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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미술과 세계기독교미술의 흐름/장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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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미술과 세계기독교미술의 흐름
장윤우(성신여대교수, 박물관장)
1. 머리글
한국에 基督敎가 뿌리를 내린지 1세기가 되었다. 天主敎는 그보다 100년이 더 앞서있다.
그간에 선교적으로나 나회, 문화, 미술적으로 커다란 발전과 성장이 있어 왔음이 사실이다. 특히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81년 5월 3일)하여 金大建 等 103位의 순교복자들을 성인 반영에 오르게 함은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사상 획기적인 사실이었다.
「巡禮하는 回勅」이라 불리우는 敎皇은 「한국 순교자들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명한 역사는 자신의 생명을 희생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삶을 나타내 보인 것」이라며 피로서 증거한 순교선인들의 신앙이 거듭 꽃피워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기독교의 신앙과 사상을 미술로 표현함에 오랜 역사와 그 넓은 지역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명 무명의 작가를 현재와 미래를 통해 끊임없이 추구될 작품세계를, 短見과 拙筆로 어찌 표현할 수 있으랴. 신앙이란 위대한 힘이 아니고는 이룩될 수 없었던 것임을 누구나 안다.
따라서 내 나름의 觀見으로서 神의 집인 교회를 중심으로 엮어진 역사적 흐름과 오늘의 한국기독미술 양상을 작가를 중심으로 엮어 보겠다.
2. 교회 미술의 흐름
서양의 미술사는 기독교미술사이고 기독교의 역사가 바로 서양사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AD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선포되면서 국가와 기독교가 밀착되었다. 그 이전의 기독교는 박해시대로 지하 깊숙히 암벽을 뚫어 만든 抗道에서 지속되었는데 후에 카타콤(catacomb) 미술이라 칭하게 되는 작품들을 남겨 놓았다.
로마의 카타콤은 규모와 다양성 그리고 중요성에서 다른 지역의 것에 비해 월등한 것을 필자도 확인하였다.(81년 9월). 기원3세기쯤 제작된 「사나운 불길 속의 세 사람」같은 작품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증명하고 신도들에게 상기시켜주는 예가 된다. 카타콤의 미술사적 가치는 장식벽화에 있다. 가장 오랜 1세기의 것에서 4세기의 절정에 이르기까지 치졸한 기법이지만 그리스도의 초상과 성사도의 모습, 교리 등을 묘사했다. 초기의 작식화에서는 상징주의적인 경향이 나타났다. 예컨데 포도와 고기는 그리스도를, 배는 교회를, 비둘기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羊을 어깨에 맨 헬메스는 신도를 구원하여 인도하는 그리스도를 의미했었다.
콘스탄티누스(Constantimus) 황제에 의해 공인되고 국가의 지주로 삼으면서 부닥친 문제가 교회였다. 지상에서의 전도가 가능하면서 大聖殿을 건립하기 시작했고 미술도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했다. 보는 Bible로서의 모자이크나 벽화, 나아가서 스테인글라스나 조각, 공예, 교회건축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발전해 갔다.
한때 기독교인들은 신의 집에서는 彫像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聖書가 공격하고 있는 이교도의 우상들과 너무 비슷했기 때문이다. 6세기末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회화적 표현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납득시켰다.
읽거나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형상이 필요하다. 이렇게 회화를 옹호하게 되어 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로마미술이 쇠퇴한 후 東로마 제국을 중심으로 번영한 비잔틴(Byzantin)미술은 서양 중세 기독교미술의 주류를 형성하였으며 미술사상 길이 빛난다. 라벤다(伊)의 한 바실리카에 있는「빵과 물고기의 기적」은 모자이크로 된 내부벽화로 이들 작품에 나타난 예수는 수염이 난 예수가 아니라 머리카락이 긴 젊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초기 기독교미술의 단순한 圖解를 비잔틴교회의 내부를 지배하는 장엄하고 거대한 형상으로 변화시킨 것이 바로 미술가들이었다.
全盛期인 유수티니아누스帝(562-565 AD)를 거쳐 레오3세의 조상숭배 금지 이후 聖像파괴운동(iconclasme 726-843)을 거쳐 마지막 盛期인 팔레이오로고스왕조(1261-1453)시대를 마지막으로 비잔틴미술을 끝맺는다. 비잔틴회화는 특히 모자이크(Mosaic) 이콘(Icon) 및 미니쳐(Miniature)의 3영역에서 발달했고 주류는 모자이크였다. 현존하는 수 많은 벽화를 보며 당대를 類推하고 감탄한다.
이콘은 以姿肖像을 뜻하는 그리스어인 에이콘(eikon)에서 유래되었으며 물감이나 입체감 등 인체의 현실적인 원근, 비례 등을 무시하고 聖像이 지닌 신성성을 직접 표현하려 했다. 이 양식은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고 필요한 것만 강조하였기에 배경은 金泥 일색으로 칠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냈다.
중세기에 접어들면서 문화발전에 수반되어 고대 로마양식이 복잡하게 중세화되고 다시 새로운 민족적 요소를 혼합하여 발달한 것이 로마네스크(Romanesque)이다. 10세기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12세기 중엽까지 서유럽 전역에 미쳤던 미술 건축양식으로 수도원의 미술도 사회로 번져 조형미술의 새 표현을 형성한다.
비잔틴 모자이크처럼 호화롭거나 우아하지 않았으나 벽화는 도리어 야성적이고 소박하였다. 대담하면서도 강열한 색채와 線描가 지닌 박력이 교회건물과 잘 조화되고 있다.
이 무렵의 회화에는 사실적인 의도를 찾아볼 수 없는 게 그리스, 로마미술과 다른 점이다. 인간과 사물의 크기 비례는 현실을 표준으로 삼지 않고 意義에 따르고 공간적 입체적 현상의 再現이 아니라 기독교의 내용을 강력하게 직시적으로 파악하였다. 모든 수단은 회화의 장식적 효과에 기울였다.
로마네스크양식에서 분리하여 1200년경부터 1500년경까지 발달한 것이 고딕(Gothic)미술이다.
고트(Gothe)족의 천한 양식이라 하여 중세건축을 비난하는 뜻으로 원래 쓰여진 것인데 르네상스미술의 開花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역에 전개된 중세기독교 미술양식을 의미하고 넓은 뜻으로는 당시 문화전반을 일컬은다.
고딕양식의 발상지는 북프랑스의 일·드·프랑스였다. 13세기에는 조각에 비해 회화가 미친 의의는 크지 않고 대신에 교회건축의 특수한 조건에 따라 높고 큰 창면을 장식하는 색유리창이 발달하였다.
스테인글라스(Stain Glass)는 금속성분으로 착색된 반투명의 유리조각을 납으로 용접결합해서 장식적, 회화적 표현을 하였는바 광선이 내부로 투과하여 나타내는 진동과 성스러운 효과는 환상적이고 경건하고 종교적이었다. 샤르트르대성당은 모두 140여개의 창이 모두 12-13세기의 스테인글라스로 장식되어, 赤·靑色調의 강렬한 색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미니츄어회화가 13세기 후반에 뛰어난 전개를 보여주면서 14세기 중엽이후로는 판화가 등장되며 제단화에서 결정을 이루었다.
중세에서 근세에 이르는 15-16세기의 미술은 르네상스(Renaissance)의 명칭으로 포함된다.
이탈리아의 피렌체(Fireze 伊 : Florece 英)市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중세 1000년의 역사적 현사엥서 탈피하려는 인간성의 회복운동이다.
중세적 종교속박에서 탈피한 르네상스 思潮는 새로운 자연과 인간의 발견이었고 화가들은 신과 종교를 통해 자유로운 표현을 시도하여 현실감과 생명감을 추구하였다. 기독교 회화의 주제인 성모마리아는 오직 聖淨無垢한 여성으로, 때로은 市井女와 같은 모습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마사치오는 27세라는 짦은 화가의 생애속에서도 르네상스 회화양식을 창조하였다. 산타마리아 델 카르미네성당의 부랑카치예배당 벽화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미켈란젤로(1475-1564)의 놀라운 재능은 30대에 그린 바티칸궁 시스티나天井벽화에 나타난다. 1508년에 착수된 이 작품은「創世記」의 여러 단계이며, 20년이 지난 후 바오로 3세의 청탁으로「최후의 심판」을 7년간 걸쳐 또 완성시키었다.
1541년 완성된 그 벽화는 모두 나체인물을 배치하였다는 비판의 소리가 높아 제자인 보르테리에 의해 赤, 靑, 白色의 천으로 허리를 둘러 본래의 작품에 汚點을 찍기도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라파엘로 역시 같은 도시에서 르네상스미술을 빛낸 3대화가로 길이 남고 있다.
르네상스 이후 17세기의 미술은 바로크(Baroque)시대로 개념된다. 그 理想은 르네상스를 기반으로 삼아 다시 비약하여 본다. 자유분방하고 활기에 넘친다. 또한 장중하고 철저한 현실주의 경향과 외적 표현에 주력하였다.
1657년 독립전쟁으로 일어난 네덜란드는 신교를 신봉하여 시민국가로 번영하였다. 램브란트 간은 화가는 현실을 회화의 주제로 하는 근대적 현실주의의 기풍을 네덜란드에 뿌리 내렸다. 유렵회화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의 한 사람으로 이 전통은 19세기이후의 근대회화의 원천이 되었다. 그가 그린 그리스도는 현실속에 호흡하는 친근한 인물이었다. 그는 성화에서 취재한 주제들을 일상세계로 끌어들여 친밀한 주위가족과 친지에서 찾아 예술화 했으니 여기에서 처음으로 신교의 宗敎畵가 창조되었던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교회는 페르시아에 전래되었고 다시 아라비아, 인도, 西域의 여러 민족을 거쳐 중국, 만주, 몽고, 한국 등으로 전파되었다. 아시아지역에서는 특히 개신교에서는 미술을 하나님의 도구로 보지 않고 우상으로 여기는 경향이 짙어 기독교미술이 별다른 발전을 보지 못했다.
서양에서는 신비한 것을 자기가 이해한 모습으로, 객관적으로 나타내려 하였고 동양에서는 신비적인 경험으로 나타내려 했다.
인도의 여류화가 엔젤라 티나드의 「축복받은 마리아의 대관식」은 인도기독교미술의 요소가 짙고, 중국의 경우 키케션의「동방박사의 경배」는 동방박사 대신 중국의 3대종교 대표자(佛, 儒敎, 道敎)가 각각 그려져 전통적인 3대대표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경배하는 모습이다. 이 그림으로 중국의 젊은 화가들이 많이 기독교미술인으로 배출되었다고 한다. 일본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이런 聖畵는 많이 나타난다.
3. 한국의 교회미술
한국 최초의 기독교화는 존 . 번연의 천로역정이 게일목사에 의해 韓譯되었을 때 (1894) 그
책속에 삽화로 이영도씨에 의해 판화형식으로 나타났다고 본다.
金殷鎬가 그린 [부활 후]가 1924년 鮮展 동양화부에 3등입선된 것이 성화의 정식이 될 것이며 以堂(雜號)은 그후 燒盡된 것을 다시 그려 YMCA에 소장되고 있다.
雲甫 金基昶도 [탄생] [골고다의 언덕]등 성화를 우리 모습으로 그렸으며 金學洙, 木佛 張雲祥, 金興鍾등이 동양화로 남기고 있다.
최초의 서양화는 張勃씨로 [복자 72인상]을 그려 명동성당에 걸었다.
그는 [金 골롬바와 아네스형제 동정치명자 肖像畵](1930)과 [金大建안드레아 신부의 초상화]도 그려 절두산 순교자기념박불관에 소장되어 있다. 서양화가 洪鍾鳴도 기독교가정에서 태어나 크리스챤으로서 신앙적인 작품을 남기고 文學晉의 [103位 순교자성화]도 대작이다. 原
谷 金基昇씨 또한 서예로 신앙세계를 지킨다. 오늘날 많은 미술인들이 교회에 나가고 창작세계에 알게 모르게 구현시키고 있다. 성당, 교회나 공공건물에 벽화로서. 浮彫나, 祭壇, 조각등으로 공헌하고도 있다.
김교만은 반포성당에, 김세중은 혜화동성당과 절두산기념박물관에, 이남규는 약현성당 스테인 글라스를, 최종태는 한강성당에 조각으로 그외 이순석, 권순형, 남용우, 임송자, 徐商煥등 기독교미술인들의 활동을 일일이 열거할 紙面이 限定되어 대표적으로 단체의 활동만을 들겠다.
19회전이란 긴 활동을 갖는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는 지난 해(12월5 ~12일)종로구 아랍미술관에서 65명의 회원전을 가졌다.
서양화 -홍종명 신영헌 이명의 이양로 강광식 강대운 권숙자 김수익 김영배 김영재 김영주
김윤식 김재임 엄익규 오해창 이호연 이춘기 장 완 전명자 표승현 하동균 정진유
최영순 현숙자 정재규 이정수 유명애 송 영 박용순 김창희
동양화 -김세원 김영길 김재배 김정묵 김학수 김흥종 노준보 문 일 선학균 안동숙 양정자
오숙환 오정자 원문자 이열모 이인실 차영규 최수영 등
서 예 -김기승 김명실 김영기 김제국 김진익 김진아 곽주옥 여영구 이철경(會長) 조경숙
조의제 조영선 조동숙 조수창 홍덕선
彫 塑 -김영옥 김정숙 박윤자 윤석원 윤영자 이정자 전 준 정은기 진송자 최병상
아세아기독교미술인협회를 통해 필리핀. 인도네시아. 오스트랄리아 등지에서 전시를 갖기로 되어 있다.
가톨릭미술가협회(회장 金世中)는 지난 84년 5월 25일 ~30일까지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회원전을 가졌고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행사로 [영원의 모습]을 주제로 한 현대종교미술국제전을 국립현대미술관(7월 21일~9월 14일)에서 개최하여 뜻을 깊게 했다. 회원으로 -장 발 이순석 박득순 김 원 김형구 변종하 임직순 박세원 문학진 정창섭 김세중 권순형 김 태 김교만 강찬균 권영숙 김희진 김춘옥 김인중 김선희 김혜원 나희균 민철홍 박숙희 박충흠 방혜자 봉상균 성옥희 엄혜실 원승덕 유리지 윤명로 이남규 이동표 이정지 이규현 이종수 이미제 이승원 이춘만 이신자 이창림 임송자 장선백 장임 정관모 조평휘 정대식 정완규 조영동 주민숙 주예경 진영선 최의순 최종태 최봉자 최아자 남용우 유희준 홍순모 강석원 장영 62名
1회 基督敎美術協展(66년 12월 8∼13일·신문회관화랑)에는 舊敎인 가톨릭 미술인도 함께 참여된 바 있으나 후에 분립되었다. 창립당시의 회원이 빠지거나 도중에 입회하여 활동하는 작가들도 있다.
4. 맺음말
문제점은 어디에 있는가.
기독교가 한국에 뿌리를 내리고 敎勢가 확장되어가는 것과 정비례하여 참다운 교회미술이 정립되고 있는가.
교인의 관심과 미술인의 작가적 양심에 비추어 볼 때 과연 바람직하다고만 볼 수는 없다. 선교 200주년, 100주년 기념행사로서의 형식적 미술전이라면 無爲한 일이다.
물론 2000여년이란 오랜 전통과 감동적 신앙, 인습과 천재적 작가 탄생과 禮遇를 무시할 수 없지만 깊은 고뇌와 기도속에 우러나오는 성화(聖畵)가 나와야 하고 조형물이 세워지고 적극적으로 나서야 된다 교회는 작가와 작품을 수렴할 의무가 있다.
유럽과 전세계 도처에 산재한 위대한 문화유산은 再言하거니와 모두 교회미술이며 신앙이 아니고는 이룩되기는커녕 상상도 못할 위업이었다.
朴容順, 金永吉의 성화개인전이 있지만 교회를 중심으로 일생일대의 역작들은 소명감을 가지고 시작되어야 한다. 지금이 그 시기이고 늦은 감이 든다. 아직은 미흡하다.
<曙光9집 1985. 12> 에서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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