계속된다. 죽임을 당한 사람의 이야기도, 죽인 사람의 이야기도 거리낌없이 대화의 공간을 메꾼다. 아니, 죽인 사람이 죽임을 당한 사람이니 그들의 이야기는 ‘하나’이다. 그리고 그 ‘하나’의 이야기의 끝에서, 곧 죽음과 죽임의 끝에서, 그들은 드디어, 그들의 내면 속에 자리잡은 “자기증오”를 발견한다.

자기에 대한 증오가 강할수록 주체와 세계(타자)의 단절감은 더욱 커진다. 자기증오의 감옥에 갇혀 이국(異國)에서 수인(囚人)과 같은 생활을 한 류요한을 생각해 보라. 이러한 인물들이 자신의 과거를-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죽인 자들과 어울리고, 또 “리당위원장”을 지낸 이찌로(일랑)처럼 “아마 모르긴 해두 내가 그 아이(류요한)럴 체다볼 젠 독한 눈이 아니댔을 거이야”(213쪽)라며 당시의 살육이 상대에 대한 무조건적인 증오에서 비롯되지만은 않았음을 고백하기도 한다.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증오하는 주체들은 상대방을 이해하게 되고, 그것은 타자의 타자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의 세계로 떠올리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죽음이라는 장의 변화와 맞물린다. 변화된 것은 무엇인가? 소설의 곳곳에 나타나지만 그것은 삶의 세계의 부분성이 죽음의 세계에서는 전체성으로 변화되었다는 점이다. 죽음의 세계는 “너 난 데”(27쪽), 곧 주체와 타자가 태어난 원초적 공간이며, 그 곳은 “우린 아무 편두 아니”라고 말해도 상관없는 비정형의 공간이다. 다양성의 가치가 열려 있는 상태라고 표현할 수 있는 비정형의 상태는 정형의 상태가 가능할 수 있는 궁극적 모태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황석영이 ‘손님’에서 전경화한 죽음의 이미지는 죽음을 통해 죽음을 넘어서려는 구성적 배치물로 의미화할 수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우리는 그 악몽의 나날을 보내면서 안에 감추고 있었을 뿐 서로를 원수보다 더 미워하게” 되는 상황의 악순환을 방지하는 소설적 장치이다. 이 장치를 통해 죽음이 이야기되는 대화는 ‘한’을 푸는 굿판으로 변화될 수 있으며, 이 장치를 통해 류요한은 그의 말대로 “이제야 고향 땅에 와서 원 풀고 한 풀고 동무들두 만나고 낯설고 어두운 데 떠돌지 않게 되었다.”(250쪽) 죽음과 대화를 가로지르는 이와 같은 구성적 힘은 분명 근자에 발표된 여타의 소설들과는 대별되는 ‘손님’만의 독특함이다. 이 독특함이 황석영이 도달한 화해의 세계를 단순한 화해의 의미망에서 벗어나게 한 주된 이유일 것이다.



5. 화해 혹은 상생(相生)의 길

황석영의 ‘손님’에서 형상화된 화해의 길은 달리 말하면 상생의 길이다. 상생을 말하기 위해 그는 기독교나 마르크시즘 같은 “손님”의 사상들을 현실세계로 불러들인다. 외래의 “손님”들이 벌인 것은 상극(相剋)의 잔치였다. 그러므로 ‘손님’에 표명되는 상생의 세계는 외래의 “손님”들이 만든 “살육”의 광장을 경유해야만 들어설 수 있다. ‘손님’에서 이 “살육”의 공간을 거쳐 궁극적으로 이른 지점은 “증조 할머니”로 표상되는 여성적인 공간인 바, “증조할머니”의 세계는 소설 말미의 ‘어머니의 세계’를 이끌어내는 원초적 기억의 세계라는 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손님’에 대한 평문들꺞에서 간과되어 온 “증조할머니”의 상징적 맥락은 실상 ‘손님’의 소설적 모태를 이룰 만큼 중요한 모티브이다. 이를테면 이 소설을 근거짓는 환상성의 모티브나 류요섭의 꿈속에 표출되는 ‘어머니의 세계’는 “증조할머니”의 세계와 접맥되어야만 소설적 의의를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이다.

“증조할머니”의 세계는 “장갑바우”와 같은 “옛말”, 곧 이야기의 세계를 지향한다. 이야기의 바탕이 상상력에 있는 것이라면, 그 세계는 분명 근대가 지향하는 이성의 세계와는 이질적인 양태를 띨 수밖에 없다. 근대의 세계가 지향하는 명료한 논리의 세계는 이야기의 세계에서 보면 여러 다양한 세계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이야기의 세계는 논리와 비논리가 혼융된 역설적인 세계이며, 인간과 동물이 공존하는 환상의 세계이다. 그렇기에 “당군 하라부지가 여게 내레와 지내다가 하늘루 올라갈 적에는 평시에 쓰던 칼과 갑옷을” 감추어둔 “장갑바우”의 세계가 이야기의 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있다. 근대의 세계, 특히 기독교적 세계가 이런 이야기의 세계를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이면에는 유일신이라는 기독교의 토대와 이야기의 다양한 세계 사이의 넘지 못할 사상적 장벽이 놓여있을 것이다.

“굿판”이라는 공존의 공간을 통해, 또 죽음의 사상을 통해 황석영이 이르려는 지점은 이 “증조할머니”의 세계, 구체적으로 이야기의 세계일 것이다. 세계로 열려야만, 그리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야만 풍성해지는 이야기의 세계는 말 그대로 “굿판”의 무질서한 세계와 상통한다. “굿판”에서 벌어지는 한 맺힌 자들의 이야기는 한 맺힌 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서 서로의 갈등을 푸는 단서가 된다. 그리하여 그 속에서 상극의 세계는 상생의 세계와 어울린다. 그리고 그 상생의 밑자리에는 “증조할머니”로 표상되는 여성성-전통성의 세계가 살아숨쉬고 있다. 이런 점에서, “증조할머니”의 세계는 단순히 전통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전통을 거슬러 근대를 다시 살아가는 것이다. 류요섭이 “낯선” 고향에 당도함으로써 과거와 화해하는 길로 들어서듯, 황석영은 “증조할머니”의 세계를 떠올림으로써 근대적 세계와 화해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새삼 “증조할머니”의 세계가 지닌 현실적 유효성의 문제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오래된 정원’이 도달한 모성적 세계와도 연관될 것인데, 황석영이 이 두 작품에서 모색해 온 ‘모죽(母竹)의 상상력꺟’은 굿판의 공간이 지니는 의미만큼이나 제의적인 상상력에 닿아 있다. 제의의 중심은 ‘샤먼(무당)’이다. 작가가 샤먼이 되어 벌이는 굿판으로서의 소설의 세계는 그러므로 이미 소설의 바깥으로 나아가는 세계라 할 수 있다. 소설이면서 동시에 소설을 넘어서는 이러한 시도는 “증조할머니”의 전통적인 세계를 근대적 소설의 세계로 되불러들이는 바탕이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의 소설적 특장이던 일상의 세밀한 묘사는 상대적으로 간과될 수밖에 없다. 90년대 이후의 시대적 변화를 염두에 두더라도, ‘손님’에서 제시되는 “증조할머니”의 세계는 “오래된 정원”(‘오래된 정원’)의 시적인 세계(절대적인 공간)만큼이나 현실 속에서 구체화되지 못하는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 이 때문에 “증조할머니”의 세계가 지닌 역설성은 현실적 유효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 소설 속에서만 가능한 고립된 세계로 빠져드는 것이다.

“증조할머니”의 세계에 필요한 것은 아마도 황석영의 초기소설인 ‘삼포가는 길’의 “백화”나 ‘잡초’의 “태금”과 같은 인물들에서 소중하게 다루어진 건강한 여성성의 세계이리라. “백화”와 “태금”의 여성성의 세계가 근대의 남성적인 세계에 의해 추방될 수밖에 없는 세계라 할지라도, 전통을 거슬러서 근대를 다시 살아가야 하는 “증조할머니”의 세계는 여전히 이 “음울한” 근대적 여성성의 세계를 통과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손님’에서 도달한 화해의 세계는 이 여성성의 세계와 다시 한번 어울려 또 다른 화해의 세계로 들어서야 한다. 그것은 남성성이 지배하는 세계에서의 화해보다 더 지난한 과정일 수 있다. 근대가 이미 지워버린 세계를, 혹은 근대가 지우려고 하는 세계를 화해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이 우리가 황석영의 향후 작업을 주목해야 할 실제적인 이유일 것이다.

<끝>

1)황석영, ‘손님’, 창작과 비평사, 2001. 이하 이 책에서 인용할 때는 쪽수만 표기함.

2)김병익, ‘이념의 상잔, 민족의 해원’(‘문학동네’ 2001년 가을호), 성민엽, ‘이데올로기 너머의 화해와 그 원리’(‘창작과 비평’ 2001년 겨울호), 임홍배, ‘주체의 위기와 서사의 회귀’(‘창작과 비평’ 2002년 가을호) 등이 ‘손님’을 다룬 대표적인 평론들인데, 이 평론들은 공통적으로 이념의 화해라는 맥락에 주목하고 있어, 그 이념 너머를 지향하는 여성적 공간의 상징성에 대한 언급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3)대밭에 처음 심는 대나무가 모죽(母竹)이다. 이 대나무가 삼백육십 도 방향으로 뿌리는 뻗어나가면 한 구역의 대숲을 이루는데, 그것은 “밖으로는 각개의 독립된 대나무지만 땅 밑으로는 그 뿌리가 그물망처럼 얽혀 있다.”(황석영, 이문재 대담 ‘문학을 찾아서’, ‘문학동네’ 1999년 봄호, 40쪽 참조) 이질적인 것들의 공존이라 볼 수 있는 ‘모죽의 상상력’은 ‘오래된 정원’과 ‘손님’에 드러나는 여성적 공간의 근간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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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 균형감  

  
응모작 중에서 최종적으로 검토의 대상이 된 작품들은 조재룡씨의 ‘행갈이의 전략과 은유의 시학’, 장사흠씨의 ‘분단의 풍경과 통일의 시학’, 이은석씨의 ‘존재와 의미의 뿌리를 응시하는 글쓰기’, 유한규씨의 ‘이야기의 귀환’, 오홍진씨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넘어 화해하는 길’ 등 다섯편이었다.
조재룡씨의 ‘행갈이의 전략과 은유의 시학’과 장사흠씨의 ‘분단의 풍경과 통일의 시학’두 편은 대상에 대한 치밀한 분석력이 돋보인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조재룡씨의 경우 분석의 대상과 방법이 적실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의 여지가 있었고, 장사흠씨의 경우는 분석 대상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있다는 것이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또 이은석씨의 ‘존재와 의미의 뿌리를 응시하는 글쓰기’는 대상에 대한 안정감 있고 균형 잡힌 서술이 돋보였으나 전체적으로 지나치게 평이하고 무난하게만 기술되고 있다는 점이 불만스러웠다.
성석제의 작품 전체에 대해 포괄적으로 조망하고 있는 유한규씨의 ‘이야기의 귀환’은 우선 힘있으면서도 세련된 문장력이 돋보였다. 웃음과 이야기를 두 개의 키워드로 삼아 성석제의 작품 세계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간취해내는 것도 설득력 있었고, 성석제의 소설이 지니고 있는 특성을 ‘즐거운 담론’이라는 중심개념으로 추출해내는 논리도 그러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를 이야기 문학의 전통과 결합시키는 것이나 근대소설 일반의 논리와 차별적인 것으로 부각시키는 것은 지나치게 안이한 발상으로 보였고, 또한 부적절한 개념과 단어의 구사가 보였다는 점도 감점 요인이었다.
오홍진씨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넘어 화해하는 길’이 지니고 있는 미덕은 평이한 결론에 도달하는 평이하지 않은 분석의 과정을 균형 잡힌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황석영의 ‘손님’을 분석하면서 유명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굿판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이 글의 핵심인데, 죽음에 대한 언설들을 통해 죽음을 넘어서는 ‘손님’의 고유한 방식에 대해 지적하는 대목과 죽음 너머에 존재하고 있는 화해와 상생의 공간으로서의 여성성에 대한 포착들이 설득력이 있었고, 그럼에도 동시에 그러한 화해의 방식 자체가 지니고 있는 현실적 유효성에 대해 지적하고 있는 대목도 적절해 보였다. 군데군데 거친 문장이 흠이었지만 논리적인 견고함이 그런 단점을 상쇄해줄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일장일단이 있어 어느 한편을 택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결국 오홍진씨의 손을 들어주기로 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당선자에게 축하 인사 전한다.
(문학평론가 조남현·서영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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