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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상기억합금/김왕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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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상기억합금/김왕노
떠나지 않는다
밤이 오고 새벽이 와도
추운 기억이 내 안에 살고 있다
모두가 용서하거나
세월 저편으로 떠나보낸 것이 내 안에 잠들고 있다
기억은 구부러지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에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두 눈으로 보아버린 날이 차라리 후회였다
사람의 이름보다 짐승의 이름으로
어둠 속에 웅크린 날이 좋았다
기일이 같은 사람들
제삿밥 짓는 밤
가슴 가득 내리는 첫눈으로도 끝끝내 덮어버리지 못한
총성이 다슬기처럼 가슴에 달라붙던 그 광장
떠나간 사람의 이름이나 나직이 불러보며 음복한다
기억은 구부러지지 않는다
세상 어디 기억의 무덤 쓸 곳은 없다
벌초를 하고 절 올리며
그 간 잘 지냈느냐
겨울이 오는데 무덤 속은 따뜻하냐 속삭여 볼
기억의 무덤은 없다
강가에 나가 강물에 실어보내고
언덕에 올라 종이 비행기로 접어 날렸지만
어느 새 가슴에 와 밥그릇 달그락거리며
살고 있는 것들
기억은 구부러지지 않는다
망각의 별로 가고 싶다
그 곳에서 우물물 길어 올리는
소녀의 뽀얀 솜털을 적시는 첫 안개를 보고 싶다
망각 속으로 떠나가는 기억을 향해
별이 울리도록 잘 가라 손짓하고 싶다
누구나 센 물살처럼 흐르지만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기억의 그물
어쩌다 터진 그물 사이로 빠져나가지만
어느새 밀물로 가슴 기슭으로 물결쳐 오고 있다
기억은 구부러지지 않는다
내 어두운 이 기억들을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다면
내 생의 이 어지러움증 다 이겨내며
저 바람 오는 저 황사 오는 하늘가로 나가
만장처럼 펄럭여도 좋을 현수막 하나 내 걸겠습니다
대동단결하자는
동해국민학교 운동회라는 현수막을 걸고
내 유년의 가리마 다시 타겠습니다
기억은 구부러지지 않는다
기억의 힘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다
기억의 생명력에 대해 말 할 필요가 없다
기억 속엔 증오의 숲이 물결치기도 한다
기억 속엔 세월의 힘으로도 끝끝내 지울 수 없는
사랑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기억이 어두운 세상 건너편으로 등불을 내 걸기도 한다
때로는 우리 모두가 기억의 강물 쪽으로 돌아누워
잠들기도 한다
기억 속에 내리는 빗방울을 새기도 한다
기억은 구부러지지 않는다
문밖에 늙은 기억이 와 있다
집 떠났다 무사히 돌아온 재회의 밤
거리에 태풍이 불고
전선이 끊기고
간판이 날려도 우리는 언제나 멀쩡하다
기억이 살고 있는 일기장
기억이 울고 있는 골목 모퉁이
기억의 가해자
기억의 피해자
기억의 원주민
기억의 어머니
기억의 바다
문 밖엔 그들의 발소리 자욱하고
그들은 헤어 질 수 없는 살붙이 일 뿐
기억은 구부러지지 않는다
기억이 수숫대로 밤새 서걱이고 있다
기억이 홀로 빈 들녁에 서 있다
기억이 밤하늘 아래서 울고 있다
기억이 먼 발치에서 흘러가고 있다
기억 속 막차도 떠나버렸다
기억 속 꽃잎도 다 져버렸다
기억 속 두꺼비집도 내려졌다
그래도 기억은 구부러지지 않는다
2002년 봄호 애지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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