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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대전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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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부도
심옥녀
오늘 메뉴는 칼국수였다. 폭삭 시어 버린 김치와 칼국수. 얼마 전 바뀐 식당 아줌마는 한달 내내 칼국수만 삶아댔다. 아무래도 할 줄 아는 분식이 칼국수 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구내 식당에서 감자를 넣고 끓인 허여멀건 칼국수로 점심을 때운 팀 동료들은 건물 뒤 주차장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여행을 가기로 했다. 아니 여행이라기보다는 어떤 숙연하고도 슬픈 의식을 치르기 위해 속상한 서울을 벗어나기로 했다. 승용차 한대에 축 늘어진 몸을 실은 일행은 살가운 사람의 장례식에라도 가는 양 씁쓸한 표정으로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나는 안전벨트를 매고 옷가지와 세면도구가 들어있는 검은 배낭을 가슴에 안았다. 불편하지 않겠냐며 밑으로 내려 놓으라는 장(張) 팀장의 말에 나는 무슨 보물단지라도 되는 것처럼 가방을 더 세게 끌어 안았다. 거리를 기웃거리는 높은 건물로 인해 가끔 내 시야는 차단되었고 그럴 때마다 앞 유리에는 거울을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내 모습이 비쳤다. 청태(靑苔) 낀 우물의 얇은 막에 비치는 내 모습은 어깨에 메는 가방 끈이 양쪽으로 벌어져 있어서인지 꼭 죽은 사람의 초상화 같았다. 나는 흐,하고 코웃음을 쳤다. 건조하고 무의미한 도시 주택가 안의 목련 몽우리를 어우르는 삼월의 햇살은 주말여행을 노곤하게 만들었다.
주차장을 벗어나 얼마를 더 달릴 때 까지도 뒤에 앉은 세 사람은 아무 기척이 없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다 보니 이(李) 대리와 권(權)은 머리를 맞대고 불쌍한 표정으로 졸고 있고, 김(金)은 내리쬐는 햇살에 눈이 부신지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볼품없는 서울의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우스갯 소리라도 할까 하다가 별로 신통치 않을 듯해 반쯤 비틀었던 몸을 돌려 앞으로 바로 앉았다.
차가 톨게이트에 다다르기도 전에 나는 눈을 감았다. 사실 잠이 와서 눈을 감았던 건 아니었다. 서울을 빠져 나가는 것이 내게는 지구 대기권을 빠져 나가는 것처럼, 순항하던 비행기가 기류를 만나 곧 땅으로 곤두박질 칠 것 같은 위협을 주는 것처럼, 몸에서 어느 한 부분이 떨어져나가는 느낌이었고 중력을 견디지 못한 목구멍에서는 금방이라도 뭐가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놀이동산의 청룡열차가 거꾸로 돌아가 듯, 뒤로 후진했던 바이킹이 앞으로 내려 갈 때와 같은 느낌을 참을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던 것이었다.
내 어릴 적 가난의 초상이 하루걸러 주식으로 먹던 수제비나 칼국수여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밀가루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침을 거른 나는 잠깐 고민을 하다가 지하식당으로 내려갔다. 습한 식당은 환풍기를 틀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올 때마다 끓여대는 칼국수 때문에 손으로 벽을 만지면 물기가 묻어날 정도였다. 식당아줌마는 선녀인양 연기에 휩싸여 모습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내 얼굴을 보지도 않고 대접 가득 퍼준 칼국수를 뒷사람 그릇에 반쯤 덜어주고 빈자리에 앉자 마자 나도 모르게 또 헛구역질이 나는 것이었다. 칼국수를 푸던 아줌마가 벌떡 일어나고, 젓가락 놀림에 분주하던 사람들이 손을 멈추고 이를 어째, 쟤 아무래도…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깜짝 놀란 내가 속이 안 좋은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고 가슴을 치며 답답해 하자 사람들은 야한 눈초리를 거두고 다시 후루룩거리며 칼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나는 울렁거림의 연유가 혹시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조갯살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젓가락으로 면 발을 살며시 들춰 보았지만 파란색이 조금 섞인 감자와 밀가루를 가늘게 뽑아 놓은 것 외에 다른 첨가물은 없었다.
내가 아이를 가져 입덧을 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음식만 먹을라치면 아니 그보다 시시고 때때로고 거식증을 능가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울렁거림은 아무래도 목젖이 끝나 식도로 연결되는 목울대 어디쯤에 무언가가 걸려도 단단히 걸린 모양이었다. 손으로 목을 더듬어 보았다. 목뼈를 감싸고 있는 얇은 가죽과 들숨과 날숨이 오가고 있는 통로 외에 달리 만져지는 건 없었다. 나는 타액을 혀 안 가득 모았다가 꿀꺽 삼켜보았다. 매끄럽게 넘어가지 않는 것이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곧 나아지겠지 한 것이 벌써 한 달이 가까워온다. 차 바퀴가 빨래판 도로를 지나는 걸 보니 톨게이트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차는 잠깐 멈춰 섰다가 다시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촌스럽게 멀미를 하는 것일까. 나는 창문을 조금 연 다음 중지(中指)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주었다. 손가락을 모아 세워 정수리 부분과 뒤통수도 눌렀다가, 손바닥을 비벼 열을 낸 다음 눈알을 감싸 쥐었다. 눈알을 빼서 찬물로 깨끗이 씻은 다음 다시 끼워 넣으면 이 울렁거림도, 울렁거림을 따라다니는 두통도 한꺼번에 없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순간 나는 참치눈알이 아닐까 생각했다. 목구멍에 걸린 오징어 껍질 같은 미끈한 것이, 미지근한 소금물을 시도 때도 없이 위(胃)로 흘려보내는 것이 참치눈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L물산 영업부 접대가 있던 날, 우리는 구로공단 역에서 내려 컨디션을 하나씩 사 먹었다. 몸에 들어오는 알코올의 농도를 최대한 낮춰 접대를 확실하게 하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라며 장 팀장은 내게 한 병을 더 권했다. 그네들이 나를 여자라고 봐 줄리 만무했고, 행여 내가 그네들보다 먼저 정신을 놓으면 접대는커녕 나 때문에 산통이 깨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말 않고 받아 마셨다. 일기예보에서는 영하 5도라고 하지만 체감온도는 건물 귀퉁이에서 몰려나온 칼바람 때문에 10도는 족히 될 듯 싶었다. 공장에서부터 시작된 예리한 바람은 우리 곁에서 떨어질 줄 모르고 양 볼과 귀를 살살 건드리며 모세혈관을 깨우고 있었다.
약속장소에는 아직 아무도 와있지 않았다. 우리는 작전회의를 시작했다. 무조건 오(吳) 과장을 죽이기로 했다. 다음날 회사에 못 나갈 정도로 흔히 접대란 것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보여주자고 했다. 목에 힘을 주고 다녀 `깁스''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 오 과장은 영업부에서 가장 메리트 좋은 오더를 진행하는 숙녀복 팀장이었다. 지금 받아놓은 스프링 오더만 해도 상반기 실적은 그냥 꿰고 넘어갈 정도로 작년보다 볼륨이 많이 커졌다고 업계에서는 소문이 자자했다. 오 과장을 구워 삶아 오더의 물꼬를 트는 것이 오늘 접대의 목적이었다. 일곱시가 조금 넘자 영업부 직원들이 하나 둘 오기 시작했다. 예의 접대란 것이 술로 시작해서 술로 끝나는 것이었다. 말은 필요 없었다. 남태평양에서 잡았다는 참치 두 마리를 썰어 술안주로 내어 오자 술잔은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물론이고 장 팀장과 출하를 맡고 있는 김은 사람들과 자리를 바꿔 가며 오 과장에게 술을 권했다. 처음에는 알아서 마시겠다며 속도를 늦추던 오 과장은 술이 조금 들어가자 건배, 원 샷을 외치며 정신없이 마시기 시작했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바통을 바꿔쥐며 일어서는 사람들은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컨디션을 마신 우리 세 사람은 혀를 꼬불거리며 취한 척 했지만 여느 때보다 말짱한 정신이었다.
술자리가 거의 끝나 갈 무렵 여덟 명의 사람들 앞에는 작은 종지와 커피 스푼이 하나씩 놓여졌다. 이제 입가심으로 수정과나 식혜, 아니면 참치요리 집만의 독특한 후식거리를 내올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곧 이어 여 종업원이 사람들 앞에 있는 종지에 뭔가 끈끈한 액체를 조금씩 덜어 놓기 시작했다. 아주 까맣고 하얀 미끌미끌한 액체를. 누군가, 그게 뭐예요?하고 묻자 종업원은 소리없이 웃으며, 정력에 좋은 참치 눈알이에요. 손님들이 드신 참치 눈인데 보시다시피 눈(目)이라 조금씩 밖에는 못 드려요. 하며 뭉그러뜨린 참치 눈알을 조금씩 떼서 종지에 덜어 놓았다. 사람들은 신기한 듯 서로 바라만 보다가 누가 먼저 랄 것도 없이 일제히 종지를 들고 입으로 털어넣었다. 나는 순간 구역질이 났지만 손으로 입을 막고 고개를 돌렸다. 다들 입안으로 참치 눈알을 넘긴 터였다. 옆에 앉은 장 팀장은 몇 번 입으로 스푼을 가져갔다가 도로 내려 놓았다. 하긴 장 팀장까지 눈알을 먹었더라면 나는 정말 그 자리에서 토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비위를 견디지 못해 얼음물을 마시고 내려놓자 만취가 된 오 과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성윤씨가 그 눈알 먹으면 내가 이번 시즌 오더 확실히 밀어주지"하며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장 팀장을 바라보았다.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오 과장은 덧붙였다.
좋아, 지금 받아놓은 오더는 물론이고 금년도 매출은 걱정하지 않게 해주지. 어때? 먹어 볼 텐가?"
참치 눈알을 먹은 사람들 눈이 일제히 내게로 쏠렸다.
"오 과장님 나중에 딴소리 안 하실 거죠? 여기 계신 분들이 증인이에요."나는 앞에 놓인 일그러진 참치 눈알에 눈을 맞추고 말했다. 무슨 오기가 났던 것일까. 임원회의 때마다 실적 때문에 깨지는 장 팀장이 안쓰러워서 였을까. 아니면 벌써 다른 업체로 노미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오 과장의 입장을 난처하게 해주고 싶어서 였을까. 어쩌면 지금이 아니면 몸에 좋다는, 은하수처럼 눈이 맑아 진다는 참치 눈알을 먹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에 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씩 웃어주며, 흡사 정액같이 끈끈한 액체가 고여있는 커피 스푼을 입안으로 가져갔다. 나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입안으로 스푼 머리를 감추었다. 사람들은 오오- 놀랐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사실 놀란 건 그네들 보다 나 자신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걸 먹었을까. 참치 눈알을 혀에 내려놓고 스푼을 빼자 바로 구역질이 났지만 나는 미끈한 것을 목안으로 꿀꺽 넘기고야 말았다.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가 감히 영혼의 수정체인 눈을 먹을 수 있을까. 세상을 바라보던 눈을, 바닷속을 조망하던 눈을, 어둠에서 빛이 되는 감각을. 몸에만 좋다면 서로의 눈알을 빼서 먹을지도 모르는 세상이다.
열 한시쯤 참치눈알을 입에 문 나는 네온사인 가득한 구로공단을 벗어났고, 남자들은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미리 예약해 둔 단란주점으로 향했다. 다음날 출근해서 보니 장 팀장과 김은 물론이고 L물산 사람들도 제 시간에 출근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장 팀장의 빈 자리를 보며 이제 오더를 받아서 쳐내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무중력 상태로 옮겨 앉은 나는 행여 운전중인 장 팀장이 따뜻한 봄 날씨에 졸지나 않을까 싶어 눈을 떴다. 턱을 괸 팔꿈치를 창틀에 올려 놓은 장 팀장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있었다. 내가 손으로 눈앞을 한번 쓸어 내리면, 아니 옆구리라도 살짝 찌르면 급 브레이크를 밟을 것처럼 눈만 뜨고 있었지 혼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창문을 열었다. 서울을 출발할 때 보다 바람은 많이 차가워졌고, 멀리 내다보이는 하늘은 조금씩 은빛 구름 이불을 덮고 있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오 과장은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 기온이 쑥 내려간 새벽녘에 집으로 들어간 오 과장은 매우 피곤하다며 잠이 들었다고 했다. 아내가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온 시간까지 곤히 자고있었다 했다. 피로가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오 과장을 그대로 둔 채 아내는 저녁을 짓기 시작했다. 검은 쌀을 조금 넣어 압력솥에 밥을 안치고, 북어를 잘게 뜯어 어슷썰기한 대파와 계란을 넣은 해장국을 끓이고, 갓나온 봄나물을 삶아 무치고, 당신이 좋아하는 겉절이를 먹음직스럽게 버무려 향긋한 식탁을 준비하고 남편을 깨우러 방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한참을 흔들어 깨워도 남편은 시체처럼 꼼짝 않고 누워 있었고, 급히 병원으로 옮겼지만 이미 뇌사상태에 빠진 뒤였다. 의사는 오 과장이 깨어난다고 해도 정상적인 생활은 힘들 거라고 말했다.
중환자실이라 면회도 안되고 병원에 가서 그냥 앉아 있다 오기를 여러 차례, 우리는 오더가 없어서 날마다 깨져도 좋으니 제발 오 과장이 일어나게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날 우리가 접대를 하지만 않았어도, 아니 술잔만 그렇게 건네지 않았어도 지금 오 과장이 이름도 알 수 없는 기계들과 함께 중환자실을 지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게 오 과장의 운명일지도 모르나 그러기엔 다섯 살 난 아이와 서른이 조금 넘은 그의 아내에겐 어떤 식으로 운명을 이야기 해주어야 하는 것일까.
어제 점심 시간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나는 처음에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병원에서 잠깐 보기는 했지만 일부러 마주치지 않았었다. 계단참에서 마주친 그녀에게 누구를 찾아 왔느냐고 묻자 장 팀장의 이름을 대는 것이었다. 따라 오라며 사무실 문을 열고 앞서 걷는데 신발 소리가 나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뒤 돌아 그녀의 발을 보니 신발도 신지 않은 하얀 맨발이었다. 순간 나는 흰 침대에 누워있는 오 과장이 떠올랐다. 그녀는 숨을 몰아 쉬며 내 뒤를 따라왔다. 나도 그 술자리에 함께 있었다는 걸 그녀가 알았더라면 내 머리채를 잡아 챘을지도 모른다. 자리에서 막 일어서는 장 팀장을 보고 내가 걸음을 멈추자 그녀는, 저분이 장 팀장인가요? 하고 내게 물었다. 그녀를 알아 본 장 팀장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낮은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 장 팀장의 옆에 앉았다. 처음에는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더니 그녀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출현으로 사무실은 순식간에 장례식장이 되었다. 그녀는 울다가 흥분한 나머지 장 팀장의 멱살을 잡고 실성한 사람처럼 오열하더니 끝내는 까무러치고 말았다.
앰뷸런스를 불러 오 과장이 있는 병원으로 그녀를 옮겼다. 그녀에게는 어떤 말도 위로가 될 수 없었다.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위로란 가당찮은 말이었다. 그녀는 누구에게 위로나 받자고 온 것이 아니었다. 남편을 그렇게 만든 장본인의 얼굴을 가슴에 새기고 오래도록 저주하며 살아가려고 온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를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그녀였다면 아마 시퍼런 칼을 들어 누군가를 찔러 죽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 생의 전부였던 남편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면.
오과장의 약속대로 우리는 많은 오더를 받아서 진행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 사람을 걸어놓고 받은 오더로 더 이상 매출에 볶이지는 않았으나 차라리 오더가 없었을 때가 우리의 마음이 더 편했는지도 몰랐다.
내가 눈을 떴을 때 차는 막 톨게이트를 빠져 나가고 있었다. 나는 무표정한 장 팀장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 과장님 곧 깨어 나실 거예요."
"그래야지…. 그래 넌 그만두면 무슨 계획이라도 있니?"
"좀 쉬려구요. 다시 이 일은 하기 싫고, 그렇다고 뭐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 할 일이 있겠죠."
미안하단 말꼬리를 흐리면서 장 팀장은 창문을 내리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제 조직 개편의 핫 이슈는 단연 우리 팀의 해체 소식이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뚜껑이 열리고 나니 허탈함은 배가 되어 오는 것 같았다. 우리 팀의 주 바이어였던 L물산이 법정관리 신청을 들어간 게 관건이었다. 법정관리 신청은 비밀리에 진행 되었다. L물산 직원은 물론이고 협력업체 누구고 아무도 몰랐으니 말이다. 뻔뻔하게도 L물산 사장은 수많은 영세업체의 도산과 칠백 명이 넘는 직원들을 위해, 해외에 가동중인 공장의 노무자, 파견 기술자들을 실업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조심스럽게 공문서를 보내왔다. 겉치장을 위해 외형 늘리기에 급급했던 L물산은 그 동안 버팀목도 없는 허울 좋은 다리 위에서 춤을 췄던 것이었다. 사력을 다해 뛰고 있다가 예상치 못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듯한 기분이었다. 한달 동안 실어 낸 오 과장의 오더만해도 오십만 불이 넘었고, 그 동안 받아 놓은 만기가 도래하지 않은 어음까지 해서 십억 가까이 부도를 맞았다. 어쩌면 그게 우리 다섯 명 인생의 부도일지도 몰랐다.
국도로 접어들면서 흐려진 하늘 만큼이나 도로변의 집들은 아직 채 겨울 때를 벗지 못한 듯 우중충해 보였다. 흙 먼지가 잔뜩 낀 간판이며, 아무 생각 없이 마구 지어 논 듯 어울리지 않는 건물들은 금방이라도 우리에게 다가와 시비를 걸 것만 같았다. 군데군데 주택을 개조해 만든 식당은 서로 `원조''를 다투며 바지락을 넣은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집들이었다. 바지락 칼국수, 바지락 수제비, 바지락 파전등등 지나치는 간판들 마다 「원조」란 말은 빼놓지 않고 써 있었다. 과연 누가 원조일까. 도대체 원조가 있기는 한 것일까. 지난 가을 수확을 끝내고는 거들떠 보지 않았을 마른 들판은 서서히 봄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처음 팀 해체식 장소가 거론되었을 때 사실 어딜 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다고 장 팀장은 서울 근교로 장소를 물색해 보라고 했다. 그 무렵 내가 바라던 건 기적 뿐이었다. 오 과장이 생동하는 봄처럼 겨울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기를, 법정 관리가 들어가기 전 계산서를 넣은 오억에 대해서 만이라도 현금이 나오기를, 어깨뼈가 으스러진 듯 힘없이 다니는 장 팀장이 다시 웃음을 찾을 수 있기를 말이다.
수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제부도는 하루에 두 번 바닷물이 갈라지는 `모세의 기적''을 볼 수 있는 곳이라 했다. 나는 어떤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에 언젠가 연인이 생기면 가야지 했던 제부도엘 가자고 했다.
바닷물이 갈라지고 길이 나온 데. 모세의 기적 알지? 그런 거래하고 내가 말했을 때 사람들은 눈이 초롱 해졌었다. 바닷물이 갈라지고 섬으로 들어가는 길이 생긴다니! 다들 모세가 되고 싶었던 것일까. 하지만 `모세''를 간판으로 내건 노래방과 커피숍이 즐비한 곳 입구에 차를 멈추고 보니 어느새 바닷물은 갈라져 까만 배를 드러내 놓고 있었다. 역시 기적은 없는 것일까. 신화나 전설에서만 통용되던 용어였을까. 기적을 찾아 달려왔지만 기적 아닌 실망만이 우리를 반길 뿐이었다. 차에서 내린 동료들은 허망한 표정으로 초라한 바다를 바라보았다. 나는 표를 사기 위해 매표소로 갔다.
"아저씨. 이 길이 그 길 맞아요? 제부도로 들어가는 길요?"
"맞는디… 왜?"
"이 길 말고 혹시 다른 길이 또 있나요?"
"제부도로 들어가는 길은 이길 밖에 없는디."
"그럼 바다가 갈라진다더니 진짜 갈라지고 길이 나온 거예요?"
"허허 참. 그럼 진짜지. 내가 물을 퍼올려 길을 내 놨을까벼?"
"그럼 언제 또 다시 갈라져요?
"저녁 무렵에 물이 차 올랐다가 내일 아침 열 한시 경에 물이 빠지니까 그때 보면 될 거여. 하지만 너무 기대는 안 하는 게 조어. 서울 사람들은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듣고 여길 오는 건지… 쯧쯧… 섬이 다 그렇지 뭐."
아저씨는 별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일행들을 죽 훑어보고 차 번호판을 확인하더니 표를 건네주었다. 나는 더 물어 봐도 별 뾰족한 대답을 듣기는 힘들 것 같아 얼른 표를 받아 들고 차에 올라타며 일행을 향해 말했다.
"이 길이 그 길 맞데. 내일 아침에 다시 기·막·히·게 바닷물이 갈라진다니까 그때 다시 봐야지 뭐."
적어도 오늘 보지 못한 기적은 내일 제부도를 나오는 시간쯤에 다시 볼 수 있을 거라 위로하며 우리는 검은 갯벌 사이에 드러난 길 위를 자석처럼 붙어 건너기 시작했다.
바닷물이 위로 솟구쳤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보고자 했던 사람들 얼굴에는 실망스러운 빛이 역력했다. 멀리 서해 바다가 보였다. 어둡고 쓸쓸한 바다였다. 영혼과 육체가 녹아 든 검은 바다가 지치고 외로운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와 바다를 갈라 놓은 길. 육지와 섬을 연결하는 그 다리에는 그저 길이 있을 뿐이었다. 멈출 수도 없는 길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괜히 사람들을 이곳으로 데려 온 게 아닌가 후회를 했다. 기적은커녕 일말의 빛도 없으니.
주말인데도 제부도를 찾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우리는 섬을 돌아보기로 했다. 섬 둘레는 약 8km라 했다. 볼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비포장 도로를 돌면서 나는 섬을 싸고 도는 건지, 아니면 육지와 육지를 도는 건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아마도 섬이라고 하는 곳 근처에 바다가 없어서 일 것이다. 멀리 도망쳐버린 바다.
나무가 거짓없이 나무이듯이 섬은 섬일 뿐이었다. 제부도란 섬은 하루에 두 번 육지와 연결되는 다리를 끊어버리고 완전한 섬이 된다. 하지만 세상에 완전한 것이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바닷물을 빌려 제 다리를 끊고 섬이 되는 제부도도 어쩌면 물속 깊은 곳에 육지와 닿는 비밀 통로를 가지고 있어 사실은 섬이 아닌 육지일지도 모른다. 완전한 섬도 아닌, 그렇다고 육지도 아닌 제부도. 육지가 잠깐 섬이 되었다가, 섬이 잠깐 육지가 되었다가. 그게 전부일까. 섬을 돌아 다시 바닷가 쪽으로 나오니 서해와는 어울리지 않는 깨끗한 백사장이 보였고, 남쪽 끝에는 기관을 이룬 매바위봉이 장식품처럼 서 있었다. 섬 서쪽에는 끝이 수평선과 맞닿은 것 같은 넓은 갯벌이 펼쳐져 있었다. 섬을 한 바퀴 돌고 난 후, 갯벌 근처에서 나를 내려 논 사람들은 민박 집을 알아본다고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나는 경리과로, 권은 회계팀으로, 김은 경기도에 있는 물류 창고로 그리고 장 팀장과 이 대리는 보직 발령이 났다. 우리는 일괄 사표를 제출했다. 회사에서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새로운 바이어를 개발할 시간도, 사태를 수습할 시간도, 다른 일자리를 찾을 시간도 주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우리를 내 몰았다. 느슨하게 회사생활을 하고 있는 여타 직원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이십대를 바쳐 일한 회사는 너무나도 냉정했다.
우리팀이 공중분해 된 이유는 비단 L물산 때문은 아니었다. 작년에도 한차례 십억 가까이 부도를 맞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어느 정도 그 상처가 아물려고 하자 또다시 터지니 회사에서도 안되겠단 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마이다스(Midas)는 되지 못할 망정 가시 손을 가졌으니 애초에 싹을 자르지 않으면 더 큰 화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였는지도 모르겠다. 작년에 맞은 부도로 장 팀장은 머리가 군데군데 한 움큼씩 빠지는 이상한 병에 걸렸었다. 차라리 미끈한 대머리를 보는 게 나았지 그 머리를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었다. 이제 또 다시 우리네 머리가 숭숭 빠질까, 아니면 한 올도 남김없이 센 백발이 될까.
봄을 싣고 넘실대는 바다 바람은 귓불을 떼내어 버릴 듯 차가웠다. 나는 섬 초입에서부터 매바위봉이 있는데 까지 물이 빠져 검은 흙뿐인 바다를 곁에 두고 걸었다. 발이 푹푹 빠질 것 같은 갯벌은 생각외로 모래알이 촘촘히 박힌 것처럼 희미한 발자국도 남지 않았다. 사람 없는 계절, 을씨년스런 유원지에는 먼지 낀 횟집, 노래방, 사람을 기다리는 민박 집이 전부였다. 바람은 더욱 강해져 모자를 썼음에도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먹장구름을 이고 바다는 천천히 섬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검은 갯벌을 바다에게 조금씩 내어주고 백사장 가까이로 걷기 시작했다.
진흙을 가득 문 검은 바다는 느린 걸음으로 뱉어 놓았던 갯벌을 삼키고 있었다. 저 물을 길어다 말리면 소금 결정체가 아닌 검은 흙이 나올 것 만 같았다. 가끔씩 붉은 해는 구름을 비껴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졌다. 먹이 없어 바닷가를 배회하던 물새들이 줄지어 물 오기를 기다리며 갯벌 위에 서 있었다.
내가 일행들과 만나기로 한 횟집으로 들어서자 사람들 얼굴은 발그레하니 상기되어 있었다. 날 빼놓고 자기네들끼리 어쩌면 그럴 수 있냐고 내가 다그치자, 바닷바람을 맞으며 좀 걸어서 볼이 언 것 뿐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 밖을 바라보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찬 바람을 맞으며 너무 떨어서 인지 몇 잔을 마시자 금방 취기가 올라왔다. 앉은뱅이 탁자 끝에 빈 술병이 볼링 핀처럼 하나씩 놓이기 시작했다. 자신을 비운 빈 병처럼, 헛껍데기 영혼을 가진 우리는 일선의 핀 들일지도 모른다. 쇳덩이에 맞아 쓰러지고 바스라져도 눈물을 훔칠 새도 없이 다시 일어나 육탄전을 계속해야 하는 서러운 핀. 그것은 우리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만취가 되어 횟집을 나왔을 때 바다에는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무런 몸부림도 치지 못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사라지고 마는 무력한 춘설(春雪). 눈은 제법 내리는 듯 싶더니 차가운 어둠은 그 눈마저도 꿀꺽 삼켜버리고 말았다. 더 이상 바다엔, 이 섬엔 어둠 속의 파도소리 밖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마저도. 어쩌면 우리모두. 밤의 파도는 우리를 달래 주고 싶었을 것이다. 겨울 바람은 우리의 영혼을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었을 것이다. 멀어지고 도망가지 말고 내게로 와서 안기라고 어두운 바다의 성난 파도는, 거침없이 불던 바람은 말하는 듯 싶었다.
밤의 유원지는 한 두 사람만을 태운 놀이기구를 가동시키고 있었다. 빈 속에 술을 마셔서 속이 불편한 나는 토하고 싶었으나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아 바이킹을 타자고 사람들을 졸랐다. 다들 이 추운데 무슨 바이킹이냐고 오락이나 하겠다며 오락실로 들어갔다. 나는 입을 쫑긋거리고는 표를 샀다. 손님은 나 혼자였다. 아저씨는 심심하던 차에 오냐 잘 됐다며 어서 타라고 했다. 나는 자리에 앉아서, 아주 오래오래 태워주세요라고 아저씨한테 소리쳤다. 바이킹은 천천히 앞으로, 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꾸로 뒤집힐 때가 되면 목안의 미끌한 것을 토해 버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바이킹의 회전 속도에 맞춰 서해 바다를 향해 소리를 질러댔다. 답답함을 다 쏟아 버리고 싶었다. 그 동안 나를 둘러싸고 있었던 부조리의 틀을 깨버리고 신선한 세상을 만나고 싶었다. 바이킹은 공중에서 그네를 뛰듯 춤을 추었다. 손을 놓으면, 이쯤에서 손을 놓으면 바다로 나를 내던질 수 있으리라. 아저씨는 거의 뒤집힐 정도로 바이킹을 하늘로 띄웠다. 나는 눈을 감았다. 세상이란 둥근 시계 판에 매달린 내가 지구 대기권을 빠져나가는 속력으로 뱅글뱅글 돌려지는 느낌이었다. 어지러움과 희열의 교차. 아, 이제야 정말 세상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 오락실에서 나온 사람들이 기다리다 지쳐 아저씨에게 세워 달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밤새 바이킹을 탔을 것이고, 어쩌면 나는 정말 공중으로, 혹은 검은 바다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잡풀이 우거진 밭 길을 걸어 민박 집에 다다르니 주인 아저씨가 환한 웃음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섬에도 봄이 왔음을 알리는 목련이 몽우리를 맺은 채 마당 한 켠에 서 있었다. 목련나무에서 두 발치쯤 떨어진 곳에는 내 가슴높이까지 얼기설기로 장작을 쌓아 놓았다.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도 MT온 대학생들의 캠프 파이어가 한창이었다. 가벼운 옷차림의 청년들은 불을 에워싸고 어깨동무를 했다. 가끔 고개를 젖혀가며 웃기도 하고 괴성을 지르기도 하는 그들의 얼굴은 하늘의 별과 나무가 타면서 튀는 불꽃과 어우러져 해맑은 소년처럼 보였다.
두꺼운 점퍼를 입은 우리 일행은 오들오들 떨며 장작에 불이 붙여 지기만을 기다렸다. 주인아저씨는 기름을 장작에 붓고는 성냥불을 그어 던졌다. 어두웠던 주위가 환히 밝아왔다. 파도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우리는 언 몸을 녹이고 트렁크에서 술을 꺼내 다시 잔을 들이켰다. 세포 사이사이로 퍼진 알코올이 굳어 버리기를, 그러다가 얼음산을 지키는 주검처럼 온 몸이 싸늘히 식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이대로 의식을 잃어 목련이 다 피어버리고, 잎이 무성하게 돋을 때 까지 오 과장 곁에 누울 수 있기를, 그러다가 끝끝내는 그와 함께 영원히 잠들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불꽃은 활활 하늘로 타오르고 그날 밤처럼 칼바람이 불어 닥치기 시작했다. 섬을 감싸 안은 하늘의 별은 반짝였고, 그 별처럼 반짝이는 삶을 살지 못하는 우리들은 술로써 가슴속 찌꺼기를 희석하려 했다. 불이 사그러질만 하면 주인 아저씨는 기름을 끼얹었다. 모닥불은 잘도 타올랐다. 또 한잔의 술을 들이키며 하늘을 보았을 때 슈웅,하고 유성우(流星雨)가 바다로 떨어졌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술만 취하면 객기를 부리는 이 대리는 아니나 다를까 대학생들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자식들아 시끄러워. 여기 니들이 전세 냈냐. 다행히도 대학생들은 깐죽거리는 이 대리를 무시했지만 그것이 화를 돋웠는지 이 대리는 급기야 마당 가에 있는 수돗가에서 물을 퍼와 그들의 모닥불을 끄고 말았다. 뜯어 말리는 패싸움이 벌어졌고, 허허 웃음으로 지상을 내려다 보던 별들은 무리 지어 서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속이 아파 눈을 떠보니 나는 낯선 방안에 누더기 이불을 덥고 누워있었다. 창 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예사롭지 않은 걸 보니 아침도 한참 전에 깨어버린 아침인 모양이었다. 촌스러운 연두색 커튼을 걷고 밖을 보니 고랑이 어설픈 밭이 보일 뿐이었다. 방문을 열자 방마다 지네가 자고 있는지 복도에는 신발이 정신없이 놓여져 있었다. 나는 낯선 사람들의 신발을 바로잡아 놓고 밖으로 나왔다. 속은 괜찮냐며 반갑게 아는 척을 하는 주인 아저씨는 타다 남은 장작과 잿더미에 파묻혀 있는 술병과 마당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쓰레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나는 아저씨와 함께 어제의 삭막한 잔해를 치우면서, 저 많은 신발 중에 누군가 하나는 주인을 잃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바람은 여전히 찼지만 하늘은 언제 그렇게 흐렸었나 싶을 정도로 맑게 개어 있었다. 나는 섬 가장자리를 찾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언제 뒤따라 왔는지 아저씨는 나를 불러 세우고 내가 걷고 있는 반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길로 곧장 가야 바닷가가 나오는데. 지금 가면 서서히 물이 빠지기 시작할 거야. 어서 가 봐."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아저씨는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저씨의 얼굴은 그 자체가 미소였다. 어떻게 살아야 저 아저씨처럼 얼굴에 미소를 새기며 살아갈 수 있을까. 얼마나 웃고, 얼마나 많은 행복을 느껴야 얼굴에 자연히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까. 나는 지금껏 살면서 이 아저씨처럼 미소가 가득한 선한 얼굴은, 부처님 얼굴보다 더 자비로워 보이는 얼굴은 본 적이 없다. 웃지 않아도 웃고 있는 얼굴, 화를 낼래야 낼 수 없는 얼굴. 살아온 삶이 비단 여유롭고 행복하지 만은 않았을 텐데, 저런 미소를 지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나는 모르긴 몰라도 지금 이대로 살아간다면 마귀할멈 같은 가면을 쓰게 될 것이다. 이 일을 하며 사람들과 육탄전을 계속하는 한, 아니 이 일을 접고 다른 일을 한다손 치더라도 나는 저 아저씨의 미소 십분의 일도 얼굴에 그릴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미소와 여유가 없는 내 인생은 실패작이 될 것이다. 발걸음을 떼 놓을 때마다 속은 울렁거렸다. 아직은 섬인 바닷가 근처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열 한시쯤 물이 빠질 거라고 했다. 바닷물을 구성하는 염분때문인지 바닷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속은 견딜 수 없이 울렁거렸다. 섬을 만들었던 바다는 천천히 물러나고 물 속에 잠겼던 어제의 길이 다시 드러나기 시작했다. 내 눈앞에 펼쳐지는 기적은 전혀 기적답지 못했다. 코웃음을 친 나는, 이게 바로 그 모세의 기적이래하며 아무것도 없는 바다를 향해 소리 내어 크게 웃어 주었다. 그리 깊지 않던 물이 천천히 빠지고 내 앞에는 촉촉한 갯벌이 드러나고 있었다. 나는 얼마를 더 웃다가 토(吐)를 하고 말았다. 속안의 답답한 것들을 발가벗은 갯벌위로 다 토해버리고 말았다. 목안의 물컹한 것이 `퉁''하고 갯벌 속으로 떨어졌다. 속을 비우고 나니 울렁거림도 없어진 듯 했다. 눈앞을 가득 채웠던 바다는 어느새 사라지고 검은 갯벌이 아침 햇살에 반사되어 금가루를 뿌려 논 듯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태양이 찬란한 쪽빛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울 거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 쪽빛 바다보다 더 황홀하게 내 눈앞에 펼쳐진 검은 갯벌은, 우리가 건너가야 할 길을, 또 다른 세상과 만나는 길을 온통 금빛으로 장식해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를 표류하던 섬은, 막막한 바다의 외로움을 달래 주던 섬은 이제 자신을 버려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고 육지가 되었다.
떠있어서 더 아름다웠을지도 모르는 섬 제부도는 이렇게 육지가 되어 갯벌처럼 까맣게 탄 우리의 심장을 쪽빛 바다보다 더 빛나게 다져주는지도 몰랐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심호흡을 하고, 멀리 서해바다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입가에 머문 눈물을 손으로 훔치고 왔던 길을 되짚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금가루가 뿌려진 개펄을 본 적이 있느냐고, 다름아닌 모세의 기적은 여기에 있었노라고. 다시 물이 차오르기 전에 우리가 건너가야 할 길을 두려움 없이 건너가자고. 아직도 무거운 머리로 자고 있을 사람들을 깨워 금빛 갯벌을 보여주자고. 내 등을 떠미는 햇살은 목 언저리를 간지럽히며 무대 위의 조명처럼 나를 따라 왔다. - 끝 -
심사평
"플롯·성격화 뛰어나… 더욱 정진해주길"
응모작들은 화소(話素)의 공통성이 돋보였다. 페르조나(가면)를 소재로 한 작품군과 80년대 식의 노사분규, 광주 민주화항쟁등 민중문학 계열의 소재, 그리고 불륜 혹은 비일상적인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있었다. 이들 작품은 상투성과 기교 때문에 생동감과 통일성을 잃은 것이 단점이었다.
본선에 올라왔던 작품은 네 편이었다. 고수종의 `존재의 초상''은 인간의 사회학적 역할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사는 현대인을 묘사했으나 주제의식이 강해서 리얼리티를 훼손한 것이 약점으로 지적되었다. 오용운의 `날개''와 장정렬의 `달빛을 타고 하얗게 부서지는 유과'', 심옥녀의 `제부도''도 비교적 좋은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오용운의 `날개''는 낯선 소재를 부각시키는데 중점을 두었으며, 장정렬의 작품은 기교가 승하여 통일성과 필연성을 해쳤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남은 작품이 ''제부도''였다.
심옥녀의 ''제부도''는 플롯이 자연스럽고, 성격화에도 성공했다. 배경을 통해 플롯의 변화를 이루는 것도 좋은 착상이었다. 특히 구조조정을 당한 인물을 시골출신 여성으로 설정한 시점도 작품의 효과를 높여주었다. 그러나 결말 부분에서 센티멘탈리즘의 경향으로 흐른 것이 단점으로 남았다. 더욱 정진할 것을 기대하며 당선작으로 뽑았다.
(심사위원 : 소설가 임관수·김수남)
심옥녀
오늘 메뉴는 칼국수였다. 폭삭 시어 버린 김치와 칼국수. 얼마 전 바뀐 식당 아줌마는 한달 내내 칼국수만 삶아댔다. 아무래도 할 줄 아는 분식이 칼국수 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구내 식당에서 감자를 넣고 끓인 허여멀건 칼국수로 점심을 때운 팀 동료들은 건물 뒤 주차장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여행을 가기로 했다. 아니 여행이라기보다는 어떤 숙연하고도 슬픈 의식을 치르기 위해 속상한 서울을 벗어나기로 했다. 승용차 한대에 축 늘어진 몸을 실은 일행은 살가운 사람의 장례식에라도 가는 양 씁쓸한 표정으로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나는 안전벨트를 매고 옷가지와 세면도구가 들어있는 검은 배낭을 가슴에 안았다. 불편하지 않겠냐며 밑으로 내려 놓으라는 장(張) 팀장의 말에 나는 무슨 보물단지라도 되는 것처럼 가방을 더 세게 끌어 안았다. 거리를 기웃거리는 높은 건물로 인해 가끔 내 시야는 차단되었고 그럴 때마다 앞 유리에는 거울을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내 모습이 비쳤다. 청태(靑苔) 낀 우물의 얇은 막에 비치는 내 모습은 어깨에 메는 가방 끈이 양쪽으로 벌어져 있어서인지 꼭 죽은 사람의 초상화 같았다. 나는 흐,하고 코웃음을 쳤다. 건조하고 무의미한 도시 주택가 안의 목련 몽우리를 어우르는 삼월의 햇살은 주말여행을 노곤하게 만들었다.
주차장을 벗어나 얼마를 더 달릴 때 까지도 뒤에 앉은 세 사람은 아무 기척이 없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다 보니 이(李) 대리와 권(權)은 머리를 맞대고 불쌍한 표정으로 졸고 있고, 김(金)은 내리쬐는 햇살에 눈이 부신지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볼품없는 서울의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우스갯 소리라도 할까 하다가 별로 신통치 않을 듯해 반쯤 비틀었던 몸을 돌려 앞으로 바로 앉았다.
차가 톨게이트에 다다르기도 전에 나는 눈을 감았다. 사실 잠이 와서 눈을 감았던 건 아니었다. 서울을 빠져 나가는 것이 내게는 지구 대기권을 빠져 나가는 것처럼, 순항하던 비행기가 기류를 만나 곧 땅으로 곤두박질 칠 것 같은 위협을 주는 것처럼, 몸에서 어느 한 부분이 떨어져나가는 느낌이었고 중력을 견디지 못한 목구멍에서는 금방이라도 뭐가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놀이동산의 청룡열차가 거꾸로 돌아가 듯, 뒤로 후진했던 바이킹이 앞으로 내려 갈 때와 같은 느낌을 참을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던 것이었다.
내 어릴 적 가난의 초상이 하루걸러 주식으로 먹던 수제비나 칼국수여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밀가루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침을 거른 나는 잠깐 고민을 하다가 지하식당으로 내려갔다. 습한 식당은 환풍기를 틀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올 때마다 끓여대는 칼국수 때문에 손으로 벽을 만지면 물기가 묻어날 정도였다. 식당아줌마는 선녀인양 연기에 휩싸여 모습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내 얼굴을 보지도 않고 대접 가득 퍼준 칼국수를 뒷사람 그릇에 반쯤 덜어주고 빈자리에 앉자 마자 나도 모르게 또 헛구역질이 나는 것이었다. 칼국수를 푸던 아줌마가 벌떡 일어나고, 젓가락 놀림에 분주하던 사람들이 손을 멈추고 이를 어째, 쟤 아무래도…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깜짝 놀란 내가 속이 안 좋은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고 가슴을 치며 답답해 하자 사람들은 야한 눈초리를 거두고 다시 후루룩거리며 칼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나는 울렁거림의 연유가 혹시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조갯살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젓가락으로 면 발을 살며시 들춰 보았지만 파란색이 조금 섞인 감자와 밀가루를 가늘게 뽑아 놓은 것 외에 다른 첨가물은 없었다.
내가 아이를 가져 입덧을 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음식만 먹을라치면 아니 그보다 시시고 때때로고 거식증을 능가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울렁거림은 아무래도 목젖이 끝나 식도로 연결되는 목울대 어디쯤에 무언가가 걸려도 단단히 걸린 모양이었다. 손으로 목을 더듬어 보았다. 목뼈를 감싸고 있는 얇은 가죽과 들숨과 날숨이 오가고 있는 통로 외에 달리 만져지는 건 없었다. 나는 타액을 혀 안 가득 모았다가 꿀꺽 삼켜보았다. 매끄럽게 넘어가지 않는 것이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곧 나아지겠지 한 것이 벌써 한 달이 가까워온다. 차 바퀴가 빨래판 도로를 지나는 걸 보니 톨게이트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차는 잠깐 멈춰 섰다가 다시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촌스럽게 멀미를 하는 것일까. 나는 창문을 조금 연 다음 중지(中指)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주었다. 손가락을 모아 세워 정수리 부분과 뒤통수도 눌렀다가, 손바닥을 비벼 열을 낸 다음 눈알을 감싸 쥐었다. 눈알을 빼서 찬물로 깨끗이 씻은 다음 다시 끼워 넣으면 이 울렁거림도, 울렁거림을 따라다니는 두통도 한꺼번에 없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순간 나는 참치눈알이 아닐까 생각했다. 목구멍에 걸린 오징어 껍질 같은 미끈한 것이, 미지근한 소금물을 시도 때도 없이 위(胃)로 흘려보내는 것이 참치눈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L물산 영업부 접대가 있던 날, 우리는 구로공단 역에서 내려 컨디션을 하나씩 사 먹었다. 몸에 들어오는 알코올의 농도를 최대한 낮춰 접대를 확실하게 하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라며 장 팀장은 내게 한 병을 더 권했다. 그네들이 나를 여자라고 봐 줄리 만무했고, 행여 내가 그네들보다 먼저 정신을 놓으면 접대는커녕 나 때문에 산통이 깨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말 않고 받아 마셨다. 일기예보에서는 영하 5도라고 하지만 체감온도는 건물 귀퉁이에서 몰려나온 칼바람 때문에 10도는 족히 될 듯 싶었다. 공장에서부터 시작된 예리한 바람은 우리 곁에서 떨어질 줄 모르고 양 볼과 귀를 살살 건드리며 모세혈관을 깨우고 있었다.
약속장소에는 아직 아무도 와있지 않았다. 우리는 작전회의를 시작했다. 무조건 오(吳) 과장을 죽이기로 했다. 다음날 회사에 못 나갈 정도로 흔히 접대란 것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보여주자고 했다. 목에 힘을 주고 다녀 `깁스''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 오 과장은 영업부에서 가장 메리트 좋은 오더를 진행하는 숙녀복 팀장이었다. 지금 받아놓은 스프링 오더만 해도 상반기 실적은 그냥 꿰고 넘어갈 정도로 작년보다 볼륨이 많이 커졌다고 업계에서는 소문이 자자했다. 오 과장을 구워 삶아 오더의 물꼬를 트는 것이 오늘 접대의 목적이었다. 일곱시가 조금 넘자 영업부 직원들이 하나 둘 오기 시작했다. 예의 접대란 것이 술로 시작해서 술로 끝나는 것이었다. 말은 필요 없었다. 남태평양에서 잡았다는 참치 두 마리를 썰어 술안주로 내어 오자 술잔은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물론이고 장 팀장과 출하를 맡고 있는 김은 사람들과 자리를 바꿔 가며 오 과장에게 술을 권했다. 처음에는 알아서 마시겠다며 속도를 늦추던 오 과장은 술이 조금 들어가자 건배, 원 샷을 외치며 정신없이 마시기 시작했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바통을 바꿔쥐며 일어서는 사람들은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컨디션을 마신 우리 세 사람은 혀를 꼬불거리며 취한 척 했지만 여느 때보다 말짱한 정신이었다.
술자리가 거의 끝나 갈 무렵 여덟 명의 사람들 앞에는 작은 종지와 커피 스푼이 하나씩 놓여졌다. 이제 입가심으로 수정과나 식혜, 아니면 참치요리 집만의 독특한 후식거리를 내올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곧 이어 여 종업원이 사람들 앞에 있는 종지에 뭔가 끈끈한 액체를 조금씩 덜어 놓기 시작했다. 아주 까맣고 하얀 미끌미끌한 액체를. 누군가, 그게 뭐예요?하고 묻자 종업원은 소리없이 웃으며, 정력에 좋은 참치 눈알이에요. 손님들이 드신 참치 눈인데 보시다시피 눈(目)이라 조금씩 밖에는 못 드려요. 하며 뭉그러뜨린 참치 눈알을 조금씩 떼서 종지에 덜어 놓았다. 사람들은 신기한 듯 서로 바라만 보다가 누가 먼저 랄 것도 없이 일제히 종지를 들고 입으로 털어넣었다. 나는 순간 구역질이 났지만 손으로 입을 막고 고개를 돌렸다. 다들 입안으로 참치 눈알을 넘긴 터였다. 옆에 앉은 장 팀장은 몇 번 입으로 스푼을 가져갔다가 도로 내려 놓았다. 하긴 장 팀장까지 눈알을 먹었더라면 나는 정말 그 자리에서 토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비위를 견디지 못해 얼음물을 마시고 내려놓자 만취가 된 오 과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성윤씨가 그 눈알 먹으면 내가 이번 시즌 오더 확실히 밀어주지"하며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장 팀장을 바라보았다.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오 과장은 덧붙였다.
좋아, 지금 받아놓은 오더는 물론이고 금년도 매출은 걱정하지 않게 해주지. 어때? 먹어 볼 텐가?"
참치 눈알을 먹은 사람들 눈이 일제히 내게로 쏠렸다.
"오 과장님 나중에 딴소리 안 하실 거죠? 여기 계신 분들이 증인이에요."나는 앞에 놓인 일그러진 참치 눈알에 눈을 맞추고 말했다. 무슨 오기가 났던 것일까. 임원회의 때마다 실적 때문에 깨지는 장 팀장이 안쓰러워서 였을까. 아니면 벌써 다른 업체로 노미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오 과장의 입장을 난처하게 해주고 싶어서 였을까. 어쩌면 지금이 아니면 몸에 좋다는, 은하수처럼 눈이 맑아 진다는 참치 눈알을 먹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에 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씩 웃어주며, 흡사 정액같이 끈끈한 액체가 고여있는 커피 스푼을 입안으로 가져갔다. 나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입안으로 스푼 머리를 감추었다. 사람들은 오오- 놀랐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사실 놀란 건 그네들 보다 나 자신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걸 먹었을까. 참치 눈알을 혀에 내려놓고 스푼을 빼자 바로 구역질이 났지만 나는 미끈한 것을 목안으로 꿀꺽 넘기고야 말았다.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가 감히 영혼의 수정체인 눈을 먹을 수 있을까. 세상을 바라보던 눈을, 바닷속을 조망하던 눈을, 어둠에서 빛이 되는 감각을. 몸에만 좋다면 서로의 눈알을 빼서 먹을지도 모르는 세상이다.
열 한시쯤 참치눈알을 입에 문 나는 네온사인 가득한 구로공단을 벗어났고, 남자들은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미리 예약해 둔 단란주점으로 향했다. 다음날 출근해서 보니 장 팀장과 김은 물론이고 L물산 사람들도 제 시간에 출근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장 팀장의 빈 자리를 보며 이제 오더를 받아서 쳐내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무중력 상태로 옮겨 앉은 나는 행여 운전중인 장 팀장이 따뜻한 봄 날씨에 졸지나 않을까 싶어 눈을 떴다. 턱을 괸 팔꿈치를 창틀에 올려 놓은 장 팀장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있었다. 내가 손으로 눈앞을 한번 쓸어 내리면, 아니 옆구리라도 살짝 찌르면 급 브레이크를 밟을 것처럼 눈만 뜨고 있었지 혼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창문을 열었다. 서울을 출발할 때 보다 바람은 많이 차가워졌고, 멀리 내다보이는 하늘은 조금씩 은빛 구름 이불을 덮고 있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오 과장은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 기온이 쑥 내려간 새벽녘에 집으로 들어간 오 과장은 매우 피곤하다며 잠이 들었다고 했다. 아내가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온 시간까지 곤히 자고있었다 했다. 피로가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오 과장을 그대로 둔 채 아내는 저녁을 짓기 시작했다. 검은 쌀을 조금 넣어 압력솥에 밥을 안치고, 북어를 잘게 뜯어 어슷썰기한 대파와 계란을 넣은 해장국을 끓이고, 갓나온 봄나물을 삶아 무치고, 당신이 좋아하는 겉절이를 먹음직스럽게 버무려 향긋한 식탁을 준비하고 남편을 깨우러 방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한참을 흔들어 깨워도 남편은 시체처럼 꼼짝 않고 누워 있었고, 급히 병원으로 옮겼지만 이미 뇌사상태에 빠진 뒤였다. 의사는 오 과장이 깨어난다고 해도 정상적인 생활은 힘들 거라고 말했다.
중환자실이라 면회도 안되고 병원에 가서 그냥 앉아 있다 오기를 여러 차례, 우리는 오더가 없어서 날마다 깨져도 좋으니 제발 오 과장이 일어나게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날 우리가 접대를 하지만 않았어도, 아니 술잔만 그렇게 건네지 않았어도 지금 오 과장이 이름도 알 수 없는 기계들과 함께 중환자실을 지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게 오 과장의 운명일지도 모르나 그러기엔 다섯 살 난 아이와 서른이 조금 넘은 그의 아내에겐 어떤 식으로 운명을 이야기 해주어야 하는 것일까.
어제 점심 시간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나는 처음에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병원에서 잠깐 보기는 했지만 일부러 마주치지 않았었다. 계단참에서 마주친 그녀에게 누구를 찾아 왔느냐고 묻자 장 팀장의 이름을 대는 것이었다. 따라 오라며 사무실 문을 열고 앞서 걷는데 신발 소리가 나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뒤 돌아 그녀의 발을 보니 신발도 신지 않은 하얀 맨발이었다. 순간 나는 흰 침대에 누워있는 오 과장이 떠올랐다. 그녀는 숨을 몰아 쉬며 내 뒤를 따라왔다. 나도 그 술자리에 함께 있었다는 걸 그녀가 알았더라면 내 머리채를 잡아 챘을지도 모른다. 자리에서 막 일어서는 장 팀장을 보고 내가 걸음을 멈추자 그녀는, 저분이 장 팀장인가요? 하고 내게 물었다. 그녀를 알아 본 장 팀장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낮은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 장 팀장의 옆에 앉았다. 처음에는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더니 그녀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출현으로 사무실은 순식간에 장례식장이 되었다. 그녀는 울다가 흥분한 나머지 장 팀장의 멱살을 잡고 실성한 사람처럼 오열하더니 끝내는 까무러치고 말았다.
앰뷸런스를 불러 오 과장이 있는 병원으로 그녀를 옮겼다. 그녀에게는 어떤 말도 위로가 될 수 없었다.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위로란 가당찮은 말이었다. 그녀는 누구에게 위로나 받자고 온 것이 아니었다. 남편을 그렇게 만든 장본인의 얼굴을 가슴에 새기고 오래도록 저주하며 살아가려고 온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를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그녀였다면 아마 시퍼런 칼을 들어 누군가를 찔러 죽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 생의 전부였던 남편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면.
오과장의 약속대로 우리는 많은 오더를 받아서 진행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 사람을 걸어놓고 받은 오더로 더 이상 매출에 볶이지는 않았으나 차라리 오더가 없었을 때가 우리의 마음이 더 편했는지도 몰랐다.
내가 눈을 떴을 때 차는 막 톨게이트를 빠져 나가고 있었다. 나는 무표정한 장 팀장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 과장님 곧 깨어 나실 거예요."
"그래야지…. 그래 넌 그만두면 무슨 계획이라도 있니?"
"좀 쉬려구요. 다시 이 일은 하기 싫고, 그렇다고 뭐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 할 일이 있겠죠."
미안하단 말꼬리를 흐리면서 장 팀장은 창문을 내리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제 조직 개편의 핫 이슈는 단연 우리 팀의 해체 소식이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뚜껑이 열리고 나니 허탈함은 배가 되어 오는 것 같았다. 우리 팀의 주 바이어였던 L물산이 법정관리 신청을 들어간 게 관건이었다. 법정관리 신청은 비밀리에 진행 되었다. L물산 직원은 물론이고 협력업체 누구고 아무도 몰랐으니 말이다. 뻔뻔하게도 L물산 사장은 수많은 영세업체의 도산과 칠백 명이 넘는 직원들을 위해, 해외에 가동중인 공장의 노무자, 파견 기술자들을 실업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조심스럽게 공문서를 보내왔다. 겉치장을 위해 외형 늘리기에 급급했던 L물산은 그 동안 버팀목도 없는 허울 좋은 다리 위에서 춤을 췄던 것이었다. 사력을 다해 뛰고 있다가 예상치 못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듯한 기분이었다. 한달 동안 실어 낸 오 과장의 오더만해도 오십만 불이 넘었고, 그 동안 받아 놓은 만기가 도래하지 않은 어음까지 해서 십억 가까이 부도를 맞았다. 어쩌면 그게 우리 다섯 명 인생의 부도일지도 몰랐다.
국도로 접어들면서 흐려진 하늘 만큼이나 도로변의 집들은 아직 채 겨울 때를 벗지 못한 듯 우중충해 보였다. 흙 먼지가 잔뜩 낀 간판이며, 아무 생각 없이 마구 지어 논 듯 어울리지 않는 건물들은 금방이라도 우리에게 다가와 시비를 걸 것만 같았다. 군데군데 주택을 개조해 만든 식당은 서로 `원조''를 다투며 바지락을 넣은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집들이었다. 바지락 칼국수, 바지락 수제비, 바지락 파전등등 지나치는 간판들 마다 「원조」란 말은 빼놓지 않고 써 있었다. 과연 누가 원조일까. 도대체 원조가 있기는 한 것일까. 지난 가을 수확을 끝내고는 거들떠 보지 않았을 마른 들판은 서서히 봄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처음 팀 해체식 장소가 거론되었을 때 사실 어딜 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다고 장 팀장은 서울 근교로 장소를 물색해 보라고 했다. 그 무렵 내가 바라던 건 기적 뿐이었다. 오 과장이 생동하는 봄처럼 겨울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기를, 법정 관리가 들어가기 전 계산서를 넣은 오억에 대해서 만이라도 현금이 나오기를, 어깨뼈가 으스러진 듯 힘없이 다니는 장 팀장이 다시 웃음을 찾을 수 있기를 말이다.
수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제부도는 하루에 두 번 바닷물이 갈라지는 `모세의 기적''을 볼 수 있는 곳이라 했다. 나는 어떤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에 언젠가 연인이 생기면 가야지 했던 제부도엘 가자고 했다.
바닷물이 갈라지고 길이 나온 데. 모세의 기적 알지? 그런 거래하고 내가 말했을 때 사람들은 눈이 초롱 해졌었다. 바닷물이 갈라지고 섬으로 들어가는 길이 생긴다니! 다들 모세가 되고 싶었던 것일까. 하지만 `모세''를 간판으로 내건 노래방과 커피숍이 즐비한 곳 입구에 차를 멈추고 보니 어느새 바닷물은 갈라져 까만 배를 드러내 놓고 있었다. 역시 기적은 없는 것일까. 신화나 전설에서만 통용되던 용어였을까. 기적을 찾아 달려왔지만 기적 아닌 실망만이 우리를 반길 뿐이었다. 차에서 내린 동료들은 허망한 표정으로 초라한 바다를 바라보았다. 나는 표를 사기 위해 매표소로 갔다.
"아저씨. 이 길이 그 길 맞아요? 제부도로 들어가는 길요?"
"맞는디… 왜?"
"이 길 말고 혹시 다른 길이 또 있나요?"
"제부도로 들어가는 길은 이길 밖에 없는디."
"그럼 바다가 갈라진다더니 진짜 갈라지고 길이 나온 거예요?"
"허허 참. 그럼 진짜지. 내가 물을 퍼올려 길을 내 놨을까벼?"
"그럼 언제 또 다시 갈라져요?
"저녁 무렵에 물이 차 올랐다가 내일 아침 열 한시 경에 물이 빠지니까 그때 보면 될 거여. 하지만 너무 기대는 안 하는 게 조어. 서울 사람들은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듣고 여길 오는 건지… 쯧쯧… 섬이 다 그렇지 뭐."
아저씨는 별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일행들을 죽 훑어보고 차 번호판을 확인하더니 표를 건네주었다. 나는 더 물어 봐도 별 뾰족한 대답을 듣기는 힘들 것 같아 얼른 표를 받아 들고 차에 올라타며 일행을 향해 말했다.
"이 길이 그 길 맞데. 내일 아침에 다시 기·막·히·게 바닷물이 갈라진다니까 그때 다시 봐야지 뭐."
적어도 오늘 보지 못한 기적은 내일 제부도를 나오는 시간쯤에 다시 볼 수 있을 거라 위로하며 우리는 검은 갯벌 사이에 드러난 길 위를 자석처럼 붙어 건너기 시작했다.
바닷물이 위로 솟구쳤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보고자 했던 사람들 얼굴에는 실망스러운 빛이 역력했다. 멀리 서해 바다가 보였다. 어둡고 쓸쓸한 바다였다. 영혼과 육체가 녹아 든 검은 바다가 지치고 외로운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와 바다를 갈라 놓은 길. 육지와 섬을 연결하는 그 다리에는 그저 길이 있을 뿐이었다. 멈출 수도 없는 길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괜히 사람들을 이곳으로 데려 온 게 아닌가 후회를 했다. 기적은커녕 일말의 빛도 없으니.
주말인데도 제부도를 찾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우리는 섬을 돌아보기로 했다. 섬 둘레는 약 8km라 했다. 볼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비포장 도로를 돌면서 나는 섬을 싸고 도는 건지, 아니면 육지와 육지를 도는 건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아마도 섬이라고 하는 곳 근처에 바다가 없어서 일 것이다. 멀리 도망쳐버린 바다.
나무가 거짓없이 나무이듯이 섬은 섬일 뿐이었다. 제부도란 섬은 하루에 두 번 육지와 연결되는 다리를 끊어버리고 완전한 섬이 된다. 하지만 세상에 완전한 것이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바닷물을 빌려 제 다리를 끊고 섬이 되는 제부도도 어쩌면 물속 깊은 곳에 육지와 닿는 비밀 통로를 가지고 있어 사실은 섬이 아닌 육지일지도 모른다. 완전한 섬도 아닌, 그렇다고 육지도 아닌 제부도. 육지가 잠깐 섬이 되었다가, 섬이 잠깐 육지가 되었다가. 그게 전부일까. 섬을 돌아 다시 바닷가 쪽으로 나오니 서해와는 어울리지 않는 깨끗한 백사장이 보였고, 남쪽 끝에는 기관을 이룬 매바위봉이 장식품처럼 서 있었다. 섬 서쪽에는 끝이 수평선과 맞닿은 것 같은 넓은 갯벌이 펼쳐져 있었다. 섬을 한 바퀴 돌고 난 후, 갯벌 근처에서 나를 내려 논 사람들은 민박 집을 알아본다고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나는 경리과로, 권은 회계팀으로, 김은 경기도에 있는 물류 창고로 그리고 장 팀장과 이 대리는 보직 발령이 났다. 우리는 일괄 사표를 제출했다. 회사에서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새로운 바이어를 개발할 시간도, 사태를 수습할 시간도, 다른 일자리를 찾을 시간도 주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우리를 내 몰았다. 느슨하게 회사생활을 하고 있는 여타 직원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이십대를 바쳐 일한 회사는 너무나도 냉정했다.
우리팀이 공중분해 된 이유는 비단 L물산 때문은 아니었다. 작년에도 한차례 십억 가까이 부도를 맞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어느 정도 그 상처가 아물려고 하자 또다시 터지니 회사에서도 안되겠단 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마이다스(Midas)는 되지 못할 망정 가시 손을 가졌으니 애초에 싹을 자르지 않으면 더 큰 화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였는지도 모르겠다. 작년에 맞은 부도로 장 팀장은 머리가 군데군데 한 움큼씩 빠지는 이상한 병에 걸렸었다. 차라리 미끈한 대머리를 보는 게 나았지 그 머리를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었다. 이제 또 다시 우리네 머리가 숭숭 빠질까, 아니면 한 올도 남김없이 센 백발이 될까.
봄을 싣고 넘실대는 바다 바람은 귓불을 떼내어 버릴 듯 차가웠다. 나는 섬 초입에서부터 매바위봉이 있는데 까지 물이 빠져 검은 흙뿐인 바다를 곁에 두고 걸었다. 발이 푹푹 빠질 것 같은 갯벌은 생각외로 모래알이 촘촘히 박힌 것처럼 희미한 발자국도 남지 않았다. 사람 없는 계절, 을씨년스런 유원지에는 먼지 낀 횟집, 노래방, 사람을 기다리는 민박 집이 전부였다. 바람은 더욱 강해져 모자를 썼음에도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먹장구름을 이고 바다는 천천히 섬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검은 갯벌을 바다에게 조금씩 내어주고 백사장 가까이로 걷기 시작했다.
진흙을 가득 문 검은 바다는 느린 걸음으로 뱉어 놓았던 갯벌을 삼키고 있었다. 저 물을 길어다 말리면 소금 결정체가 아닌 검은 흙이 나올 것 만 같았다. 가끔씩 붉은 해는 구름을 비껴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졌다. 먹이 없어 바닷가를 배회하던 물새들이 줄지어 물 오기를 기다리며 갯벌 위에 서 있었다.
내가 일행들과 만나기로 한 횟집으로 들어서자 사람들 얼굴은 발그레하니 상기되어 있었다. 날 빼놓고 자기네들끼리 어쩌면 그럴 수 있냐고 내가 다그치자, 바닷바람을 맞으며 좀 걸어서 볼이 언 것 뿐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 밖을 바라보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찬 바람을 맞으며 너무 떨어서 인지 몇 잔을 마시자 금방 취기가 올라왔다. 앉은뱅이 탁자 끝에 빈 술병이 볼링 핀처럼 하나씩 놓이기 시작했다. 자신을 비운 빈 병처럼, 헛껍데기 영혼을 가진 우리는 일선의 핀 들일지도 모른다. 쇳덩이에 맞아 쓰러지고 바스라져도 눈물을 훔칠 새도 없이 다시 일어나 육탄전을 계속해야 하는 서러운 핀. 그것은 우리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만취가 되어 횟집을 나왔을 때 바다에는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무런 몸부림도 치지 못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사라지고 마는 무력한 춘설(春雪). 눈은 제법 내리는 듯 싶더니 차가운 어둠은 그 눈마저도 꿀꺽 삼켜버리고 말았다. 더 이상 바다엔, 이 섬엔 어둠 속의 파도소리 밖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마저도. 어쩌면 우리모두. 밤의 파도는 우리를 달래 주고 싶었을 것이다. 겨울 바람은 우리의 영혼을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었을 것이다. 멀어지고 도망가지 말고 내게로 와서 안기라고 어두운 바다의 성난 파도는, 거침없이 불던 바람은 말하는 듯 싶었다.
밤의 유원지는 한 두 사람만을 태운 놀이기구를 가동시키고 있었다. 빈 속에 술을 마셔서 속이 불편한 나는 토하고 싶었으나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아 바이킹을 타자고 사람들을 졸랐다. 다들 이 추운데 무슨 바이킹이냐고 오락이나 하겠다며 오락실로 들어갔다. 나는 입을 쫑긋거리고는 표를 샀다. 손님은 나 혼자였다. 아저씨는 심심하던 차에 오냐 잘 됐다며 어서 타라고 했다. 나는 자리에 앉아서, 아주 오래오래 태워주세요라고 아저씨한테 소리쳤다. 바이킹은 천천히 앞으로, 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꾸로 뒤집힐 때가 되면 목안의 미끌한 것을 토해 버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바이킹의 회전 속도에 맞춰 서해 바다를 향해 소리를 질러댔다. 답답함을 다 쏟아 버리고 싶었다. 그 동안 나를 둘러싸고 있었던 부조리의 틀을 깨버리고 신선한 세상을 만나고 싶었다. 바이킹은 공중에서 그네를 뛰듯 춤을 추었다. 손을 놓으면, 이쯤에서 손을 놓으면 바다로 나를 내던질 수 있으리라. 아저씨는 거의 뒤집힐 정도로 바이킹을 하늘로 띄웠다. 나는 눈을 감았다. 세상이란 둥근 시계 판에 매달린 내가 지구 대기권을 빠져나가는 속력으로 뱅글뱅글 돌려지는 느낌이었다. 어지러움과 희열의 교차. 아, 이제야 정말 세상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 오락실에서 나온 사람들이 기다리다 지쳐 아저씨에게 세워 달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밤새 바이킹을 탔을 것이고, 어쩌면 나는 정말 공중으로, 혹은 검은 바다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잡풀이 우거진 밭 길을 걸어 민박 집에 다다르니 주인 아저씨가 환한 웃음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섬에도 봄이 왔음을 알리는 목련이 몽우리를 맺은 채 마당 한 켠에 서 있었다. 목련나무에서 두 발치쯤 떨어진 곳에는 내 가슴높이까지 얼기설기로 장작을 쌓아 놓았다.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도 MT온 대학생들의 캠프 파이어가 한창이었다. 가벼운 옷차림의 청년들은 불을 에워싸고 어깨동무를 했다. 가끔 고개를 젖혀가며 웃기도 하고 괴성을 지르기도 하는 그들의 얼굴은 하늘의 별과 나무가 타면서 튀는 불꽃과 어우러져 해맑은 소년처럼 보였다.
두꺼운 점퍼를 입은 우리 일행은 오들오들 떨며 장작에 불이 붙여 지기만을 기다렸다. 주인아저씨는 기름을 장작에 붓고는 성냥불을 그어 던졌다. 어두웠던 주위가 환히 밝아왔다. 파도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우리는 언 몸을 녹이고 트렁크에서 술을 꺼내 다시 잔을 들이켰다. 세포 사이사이로 퍼진 알코올이 굳어 버리기를, 그러다가 얼음산을 지키는 주검처럼 온 몸이 싸늘히 식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이대로 의식을 잃어 목련이 다 피어버리고, 잎이 무성하게 돋을 때 까지 오 과장 곁에 누울 수 있기를, 그러다가 끝끝내는 그와 함께 영원히 잠들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불꽃은 활활 하늘로 타오르고 그날 밤처럼 칼바람이 불어 닥치기 시작했다. 섬을 감싸 안은 하늘의 별은 반짝였고, 그 별처럼 반짝이는 삶을 살지 못하는 우리들은 술로써 가슴속 찌꺼기를 희석하려 했다. 불이 사그러질만 하면 주인 아저씨는 기름을 끼얹었다. 모닥불은 잘도 타올랐다. 또 한잔의 술을 들이키며 하늘을 보았을 때 슈웅,하고 유성우(流星雨)가 바다로 떨어졌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술만 취하면 객기를 부리는 이 대리는 아니나 다를까 대학생들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자식들아 시끄러워. 여기 니들이 전세 냈냐. 다행히도 대학생들은 깐죽거리는 이 대리를 무시했지만 그것이 화를 돋웠는지 이 대리는 급기야 마당 가에 있는 수돗가에서 물을 퍼와 그들의 모닥불을 끄고 말았다. 뜯어 말리는 패싸움이 벌어졌고, 허허 웃음으로 지상을 내려다 보던 별들은 무리 지어 서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속이 아파 눈을 떠보니 나는 낯선 방안에 누더기 이불을 덥고 누워있었다. 창 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예사롭지 않은 걸 보니 아침도 한참 전에 깨어버린 아침인 모양이었다. 촌스러운 연두색 커튼을 걷고 밖을 보니 고랑이 어설픈 밭이 보일 뿐이었다. 방문을 열자 방마다 지네가 자고 있는지 복도에는 신발이 정신없이 놓여져 있었다. 나는 낯선 사람들의 신발을 바로잡아 놓고 밖으로 나왔다. 속은 괜찮냐며 반갑게 아는 척을 하는 주인 아저씨는 타다 남은 장작과 잿더미에 파묻혀 있는 술병과 마당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쓰레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나는 아저씨와 함께 어제의 삭막한 잔해를 치우면서, 저 많은 신발 중에 누군가 하나는 주인을 잃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바람은 여전히 찼지만 하늘은 언제 그렇게 흐렸었나 싶을 정도로 맑게 개어 있었다. 나는 섬 가장자리를 찾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언제 뒤따라 왔는지 아저씨는 나를 불러 세우고 내가 걷고 있는 반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길로 곧장 가야 바닷가가 나오는데. 지금 가면 서서히 물이 빠지기 시작할 거야. 어서 가 봐."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아저씨는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저씨의 얼굴은 그 자체가 미소였다. 어떻게 살아야 저 아저씨처럼 얼굴에 미소를 새기며 살아갈 수 있을까. 얼마나 웃고, 얼마나 많은 행복을 느껴야 얼굴에 자연히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까. 나는 지금껏 살면서 이 아저씨처럼 미소가 가득한 선한 얼굴은, 부처님 얼굴보다 더 자비로워 보이는 얼굴은 본 적이 없다. 웃지 않아도 웃고 있는 얼굴, 화를 낼래야 낼 수 없는 얼굴. 살아온 삶이 비단 여유롭고 행복하지 만은 않았을 텐데, 저런 미소를 지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나는 모르긴 몰라도 지금 이대로 살아간다면 마귀할멈 같은 가면을 쓰게 될 것이다. 이 일을 하며 사람들과 육탄전을 계속하는 한, 아니 이 일을 접고 다른 일을 한다손 치더라도 나는 저 아저씨의 미소 십분의 일도 얼굴에 그릴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미소와 여유가 없는 내 인생은 실패작이 될 것이다. 발걸음을 떼 놓을 때마다 속은 울렁거렸다. 아직은 섬인 바닷가 근처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열 한시쯤 물이 빠질 거라고 했다. 바닷물을 구성하는 염분때문인지 바닷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속은 견딜 수 없이 울렁거렸다. 섬을 만들었던 바다는 천천히 물러나고 물 속에 잠겼던 어제의 길이 다시 드러나기 시작했다. 내 눈앞에 펼쳐지는 기적은 전혀 기적답지 못했다. 코웃음을 친 나는, 이게 바로 그 모세의 기적이래하며 아무것도 없는 바다를 향해 소리 내어 크게 웃어 주었다. 그리 깊지 않던 물이 천천히 빠지고 내 앞에는 촉촉한 갯벌이 드러나고 있었다. 나는 얼마를 더 웃다가 토(吐)를 하고 말았다. 속안의 답답한 것들을 발가벗은 갯벌위로 다 토해버리고 말았다. 목안의 물컹한 것이 `퉁''하고 갯벌 속으로 떨어졌다. 속을 비우고 나니 울렁거림도 없어진 듯 했다. 눈앞을 가득 채웠던 바다는 어느새 사라지고 검은 갯벌이 아침 햇살에 반사되어 금가루를 뿌려 논 듯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태양이 찬란한 쪽빛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울 거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 쪽빛 바다보다 더 황홀하게 내 눈앞에 펼쳐진 검은 갯벌은, 우리가 건너가야 할 길을, 또 다른 세상과 만나는 길을 온통 금빛으로 장식해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를 표류하던 섬은, 막막한 바다의 외로움을 달래 주던 섬은 이제 자신을 버려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고 육지가 되었다.
떠있어서 더 아름다웠을지도 모르는 섬 제부도는 이렇게 육지가 되어 갯벌처럼 까맣게 탄 우리의 심장을 쪽빛 바다보다 더 빛나게 다져주는지도 몰랐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심호흡을 하고, 멀리 서해바다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입가에 머문 눈물을 손으로 훔치고 왔던 길을 되짚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금가루가 뿌려진 개펄을 본 적이 있느냐고, 다름아닌 모세의 기적은 여기에 있었노라고. 다시 물이 차오르기 전에 우리가 건너가야 할 길을 두려움 없이 건너가자고. 아직도 무거운 머리로 자고 있을 사람들을 깨워 금빛 갯벌을 보여주자고. 내 등을 떠미는 햇살은 목 언저리를 간지럽히며 무대 위의 조명처럼 나를 따라 왔다. - 끝 -
심사평
"플롯·성격화 뛰어나… 더욱 정진해주길"
응모작들은 화소(話素)의 공통성이 돋보였다. 페르조나(가면)를 소재로 한 작품군과 80년대 식의 노사분규, 광주 민주화항쟁등 민중문학 계열의 소재, 그리고 불륜 혹은 비일상적인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있었다. 이들 작품은 상투성과 기교 때문에 생동감과 통일성을 잃은 것이 단점이었다.
본선에 올라왔던 작품은 네 편이었다. 고수종의 `존재의 초상''은 인간의 사회학적 역할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사는 현대인을 묘사했으나 주제의식이 강해서 리얼리티를 훼손한 것이 약점으로 지적되었다. 오용운의 `날개''와 장정렬의 `달빛을 타고 하얗게 부서지는 유과'', 심옥녀의 `제부도''도 비교적 좋은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오용운의 `날개''는 낯선 소재를 부각시키는데 중점을 두었으며, 장정렬의 작품은 기교가 승하여 통일성과 필연성을 해쳤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남은 작품이 ''제부도''였다.
심옥녀의 ''제부도''는 플롯이 자연스럽고, 성격화에도 성공했다. 배경을 통해 플롯의 변화를 이루는 것도 좋은 착상이었다. 특히 구조조정을 당한 인물을 시골출신 여성으로 설정한 시점도 작품의 효과를 높여주었다. 그러나 결말 부분에서 센티멘탈리즘의 경향으로 흐른 것이 단점으로 남았다. 더욱 정진할 것을 기대하며 당선작으로 뽑았다.
(심사위원 : 소설가 임관수·김수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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