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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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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330회 작성일 17-02-01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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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조선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작]


박혜진

1986년 대구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없는 얼굴로 돌아보라

-김엄지 소설에 나타난 장막의 글쓰기


1 아는 사회

우리는 정보로 호흡한다. 그것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가운데 정보화 사회의 생명도, 그곳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생명도 지속된다. 인터넷이 공간이라면 정보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수많은 정보가 분초를 다투며 생산되고 있는데, 지구상에 존재하는 정보의 90%가 지난 2년 동안 만들어졌을 정도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정보의 대부분은 페이스북, 트위터, 블로그, 유튜브, 웹페이지 등에 남기는 댓글이나 사진, 동영상이나 음악처럼 구조화되지 않은 형태의 것들이다. 각주1)

각주1) 박순서, 빅데이터, 세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레디셋고, 2013), 25.

이는 엄청난 속도로 증가한 폭발적 양의 정보 대부분이 판단이나 선택을 위한 객관적 수단으로서의 정보가 아닌 발신과 수신 자체에 목적이 있는 주관적 표현으로서의 정보라는 것을 말해 준다. 고도화되어 가는 정보화 사회의 새로운 모습이다.

주관적 표현물로서의 정보가 압도적으로 많은 사회에서는 정보의 발신자와 수신자가 구분되지 않는다. 정보 사회에 참여하는 사람 모두가 생산자인 동시에 전달자고 수요자다. 누구나 원하는 만큼의 정보에 접근할 수 있고 원하는 방식으로 정보를 생산할 수 있으며 원하는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정보의 이름 아래 성역은 없다. 모든 것은 노출될 수 있고 모든 사람은 알 자격이 있다. 사생활 침해나 명예 훼손은 알고자 하는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 정도에 불과하다. 정보화 시대, 앎의 한계선은 해제되었다.

그러는 사이 우리가 이용하던 정보의 바다는 우리를 이용하는 바다의 괴물, 권력의 유기체, 일종의 리바이어던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디지털 리바이어던의 지배 아래에서 우리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간섭이 일상화된 네티즌으로 살아가며 모르는 지식도 없고 모르는 사람도 없는 아는 사회아는 시민이 되었다. 그러나 그 앎은 때때로 무의미한 앎이고 그 자체로 폭력인 앎이며 익명의 이름으로 휘두르는 무기로서의 앎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모르는 것보다 불행한 앎이자 타인을 불행에 빠뜨리는 악으로서의 앎이다. 우리는 지금 아는 사회의 아는 시민으로 살아가며 타인을 무자비하게 노출하고 판단하며 노출된 타인을 생각 없이 즐기는 데 중독된, 정보화 사회의 그림자로 살아가는 건 아닐까. 이제 우리는 앎의 과잉에서 도망치고 싶다.

정보가 재난이 되기도 하는 정보화 사회에 소설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을까. 소설은 무엇보다 동시대의 산물이다. 그렇다면 소설에서도 정보와 앎에 대한 과잉된 욕구, 타자에 대한 폭력적 관심과 성급한 판단, 그로 인한 인간 내면의 피로도 증가에 대한 징후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정보화 사회의 그림자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지 그 양상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글은 정보화 사회의 소설 읽기라는 작은 궁금증과 호기심에서 출발했다.

2 모르는 소설

너무 많이 아는 사회와 비교되게 최근에 읽은 어떤 소설은 너무 많이 모른다. 모르기로 작정한 듯 등장하는 인물들은 생각이 없고 고민이 없고 행동이 없다. 서술하는 화자도 인물에 대해, 인물이 처한 상황에 대해, 아는 바가 없거나 전달하려는 의도가 없다. 그러는 사이 인물들의 윤곽은 흐려지고 정체는 모호해진다. 정보는 과할 정도로 많이 주어지지만 그 정보를 받아 들어도 소설이 끝나도록 독자의 머릿속에는 주인공과 사건, 배경과 갈등이 자리 잡히지 않는다. 지식이 즐비한 아는 사회에 구태여 등장한 이 모르는 소설의 존재를 어떻게 봐야 할까. 나는 여기서 의도된 무지(無知)를 느낀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모름이 완성되는 역설적 서사, 무지의 구조화는 아는 사회를 향한 반격의 글쓰기이자 아는 시민에게 비추는 반사된 거울일지 모른다.

2010문학과 사회로 등단한 이래 4년 동안 다수의 단편과 한 편의 장편 및 엽편을 발표한 김엄지 소설에 등장하는 백치들은 아는 사회와 싸우는 모르는 소설로 살펴보기 좋은 예다. 그녀가 발표한 엽편 소설 잡스가 꿈에 나왔다는 앞으로 다루게 될 이야기의 프롤로그로 적당해 보인다. 소설은 잡스로 추정되는 영적인 가래침에 대한 프레젠테이션과 그것을 듣고 있는 청중 의 이야기다.

영적인 가래침은 매우 편리한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누구나 영적으로 가래를 뱉을 수 있다. 어렵지 않다. 낫 디피컬트! 청중들은 어김없이 박수를 쳤고, 나 역시 박수를 쳤다. 박수를 치는 동안에 나는 손바닥이 아파져서 일찍 박수를 멈췄다. 내가 박수를 멈추자 모든 좌석의 청중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뒤통수로도 시선을 느꼈다. 청중들은 박수를 치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다시 박수를 쳤다.

-잡스가 꿈에 나왔다에서

박수를 치다 말다 하는 와 영적인 가래침 뱉기의 실천적 방법에 대해 설명하는 잡스를 다룬 이 짧은 이야기는 잡스의 죽음을 모티프로 한 콩트만은 아니다. 소설의 핵심 구조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대립이다. 먼저 아는 것. 잡스를 알기때문에 그가 하는 말이 가래침에 대한 이야기건 가르침에 대한 이야기건 상관 않고 청중들은 박수를 보낸다. 손바닥이 아파 잠깐 멈춘 조차 사람들 눈에 떠밀려 다시 박수를 친다. 환호를 보낸다. 그런 한편 모르는 것. 박수 치는 청중들은 잡스를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역시, 그가 하는 말이 가래침에 대한 이야기건 가르침에 대한 이야기건 상관 않고 박수를 보낸다. 팽팽하게 맞서던 구도는 의 갑작스러운 고백과 함께 한쪽으로 기운다.

나는 그의 자서전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죽은 다음에 자서전이 팔리면 그게 무슨 소용이에요? 나는 갑자기 울컥해서 울음이 났다. 나는 엉엉 울었다.

-잡스가 꿈에 나왔다에서

는 영원히 를 알 수 없다. ‘는 무턱대고 박수 치는 존재이기에 앞서 다른 사람이 판단해 놓은 텍스트-자서전-를 읽지 않고서는 자기 의견을 가질 수 없는 확신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서전이 없어서 그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는 건 뿐만이 아니다. 모두가 확신하지 못한 채 자서전만 바라본다. 그런데 또 한 번 갑작스럽게, 그것은 의 눈에 아무런 소용도 없어 보인다. 자서전을 읽어도 그를 알 수 없다는 걸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죽었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는 그에 대한 맹목적이고 피상적인 앎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엉엉. ‘의 울음에서, 타인에 대한 집단적이고 피상적인 앎과 그러는 사이 우리가 놓쳐 버린 것에 대한 모종의 슬픔을 읽는다면 비약일까. 지금부터 다루어질 그녀의 소설과 거기 등장하는 의도적으로 숨겨짐으로써 파악되고 기억되기를 거부하는 인물들은 그것이 비약이 아님을 증명할 것이다.

3 현미경의 역설

디테일의 맹점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지나치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체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현미경의 역설이다. 그것은 또한 김엄지가 인물을 숨기기 위해 사용하는 특유의 방법이기도 하다. 묘사의 역설이다. 김엄지 소설에 드러나는 얼굴 없는인물들, 그들은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다뤄지고 또는 미세한 부분만 다뤄지고, 그런 탓에 독자들은 오히려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미세하고 편집증적인 묘사로 전위의 한 축을 담당했던 대표적인 작가는 하일지였다. 김엄지는 하일지가 전범으로 삼은 로브그리예를 위시한 누보로망의 리얼리즘 소설들과 얼마간 어긋난 궤도에서, 그러나 아주 어긋나지는 않은 곳에서 자신만 배율로 묘사를, 소설을 시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김엄지가 발표한 소설 중 주말, 출근, 산책: 어두움과 비(세계의 문학, 2013년 겨울호)고산자로 12(21세기 문학, 2014년 가을호) 두 편은 현미경적 시각으로 주인공을 묘사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한 인물을 옆에서 자세히 들여다봐야만 알 수 있는 지극히 디테일한 이야기들,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을 정도로 말할 수 없이 사소하고 쓸데없는 이야기들은 누군가의 일기장에서나 볼 수 있을까, 연거푸 봐도 서술되어야 할 필연적 이유를 찾을 수 없다. 마음의 바닥에 가라앉은 생각에서 입술 앞까지 올라온 생각들, 그러니까 결국엔 발화되지도 못했고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지도 못한 언어들을 두 소설은 정색한 표정으로 전달한다.

e라는 동일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두 편의 소설은 전력을 다해 e를 관찰하는 일종의 캐릭터 소설이다. e는 혼자 사는 남자로, 나이는 30대 정도며 사귀는 여자는 없다. 내키지 않는 회식에 참석할 때도 싫은 내색은 하지 않고 주말에는 집에서 쉬길 원하지만 상사의 뜻에 맞춰 낚시에 동행하기도 한다. 늘 밀린 빨래가 염려되고 집으로 가는 길엔 개도 보고 비둘기도 보고 회사 동료의 전 여자 친구도 본다……. 이런 요약이 의미 있을까. 말하자면 e는 보통의 소설에서 주목하지 않고 이야기로 채택되지 않는, 그 모든 일상적인 것들, 말하자면 특별하지 않은 하루하루를 구성하는 잊힐 만한 모든 것을 서술의 대상으로 삼는다. 끝도 없는 췌사(贅辭)로 이루어진 캐릭터 없는 캐릭터 소설이다.

그는 치과 안에서 들리는 기계음에 어떤 규칙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스케일링이 끝날 때까지 어떤 규칙도 찾을 수 없었다. 스케일링이 끝났을 때 턱이 뻐근했다.

퇴근길에 e는 집 앞 전봇대 밑에서 비둘기 두 마리를 보았다. 한 마리는 발목이 잘려 있었다. 미련해서. 그는 발목이 잘린 비둘기가 미련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비둘기들 앞에 서서 발목을 돌렸다.

-주말, 출간, 산책: 어두움과 비에서

한잔 더 하겠어? a가 제안했고, b, c는 동의했다. e는 망설여졌다. 그는 집으로 가고 싶기도 했다. e는 밀린 빨래를 해야 했다. e의 근래 의무감은 빨래를 향해 있었다. 예고된 태풍이 오질 않고, 예고된 장마 역시 오질 않고 있었다. 아무것도 오지 않는 나날은 내내 습하고 무더웠다. 끈적거리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e는 주말에 끈적거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곰팡이가 피겠지. e는 쌓인 빨래에 곰팡이가 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고산자로 12에서

이런 문장의 계속이다. 치과 안에서 들리는 기계음에 규칙이 있거나 말거나 하는 것은 더 이상 진행되지도 않을 뿐더러 e에게 별다른 영향을 주지도 않는다. 그저 e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생각일 뿐이다. e가 스케일링을 받는 내내 다른 무엇도 아닌 그 생각을 했다는 것. 그게 전부다. 비둘기라고 다르지 않다. 퇴근길에 본 비둘기를 보고 미련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해서 그 비둘기가 e의 감정을 이입 받은 대상이라거나 e의 무의식이 반영된 매개물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문학을 읽는 독자의 강박이나 습관에 의한 자의적인 해설일 뿐 그곳엔 김엄지가 쓴 소설이 없다.

드러나지 않는 연관성을 찾아내거나 알레고리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쓰인 것을 있는 그대로 보자. e가 누군지 설명하는 데 전력을 다하는 이 소설들은 결과적으로 독자의 머릿속에서 e를 지워내고 있다. 누구도 이틀 전 출근길에서 마주친 비둘기를 기억하지 못하고 특징 없는 회식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날이 지나면 생각나지 않는 평범한 e의 일상은 e를 독자의 손에 넘겨주는 열쇠가 아니다. 그런 탓에 독자들은 뻔히 보이는 너무 쉬운 e, 아이러니하게도 안다고 할 수 없다.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 e의 사생활을 좀 들여다봤다고 해서, ‘아는 사람으로서의 우리가 그래왔듯 e가 소심한 사람이라거나 강박에 시달리는 사람이라고 단정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정보들이 무의미한 앎이자 그 자체로 폭력인 앎이며 익명의 이름으로 휘두르는 무기로서의 앎이자 모르는 것보다 불행한, 타인을 불행에 빠뜨리는 앎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일 것이다. 숲은 보여 주지 않고 나무만 수십 수백 그루 보여 주기. 김엄지가 인물을 숨기는 첫 번째 방법이다.

4 욕망보다 결심

김엄지가 인물을 드러내지 않는 보다 내재적인 방법은 주인공에게서 욕망을 빼앗는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욕망이 개인을 만든다. 그것만이 너와 나를 구분해 준다. 이야기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욕망이 캐릭터를 만든다. 욕망하면 갈등이 생기고 갈등하는 인물은 캐릭터가 된다. 캐릭터는 독자들의 기억에 남고 기억에 남는 것만 독자들은 안다. 그런데 김엄지 소설에 나타나는 e는 욕망하지 않는다. ‘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욕망하지 않지만, 욕망하지 않는 대신 결심한다. 허구헌날 결심에 결심을 반복한다. 주말, 출근, 산책: 어두움과 비에는 결심이란 단어가 스물한 번 등장한다. 걸핏하면 출현하는 결심이란 대략 다음과 같다.

e는 생일 기념으로 스케일링을 하기로 결심했다.

우산을 사야 해. 검정색으로. 그는 검정색 우산을 사기로 결심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폐가 약했어. e는 이제부터 폐를 관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새해 첫 결심이었다.

그리고 당분간은 빨래를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는 병원엘 가리라 결심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 실컷 자리라 결심했다.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창작과 비평, 2013년 가을호)에서도 세 번의 결심이 등장한다. 세 번이란 숫자에 실망할 필요는 없다. 주인공은 지금 계곡에서 다이빙을 하기 위해 등산을 나섰지만 숙박할 곳을 찾지 못해 헤맸고 숙박이 해결된 다음에는 숲에서 길을 잃어 헤맸다. 도와 줄 사람도 없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구사일생으로 숲을 나온 란 말이다. 그런 가 하는 결심도 별다르지 않다.

그는 그저, 집으로 돌아가면 이불을 빨아야겠다고 결심했을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이불 빨래를 하리라 다시 굳게 다짐했다. 하지만 그는 다짐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그는 1년 전부터 이불 빨래를 결심하고 있었다.

사사롭다. 다수에게 하찮은 것이 어떤 이에게는 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이건 너무 사사롭지 않은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정도의 일에 마음을 걸지 않는다. 우산을 사겠다고, 폐를 잘 관리하겠다고, 잠을 실컷 자겠다고, 병원엘 가겠다고 결심까지 하지는 않는다.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우산이 없어서 곤경에 빠졌다면, 폐에 문제가 생겨 겁을 먹었다면, 불면증에 시달려 고생했다면, 병원에 안 가 큰 코를 다쳤다면. 하지만 우리에게 전달된 e는 비나 눈 때문에 어려움에 빠지지 않았고 폐가 위험하다는 경고도 듣지 않았으며 잠이 안 와 고생하지도, 병원을 멀리해 위기에 처하지도 않았다. 그저 발단으로서의 결심이 있고 위기로서의 포기가 있을 뿐이다. 절정은 없다. 결말에 이르면 또 다른 결심이 추가될 뿐이다. 실패한다고 해서 대단한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닌 결심은 타인과 상관없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다. ‘실패가 아니라 다시가 있을 뿐이므로 욕망보다 리스크가 적은 일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결심은 이야기의 핵심 성분인 말썽의 플롯장치각주2) 로서의 욕망을 제거하고도 이야기를 진행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플롯장치인 것이다.

각주2) 조너선 갓설, 노승영 옮김, 지옥은 이야기 친화적이다, 스토리텔링 애니멀(민음사, 2014), 77.

포기하면 그만이고 실패해도 그만인 결심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상황을 꼬이게 만드는 욕망과 다르다. 욕망은 위험하다. 그것은 채워지지 않고 위기를 불러오며 끊임없이 극복해야 한다. 무엇보다 갈등을 발생시킨다. 갈등하는 인물은 선택하고 행동하므로 그 과정에서 캐릭터로 발전한다. 캐릭터가 된 인물은 독자에게 전달되고 파악되며 궁극에는 독자의 것이 된다. 독자들로 하여금 e를 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독자의 손에 인물을 넘겨주는 것이다. 반면 욕망하지 않고 결심만 하는 e는 결코 독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는다.

e가 대체로 감정이 없거나 의미가 모호한눈물을 흘리는 것도 욕망이 없어서다. 감정은 무엇보다 욕망의 표현이다. 욕망을 통해 외부와 상호작용하는 대신 결심을 반복하며 개인적인 생각만 진행하므로 기쁨이나 환희, 분노나 슬픔이 드러나지 않는다. 반응하는 상대가 없기 때문에 드러나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 힘들다. 잡스 앞에서 흘린 눈물처럼, 또는 잡스에게 보낸 박수처럼 맹목적이거나 모호하다. 그러니 서술자가 독자들 앞에 쏟아놓은 말과 정보가 얼마나 많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정말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읽으면 읽을수록 소설 속 주인공은 우리에게서 멀어져 간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없는 얼굴만 커다래진다.

그들의 결심이 가지는 의미를 정리해 보자. 주인공 마음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 하더라도 결심은 독자에게 이야기가 진행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준다. 그러나 기대는 배신당하고 끝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결심의 내용을 봐도 누구의 결심이라 해도 될 만한 밋밋함을 유지함으로써 끝내 독자에게 개별 인물을 드러내지 않는다. 요컨대 결심의 무한 반복은 욕망을 통제함으로써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막는 외부적 장치인 동시에 감정의 근원으로서의 욕망을 차단해 인물의 개성을 봉쇄하는 내부적 장치인 것이다.

5 엑스트라 주체

무대 위에서 엑스트라는 얼굴이 없다. 관객에게 주인공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얘기를 들어줄 친구가 필요할 뿐 그 친구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다만 주인공에 대한 정보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 잊히기 위해 등장하는 역설적 존재이자 맥락을 거세당한 불구의 존재다. 김엄지는 앞서 살펴본 소설에서 욕망 대신 결심을 반복하고 부분으로 전체를 감춤으로써 잊히기 위한 존재를 만드는가 하면 하나의 사건에 집중하지 않고 수많은 부분을 파편적으로 펼쳐 놓음으로써 스토리가 없는 부분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 존재들, 파악되지 않기 위해 쓸데없는 것만 조명받는 조연 같은 주인공이자 맥락 없이 파편적으로 존재하는 부수적인 그들을 엑스트라(extra) 주체라고 불러본다. 엑스트라 주체, 그 모순의 형용을 이 시대가 호출했다. 상기하건대 여기는 아는 사회, 우리는 아는 시민인 동시에 아는 것에 피로를 느끼는 중이다.

엑스트라 주체에게 미래가 있을까. 문학동네2012년 봄호에 발표된 영철이에서 나는 아는 시민의 파국을 본다. 그녀와 영철이는 부부다. 둘은 이혼한다. 아내가 뭐라고 묻건 간에 영철은 글쎄, 그러게, 잘 모르겠는데, 라고 대답해기 때문이다. 그런 영철을 아내는 몸이 떨릴 정도로 싫어하는(것처럼 보이는), 하지만 둘은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 둘의 단절은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앎의 함정에서 비롯된 거대한 오해. 둘은 키우던 개가 사라진 날, 개를 찾던 중 그걸 깨닫는다.

어딜 간 거야, 어딜. 그녀는 입을 벌리고 울었다. 그만 울란다고 그만 울 아내가 아니었기 때문에 영철은 묵묵히 아내 옆에 서 있었다. (……) 어딜 간 거야, 어딜. 그녀는 쉽게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게 영철은 아내의 옆에 서서 속삭이듯이 말했다. 영철이 속삭이는 동안 해가 완전히 사라졌다.

개가 많이 있는 동네가 어딘데? 아내는 묻고 싶었지만, 묻는다고 영철이 제대로 알 리가 없었다. 행여 안다고 해도 똑바로 대답해 주리란 보장이 없었다. 보장이란 보증보다도 무서워서, 그녀는 영철에게 개가 많은 동네가 어딘지 묻지 않았다.

-영철이에서

영철이 우는 아내의 귀에 대고 그러게, 속삭이는 대신 울지 말라고 말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개가 많이 있는 동네로 가 보자는 영철의 말에 아내가 보장이니 보증이니 하는 생각을 버리고 개가 많은 동네가 어디냐고 물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래도 헤어졌을까? 사라진 개를 찾으며 둘은 서로의 의외성을 발견하지만 그들에겐 그것을 표현할 언어가 없었고 그래서 그들은 이별했다. 잡스가 꿈에 나왔다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대립을 통해 허위적 앎과 그것의 허무감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면 영철이는 알고 있다는 착각과 확신으로 인해 생겨나는 인간 사이의 거리감을 그리고 있다. 슬픈 거리감이다. 이러한 슬픔, 어떤 타인과도 오직 거리감으로만 연결되어 있는 슬픔의 정조는 김엄지가 만들고 있는 소설의 정념이자 우리 시대가 갖고 있는 보편적 정념이기도 하다.

김엄지 소설은 읽으면 읽을수록 모르는 게 많아진다. 읽기가 진전될수록 앎은 뒤로 간다. 그 안에서 독자들은 정보를 획득하는 동시에 모름을 달성하는 무지의 경험을 체험한다. 인물에 대해 주어지는 정보는 많지만 그 정보를 전달하는 서술자는 때때로 과장된 해석과 왜곡, 단정을 일삼기 때문에 -주인공에 대해 너무 쉽게, 강박이 있다거나 생각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다.- 그것은 믿을 만한 정보가 되지 못하기도 한다. 여러 장치들을 통해 끝내 파악되지 않는 데 성공한 인물들은 너무나도 쉽게 노출되고 간단하게 간파당함으로써 아는 사회의 피해자가 되는 사람들과 대조를 이룬다. 그 밋밋한 이야기, 밋밋한 인물들을 읽어 나가며 무지를 경험한다는 것은 너무 쉽게 한 사람에 대해 아는 사람이 되었던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적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끝내 모르기 위한 독서, 더욱더 모르기 위한 읽기. 김엄지 소설이 아는 사회와 싸우는 방식이다.

중얼거림을 텍스트화하거나 웅얼거림을 민감하게 포착해 냄으로써 그동안 한국문학사에서 배제되었던 거의 모든 대상, 계층, 사물, 주체 들의 숨겨진 말을 듣거나 대신해 주고 그를 통해 다양하고 생동감 있는 목소리들이 넘쳐흐르는 혼성적이고 카니발적인 시공간을 만든 것이 1990년대 문학이었다면각주3) 2000년대 문학은 환상이라 불리며 소설적인 질서 안에서 얼마간 폄하되어 왔던 영역의 전면적인 확산과 그로 인한 리얼리티를 재편각주4)해 왔다. 그리고 2010. 우리 앞에 나타난 한 소설가는 정보화 사회에 그늘진 폭력적인 앎의 권력에 반기를 들며 무지의 체험을 전달하는 장막의 소설을 쓴다. 여기에는 1990년대 문학의 특징인 다양한 목소리를 품으려는 사회적 의식과 2000년대 문학의 개성인 상상력의 확산에서 이어 받은 표현 의지가 더해져 이루어 낸 또 다른 성취의 시작이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 성취의 면면을 살펴봤다. 김엄지가 그려 보이는 거대한 무지 앞에 서 있는 지금, 그녀의 물음이 다시 들려온다. 이제 우리가 답할 차례다. 우리의 앎을 반성해 볼 차례다.

각주3) 류보선, 하위주체들의 카니발, 혹은 1990년대 문학비평의 풍경, 또 다른 목소리들(소명, 2006), 105~106.

각주4) 백지은, 사회적인 것을 묻는 세 가지 방식, 독자 시점(민음사, 2013), 203.



[문학평론 당선 소감] 평론·편집의 즐거움 만나뜨거운 에너지 느꼈다

박혜진 좋아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 좋아해야 한다고, 한 선배 편집자는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심드렁한 척했지만 실은 한 번도 허투루 듣지 않았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문학 편집자로서 다잡아야 할 마음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좋아하는 문학이 있거나 없거나 하는 것이 다른 어떤 일보다 중요한 저는 4년차 한국 문학 편집자입니다. 작품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일에 하루하루를 씁니다. 모태문학이랄까, 저에게 문학은 환경이고 생활이며 직업이고 꿈입니다.

고백건대 저는 김엄지 소설의 독자인 동시에 김엄지의 어떤 소설을 책으로 만들고 있는 편집자입니다. 편집자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 있고 평론가도 언뜻, 작가와 독자 사이의 어디쯤에 있는 것 같습니다. 가뜩이나 더 좋아하고 싶어 안달 난 제가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만들면서 이 글을 쓰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평론의 본령일 수는 없겠지만 이것은 저의 진심 어린 출발입니다. 글을 쓰며 평론의 즐거음과 편집의 즐거움이 만나 뜨거운 에너지로 변하는 순간을 경험했습니다. 개인적인 즐거움을 사회적인 기쁨으로 확장시키는 데 제가 갈 길이 있다고 믿습니다.

특별히 감사하는 마음은 선배 문학 편집자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책의 사각지대에서 묵묵히, 그러나 놀랄 만큼의 성실함과 한결같은 열정으로 문학을 대하는 선배들을 보며 이 길을 계속 가고 있습니다. 부족한 원고에 기회를 주신 김동식 선생님께는 성실함으로 보답하겠습니다.




[문학평론 심사평] ‘김엄지 소설의 서사 전략문제의식 선명히 드러내

김동식·문학평론가·인하대 교수 201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문학비평 부문에는 모두 15편이 응모하였다. 지난해와 비교할 때 응모작의 편수에서 뚜렷한 증가가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응모작의 수준이 높아지고 주제가 다양해졌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노인 문학의 문제, 공생의 윤리학, 자본주의적 환상과 실재, 21세기의 메시아 등등 매우 다양한 문제의식들과 만날 수 있었다. 한국문학의 위기가 여전히 이야기되는 시절이지만 문학에 대한 젊은 열정들이 살아있음을 알리는 반가운 소식으로 다가왔다.

본심에서는 심사 대상을 3편으로 압축하여 집중적인 검토를 하였다. 박남현의 '황병승 시의 '백발 소년'들과 시적 인간의 탄생'은 자본주의적 착란의 민얼굴을 드러내는 황병승 시의 기법에 대한 세밀한 독해를 보여주었으며, 임동휘의 '숨은그림 찾기'는 소설가 김숨의 작품을 대상으로 반복적 일상에 숨어있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의 의미를 고찰하였으며, 박혜진의 '없는 얼굴로 돌아보라'는 소설가 김엄지의 작품에 등장하는 의도된 무지(無知)의 축조술을 제시하고 그 사회적 의미를 구명하고자 하였다.

고심을 거듭한 끝에, 폭력적인 앎이 지배하는 정보사회의 논리에 맞서 무지의 체험을 전달하고자 하는 김엄지 소설의 서사 전략에 주목하여, 작품에 대한 문제의식과 비평적 안목을 선명하게 드러낸 '없는 얼굴로 돌아보라'를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앞으로 한국문학을 풍성하게 하는 비평가로 성장하기를 기원하며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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