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추천작품

2003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작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장
댓글 0건 조회 3,364회 작성일 03-01-04 23:07

본문

식(食)의 정치학, 우주적 상상력-천운영론

한민주  



1. 난폭한 욕망이 호출한 식욕, 성욕
성적 쾌감을 인간의 것으로만 규정짓는 일반상식을 전복시킬만한 사례가 동물의 세계에도 존재한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암컷 사마귀는 교미하는 도중에 자신의 배우자를 잡아먹는다. 더 놀라운 것은 자신의 몸이 암컷의 입 속으로 먹혀 들어가는 동안도 수컷의 성기는 성행위를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죽음과 함께 하는 섹스. 어찌 보면 이는 작은 죽음의 연속으로 섹스를 말하던 바타이유의 죽음충동을 극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장면 같다. 게다가 파트너의 성행위 동안 상대의 몸을 먹이감으로 대체하여 탐식하는 암컷의 괴기스러움이라니. 이를 단순히 동물의 번식본능으로만 일축할 수 있을까. 이러한 양상은 문학의 경우에도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위험스럽고 공포스러운 여성의 이미지들, 그리고 30년대 이상의 소설이나 여타의 소설들에서 사용되는 살기 어린 '여왕봉'의 이미지는 나약한 남성들을 위협하는 것으로 재현된다. 그렇다면 여성혐오증을 발현하는 양상의 다른 한편에 성적 오르가즘의 불안과 열망의 양가성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기존의 텍스트들을 살필 때, 위험한 여성의 자리엔 변칙적인 성과 육체의 밑바닥까지 드러내는 욕망이 자리한다. 욕망이 어떤 결핍에서 생겨나는 활동임을 전제로 한다면 욕망이란 생래적인 성질상 난폭하다고 황종연{{) 황종연, "탈승화의 리얼리즘-윤성희와 천운영의 소설-", (『문학동네』, 2001, 가을, 28호), p. 414.

}}은 보고 있다. 이는 욕망이 궁극적으로 욕망에 대한 결핍을 의미하는 모든 타자를 절멸시키고 욕망의 환상과 일치하도록 세계를 변형시키려는 활동이기 때문이며, 욕망에 저항하고 욕망으로부터 살아남는 세계의 능력에 대한 원통한 인식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욕망과 살기는 구분되지 않는다. 그리고 또 살기 어린 욕망은 잠재적인 폭력성을 담고 있다. 폭력과 식욕, 그리고 성적 욕망은 천운영의 소설에서 행위의 기본적인 동기들로 서로 매개되어 있다.

난폭하고 살기 어린 욕망과 취향의 표현은 흔히 추의 미학이나 그로테스크의 미학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러한 미학은 우리의 감정을 불편하고도 낯설게 만드는 어떤 소외된 세계의 표현으로 자리한다. 이 미학 속에는 익숙한 현실을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게 함으로써 형식주의가 주장하는 '낯설게 하기'의 방식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이 세계를 낯설게 한다. 이러한 엽기적 욕망과 취향은 존재와 세계의 심연에 드리워져 있는 부조리와 모순을 한편으로는 유희적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공포스러움으로 응시한다. 일종의 도발과 전복을 수행하는 불온한 상상력을 토대로 하여 그로테스크적인 추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미적 승화의 원리'나 '숭고의 미'에 대한 강박관념을 무시하고 도전하는 것이다. 천운영은 난폭하고 살기 어린 욕망의 표현을 주로 식욕과 음식 먹기로 그려내고 있다.

엄마는 이사다닐 때마다 정육점 위치를 먼저 알아냈다. 이십여년 공장일에 힘든 아버지의 밥상을 위해서였다. 1994 꼴찌. 점심에는 깻잎을 듬뿍 넣고 끓인 라면을 먹었고, 저녁에는 싱싱한 굴과 호박전에 막걸리를 마셨다. [작가의 말](『바늘』, 창작과 비평사, 200, p.4.

인용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작품을 묶어내는 작품집의 서두에서 시작하는 작가의 말이 음식담론으로 꾸며지고 있다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이를 발판으로 하여, 천운영은 자신의 작품에서 먹기에 대한 상당한 조예를 보여준다. 천운영 소설 속 그녀들이 먹는 것은 야채 샐러드나 과일, 아니면 현대적이고 고급스런 음식물들이 아닌, 동물성의 육식이다. 그래서, 그녀들은 공격적이다. 일상생활에서 먹는다는 행위는 단순히 삶의 연장을 위한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먹기의 즐거움, 포식자와 피식자, 먹을 수 있는 사람과 먹지 못하는 사람의 관계에서 쾌락과 권력에 맞닿아 있다. 다시 말해서 폭력과 식욕, 거기다 섹슈얼리티까지 모두 권력과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천운영의 소설에서 먹기는 권력의 메타포로 사용되고 또 여성과 남성간의 관계를 탐색하는 극도로 미묘한 도구로서 이용되기도 한다. 권력자는 그들 자신의 먹기로 인해 특화되고, 권력 없는 자는 그들이 안 먹는 것으로 특화된다. 먹기만이 유일한 그리고 가장 우세한 권력 메타포인 것은 아니다. 젠더의 성적 우세성도 이 권력 관계에 포함된다. 여성이 자신의 정체성과 권위를 상실했을 때, 그녀는 먹을 능력을 상실한다. 그녀의 먹지 않음은 자신의 무력함의 신체적 표현이며, 동시에, 무력함에 대항함이다. 뿐만 아니라 여성의 성욕 역시 지배당하고 억압당한다. 따라서 먹기와 성적 관계, 즉 섹슈얼리티의 상관관계는 그녀의 작품에서 상당히 정치적으로 기여할 수밖에 없다. 먹기의 정치 분석은 천운영 소설 읽기의 새로운 방식, 즉 여성이 식품과 맺는 관계 이해의 새로운 방식을 제공할 것이다.

이 글은 천운영 소설에서 음식 먹기가 권력의 메타포로서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살펴, 여성이 자신의 권력을 주장하는 방식을 어떻게 다루는가를 규명해 보려 한다.

2. 신체의 욕망과 혐오, 경계 해체적 욕망
우선, 식탐을 부리거나 섬세하게 뼈에서 살을 발라내는 여자들은 어떤 여자들인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천운영의 소설에는 예쁜 여자가 나오지 않는다. 그녀들은 늙고 추한 모습을 하고 있다.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곱추를 연상케 할 정도로 둥그렇게 붙은 목과 등의 살덩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목소리, 뭉뚱한 발가락'(「바늘」), '검은 옷과 흰 머리칼의 그녀가 혹시 유령의 집에 속한 하나의 장식품이 아닐까'(「유령의 집」)라 생각할지 모를 형상이거나 혹은 불구의 이미지를 갖는다. 「월경」의 '내 몸에서 자라는 것은 머리통뿐이다. 이 순간에도 쑥쑥 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커다란 머리통은 곱추의 등허리처럼 부담스럽고 거치적거리기만 한다'라고 하며 성장이 멈춘 소녀라든지, '몸을 돌리다가 둥그렇게 솟은 어깨와 등의 굴곡을 보고 만다. 등을 잠시 잊고 있었다. 내 등은 수수께끼다. 사막의 비밀을 간직한 낙타의 등'을 가진 「포옹」의 꼽추 여인은 신체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못생기고 늙었거나 신체적인 장애를 갖고 있는 그녀들은 혐오감을 수반하면서 아웃사이더의 숙명적인 일탈성을 그 자질로 갖고 있다. 그녀들의 신체적 비정상성은 자신들의 삶의 소외와 주변성을 동시에 상징하고 있다. 따라서 비정상성과 주변성으로 인해 소외된 신체에 고착된 여성의 섹슈얼리티 역시 도착적인 방식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다.

여자는 뼈가 유난히 도드라졌다. 동그랗게 솟은 어깨뼈와 새가슴, 시폰감의 치마 사이로 드러난 무릎뼈와 퀭하니 드러난 발목의 복사뼈까지. 여자가 무언가 강렬히 억누르고 있거나 모욕을 견뎌 낼 때 그 뼈들은 시위를 하듯 일제히 솟아올랐다. 그때마다 남자의 몸 깊은 곳에서는 여자를 능멸하고 짓밟고 싶은 충동이 더욱더 강렬히 솟구치곤 했다. 그것은 몸 속 깊이 숨은 종양덩이와 같아서 남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한한 번식력으로 자라났다. 그러나 지금 남자의 눈 속에 들어 있는 여자의 뼈들은 몹시 매혹적으로까지 보인다. 남자를 질식시키고 불쾌하게 만들었던 뼈들이 갑자기 매력적인 것으로 반전이 이루어진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 (「등뼈」, p. 137.

불구적인 신체의 이미지는 그 신체를 바라보는 시선에 의해 능멸당하고 짓밟힐 수 있는 대상이지만, 그 혐오감은 폭력과 광기적인 욕망의 형식을 빌려 매혹의 대상으로 변화되기도 한다. 이러한 인식은 엽기적인 대상물에 대한 양가적인 심리 기제와 동 궤에 놓고 생각할 수 있다. 역겨움이 수반하는 쾌감과 매력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관능은 정상적인 시선으로 돌아왔을 때 모욕적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작가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해체하려는 여성적 욕망을 제시하여 경계의 비극성을 초월해 보려 한다.

천운영의 『바늘』에 실린 아홉 편의 소설들에는 여러 쌍의 대립적 이미지들이 나타나 있다.「바늘」에서 전쟁기념관에 근무하는 연약한 사내가 자신의 속성과는 반대되는 강함(전쟁, 무기)에 이끌리거나, 추한 외모의 문신사인 '나'가 화려하고 아름다운 무늬들을 몸에 새긴다는 설정, 「숨」에서 할머니의 육식동물 이미지와 미연의 초식동물 이미지의 대립, 또 「월경」에서 비옥한 대지와도 같은 계집의 몸과 불모적이고 황폐한 '나'의 몸의 대립, 「행복고물상」에서 마조히스트 남편과 사디스트 아내의 대립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대립적 이미지는 작품의 구조적 이분법을 통해 경계를 두드러지게 한다. 서사에서 실제 경계와 암시적 경계를 넘나드는 용이함은 인물을 특성화하고 텍스트적 영역을 구성하며 비극에 있어서 구조적 요소로 작용한다. 비극적 숙명론을 담보하는 <경계>는 주인공이 자신의 개인적 의지로 공동의 제한에 반하여 어떤 집단이나 사회의 규정을 위반해서 나아갈 것이라고 주장할 때 서사를 극화시키는 중요한 모티프가 된다.

어떻게 저 길을 건널까. 그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는 철로를 건너야만 한다. 철로를 건너 사거리를 지나 동쪽으로 가다보면 그가 있는 곳에 닿을 수 있다. 어둠 속에 철로의 가느다란 다리가 보인다. 철로를 향해 결음을 떼어본다. 철로에 가까이 갈수록 강한 전류가 느껴진다. 철로를 밟는 순간 몇만 볼트의 전기에 감전돼 새카맣게 타버릴 것 같다. 철로는 강력한 힘으로 나를 밀쳐내고만 있다. 언젠가 기차가 다시 오게 되면 저 길을 건널 수 있을까.(「월경」, p. 76.

「월경」에서 '철로'라는 경계선의 설정은 경계선 이편의 '나'를 고착화시키는 형식이 된다. 경계선을 넘지 못하는 '나'는 몸의 생장점마저 멈추어 버려, '젖가슴은 열세 살 몽우리로 남아 있고 키도 150센티미터가 안 된다. 열두 살에 시작한 생리도 이젠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 그녀의 몸에서 자라는 것은 머리통뿐이다. 사회적인 금기나 속박으로 인해 경계선을 넘는다는 것은 이단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지적, 이성적 힘의 상징인 머리통만 자라는 경계선 이편의 '나'가 끊임없이 '달'과 '은행나무'를 통한 섹슈얼리티에의 경도 때문에 '철로' 저편으로의 <월경>을 꿈꾸는 것 역시 이단적이다. 이러한 내용상의 대립에서 대립의 한 축은 언제나 추하거나 그로테스크하거나 혹은 불구적인 지대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추하거나 불구적인 속성들은 그 반대의 것들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기에 더욱 아름답다는 것이 천운영의 논리이다.

「눈보라콘」에서의 '눈보라콘'과 '부라보콘'의 대립은 강/약, 미/추, 진/위간의 대립이기도 하다. 그런데 천운영이 설정해 놓은 이들 항 사이의 빗금은 너무나도 선명해 넘기 어려운 빗금인 것 같으나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눈보라콘 속에는 부라보콘을 향한 욕망과 열망이 들어 있'기에 눈보라콘을 좋아하는 나의 생각처럼 '눈보라콘에는 다른 가짜들과는 구분되는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한다.' 따라서 천운영이 소설 곳곳에 설정해 놓은 빗금, 경계선들은 그것을 넘고자 하는 열망들을 위해 마련된 뜀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계선 해체의 욕망들은 대칭구조를 해체하며 작품의 균형을 잡아 나아간다. 그렇다면 경계 해체적 여성 욕망은 어떠한 형식을 취하는가. 거기에는 우주적인 여성성이 마련되어 있다.

나는 그의 가슴에 새끼손가락만한 바늘을 하나 그려주었다. 티타늄으로 그린 바늘은 어찌 보면 작은 틈새 같았다. 어린 여자아이의 성기같은 얇은 틈새. 그 틈으로 우주가 빨려들어갈 것 같다. 그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기를 가슴에 품고 있다. 가장 얇으면서 가장 강하고 부드러운 바늘. (「바늘」, p. 33.

심호흡을 한번 하고 철길을 넘어선다. 그리고 그가 걸었던 길을 조심조심 밟아 걷는다. 발을 디딜 때마다 잠든 곤충들의 낮은 숨소리가 들린다. 집으로부터 한없이 멀어지는 내 머리 위로 무수히 달빛이 쏟아진다. 더 이상 차오를 수 없는 보름달은 스스로 몸을 허물어 경계를 지우리라. (「월경」, p. 83.

「바늘」에서 추하게 생긴 문신사 '나'가 약한 그에게 강함의 상징으로 그려 준 것은 '바늘'이다. 남성의 강함에 대한 열망이 바늘을 통해 얻어진다는 것과 그 바늘의 생김이 '어린 여자아이의 성기'같다는 것은 여성성의 강력함을 나타낸다. '우주가 빨려들어갈 것 같'은 그 틈새는 바로 여성성의 상징적 비유이자, 경계선 극복의 수단 역시 여성성임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대칭적 이미지의 통합 가능성을 여성성에서 찾고자 하는 방식은 섹슈얼리티에 대한 사회적 금기와 터부의 경계선 해체로도 나타난다. 푸코의 계보학적 연구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성의 성이 발견된 것은 그리 오래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없다. 그만큼 성 담론은 남성의 것으로 지배되어 왔고, 성적 주체라고 했을 때, 그 속에 여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회적 금기는 여성을 섹슈얼리티의 측면에서도 속박하였는데, 이러한 속박과 경계의 해체 욕망은「월경」의 경우 '나'가 철로 바깥으로 '월경'하는 순간 드러난다. 성적 이미지의 하나인 '보름달'이 '스스로 몸을 허물어 경계를 지우'는 것은 욕망의 본원성 혹은 원시성으로 향하는 것이다. 따라서,「월경」에서 지속적으로 섹슈얼리티를 상징하던 '달'의 상징은 '越境'과 '月經'의 상징성을 통해 우주적인 여성 순환 원리와 경계 이탈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천운영 소설에서 '틈새'와 '越境'이라는 경계 넘기는 형식적 완성미를 구현하는 미학적 자질을 갖추게 된다.

3. 폭력적 육식성과 동물적 관능, 야성적 여성성
현대 여성 소설에서 음식물 테마의 중요성은 간과되어선 안 된다. 천운영 소설의 여주인공들은 세계를 음식에 비추어서 해석하고, 음식을 통한 삶의 방식으로 산다. 음식 상상력은 소설들에 스며들어 있고, 사람들, 풍경, 그리고 감정을 묘사하기 위해 여성 주인공이 사용하는 주요 메타포가 되어 왔다. 여성은 음식을 언어로 연상하는데,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그들이 언제나 음식과 연계되어 왔기 때문이다. 먹기의 정치학의 중요성은 구순부 이미지에 의해 담보된다. 이는 입술에 그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인데, 전통적으로 입은 여성 취약성의 장소이다. 때문에, 남성은 여성의 입을 침투하고 지배한다. 이 부분에서 입은 권력의 잠재적 원천이 되고 있다. 또 치아 역시 권력의 고유한 상징이 된다. 무엇보다 인간은 치아가 없으면 먹질 못한다. 어떤 여주인공들은 자기네 치아를 깨끗이 하는 것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기도 한다. 일례로, 신경숙의「풍금이 있던 자리」에서 '그 여자'는 자신의 심리적 불안과 반성을 위해 반복해서 양치질을 했었다. 그리고 치아의 고통은 인물의 심리적 반영물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 권력이 개입되면, 권력자는 자신의 치아를 드러내는 동시에 권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반면에 힘이 없는 자는 치아가 없을 수도 있다. 게다가 먹기는 성담론과 연결되어 있다. '먹는다'라는 말은 속어로 성적 상대와의 결합을 의미한다. 그리고 포식자와 피식자의 권력적인 관계가 젠더적 우위성, 매저키즘과 사디즘의 성적 권력 관계마저 함축하고 있다. 이처럼 먹기와 신체의 이미지는 권력과 성을 통해 주체를 구성하는 주요 인자가 된다.

음식을 먹는 행위는 권력 행사이자 섹슈얼리티와 맞물려 있기에 에로틱할 수 있다.「눈보라콘」에서의 아이스크림 역시 에로틱한 의미자질을 함유한다. 아이스크림에 대한 나의 탐닉은 명백히 성적인 것이다. '손가락 한마디쯤 되는 부라보콘 뿔을 입에 넣는 순간, 정신의 한 부분이 내 몸을 이탈해 무한한 공간 속으로 빨려가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머니의 젖꼭지를 물고 있는 듯 편안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아쉬우면서도 만족스러운 마지막 한 입, 그 허망하면서도 풍만한 달콤함. 별안간 사타구니가 뜨뜻해져온다. 팬티가 축축하다.' 여기에서 부라보콘의 성적 매력이 소년에게는 도발적인 것이라기보다 어머니의 부드러운 여성성에 닿아 있다. 녹꽃을 다룰 줄 아는 어머니의 부드러운 손은 바로 그 안에 얼음을 품고 있는 부드러운 아이스크림과 비유적 관계를 이룬다. 그런데 소년에게 있어 어머니의 여성성이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여성성인 것처럼, 부라보콘의 매력은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높이에 있다. 어머니와 부라보콘은 그렇게 가질 수 없는 동경과 숭배의 대상으로서 존재한다.

「등뼈」에서 생선과 닭을 유난히 좋아하던 여자는 '생선살을 잘 발라 내 남자의 밥 위에 올려 주고 나서 생선뼈에 남은 작은 살들을 발라내 쪽쪽 소리를 내며 빨아먹곤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난 여자의 접시에는 잘 발라낸 뼈들만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남자가 왜 구질구질하게 그런 걸 먹느냐고 묻자, 여자는 '뼈에 가장 가까운 살'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어느 날 사라진 여자가 '그 등뼈에 숨어 남자의 등을 하염없이 쓰다듬고 있'다는 결말은 애정의 권력관계에서 우월했던 남성의 상황이 역전되어 여성의 포용성에 흡수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권력관계의 전복을 보이기 위해 시도된 것이 육식성이다. 부재하는 또는 결핍된 것들에 대한 열망을 그리는 욕망과 섹슈얼리티는 그 자체의 미끄러짐을 통한 난폭성 때문에 광기를 띨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 광기를 육식성으로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숨」에서는 할머니와 손자 사이에서의 권력투쟁에 초점을 두며, 이러한 투쟁이 음식물에 집중되는 것으로 재현하고 있다. 할머니는 손자의 삶과 정체성을 지배하려 든다. 그래서 그녀는 손자에게 자신의 권위를 확인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그녀의 권력은 자신의 왕성한 육식 섭취에 의해 상징화된다. 따라서, 소골을 손질해서 먹는 '그녀의 눈 속에는 먹잇감을 공격하기 위해 적절한 시기를 고르는 포식자의 집요함이 들어 있다.' 작가는 자신의 소설들에서 여성 포식자의 권력을 육식성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천운영이 그려낸 어떤 그녀들은 난폭하기까지 하다.

아내는 지금쯤 돼지찌개를 퍼먹고 있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내는 끼니를 거르지 않는다. 두터운 입술에 생선가시를 붙이고 갈치의 비린 맛을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 나를 때린 뒤 아내의 식욕은 무서울 정도로 왕성해진다. 소진된 몸을 보강하기라도 하려는 듯 아내는 막무가내로 먹어댄다. (「행복고물상」, p. 167.

그녀들은 관습적인 의미의 여성성과는 정반대의 동물적인 공격성을 보인다. 그래서 천운영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자들이 하는 일도 예사롭지 않다. 그녀들은 소골을 손질하거나(「숨」), 곰장어의 껍질을 벗기거나 (「당신의 바다」), 남자의 몸에 문신을 새긴다(「바늘」). 이런 여성들의 폭력성이 잘 드러나는 곳은 그들의 식성이다. 흥미롭게도, 그녀들은 대부분 육식을 즐긴다. '할머니는 모든 병을 육식으로 치료한다'(「숨」), '양념하지 않은 고기를 먹는다. 손가락 두께로 썰어서 피가 살짝 날 정도로 구운 쇠고기나 마늘과 양파를 많이 넣고 삶은 돼지고기를 좋아'(「바늘」)하거나, '뼈에 붙은 살을 좋아한다.' 이들의 식성은 탐미가의 미적 쾌감을 수반하는 경지에까지 오른 듯 하다. 그녀들에게 먹는다는 행위는 단순히 생계를 위한 목적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닭튀김을 먹을 때 여자는 다리나 날개 가슴살을 거들떠보지 않고 먹기 힘든 부분만 먹었다. 다리 마디에 붙어 있는 살이나 닭 갈비뼈 따위들'(「등뼈」)을 발라내어 먹는 섬세함은 매니아의 경지에 오른 자만이 가능한 식습관이다. 이러한 육식에 대한 집착은 그녀들의 본능적인 동물적 욕구를 반영하며, 외부세계에 대한 공격성과 적의를 암시하는 것이다.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여자도 있다. 남편에게 주기적인 폭행을 일삼는 아내의 식욕은 그야말로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재현된다. '나를 때린 뒤 아내의 식욕은 무서울 정도로 왕성해진다. 소진된 몸을 보강하기라도 하려는 듯 아내는 막무가내로 먹어댄다'.(「행복고물상」) 아내는 야생의 초원을 가졌다. 아내의 몸속에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맹수와 성난 발길질을 하는 암말과 살진 들소가 산다. 맹수의 시체를 향해 덤벼드는 검은머리독수리와 독수리에 쫓기는 연약한 새도 있다. (p. 164.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 서술자는 여자에게 야생동물의 이미지를 입히고 있다. 왜냐하면, 비이성적이고 난폭한 행위들은 어떤 내적 억압의 분출이라고 볼 수 있는데, 작품에서 그녀들이 부여받은 야수성의 이미지는 제도적 현실에서 억눌린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욕구를 표현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난폭한 욕망을 감추지 않고, 먹는 것으로 자신의 권력을 드러내려는 여성들은 밀림에서의 포식자의 자리에 위치한다. 여기에서 남성들은 나약하며 피식자로서의 기능만을 다할 뿐이다. 분명, 폭력과 식욕, 그리고 성적 욕구는 천운영의 소설에서 행위의 기본적인 동기들로 서로 매개되어 있다.

4. 여성 판타지와 에코토피아
남성 판타지가 만들어 내는 권력이 있다면, 그에 맞서 권력을 재의미화 하려는 여성 판타지가 있을 것이다. 그 하나의 지표가 된 천운영은 권력을 파괴하기 위해 폭력을 호출해서, 그것을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언어화한다. 그녀는 그 욕망의 언어를 음식담론에서 찾아내었던 것이다. 음식, 섹스, 폭력이 맞닿아 있는 성의 정치에서, 음식의 중요성은 대부분의 만남이 식사 중에 벌어진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썩어 가는 음식의 곡해된 이미지와 악취를 발산하는 부패한 아우라는 권력추구에 기반한 관계의 비건전성에 대한 인식을 강력하게 촉발시킨다. 그리고 쓰레기가 될 운명인 남은 음식은 결혼생활의 부패해 가는 조건을 상징할 수도 있다. 성적 탐닉, 걸식, 자학, 폭식, 음식 거부증 등 음식에 대한 여성의 신체적 거부는 여성이 억눌려 사는 전제 정권에 대한 정신적, 감정적 거부임을 상징한다. 결국 음식을 먹으려는 갈망은 인물 자신의 권력 욕구와 일치하기도 하고, 지배를 전복하는 도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음식담론은 인간의 욕망과 권력을 상징화하는 방식이다. 천운영의 소설은 음식이 권력의 메타포로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 천운영이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단순히 난폭한 욕망을 억압 없이 식욕과 폭력으로 드러내자는 데 있지 않다. 분명, 그녀 역시 대안을 제기하고 있다.

광포한 폭력성을 담고 있는 육식성의 반대항에 자리하고 있는 식물성은 난폭한 욕망을 일 순간 잠재운다.「숨」에서 할머니에 의해 육식성으로 길들여진 '나'가 '식물성'의 미연과 결합하는 순간, 찾아드는 평온함과 순화과정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여리고 부드러운 싹이 살갗을 밀고 올라오는 것 같다. 나는 팔과 다리를 활짝 펴고 그녀를 안는다. 가슴팍에서 가늘고 여린 이파리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그녀가 내 수풀을 한입 가득 베어문다'.(p. 58) 따뜻한 가족이나 손자며느리를 원하지 않고 '그녀가 필요로 한 것은 먹을 것을 물어다주는 사냥개가 아니었을까' 싶은 할머니 앞에서 '나'는 '거세된 수소'였다. 그러던 그가 '풀냄새'가 나는 미연의 세계와 합일을 꿈꾸는 것은 작가가 단순히 육식성의 본원성을 주장하지 않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렇지만 앞에서 말했듯 천운영은 경계를 해체하려는 여성적 욕망을 제시하고 있다.

작가가 꿈꾸는 세계는 육식성도 식물성도 아닌 양자 교합의 세계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포옹」일 것이다. 이 소설에는 두 여자가 등장한다. 그 두 여자는 낭만적 사랑의 허구화를 체감한 곱사등이와 비열한 남성에게 성적 유린을 당한 뒤 방탕한 삶을 살던 여자이다. 이들이 과거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찾아가는 '청도'라는 섬의 설정은 지금껏 들끓던 욕망들의 수포를 수그러들게 하는 자질을 갖고 있는 공간이다.

그 푸른 섬은 바다 깊숙한 곳에 있대. 바다생물들과 육지생물들이 함께 살아가는 곳이지. 그곳에는 피부가 빙설 같고 해초를 뜯어먹고 사는 신인이 있어. 그녀가 정신을 집중하면 만물이 소생하고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지워준대. 그러니 걱정 말아. 어느 곳에 도착하든 우린 안전할 거야. (p. 243.

'청도'라는 푸른 섬은 '바다생물과 육지생물'이 공존하며, '만물이 소생하고 고통스런 기억들을 지워'주기까지 하는 낙원이다. 한 마디로 말해, 이상향이다. 지도상으로도 찾을 수 없는 이 비현실적인 공간에 대한 설정은 두 여자의 각성을 바다에로의 투신으로 결론지을 수밖에 없도록 한다. 그러나 육식성과 식물성이라는 이분법을 해소하려는 지극히 피상적인 해결욕망은 추상론에 불과하다. 여자아이의 성기 같은 '틈새'로 모든 것을 빨아드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우주의 힘을 여성성으로 그리고 있던 작가는 본원적이고 원시적인 여성성의 토대를 육식성에 두며 모든 생물의 경계선을 해체해 보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려낸 육식성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못하고, 난폭한 욕망을 잠재우기 위한 식물성의 끌어들임도 재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우주 만물의 공생과 경계 해체를 통한 자연과 인간, 여성과 남성의 경계 해체를 꿈꾸었던 천운영의 에코토피아적 상상력은 육식성의 무게를 제대로 감당해내지 못한 감이 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여성성은 여성성을 가장한 남성성과 권력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때문에 경계를 월경하는 제스처만 취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지금까지 여성성은 지극히 단순하게 정의되어 왔다. 그러한 단순 논리를 전복하려 시도하는 천운영의 논리에서 보자면, 여성성은 강한 것이다. 지금껏 수동성, 나약함, 그리고 식물성 같은 것으로 여성성을 설명하려 들어 왔다. 하지만 욕망은 남자나 여자나 같은 것이고, 어느 누가 단정할 수 있으랴. 여성은 꽃이라고. 아마도 천운영의 문제 제기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녀는 자신의 소설에서 밀림 속의 야성적인 본능처럼 여성성의 강인함이 지닌 일면을 육식성으로 그려내고자 한 것이다. 약자가 아닌 강자의 입장에서 재기술되는 여성성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주체를 구성해 낸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사회, 문화적인 자리에서 강한 여성이 이단자로 분류된다. 이러한 것에 대한 반성의 자리에서 작가는 아름다운 성을 그릴 수 없다.


[ 단평 ]

신체 정치의 게임: 비밀의 수사학
- 정길연의 「손」을 중심으로 -
'타인의 손은 불결하다.'

정길연의 「손」(『문학사상』, 2001. 1) 은 시작부터 신체의 일부인 '손'이미지를 예사롭지 않게 사용한다. 이 작품에서 파편화된 신체 부위는 하나의 타자가 되어 주체의 육체에 씌어진 기억들을 탐구해 나가는 실마리로 작용한다. '타인의 손'과 '불결함'은 지속적으로 한 여자를 괴롭히며 서사 진행의 모터가 된다. 누군가의 손이 엄습해 오는 공포는 텍스트와 인물을 베일에 휩싸이게 만드는데, 이러한 작업은 애당초 자신의 은폐, 자신의 진실이 드러남을 피하기 위한 작업으로 의도된 것이다. 저자는 육체의 물질성과 타자에 대한 인식을 함께 제기하고 있다. 육체를 떠나서는 결코 이 '나'를 설명할 수 없는 현대인에게 있어 '신체'는 '자아'와 동일시되며 특정한 신체이미지를 추구한다. 앤소니 기든슨이 말하는 현대의 '연출하는 자아'는 끊임없이 신체이미지에 사로잡혀 있다. 인위성이 강한 신체의 이미지는 이제 문화적으로 구성되는 타자를 위한 신체가 될 수밖에 없다. 그 속에서 '나'는 타자를 위한 물질성일 뿐이며, 주체의 사유는 살 너머의 문제일 따름이다.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에는 근대의 리얼리즘 미학의 한계를 넘어서면서도 동시에 사소한 형식주의에 빠지지 않는 새로운 유물론적 리얼리즘 미학의 단초가 담겨 있다. 내 몸을 말하기 위해서는 이제 감각론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인식적 기반 위에선 「손」은 시각, 촉각, 청각의 이미지들로 범람한다. 따라서 이 작품은 곤두서있는 세포 하나 하나를 예리하게 일깨우는 공감각적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여자는 잠귀가 밝다. 오래 전 여자가 작은 여자아이였을 때부터 그랬다. 여자아이가 잠에 든 것을 확인하고 나면 부모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깨득깨득 간지럼 참는 웃음소리를 낼 때도 있었고, 여자아이로서는 어렴풋이 짐작할 뿐인 시름거리에 끌탕하는 한숨이 푹푹 새나올 때도 있었다. ..여자아이는 자는 척 눈을 감고 있다가 부모가 잠이 들면 그제서야 잠이 들었다. 꼭 어른들만큼밖에 자지 않았으므로 여자아이는 늘 잠이 부족했다. 부모는 그 사실을 몰랐다. 덜 여문 생각으로도 생쥐처럼 엿들은 죄값을 치르게 될까 겁이 났기 때문에 여자아이는 기척을 낼 수 없었다. (222쪽.

'여자'는 어렸을 적부터 남달리 청각이 발달되어 있는 인물이다. 인용문은 마치 프로이트의 상징 사건이 재현되는 한 장면처럼 보인다. 남달리 발달한 청각은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죄가 될 수 있다. 타자를 거스르는 감각은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청각적인 비밀스러움과 공포는 긴장감을 유발한다. 소설 전체는 이러한 감각의 긴장감과 비밀스러움이 포진해 있다. 어른이 된 여자는 이혼녀로서 어머니가 얻어 준 아파트에 혼자 산다. 그녀는 스스로 목소리를 상실한 여자로서 자신의 입 밖으로 소리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가까스로 이룬 잠의 문턱을 침범하는 소리의 정체'에서부터 신문과 우유의 투입과정, 현관과 벽 너머에서 들려오기 시작하는 일상적인 소음 등은 남달리 예리한 청각력을 지닌 여자의 신체가 외부를 지각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서사진행의 중심 사건은 우유팩과 신문 두 가지 투입물 중 어떤 날엔 우유팩이, 어떤 날엔 신문이 사라지고 없을 때가 있다는 사실의 발견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럴 때 여자는 무엇에 홀린 기분이다. 문제는 절취의 의도를 가진 누군가의 손이 여자의 예민한 청각을 건드리지 않고도 투입구를 드나들었다는 데 있다. 외부와의 단절을 꾀하는 그녀의 공간 속에 정체 모를 타인의 손이 반복적으로 침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 여자에겐 누구의 손인가를 밝혀 내는 일이 강박관념처럼 따라 다닌다. 게다가 서술자는 왜 그녀가 이혼을 하여 사랑하는 아이와 함께 있지 못하는 가를 비밀로 남겨 둔 채, 독자에게 긴장감을 늦추지 않도록 한다. 미지의 손이든 여자의 정체든 독자에게 알려진 정보는 부족하기만 하다. 이런 서사의 유희는 부족한 정보를 해석의 토대로 삼아 비밀을 파헤쳐 나가는 가운데 있다.

개인의 비밀은 놀이와 연관된다. 사람들은 어쨌든 자신의 비밀을 자신의 양심이나 정신에서 해제해 버리고 싶은 하나의 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장하거나 조작하는 특수한 형식의 놀이를 수반한다. '비밀의 유혹'은 자기 '누설의 유혹'과 양립한다. 따라서 '가장(假裝)'이라는 보호막 안에서 놀이를 이용한 비밀 욕구의 표출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손」에서 관찰만 하는 서술자에게 그녀의 비밀을 털어놓을 것이란 기대는 할 수가 없다. 그녀가 유일하게 전화를 걸어 전화상담원과 대화를 나누는 의사소통과정을 살필 때만이 일말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여자는 열한 시만 되면 전화를 건다. '여자가 예약된 시간에 전화를 걸지 않으면 그들간의 계약은 자동으로 해지된다.' 그러나 그녀가 유일하게 세상과 의사소통하며 위로를 받는 것이 이 전화이기도 하다. 그래서 쉽사리 그 계약은 파기되지 않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여자는 일주일에 두 번 '이력서를 쓰는 기분으로 자신을 설명해 왔다. 중요할 것 같지 않은 습관, 물건을 고르는 취향, 그런 사소한 정보와 지리멸렬한 넋두리'를 해대는 것이다. 발설로 인한 낭패감 이면에는 고해의 희열도 있다. 상담원과 여자의 전화통화 역시 말을 감추고 풀어내는 게임의 일종이 된다. 성적 고해성사처럼 자신의 내면을 토설 해내는 여자의 전화걸기는 세계와 자신을 향한 대화의 희망일 것이다. 그러던 가운데 아파트 승강기 안에서 우연히 마주친 한 사내의 추레한 모습은 그녀에게 걷잡을 수 없는 욕지기를 느끼게 하며 어두운 기억의 재생이 촉발되도록 한다. 독자는 그 어두운 기억이라는 것이 그녀의 비밀임을 직감하게 된다. 여자는 생의 어떤 순간, 지독하게 멀고 지독하게 아득했던 한 순간을 완성된 화면으로 떠올리며 진저리친다. 그런 상징적 기억은 트라우마가 되어 주체의 기억 속에 반복적으로 재등장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밝은 세계의 것과 분명히 구별되는 어떤 손'과 '분명히 구별되는 어떤 냄새'의 징후는 여자 자신의 덜미를 움켜쥘지도 모를 공포임에 분명하다.

도대체 여자를 그토록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또 그 손의 정체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자는 왜 자신의 생이 무너졌다고 생각하는가. 이쯤 되면 이유가 서서히 밝혀질 만도 하다. 그래서 등장하는 서사적 전략이 남편의 전화다. 전화 내용상, 여자가 그토록 괴로워한 그 사건은 '그날 일어난 불의의 습격이 아니라 그 습격에는 무력했던 남편이 보여 준 용렬함'이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여자의 상처가 무엇인지 짐작이 가능해 진다. 여자가 이혼 당한 이유는 '흉기를 들고 집 안으로 뛰어든 침입자들'에 의해 그녀가 남편 앞에서 성적 유린을 당한 여자였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남편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대상이 습격에 무력했던 남편 자신이 아닌 훼손된 아내의 정조였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작은 바스락거림이 들린 것 같다. 여자의 신경이 가시처럼 곤두선다. 숨을 죽이고 무게를 줄인, 공기처럼 가벼운 접근. 여자는 긴장한다. 드디어 여자의 눈앞에서 투입구의 뚜껑이 들춰지고 있다. 여자는 마른 입술을 깨문다. 조용히 일어나서 현관으로 다가간다. 누군가의 손이 구멍으로 기어들어와 천천히 바닥을 더듬고 있다. 손가락에 신문이 닿자 손아귀에 넣기 좋도록 둘둘 말아서 움켜잡는다. 여자는 신문을 움켜쥔 침입자의 손을 내려다본다. 손등에 길게 긁힌 자국이 나 있다. 승강기의 거울을 들여다보며 면도를 하던 남자의 손이 분명하다. 더럽고 불결하고 음험하고 뻔뻔스러운 타인의 손이다. 여자는 예리한 칼 끝에 썸벅 가슴을 베인 듯하다. 동통과 함께 자신의 피가 거꾸로 분수처럼 솟구치는 듯한 격렬한 증오를 느낀다. (239쪽)

얼굴 없는 '손'은 정체를 분명히 알 수 없기에 더욱 공포스럽다. 따라서 여자가 현관문의 투입구에 침입하는 손을 밝혀 내는 일은 자신의 공포와 맞서 싸우는 격이 된다. 그녀의 모든 감각이 타인의 손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결국 유린당하고 무너져 내린 자신의 생을 복원하려는 욕망의 표현인 것이다. 이쯤 되면 게임은 여자 쪽에 더 유리하도록 작용할 것이다. 게다가 남은 비밀은 '타인의 손'의 정체를 밝히는 것뿐이다. 남자의 손이 구멍을 빠져나가기 전에 여자가 거센 힘으로 현관문을 밀어붙이자, 남자는 투입구에 손이 걸린 채 두려움에 떨고 있다. 침입자의 손등에 '긁힌 자국'은 정체성을 확인할 하나의 기호가 되어, 그 자국의 주인이 바로 아파트 승강기에서 마주쳤던 그 사내임을 알 수 있게 한다. 투입구에서 팔을 빼고 달아나는 남자의 모습은 그 날밤 남편의 모습과 닮아 있다. 이 부분에서 사내의 비굴함과 남편의 비굴함이 합성되며 여자의 존재감은 정당화될 수 있다.

21세기 서사에서 파편화된 신체의 현저한 존재, 그리고 텍스트의 비밀과 신체 부분의 권력이 어떻게 교합하는가를 밝혀 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신체의 한 부분은 주체화 될 수 있다. 그래서 신체의 부분만으로도 주체와 타자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신체의 한 부분만으로 타자의 불순함을 이렇게 잘 그려내고 있는 소설도 드물다.


심사평

응모작은 총 17편. 분석단위를 작가 또는 작품에 한정한 작가론 또는 작품론이 주류였다. 구멍 뚫린 거대담론을 농(弄)하는 것도 문제지만 시야(視野)에 대한 감각을 포기한 채 즉물적 작업에만 몰두하는 것은 더 문제다. 대담한 가설과 치밀한 분석을 결합할 줄 아는 신인 평론가의 등장을 지금 한국 평단이 간절히 고대하고 있다는 점을 우선 지적해두고 싶다.
나는 4편의 글에 주목했다. 대석의 '넬리 작스의 시 한편에 숨겨진 의미'는 하나의 작품에 집중하여 그 문화사적 추억과 정치적 긴장을 아울러 드러내는 성실성이 돋보이지만, 평론의 생명인 '지금 이곳'의 현실성과의 연관이 희미한 게 아쉽다.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오탁번의 최근 시세계를 해학이란 키워드로 조명한 장은석의 '생의 은폐된 비밀을 소환하는 교감주술'은 탄탄한 문장력에 비해 분석은 평범하고 독특한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허술하다. 유임하의 '고백과 자기점검'은 요절한 작가 김소진론이다. 도시빈민의 일상을 80년대 민중문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집요하게 추적함으로써 90년대 소설의 일반적 경향 바깥에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김소진문학의 의의를 잘 짚어냈지만, 문장이 부정확하고 더욱이 해설에 그친 게 안타깝다. 비평은 무엇보다 비판적 독서다. 주목받는 신진작가 천운영을 분석한 한민주의 '식(食)의 정치학, 우주적 상상력'은 이 여성작가 특유의 그로테스크미학의 심미적 사회성을 예리한 각도와 일관된 논리로 분석해 내면서 그 한계까지 지적하는 비평적 개입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문장이 더러 부정확하고 페미니즘 밖과 소통하는 시야가 부족한 게 흠이다. 그 때문에 결론도 약해졌다.
나는 유임하와 한민주 사이에서 고민했다. 최종적으로 후자를 선택했다. 최근 우리 사회, 또는 우리 문학의 고민의 현재성에 더 가까이 자리잡고 있는 후자의 비평적 가능성을 평가하고 싶기 때문이다. 축하한다. 아울러 응모자 모두의 정진을 바란다.
(최원식 문학평론가)

추천12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