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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평론/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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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
1. 심연
김수영의 문학은 일정한 체계화에 저항한다. 이 저항의 방식은 체계에 맞서 다른 체계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다. 저항이라고 부를만한 것은 오히려 체계화 자체에 대한 거부에 있다. 그러나 이 저항의 지점은 반드시 텍스트의 내부만을 관통하는 것도 아니고, 외부를 향해 실천적으로 작동하는 것도 아니다. 즉 그것은 우리가 의미를 도출시키기 용이한 명확한 출발의 지점을 허락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몇몇 글들은 모순과 아포리아로 점철된 것처럼 보이고, 이것이 김수영의 사유가 지닌 논리적 취약성으로 귀결될 위험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하나의 ‘신화’가 아니라 명확히 그것과 반대되는, 불안에 떨고 있는 어떤 위험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해야만 한다. 중요한 것은 김수영 스스로가 그 위험(불완전성)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자신의 문학(사유)의 본질에 위치시켰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유의 불완전성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불완전성에 대한 사유를 한 것이다.
나는 아직도 나의 시론을 전개할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나의 운산(運算)은 내 작품을 검토하기 위한 것인데, 시론을 꾸밀 만한 주밀한 운산이 되어 있지 않다. 시론도 문학이다. 그런데 나의 운산은 침묵을 위한 운산이 되기를 원하고 그래야지만 빛이 난다. 시론이 빛이 나는 것이 아니라 시가 빛이 난다. 이런 말도 해서는 아니 되는 말이다.
그리고 아들아 나는 아직도 너에게 할 말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안한다
안하기로 했다 안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너에게도 엄마에게도 모든
아버지보다 돈 많은 사람들에게도
아버지 자신에게도
-「VOGUE야」(1967. 2) 4연
언어가 죽음의 벽을 뚫고 나가기 위한
숙제는 오래된다 이 숙제를 노상 방해하는 것이
성의 윤리와 윤리의 윤리다 중요한 것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이행이다 우리의 행동
이것을 우리의 시로 옮겨놓으려는 생각은
단념하라 괴로운 설사
괴로운 설사가 끝나거든 입을 다물어라 누가
보았는가 무엇을 보았는가 일절 말하지 말아라
그것이 우리의 증명이다
-「설사의 알리바이」(1966. 8. 23) 5연∼6연
지금 우리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말하지 않을 것인가’라는 물음이 걸려있는 작가와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고지하고, 경고한다. 말하지 않음, 말하는 것을 피하는 것, (‘말할 수 없음’의 표현이 아닌) 이러한 회피의 능동성은 말과 의미의 지평에 공백을 기입하는 것이다. 쓰인 것은 사실상 이미 지워진 것이며, 따라서 그 흔적은 ‘읽기’의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예를 들면, 김수영의 산문을 읽을 때의 당혹감은 그것이 ‘문학’ 혹은 ‘비평’의 본질이 쉽게 완결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문학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시인 김수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문학사적으로 드러나는 시차가 아니다. 그의 글을 대면할 때 우리는 어떤 근원적 공백 혹은 불가능성 앞에서 머뭇거리거나 망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일화의 작업을 대신에 김수영이라는 작가에게 주어진 무대와 우리가 마주하기엔 아직 한 가지 질문이 더 필요하다. 요컨대 그것은 김수영 스스로가 던졌던 질문을 반복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비평, 특히 어떤 이론적 작업에 대해서 끝임 없이 이의를 제기하는 회의주의자(타자)이다. 물론 그는 ‘비평’이나 어떤 이론에 대한 거부의 내용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끊임없이 당대의 문학과의 위화감을 보여준다. 1960년대 말의 소위 ‘불온시 논쟁’에서 김수영의 글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는 단순히 이어령의 논리에 대해 대립적 의사를 밝히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문제의 시각을 전도시키고 있다. 김수영의 글은 정치적 문제의 심각성을 우위에 두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상은 ‘불온성’이나 ‘유아 언어’ 혹은 ‘상상적 강박’, ‘에비’로 상징되는 ‘가상적 어떤 금제의 힘’처럼 이어령 자신이 부정적 의미를 부여했던 것들을 오히려 역설적으로 문학의 본질의 영역에 가져다 놓은 것뿐이다. 그것은 ‘진정한 문학은 이런 것이다.’라는 또 다른 주장이나 이론적 설득이 아니다. 그의 부정은 문학(시)이라고 부를 만한 것 혹은 문학의 본질이라는 것이 부재 한다는 주장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정언적 명령이다. 적어도 김수영의 문학이 이해의 무대에 전면으로 등장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전도가 갖는 의미, 그러한 고집스러운 태도의 심연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기다림의 시간은 그 명령에 대한 응답(책임)의 가능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러한 가능성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희망적이지 않다. 문제는 “아무리 해도, 자기의 몸을 자기가 못 보듯이 자기의 시는 자기가 모른다”고 말하는, 즉 “어떤 말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 자신에게로 번역되지 않는” 한 작가의 작품을 어떻게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가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김수영의 문학작품을 상속함에 있어서 ‘얼마만큼 그의 내면으로 파고들어야 하는가. 다시 말해 그의 내면을 작품 이해의 토대로 삼을 것인가’ 혹은 ‘얼마만큼 외부(역사)의 객관적인 기준에 의해 그것이 점하는 위치를 규정할 수 있는가’라는 두 길 사이에서 결코 행복한 선택의 기회를 맞을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말해준다. 모든 논의를 뿌리부터 뒤흔들어버리는 이러한 맹점이 우리를 ‘초월적 기의’(의미)로 향하게 만든다. 나를 응시하는 어둠 앞에서 의미의 유혹은 얼마나 피하기 어려운 것인가. 라캉의 말대로 응시의 지점은 언제나 보석의 애매모호함을 담고 있지 않은가. 지금 여기서 내가 하려는 작업 역시 그 의미의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다만 치열했던 한 작가의 심연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범박한 은유일 수 있겠지만, 허락된다면 ‘김수영은 스스로의 작품을 읽어내지 못한 최초의 독자였다.’고 쓰고 싶다. 생전의 김수영은 자신의 시가 ‘좋은 시’로 읽힐 경우 오히려 더 거칠게 고쳐 썼다. 이것은 단순한 창작 습관이 아니다. 누구도 그런 식으로 고쳐 쓰려 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해서 그는 자신이 읽히지 않게 쓴 것이 아니라, 읽히지 않는 것에 대해서 썼다. 그가 거칠게 다듬은 작품은 무지나 어떤 것의 결여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토대 없음’ 의 개방된 장소에 있다. 따라서 그의 시는 단일한 주제로 쌓아올린 건축물처럼 동일성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근사하게 지어진 현대적 건축물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공허 위에, 혹은 근거의 부재 위에 세워졌는지 알기만 하면 곧바로 무너져 버릴 듯이 버티고 있는 건물 안에서 김수영은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김수영의 시와 산문에는 그러한 근원적 질문에 의해 동요되고 해체되는 개념들로 가득 차 있다. 그가 선택한 주제들은 개념화 자체에 저항하며 위태롭게 연결되어 있다. 때로는 대립적 개념들이 일치하는 맥락을 보여주고, 동일한 개념이 또 다른 의미로 대체되기도 하면서 사유의 정점으로 올라간 말들은 의미를 거의 잃어버릴 만큼 떨고 있다. 그의 시적 주제를 ‘자유’나 ‘양심’, ‘존재의 문제’ 혹은 ‘혁명’이나 ‘사랑’과 같은 주제로 실체화 할 경우 거친 문맥은 더 매끄럽게 안정감을 찾고 ‘혼돈’은 정리되겠지만, 그의 작품이 지닌 물음(사유)의 심연은 사라지는 것이다. 김수영은 4.19를 통과하면서 자신(공동체)을 구성하는 혼돈 그 자체를 목격했고, 이후의 그의 작업은 그 인식적 사건에 대한 모종의 응답으로 점철되어 있다. 사라지는 어떤 것 앞에서 그가 취한 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김수영은 이미 ‘비평’에 대해서도 물음을 던져놓았기 때문이다. 사다리를 걷어차기에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단지 ‘비평’이 과거에 대한 정리 작업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래할 것으로 남아있는 과거나 미래에 대한 하나의 응답(책임), 즉 그것이 또 다른 시작이기 위해서는 시인 김수영이 열어놓은 공간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2. 첫 번째 아포리아: 쓰일 수 없는 역사
김수영에게 있어서 ‘주체’의 문제가 어떤 식으로 드러났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이 변화하는 지점을 발견해야 한다. 엄밀히 말해서, 주체에 관한 관점이 변했다고 말하는 것은 오류이다. 요컨대 그것은 4. 19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그에게 4. 19는 유의미한 단계로 소급되기 이전의 비역사적인 삶의 궁지를 드러내는 사건이었으며, 그가 악마의 작업을 통해서라도 밝히고 싶다던 ‘주체’ 문제의 전회를 이루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 전도의 체험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처럼 실험적 관점으로부터 실천적 관점으로 혹은 모더니즘으로부터 리얼리즘으로의 명확히 대립적인 이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 교차지점에서 세공해야 하는 문제는 ‘불완전한 주체’로부터 ‘불완전함으로서의 주체’로의 전도이다. 중요한 것은 이 전도의 경험이다. 우리는 이미 정신분석과 후기 구조주의의 이론적 개념들을 통해 ‘불완전함으로서의 주체’를 명명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리고 우리시대는 이미 수많은 ‘유령’과 ‘시차’가 넘쳐나지 않는가. 그러나 이 전도의 경험은 결코 주제화될 수 없다.
김수영이 주체에 대한 물음을 드러낸 부분은 단 두 문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주체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명확한 설명을 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 그가 주체적으로 살았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일 수는 없다.
모리스 블랑쇼는 68년의 혁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단지 하나의 권력을 다른 하나의 권력으로 대치하기 위해 찬탈하는 것도, 바스티유․겨울궁․엘리제궁․국민의회와 같은 어떤 목표물을 점령하는 것도, 나아가 구세계를 전복하는 것도 문제가 아니었다. 각자를 고무시켰던 말할 자유에 기초한 박애에 따라, 모두의 평등에 대한 권리를 증명하는 같이-있음의 가능성을 모든 실리적 관심 바깥에서 드러낸 것이 문제였다. 각자는 뭔가 말할 것이, 때로 (벽에) 써야 할 것이 있었다. 그런데 무엇을?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말함이 말하여진 것을 능가했다. 시(詩)는 일상적인 것이었다.(필자강조)....(중략).....그 현전은 권력을 잡고 있었던 자들의 분석을 비껴 나갔는데, 그들의 눈에 그것은, 사회학에서의 전형적인 표현에 따른다면, 난장판의 가장행렬로 여겨졌을 뿐이다.” 그리고 지젝 역시 10월 혁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객관화된 역사적 설명을 빠져나가는 것과 대면하기 위해서는 레닌·트로츠키·멘셰비키, 그 외 혁명가들의 열정적인 논쟁을 다시 읽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들이 지고 있던 상황 내적인 결정의 부담, 말하자면 그 속의 행위자들로 하여금 어떠한 ‘역사발전의 일반 법칙에’에 의한 보증도 없이 미증유의 결단과 새로운 해결책을 내리도록 강제하는 그런 결정의 책임 말이다. 이 미결정의 ‘불가능한 순간’이 주체성의 계기를 구성한다.” 이것은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은 비역사적인 삶의 한 국면에 대한 기록이다. 역사의 상징체계는 이러한 익명적 체험의 기록을 지워버린다. 김수영에게 있어서 4. 19는 역사적 기록으로 남겨지기 이전의 육체적 체험이었다. 그것은 반복되기 이전에는 읽을 수 없는 지워진 문자이다. 우리는 이렇게 지워진 혁명의 기록들을 블랑쇼의 기록과 대구를 이루도록 나란히 이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4. 19때에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통일>을 느꼈소. 이 <느꼈다>는 것은 정말 느껴본 일이 없는 사람이면 그 위대성을 모를 것이오. 그때는 정말 <남>도 <북>도 없고 <미국>도 <소련>도 아무 두려울 것이 없습디다. 하늘과 땅 사이가 온통 <자유독립> 그것뿐입디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그처럼 아름다워 보일 수가 있습디까! 나의 온몸에는 티끌만한 허위도 없습디다. 그러니까 나의 몸은 전부가 바로 <주장>입디다. <자유>입디다…….” 김수영에게 혁명의 경험은 일상적인 것이 위대성을 획득하는 성공적 이야기가 아니라, 일상적인 것과 위대성의 경계가 무너지는 사건의 체험이었다. ‘주체’의 문제로서 그것의 내부적 균열이 만들어내는 낙차를 견디는 ‘비애’와 ‘설움’으로부터 주체의 내부적 결핍이 대타자의 파열과 공명하는 ‘자유’와 ‘사랑’으로 도약한다. 그러나 그것은 미세하고 위험한 차이이다. 그는 이미 가장 위태로운 장소에서뿐만 아니라, 그 위태로움이 ‘사랑’이라고 썼다. ‘비애’와 ‘설움’은 해소된 것이 아니라, 재발견 되었다. 그것이 4.19 혁명이라는 사건이 김수영에게 있어서 역사적 실패의 지점이 아닌, 주체를 구성하는 근원적 부정성의 지점이 되는 이유이다.
3. 두 번째 아포리아: 시론 없는 시론
시인 김수영이 ‘나’를 문제 삼고 있을 때 중요한 것은 문제시되고 있는 ‘나’가 아니라, 그것을 문제 삼고 있는 ‘나’의 위치, 그것이 문제시 될 때 출현하는 ‘나’의 분열이다. 김수영은 문제의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 자체를 규정하고, 선언한다. 그는 언제나 어떤 경계의 지점을 의식할 뿐, 그것을 결코 넘어서지(초월하지) 않는다.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초월적인 시의 이론은 제시되어 있지 않다. 단지 왜 시가 ‘혼돈’이나 ‘과잉’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는지, 혹은 시작해야만 하는지를 역설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그는 그것을 통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실체적이고 자명한 대상인 시가 근본적으로 혼돈과 의미의 과잉을 지닌, 주체의 흔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누군가(주체)에 의한 창작(열림)의 결과물임을 재인식시켜준다. 처음에는 자명하고 평범한 것으로 보였던 시, 그러나 그것을 분석하면 형이상학적 궤변으로 가득 차 있는 기묘한 대상이라는 사실이 판명된다. 한 편의 시는 어느 정도 체계나 법칙의 지배를 받지만 결코 필연적 결과물이 아니다. 더군다나 하나의 작품은 작가가 인지하지 못하는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체계와 작가와 작품의 프로그램된 틀 안에서 작품 속의 결정 불가능한 흔적을 지워버린다면, 새로운 ‘읽기’는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침을 뱉으라’는 돌연한 명령의 출현은 그 글 속에서 도무지 해결될 수 없는 이물질의 출몰이다. 그것은 모든 논리적 개연성을 파괴하며, 인과관계의 그물망 사이로 돌출한다. 이 이물질의 사건적 출현이 그의 시에 대한 시각을 초월적 시점으로 수렴하는 것에 저항하는 최종적 잉여물이다. 김수영은 그것을 긍정한다.(“혼란은 허용되어야 한다”) 그것은 김수영이 말하는 ‘자유’의 이행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와 같은 이행(행위)의 지점에서 현실을 이루는 실존적 삶과 인간성은 논리적이기 보다는 ‘운명’과 관련된 것이고 따라서 김수영 변증법의 추상성과 그 한계를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삶이라는 불투명성(운명, 우연성)에 의해 그의 논리적 구조가 흐려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삶을 추상적 층위로 한계지우고 있는 것은 바로 논리의 위계 그 자체라는 것이다. 논리는 우연성의 도입을 두려워한다. 김수영 자신이 모색한 것이 ‘변증법의 실현’이 아니라 반대로 그러한 변증법으로부터의 탈피였다면 어찌할 것인가. ‘아직도 명확한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이 스스로의 논리적 취약성을 드러내는 말이 아니라, 하나의 요청된 불명확성이라면 논의의 층위는 전혀 다른 것이 된다. 김수영은 분명히 “나의 모호성은 시작을 위한 나의 정신구조의 상부 중에서도 가장 첨단의 부분을 차지한다.”고 적고 있다. 가능하다면 나는 이 명확한 구절이 던져주는 의미의 주석으로부터 해석의 지평으로 나아가고 싶다. 김수영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어떤 미완의 상태가 필연적이며 결정적이다. 변증법의 완결과 명확성은 그의 논리적 귀결의 명확성이 아니라, 바로 그 결정불가능성을 통과하고 창작된 시 작품에 의해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것일 뿐이다. 김수영은 일반적 시론을 구성한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시 한 편이 어떻게 창작되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 편의 시가(혹은 예술작품이) 창작되는 기원의 층위에서 보면 그의 텍스트는 냉정할 만큼 논리적이다. 오히려 한계는 비평적 논리가 거부한 ‘모호성(아포리아)’이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지 시를 논하는 사람이 아니며, 막상 시를 논하게 되는 때에도 그는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한다.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한다.’는 문장이 갖는 폭력성은 불행히도 잊혀져버렸다. ‘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시를 쓰는 것과 시를 논하는 것의 일견 대립적인 모순을 일치시키는 윤리적 명령. 이 문장 뒤에서 시와 비평의 일반론은 그 토대를 뒤흔드는 동요를 거쳐야 한다. 그것은 ‘비평’이 불가능한 지점을 표시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시도 아니고, 시평(시론) 또한 아닐 수 있는 전대미문의 위험한 장소를 가리킬 수 있지 않은가? 김수영이 발견한 공간은 결코 초월적 공간이 아니었다. 그는 그 장소를 4. 19라는 구체적 사건을 통해 발견했다. 공동체(체계)를 구성하는 권력의 헤게모니가 하나의 허구에 의해 지탱되어 왔었다는 자각, 또 다른 이데올로기적 전유(5. 16 군사 쿠데타)에 의해 다시 봉합되기 이전의 텅 빈 ‘자유’의 공간에 대한, 짧은 순간 동안 대타자의 상징적 질서 안의 구멍이 가시화되는 체험, ‘온몸으로 온몸을 밀고’ 나갈 수 있는 순간 들이 바로 시인 김수영이 ‘모험’을 감행했던 주체로서의 사유의 공간이다.「시여, 침을 뱉어라」는 (시론 없는)시론인 동시에 지극히 정치적이고 실천적(윤리적)인 메타포로 가득 차있다. 그러나 그 개념들 중 한 가지를 취해 해석이 가해질 때, 우리는 의미의 덫에 빠지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으로도 가능하다면, 우리는 먼저 무엇도 될 수 없는 불가능의 지점 위에 서 있는 것과 같다.
김수영에게 문제시되는 것은 대립된 것을 어떻게 융합하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립의 이전으로 돌아가 어떻게 혼돈을 긍정할 것인가 하는 점에 있다. 헤겔에게 있어서 논리적 변증법의 계기들 또한 모든 표상과 개념 속에서 모순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성립한다. 지젝이 헤겔을 설명하면서 칸트로부터의 이행(칸트의 반복)을 강조하는 것도, 모순의 구성적 필연성을 통해 헤겔의 변증법이 어떤 외부의 절대정신으로의 무차별적 포섭과정으로 오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문제는 실패한 총체화가 아니라, 그 실패의 지점으로부터 체계를 만들 수 있는 본래적 가능성이다. 그것은 초월적 시각에 대한 단호한 거부의 목소리이며, 이 불가능을 선언하는 목소리의 출현은 초월론적 주체의 장소를 고지한다. 김수영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실패의 지점을 어떠한 역사적 과정의 한 지점으로 환원하는 것-4·19 이후 사회적 억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하고 ‘자기 풍자’로 퇴행한다는 일반적 관점-은 그러한 지점들을 시적 배열로 완성한 주체의 관점을 잃게 만든다.
김수영의 문학적 공간은 내부와 외부로 구획된 안정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지 않다. 그것은 이론적 취약함이나 비일관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전에 존재하는 체계나 규칙들이 들어설 곳이 없는 열린 공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차이(경계)의 긴장은 계열화되지 않는 자유, 죽음, 사랑, 글쓰기, 혁명 등의 단어들이 지니고 있는 의미의 관계와 얽힘으로 나타난다. 그가 요청하는 것은 변증법을 거친 완결된 결과물이 아니라, 그러한 결과 이전으로의 회귀를 나타낸다.
귀납과 연역, 내포와 외연, 비호(庇護)와 무비호, 유심론과 유물론, 과거와 미래, 남과 북, 시와 반시의 대극의 긴장. 무한한 순환. 원주(圓周)의 확대. 곡예와 곡예의 혈투. 뮤리얼 스파크와 스푸트니크의 싸움. 릴케와 브레히트의 싸움. 앨비와 보즈네센스키의 싸움. 더 큰 싸움, 더 큰 싸움, 더, 더, 더 큰 싸움……반시론의 반어.-「반시론」(1968)
시인은 영원한 배반자다. 촌초의 배반자다.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고……이렇게 배반하는 배반자. 배반을 배반하는 배반자……이렇게 무한이 배반하는 배반자다.-「시인의 정신은 미지」(1964)
김수영의 이와 같은 무한의 변증법 속에서 발견되는 것은 배반하고 배반당하는 수없이 많은 자신과 수없이 배반하는 하나의 자신이다. 전자가 세계와 관계하는 자신이라면 후자는 그러한 관계 저편에 있는, 분열하는 주체이다. 그것은 무한히 배반하는 배반자이기 때문에 하나의 실체로 존속할 수 없다. 우리가 전자의 자신에만 주목할 경우 끝없이 도주하는, 즉 역사의 짐을 짊어진 채 짓눌린 김수영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마지막 구절인 ‘이렇게 무한히 배반하는 배반자’다.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달나라의 장난」(1953) 부분
김수영은 이렇게 자기 단절의 무한성(반복)을 통해서 비로소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을 확립했다. 그 때 ‘주체’를 ‘시인’이라는 단어로 대체해도 마찬가지이다.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이란 문장 속에는 주체의 내면적 성찰과 함께 ‘시인’으로서의 고통스러운 자의식이 담겨 있다. 이로써 우리는 또다시 ‘말할 수 없는 영역’(운명)에 도달한 것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운명의 원인이 아니라, 운명이 불러일으키는 결과들이다. 우연성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묻는 것은 소모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갖고 있는 상대적 절대성은 놀라운 것이다. 문제는 ‘운명’의 추상성이 아니라, 그것에 직면한 인간이 느끼는 구체적 절대성이다. 주체의 내면에 ‘운명’이라는 균열이 생길 때, 비로소 주체는 ‘선택’의 장소에 다다른다. 그곳은 명확한 대립의 세계가 아니다. 결정 불가능한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드는 곳, 환영으로 가득 찬 ‘여기에서는 핏빛의 얼굴이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저기에서는 또 다른 하얀 형태가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는 장소이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장소, 파괴와 창조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무(無)의 장소, 그곳으로의 반복적 회귀, 거기에 김수영의 ‘순간을 다투는 어떤 윤리가 있다.’
4. 세 번째 아포리아: 순간을 다투는 윤리
김수영은 자신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의 핵심이 ‘나’의 문제라는 것은 주지하고 있었지만, 그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피력하지는 않았다. 그것 또한 주의를 기울이며 피해야 할 단어들의 목록에 기입 되어 있다. 그가 파악한 주체가 어떤 양태를 띠고 나타날 수 있는지, 혹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어떤 존재론적 위치를 점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은 채 유명을 달리했다. 우리가 유일무이하게 목격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인식의 결과들, 엄밀히 말해 그러한 결과물들이 그려내는 역사적 궤적들뿐이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로 엮어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기에는 시적주체가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의 복잡성으로 인해 표류할 수밖에 없다. 그것들을 일련의 단계로 정리할 때, 우리는 단순하고 명확한 체계를 얻게 되겠지만, 그가 전적으로 물음을 던졌던 대상의 존재론적 중핵은 상실되고 만다. 놀랍게도 이것은 김수영 자신의 문제이기도 했다. 김수영의 문학을 바라볼 때 적어도 한 번의 전위적 시선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김수영은 몇몇 글 속에서 이와 같은 궁지에서의 자신의 관점을 보여준다. 김수영은 자신의 존재론적 문제의 발상지인 근원적 생성의 공간, ‘혼돈’이라고 지칭되는 공간까지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침묵의 세계, 자신의 언어(사유)가 세계와 극단적으로 단절되는 체험까지도 하게 된다. 메울 수 없는 심연을 가진 존재에게 언어의 집은 안락하지 않다. 언어는 존재의 공포스러운 집이다.
이 무언의 말
이 때문에 아내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자식을 다루기 어려워지고 친구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이 너무나 큰 어려움에 나는 입을 봉하고 있는 셈이고
무서운 무성의를 자행하고 있다
이 무언의 말
하늘의 빛이요 물의 빛이요 우연의 빛이요 우연의 말
죽음을 꿰뚫는 가장 무력한 말
죽음을 위한 말 죽음에 섬기는 말
고지식한 것을 제일 싫어하는 말
이 만능의 말
겨울의 말이자 봄의 말
이제 내 말은 내 말이 아니다.
-「말」(1964. 11. 16) 3연~4연
그는 혼돈 속에서 ‘자유’와 ‘사랑’, ‘혁명’이라는 단어들을 길어내어 우리에게 시를 통해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개념의 동질성을 뒤흔드는 것은 언어에 남아있는 주체의 흔적이다.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영역 속에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는 것이 이미 함께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수영에게 있어서 ‘나’에 대한 물음은 언제나 시인으로서의 ‘나’에 대한 물음에 의해 대리보충 된다. 김수영의 주체인식과 시적화자는 중첩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실존적 물음은 ‘시인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윤리적(실천적) 물음의 문을 열어놓는다. 그러나 우리는 김수영의 텍스트 어디에서도 직접적으로 서술된 ‘윤리’를 발견할 수 없다. 그는 윤리에 대해서 쓰지 않았다. 그에게 윤리는 말할 수 없는 것 혹은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의 영역에 있다. 김수영에게 있어서 윤리적인 어떤 것은 설명적인 것들을 통해서 대체될 수 없는 것이다. 그에게 윤리는 항상 ‘이것(고유명)의 윤리’로만 존재한다. 즉 윤리(실천)는 행위의 이행(침묵)의 차원에 있는 것이지, 그것의 기술이나 주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어떤 행위에 대한 기술이 된다면, 그것은 행위로부터의 거리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것은 ‘자유’가 기술되거나 주장이 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는 이미 ‘시작의 출발부터 시인을 포기했으며, 자신에게 시인이 없어졌을 때 비로소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김수영은 이미 지식의 테두리에 가두어질 수 없는 ‘행위’의 실재적 차원을 열어 보이고 있었다. 그가 ‘윤리’를 언급하고 있는 문장은 모두 하나의 지칭일 뿐, 윤리 그 자체를 술어로 채우지 않는다.
<제정신을 갖고 산다는 것은, 어떤 정지된 상태로서의 <남>을 생각할 수도 없고, 정지된 <나>를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엄격히 말하자면 <제정신을 가진> 비평의 객체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창조생활(넓은 의미의 창조생활)을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창조생활은 유동적인 것이고 발전적인 것이다. 여기에는 순간을 다투는 어떤 윤리가 있다.
그것이 ‘순간을 다투는’ 윤리인 이유는 ‘정지된 <나>’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이 문장에 쓰인 ‘윤리’에 대한 최적의 술어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윤리가 있다.’는 선언과 ‘정지된 <나>를 생각할 수 없다’는 사태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성도 끼어들 수 없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서 ‘윤리가 있다.’라고 쓰고 있는 숨어있는 언표행위의 주체가 바로 정지될 수 없는 ‘나’인 것이다. 그것이 지속적일 수 없다는 것을 김수영은 자각하고 있다. 창조적인 한에서 주체는 ‘유동적이고 발전적’이다. 김수영의 윤리는 김수영 자신이 윤리라고 지칭하는 행위에 있다.
김수영의 윤리는 ‘나는 누구인가’에서 ‘시인은 어떠해야 하는가’로 향하는 이행의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동의 실천에 있다. ‘나’의 존재적 통일성과 ‘시인’의 실체 사이의 안정된 체계를 와해시킬 수도 있는, 윤리적 결단. 우리는 그가 기입한 윤리로부터 어떠한 ‘내용’도 읽어낼 수가 없다. 그것은 주체의 결단, 다시 말해 행위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윤리’가 주체적 동일성의 존속을 위한 구축이 아니라, 생성을 위한 파괴(죽음) 속에 있다는 사실이다.
김수영에게 있어서 실천적인 영역은 그의 주체인식의 맹점을 감싸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이미 타자적이다. 혁명의 혼돈 속에서 ‘자유’가 어떻게 실현되었는지, 어떻게 그것이 하나의 행위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지, 혁명의 혼돈 속에서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의 의미가 자기 자신의 실존적 무게를 얼마만큼 감내해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 이후 벌어진 혼돈의 수습과 ‘질서’(체계)가 어떤 폭력을 은폐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뚜렷한 자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 이전의 ‘불가능한 주체’에서 ‘불가능성으로서의 주체’로 도약한다. 그는 모순을 지적하고 그것의 합일을 위한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그것은 혁명가의 직분이 아니라 정치가의 몫이다-,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현실의 근본적 외상성을 폭로하는 방식을 통해서 실천(윤리)의 가능성을 묻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엄숙한, 가장된 침묵의 한복판에 “침을 뱉으라”는 비윤리, 그것은 거짓된 침묵을 파괴시키기 위한 또 다른 윤리적 행위의 실천이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새로운 문학에의 용기가 없다. 이러고서도 정치적 금기에만 다치지 않는 한 얼마든지 <새로운> 문학을 할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라고 김수영은 말한다. 이때 ‘새로운 문학’이란 이전에는 없었던 것, 새로운 기반 위에서만 시작될 수 있는 문학을 일컫는다. 그가 단 한 번 사용했던 용어인 ‘문학혁명’, 그것은 도래할지 알 수 없는 미래의 어느 시점(무한)을 향한 무조건적인 열림의 실천을 요청하는 것이다. ‘침을 뱉으라’는 폭력성의 이면은 그러한 열림의 순간에 노출된 존재의 공포를 대변한다.
불을 끄고 누웠다가
잊어지지 않는 것이 있어
다시 일어났다
암만해도 잊어버리지 못할 것이 있어 다시 불을 켜고 앉았을 때는
이미 내가 찾던 것은 없어졌을 때
반드시 찾으려고 불을 켠 것도 아니지만
없어지는 자체를 보기 위하여서만 불을 켠 것도 아닌데
잊어버려서 아까운지 아까웁지 않은지 헤아릴 사이도 없이 불은 켜지고
나는 잠시 아름다운 통각(統覺)과 조화와 영원과 귀결을 찾지 않으려 한다
어둠 속에 본 것은 청춘이었는지 대지의 진동이었는지
나는 자꾸 땅만 만지고 싶었는데
땅과 몸이 일체가 되기를 원하며 그것만을 힘삼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러한 불굴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인가
어둠 속에서 일순간을 다투며
없어져버린 애처롭고 아름답고 화려하고 부박한 꿈을 찾으려 하는 것은
-「구슬픈 육체」(1954) 1연~6연
조화와 균형을 깨고 안정적인 존재의 질서에 파문이 일어난다. 김수영은 이 시에서 어둠으로부터 불이 켜지는 찰나에 무엇이 스쳐지나갔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반드시 찾으려고 불을 켠 것도 아니지만 없어지는 자체를 보기 위하여서만 불을 켠 것도 아닌데”라는 것은 사라지는 것으로서만 자신을 드러내는 어떤 것과의 마주침을 나타낸다. 그것 앞에서 주체가 어떤 결단을 내리는가가 중요하다. “나는 잠시 아름다운 통각과 조화와 영원과 귀결을 찾지 않으려 한다.” 존재의 평화가 깨어지는 파문 속에서 타자성의 도래는 어떤 필연적 귀결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주체는 그러한 열림의 순간을 본다. 그것이 잠시뿐일지라도 ‘어둠 속에서 일순간을 다투며’ 없어져버린, 불가능한 꿈을 찾는 주체의 장소에 ‘순간을 다투는 어떤 윤리’가 가능하다.
우리가 얼마만큼 타자를 향해 개방될 수 있는가, 미래를 향한 열림의 공포를 감내할 수 있는가. 불 켜진 텅 빈 방, 존재의 심연은 눈물겹도록 깊고 어둡다.
5. 네 번째 아포리아: 죽음 혹은 사랑
김수영의 초기시 「공자의 생활난」에서부터 주체를 둘러싼 문제의식은 그가 전개한 시적 흐름에 있어서 다양한 국면으로 표출되는 일관된 인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자의식은 김수영 시의 알파이며 오메가다. 중요한 것은 그가 ‘사물’의 ‘우매와 명석성’을 알아 볼만큼의 위치에 다다랐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죽음’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역설적인 ‘자기 한계’는 김수영 스스로가 시인이기를 포기하고서야 시를 쓸 수 있었다는 술회에서도 잘 나타나는 바이다. 어떠한 한계지점으로서의 자의식은 오히려 세계로부터 자신과 시를 지켜주는 원동력이 되고, 훗날 ‘자유’라는 실존적 과제와 만나게 되는 극적 순간을 예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죽음(타자)은 그의 시에 항상 들어와 있었고, 그에게 시작(詩作)은 그것을 드러내기 위한 반복적 작업이었다. ‘죽음’은 그의 내면적 각성의 장애가 아니라, 내속적 조건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김수영은 ‘죽음’이라고 쓰일 수 있는 자리에 ‘사랑’이라고 적는다. 더 나아가 죽음이 없다면 사랑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한 나라의 번영은 부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에 있다.> 이 평범한 자유의 표어가 사실은 5개년 경제계획과 같은 비중으로 자유의 가치를 내세우고 있는 현 정부의, 사실은 가장 허약한 맹점을 찌르는 교훈이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중략)…그리고 그것은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상식적으로 피상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자유의 죽은 관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시를 이행하고 있는 것이고 진정한 시는 자기를 죽이고 타자가 되는 사랑의 작업이며 자세인 것이다.-「로터리의 꽃의 노이로제」(1967. 7)
‘자유’는 60년대의 상황 속에서 ‘혁명’과 서로 맞물리면서 본연의 의미를 찾게 된다. ‘자유’와 ‘혁명’은 개인의 ‘주체로서의 체험’을 가능하게 한 매개체였다. 그것이 시 속에서 드러나는 양상은 ‘피의 냄새’를 간직한 자유(「푸른 하늘을」)였다. ‘혁명’과 ‘자유’는 주체의 공백에 붙여진 이름들이다. ‘죽음’은 그러한 공백의 체험이면서 동시에 타자와의 대면(사랑)이다. 사랑의 체험은 주체의 개방으로 향하는 타자의 불가능한 도래, 불가능성의 경험이다.(‘죽음이 없으면 사랑이 없고, 사랑이 없으면 죽음이 없다.’-「나의 연애시」, 1968)
김수영이 언급하는 ‘자유’와 ‘혁명’, ‘죽음’ 등은 그 의미들의 이면을 지지하고 있는 어둠에 둘러싸인 언표행위의 차원(주체)을 갖는다. 김수영이 주조해내는 시어들을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자유’나 ‘죽음’ 등의 단어로 그대로 옮겨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의 시어들은 번역되지 않는다. 그 단어들 속에는 주체의 내적 균열이 흔적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끝끝내 상징질서로의 체계화에 거부한다. 이와 같은 시어들의 의미는 겹쳐지고, 횡단하고, 반복되면서 의미의 ‘결정불가능성’ 속에 머문다. 김수영의 문학 작품 속에 드러나는 ‘이율배반’(모순)은 하나의 중심을 감싸고 펼쳐지는데,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자유’와 ‘혁명’, ‘죽음’ 등이 유령처럼 떠도는 텅 빈 주체의 장소이다. 김수영은 부조화와 불균형의 이상적 합일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비대칭성을 극단적으로 밀고나가 그것이 조화롭다고 믿고 있었던 것들과 이미 함께 있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것이 김수영이 보여주었던 해체의 본 모습이다. 욕망과 광기에 사로잡혀 있는 사랑, 그것은 부조리한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 지니고 있는 근원적 간극이다.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 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3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넝쿨장미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사랑의 변주곡」(1967. 2. 15)1~3연
우리의 기대와 달리 위의 시「사랑의 변주곡」이 처절하게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끝끝내 ‘사랑’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가 ‘사랑’을 통해 호명하는 모든 대상들은 ‘죽음’과 침묵의 공간을 채우고 있다. ‘사랑’을 대리보충 하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세계의 균열들 속에서, 나의 존재론적 우주에 균열을 일으키는 죽음(타자)이 없이는 나는 ‘나’를 생각할 수도 없고, 사랑을 경험할 수도 없다. 즉 사랑은 일자가 타자에게, 그에게 고유한 자신과의 일치를 허락하는 것이며, 그(타자)에게 현존을 주는 것이다.(자크 데리다) 가장 세속적인 대상들과 사랑은 하나로 이어진다. 우리는 어떤 것이든 그것을 향해 그가 했듯이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다른 그 무엇으로도 부를 수 없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있지만, 어떤 것도 그것을 대신할 수는 없다. 김수영에게 있어서 ‘사랑’의 위치는 다른 어떤 것보다 특권적이다. 김수영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이 것’(자유, 혁명, 시, 윤리) 들 속에서 그 모든 것을 대체 할 수 있는 ‘사랑’을 발견한 것이다. 우리는 그의 글 속에서 ‘이것이 윤리이다.’라는 문장에서 보았던 방식으로 ‘이것이 사랑이다.’라는 문장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정의로서 부족하다고 생각 될 수 있다. 그러나 정의로서 부족할 뿐,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선언으로써 거의 모든 것을 대체하고 있다.
6. ‘비평’의 아포리아
김수영이라는 고유명은 대체불가능하다. 단지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김수영을 하나의 일반적 주체로 치환할 경우에 한해서이다. ‘이것이 김수영이다.’는 발견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김수영은 X이다’라는 문장의 X를 완전히 충족시키는 의미는 얻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사유의 가능성이 그러한 X를 빠져나가는 것을 통해 획득된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김수영의 내부에서 시인 김수영을 넘어서는 부분. 그러나 그것은 ‘비평’이 불가능해지는 지점을 가리키고 있는 것 아닌가? 김수영 스스로 피해야만 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의 한계 이상을 보고자 욕망했던 지워진 모든 문자들의 흔적을 비평은 정리할 수 있는가? 우리가 끝내 명명하길 원하면서 찾아낸 주체의 심연은 또 다른 페르소나가 아닐까? 그것을 주체와 가면으로 아무런 동요 없이 나눌 수 있는 확실성을 부여해주는 토대는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또 다른 심연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물음들은 이미 오래전 플라톤이 시를 추방하며 맞세웠던 로고스의 시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히려 이번에는 시가 먼저 질문하고, 사유보다 앞서 사유가 아닌 것에 대해 묻고 있는데도 말이다.
‘주체란 무엇인가?’ 이것이 김수영이 쓰지 않았던 한 책의 제목이다. 그는 그것을 주제로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서 쓰지 않았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과 관련된 대부분에 대해서 쓰지 않았을 뿐, 그는 그것을 썼다. ‘자유’와 ‘혁명’, ‘윤리’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 쓰지 않았을 뿐이며, 그는 그것을 (글쓰기의) 행위로서 썼다. 글쓰기 자체는 어떤 ‘용기’를 수반한다. 어떠한 토대도 없는, 어떠한 규칙이나 체계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게 시작하기 위한, 모험을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자명함은 우리가 보고 있듯이 단순한 동의를 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감내하기 어려운 무거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김수영이 ‘잘못된 시간’(「사랑의 변주곡」) 속에서 미래의 타자(‘아들’)들에게 걸었던 가능성의 내기는 보다 더 근원적인 ‘불가능성’에 걸려있다. 김수영이 말할 수 없었던 것, 말하지 않아야 했던 것에 대해서 우리는 과연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 ‘말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할 수 있는가. 오히려 단지 그것에 의해서만 사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안온한 질서 속에 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면 여전히 시간은 어긋나 있는 것이다. ‘유령’은 1960년대의 어느 날 보다 더 많이 출몰할 테지만 누구도 그것을 명명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김수영은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했던 것과 같은 ‘말년의 양식’을 획득할 시간을 갖기도 전에 멈추어 섰다. 그러나 그는 이미 ‘말년의 양식’과 같은 어떤 것(죽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베토벤의 말년의 작품은 더 높은 종합에 의해 화해되거나 흡수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어떤 도식에도 들어맞지 않으며 화해되거나 해결될 수 없다. 작품의 확고하지 않은 특성, 종합되지 않는 단편적 특성이 뭔가 다른 것의 장식이나 상징이 아니라 작품의 본질적인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말년의 작품은 사실상 “잃어버린 전체성”에 관한 것이고, 그러므로 파국적이다.
말년의 양식은 시의성에 저항한다.(사이드) 현재 속에 거주하면서 동시에 그 현재로부터 벗어나 있다. 오로지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한에서 다음 시대를 연다. 그것은 반드시 노년에 직면한 예술가의 상태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말년의 양식이 지닌 ‘부정성’에 있다. “모든 시론은 이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는 모습과 행방과 그 행방의 거리에 대한 해석과 측정의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과 사랑을 대극에 놓고 시의 새로움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시라는 것이 얼마만큼 새로운 것이고 얼마큼 낡은 것인가의 본질적인 묵계를 알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필자의 말을 너무나 정통파적이고 고루하다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필자의 갈망은 훨씬 미래의 편에 서 있다.”고 김수영은 말하고 있다. 김수영의 작품을 통해 일련의 파국을 읽지 못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착시이다. ‘자유의 과잉’과 ‘혼돈’은 ‘비평’이 그것의 토대를 견뎌내기 어려울 만큼 파국적이다. 아마도 김수영이 설정한 미래는 여전히 도래하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기다림은 기다림의 대상을 향하지 않을 때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데리다의 말처럼 우리는 기대가 장래의 도래를 예비하는 것인지 아니면 동일한 것, 환영으로서의 사물자체의 반복을 상기시키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기다림의 끝에는 우리가 기대하거나 상상하는 것을 배반하는 전혀 다른 것이 도래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잘못된 시간’ 속에 있으며, 그 어긋난 시간 속에서만이 시작할 수 있을 뿐이다.
‘비평’을 가리고 있던 베일이 이제 서서히 걷히고 무대 위로 등장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화려한 등장일 수 없다. 그것은 일련의 파국적 무대 위에 서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다, 오히려 무대 위는 비어있다. 베일이 걷히고 무대 위는 텅 빈 관객석보다도 더 깊은 어둠을 상연하고 있을 뿐이다. 객석과 무대의 구분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모든 것이 고요한 침묵으로 빠져드는 예감의 시간이다. 우리는 너무 늦게 도착했고, 그는 너무 일찍 떠났다. 아니다, 우리는 너무 일찍 떠났고, 그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당선소감_"나의 버팀목들과 영예로운 출발 하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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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 있는 비평적 재능들이 점점 소수정예화되는 듯하다. 올해는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투고된 원고의 수가 예년에 비해서 다소 줄어든 편이었으나 범상치 않은 역량을 보여주는 몇몇 원고들로 인해 심사의 자리는 치열했고 또 즐거웠다. 심사과정에서 최종적으로 논의된 글들은 ‘조용한 혼돈, 주체 혹은 페르소나’와 ‘아이의 귀환, 모글리 신드롬’ 2편이었다.
‘아이의 귀환…’은 지난 10년 동안 있었던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시를 쓰는 젊은 시인들의 출현(글쓴이에 따르면 ‘모글리들의 출현’)에 주목하고, 그들의 시를 꼼꼼하고 끈질기게 읽어내려 애쓴 글이다. ‘늑대소년’에서 시 해석의 모티프를 가져온 발상도 흥미롭고 소통의 장벽을 넘어 시 속에 감춰진 의미를 풀어나가는 과정도 꽤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글의 흐름이 젊은 시인들의 시적 경향과 연결된 보다 확장된 논의로 나아가지 못한 채 각 시에 대한 개별적인 논의의 틀 안에 머물러버리고 만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조용한 혼돈…’은 김수영 문학이 지닌 아주 중요한 지점을 관통하는 글로 주목받았다. ‘정해진 것’으로서의 윤리, 정치, 문학을 말하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부정하고 해체하고 머뭇거리는 김수영 문학의 모호한, 아니 모호함으로써 명징한 어떤 본질을 매우 깊이 있게 포착하고 있다. 김수영이 왜 김수영인지를, 혹은 왜 김수영이어야 하는지를 성찰하고 또한 성찰케 하는, 거친 부분이 없지 않지만, 상당한 내공을 짐작케 하는 의미 있는 글이라고 판단하였다. 앞으로의 많은 활동을 기대한다.
이남호·박혜경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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