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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식물원/김왕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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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식물원/김왕노
내 달아오른 나날 위해 그늘이 필요하여 내게도 식물원이 있다. 내 부르튼 발바닥 위해 내 지친 눈동자 위해 식물원이 있다. 내 마음속으로 넝쿨 뻗거나 뿌리내리는 풀이 있다. 나무가 있다. 온갖 식물이 있다. 자생식물이거나 쐐기풀과의 여러해살이 풀, 신기하고 날렵하고 예쁜 학명을 달고 태어난 백두산 식물도 있다. 백두산 식물군락도 있다. 내 평생 꽃 한번 피운 적 없으므로 내 평생 내 앞으로 지나가는 세월에 꽃모종 한번 옮겨 심지 못했으므로 날마다 참회의 무릎 꿇으러 가는 식물원이 있다. 잘 반달가슴 담비 백두산사슴 호랑이 하늘다람쥐 고라니 고슴도치 쥐토끼 족제비 너구리 늑대 표범 대륙사슴 산양 산달 시라스니 살쾡이 수달 여우 긴안락꽃하늘소 장수하늘소 무당벌레 통사과하늘소 길앞잡이 갈겨니 미유기 메기 뱀장어 세미 쉬리 연어 연준모치 은어 칠성장어 퉁가리 돌고기 등이 사는 식물원이 있다. 귀뚜라미 베짱이 북방여치 방울벌레 울어울어 애간장 녹이는 식물원이 있다.
나 쓸쓸한 날 깊숙이 들어가 영혼의 바짓가랑이 내리고 슬픔을 자위하는 식물원이 있다. 온갖 바람과 구름, 별과 달빛의 숨소리 잎 위에 쌓이거나 스쳐 가는 식물원이 있다. 지상과 하늘을 잇는 자작나무 물결치는 식물원이 있다.
나도 이제 누군가를 위해 꽃이 되고 잎이 되고 가지가 되고 식물이 되어 당당히 태풍 앞에 나서다 가지 부러지거나 뿌리째 뽑혀도 후회하지 않을 식물원이 있다. 누군가의 씨방 속으로 잠겨가 식물나라의 건국을 꿈꾸는 계절이 있다. 나를 한줌 흙으로 돌려줄 꿈의 박테리아 바글거리는 식물원이 있다. 네가 오면 네 생 물오르게 할 식물원이 있다. 안개 피어났다 흩어지는 숲의 고요, 네 영혼이 등물하고 밑을 씻는 비밀의 개울도 있다.
뒤돌아 보라. 네 생의 어느 한 모퉁이에 내 식물원이 있다. 너를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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