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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출/정승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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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출/정승렬
사랑채 후미진 곳에서 낡은 쟁기 하나가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햇볕 한번 쬐지 못한 채 검버섯은 덕지덕지 피어있고 움푹패인 허벅지는 상처로 얼룩져 벌겋게 녹이 슬어 있었다. 허리는 활처럼 휘어 그의 삶이 한 뼘 정도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었다. 황소 한 마리 앞세우며 삶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닫힌 새벽을 억지 로 열고 논두렁 밭두렁 마구 헤매던 날, 퍼렇게 날이 선 쟁기발이 스칠 때마다 세상은 뒤집어지고 내리 꽂히던 햇살도 서걱서걱 베어 져 이랑마다 어지럽게 나뒹굴었다. 그것은 분명 혁명이었다. 새마을 행진곡이 울려퍼질때에도 혁명은 계속 되었다 혁명이오혁명이오 소리칠 때마다 피를 토해내고 게거품을 흘리며 혁명을 완수하였다. 웅장한 기계음이 또 한번의 혁명을 일으켰다. 힘빠진 쟁기 날은 무뎌지고 마른기침만 꾸역꾸역 토해내고 있었다. 노을이 짙게 드린 저녁, 꺼져가는 한 줌의 햇살마저 피해가며 쟁기는 한마디 말도 없이 경운기 트레일러에 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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