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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앓이/김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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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앓이
김규성
떠나는 것을, 손을 흔들지도 않고 떠나는 것을, 눈물 보이는 채로 떠나는 것을, 뒤에 남아서 바라보기란 아무리 눈을 감아도 죄없는 가슴에게 차마 못할 일이어서, 발길 채 돌리기도 전에 그 자리보다 더 가까이 되돌아가던 우리의 별리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오늘 당신은 가슴이 찢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상처가 오래 아물지 않을 것 같다고도 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걱정하는 당신의 순수가 아직 건재하다는 반증이라고 나는 자신에게 타이르며 저간의 조바심을 종일 하릴없이 내리는 가을비 속에 뿌렸습니다
나만 잘못이 없다는 말은 마치 당신의 잘못으로부터 혼자만 자유롭고 싶다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서는 안될 금기인 것을 내 한 티끌 자존심만 그렇게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고의 아닌 여드름자국 하나도 내 상처로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때로 당신이 낯설어서 외로웠던 것은, 강의 淸濁이 둘이 아닌 한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내 이기심이 화근이었습니다 가파른 세상이 당신을 고삐도 없이 끌고가는 것을 모르고 나는 그저 사랑이란 한마디만 고삐인 줄 알고 꼭 움켜쥐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나는 가끔 당신의 천사보다는 당신의 욕망에 동의해야 합니다
이제 세상은 산봉우리나 호수가 머무는 한 폭의 그림이 아닙니다 세상엔 우리가 앉을 안락의자가 없습니다 활이나 천리마 사냥개 그리고 십리를 한눈에 꿰뚫어보는 시력도 없이 유목의 뙤약볕 속에 내팽개쳐진 지친 호흡만 있을뿐입니다
고향을 빼앗긴 유랑민에게는 사랑이 고향일 수밖에 없지만 한편 부초처럼 불확실성의 배급을 받아 떠다니는 사랑의 속성을 헤아려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당신을 향한 낯설고 외로움에 세상보다도 먼저 지쳐버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게 사랑은 항상 미학의 시작입니다 당신의 사랑과 만날 때 나는 잊고 있었던 세상의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사랑은 나에게 분노와 절망과 우울 말고도 소망이라는 기적이 남아있음을 일깨워 준 행운의 밀사였습니다
아침의 분노와 정오의 자책을 거쳐 한밤의 그리움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숨가쁜 변화의 해일 속에서 역시 당신을 향한 사랑이란 한마디만 낯설지않습니다 중독될수록 구원이 되는 사랑이란 술잔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나는 내 가슴 속에 꼭꼭 숨겨둔 작은 당신의 포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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