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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희곡/안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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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서
안재승
▶등장인물: 어머니,아들,딸,아버지(1인1역),외교통상부 관계자,무장단체 요원들,기자들,시민들,각 단체 대표들(해병전우회장,기독교단체장,시민단체장),동시통역사(이상 1인다역)
▶시간 및 공간: 현대,대한민국
▶무대: 이 극은 장면의 전환이 많다.따라서 기본적으로 빈 무대를 사용하며,사건이 벌어지는 장소의 분위기를 상징할 수 있는 최소한의 소품들을 사용한다.
1장
방 세 개짜리 반 지하방의 거실.한밤중.붉은 색,취침등이 켜져 있다.정적을 깨는 전화벨 소리.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잠시 후,다시 울리는 전화벨.거실 한 구석에서 토막잠을 자던 어머니,잠에서 깨어 전화기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와 손을 뻗는다.어머니,전화를 받을까 말까 망설인다.전화벨이 끊어진다.잠시 후,다시 시끄럽게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딸이 방문을 열고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나온다.
딸 에이 씨!
어머니 그들일까?
딸 시끄러워.빨리 받아.
어머니,쉽게 전화를 받지 못한다.아들,방에서 나온다.어머니,망설임 끝에 전화를 받는다.
어머니 여보세요?
외교통상부 (소리)여기 외교부인데요!
어머니 (말을 자르며)어디요?
외교통상부 외교통상부요!
어머니 무슨 일이시죠?
외교통상부 (소리)조금 전에 주 파키스탄 대사관에 이 전화번호하고,김만수씨를 인질로 잡고 있다는 무장단체의 메시지가 전달됐는데요.저희도 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을 해야 해서요.김만수씨 집에 계시면 좀 바꿔주시죠.
어머니 제 남편요?그럼요.지금 방 안에서 자고 있는걸요.잠깐만요.
어머니,남편의 방 문 앞에 가서 문을 두드린다.
어머니 나와서 전화 좀 받아봐요!
정적.아무런,인기척이 없다.어머니,남편의 방문을 다시 두드린다.
딸 그냥 열어!
어머니 항상 잠겨 있잖니.
딸,아버지 방의 문고리를 거칠게 돌린다.쉽게 열린다.어두운 방 안에는 아무도 없다.아버지의 방은 파키스탄 어느 민가로 전환된다.환영처럼,어둠 속,눈이 가려지고 양 손이 결박당한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아버지의 모습.아버지의 뒤로 소총을 들고 얼굴에 복면을 한 무장 단체 요원들.무장 단체 요원 중 한 명이 커다란 아랍 칼을 들어 아버지의 목을 베는 듯한 시늉을 한다.옆에서 다른 요원이 아랍어로 된 성명서를 읽으려 하는 도중,무대 밝아진다.거실,가족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어머니 언제 없어진 걸까?(사이)너하곤 종종 얘길 하지 않았니.
아들 옛날 얘기예요.
딸 정확히 3년 전이야!내가 연기학원을 그만둔 날이었으니까.
아들 저녁을 먹는데 느닷없이 ‘난 파산했다.’고 말했죠.
딸 처음엔 장난치는 줄 알았지.
어머니 ‘양심적으로 갚으려고 했는데.이젠 돌려막기도 한계에 다다랐구나.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얘기했어.
아들 침묵.한참 후에 엄만 ‘그럼 우린 이제 어떻게 살죠?’라고 물으셨죠.
어머니 니 아빤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니?’라고 대답했고.
딸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어.
아들 그 이후,우리가 있을 땐 절대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죠.
어머니 산 입에도 거미줄을 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딸 우리가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다는 사실을 통보받았을 때도.
아들 절대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죠.
딸 어쩌다 가끔 소리는 들려왔어.
아들 아직 살아 있구나를 확인할 수 있는.
가족들의 기억에 따라,아버지의 방 너머에서 다양한 소리들이 들려온다.
어머니 한참을 누군가와 애기하는 듯했지.
아들 알 수 없는 중얼거림.
딸 끙끙 앓는 신음소리.
어머니 다친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
아들 무서운 비명소리.
딸 귀신이 곡하는 소리.
어머니 깊은 한숨소리.
아들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지면 소리가 시작되었죠.우리가 들어주길 바라는 것처럼.
어머니 아주 서툰 연기였지.
아들 동정을 바랐겠죠.아니면 자기 역시 힘들다는 걸 알리고 싶었거나.
딸 TV 볼륨을 높이면 더 크게 소리를 내.소리를 죽이면 멈추고.마치 우리를 조롱하는 것처럼.
아들 우리의 일과에 맞춰,늘 정해진 시간에 시작해서 정해진 시간에 끝이 났죠.
침묵.소리,사라진다.
딸 유령 같았어.살아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워질 정도로.
아들 방 안에서 도대체 뭘 했던 걸까요?
어머니 시간을 죽였겠지.
딸 바깥의 상황을 살피며 어떡하면 더 불쌍하게 보일까 궁리했든가.
아들 우리가 나가고 나면?
어머니 밥을 먹거나,TV를 보거나.살아 있다는 흔적을 남기듯이.
아들 외출은?
어머니 가끔 신발의 위치가 바뀌어 있긴 했는데.먼지가 그대로인 걸 봐서는 멀리 다녀온 것 같지는 않더라.
침묵.
어머니 신음 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은 게 언제였더라?
아들 (사이)이주 전쯤 이었을 거예요.아버진 누군가와 얘길 하고 있었어요.누군가와 비밀스런 대화를 하듯,‘이브라힘!’이라는 말을 반복했죠.미친 게 아닐까 의심했어요.제 인기척이 느껴지자 급하게 전화를 끊더라고요.그러곤 다시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했죠.늘 그랬던 것처럼.갑자기 짜증이 밀려 왔어요.그래서 제가 한마디를 했죠.(사이)에이! 씨발.조용해지더군요.평화가 내려앉은 것처럼.
어머니 네가 좀 심했구나.
아들 씨발.아버지가 즐겨 내뱉던 단어죠.침묵을 제외한 유일한 단어.
딸 아빤 언제나 화가 나 있었어.
아들 늘 긴장해야 했지요.
어머니 말을 안 하니까 더 불안했지.
딸 그래도 얼굴엔 다 쓰여 있었어.알아서 기어라!
아들 복종과 침묵의 룰.일종의 계약이었죠.
딸 누구 맘대로?
아들 아빠 맘대로.
딸 왜?
아들 그야,이 집의 가장이니까.
사이.어머니,갑자기 하품을 한다.
어머니 이러면 안 되는데….자꾸 졸음이 오는구나.
딸,크게 하품을 한다.
어머니 니 아빠가 지금 잡혀있는 곳이 어디라 했지?
아들 파키스탄요.
어머니 거긴 어떤 곳이니?
아들 끝없는 모래사막 주변으로,깎아놓은 듯한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어요.
어머니 경치가 무지 좋겠구나.
딸 이런 홀가분한 기분 정말 오래간만인 것 같아.
아들 신경 써야 할 무언가가 없다는 거.
딸,바닥에 눕는다.하품이 전염된다.아들 역시 하품을 한다.아들도 바닥에 눕는다.어머니도 하품을 한다.어머니,졸음을 참는다.어머니,갑자기 무엇인가 생각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을 뒤진다.
아들 왜요?
어머니 오늘이 이자 내는 날이구나.
딸 에이-씨.기분 잡치게 그딴 소린 왜 해.
어머니 미뤄달라고 사정 좀 해볼까?
아들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그만 하세요!
아들과 딸,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으로 들어간다.어머니,고민한다.
어머니 근데 니 아빠는 왜 거길 간 걸까?(사이)진짜 아버질 죽일까?(사이)이자는 어떻게 마련하지?
무대 천천히 어두워진다.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밝아지는 무대.그 소리에 잠에서 깨는 어머니.조심스럽게 현관으로 걸어가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려고 애쓴다.누군가 밖으로 난 거실의 창문을 열려는 시도를 한다.어머니,아들의 방으로 도망치듯 들어간다.어머니,아들을 앞세워 걸어 나온다.현관문과 거실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어머니 이번엔 확실하지?
아들 그냥 아무도 없는 척해요.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깬 딸,부스스한 모습으로 방문을 열고 나온다.
딸 (소리를 지르며)에이-씨!왜 이렇게 시끄러워!
어머니와 아들,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딸을 바라본다.조금 전보다 더 격렬하게 현관문과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딸 뭐야?
어머니 그들.
딸 아빠,파키스탄으로 도망갔다고 해.
아들 그럼 우리가 갚아야 돼.
딸 왜?
아들 가족이니까.
딸 더 이상은 아니라고 해.아버지는 우릴 버리고 떠났다.그래서 우리도 기억에서 아버지를 죽였다.그러니까 아무런 관계도 아니다.
딸,현관문을 벌컥 연다.일제히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아들,딸을 밀쳐내고 문을 닫는다.딸,화장실로 뛰어간다.
어머니 뭐였니?
아들 기자들.
어머니 왜?
아들 인터뷰하러.
어머니 뭘?
아들 우리.
어머니 왜?
아들 테러리스트에게 가장을 인질로 잡힌 가족,극적이잖아요.
딸,화장실에서 나온다.세수를 하고 나온 얼굴이다.급하게 화장품을 바른다.
딸 에이 씨,쌩얼이었는데.인터넷에 엽기사진으로 돌아다닐 게 분명해.
아들 이 상황에 그딴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니?
딸 내 미래가 걸린 심각한 상황이니까.
아들 미친년!
어머니 (소리를 지르며)그만.
아들과 딸,각자의 방으로 들어간다.갑자기 굳게 닫혀있던 창문 틈 사이로 머리 하나와 마이크가 불쑥 들어온다.
기자1 김만수씨는 왜 파키스탄에 간 겁니까?
어머니 (당황해서)몰라요.
기자1 짐작 가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어머니 정말 몰라요.한 달 간 방안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았으니까.
기자1 암중모색!
기자1의 얼굴이 사라지고,기자2의 얼굴이 들어온다.
기자2 와신상담!그렇다면 어떤 큰 결심이 있으셨단 얘기군요.최근 평상시와는 다른 특별한 말이나 행동은 없었나요?
어머니 늘 신음소리와 한숨소리뿐이었죠.
기자2 고뇌에 찬 인간의 탄식!집에선 주로 어떤 생활을 하셨죠?
어머니 유령처럼 살아있다는 작은 흔적만 남겼어요.
기자2의 얼굴이 사라지고,기자1의 얼굴이 들어온다.
기자1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기 위한 수양!그리고요?
어머니 가끔 TV를 봤어요.
기자1 어떤 프로그램이었죠?
어머니 동물의 왕국.
기자1,안간힘을 다해 버틴다.기자1의 얼굴이 사라지고,기자3의 얼굴이 들어온다.
기자3 저희 방송사의 인기 프로그램이군요.인터뷰를 종합하면 김만수씨는 한 달 동안의 칩거를 통해 생태계의 문제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그 뜻을 펼치고자 파키스탄에 가신 거네요?
기자3의 얼굴이 사라진다.창 밖에서 기자들이 다투는 소리가 들려온다.무대 점점 어두워지고,주변사람들이 아버지에 대해 증언한다.증언자의 기억에 따라,아버지의 모습이 다양하게 재현된다.
여성 그 아저씨,특별했어요.전 한 무리의 고양이들이 아저씨네 집 창문 앞에 모여 있는 걸 자주 봤어요.‘야옹!야옹!’고양이들이 선창을 하면,‘야옹!야옹!’아저씨는 화음을 넣었죠.합창하듯이.무언가 교감이 이루어지는 듯했어요.그걸 지켜보는데 온 몸에 소름이 돋더라고요.
청년 마치 축지법을 연마하는 도인 같았어요.매일 아침,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소리와 함께 아저씨의 수련이 시작되죠.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른 걸음으로 제 창문 앞을 스쳐 지나가요.‘사-삭!사-삭!’지면과 발바닥의 마찰이 없는 것처럼.잠시 후 다시 ‘사-삭!사-삭!’제 창문 앞을 스쳐지나,집으로 들어가면 수련이 마무리됐죠.아저씨 손에는 언제나 수련의 징표가 들려있었죠.요 앞 지하철역에서 나눠주는 무가지요.
무대 밝아오면,거실에 심각하게 앉아 있는 가족.
딸 에이 씨!아빠가 무슨 사이비 교주라도 되는 것처럼 떠들어대잖아.내 미니홈피는 온통 악플로 도배야.(엄마에게)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아들 사실이 아니라고 밝히면 되지.
딸 진실이라 해도 안 믿어.
아들 거짓말이라도 해서 믿게끔 만들어야지.
딸 난 결백하다,자살이라도 해야 겨우 믿을 걸?
아들 이런 건 어때?예를 들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파키스탄에 갔다고 하든가,국가적 사명을 가지고 갔다고 하든가.그러면 악플 달 이유가 없는 거잖아.
딸 (비아냥거리며)아빠가 틈만 나면 욕을 퍼붓든 두 가지네.
아들 조작하면 어때?직접 확인할 수도 없는데.
어머니 있잖니….아버지 말이다.예전에 교회를 다녔다는 얘기를 들은 것도 같구나.결혼하기 전에.해병대에서.
딸 (화를 내며)그게 뭐 어쨌다고!
아들 해병대와 교회!완벽한 알리바이야!(사이,아들 부산을 떤다)엄마는 아빠 서랍장에서 해병대 군복을 찾으세요.그리고 넌 십자가 목걸이 가져오고.빨리!지금부터 우리 집 가훈은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예수천국 불신지옥!’아버진,신의 부름을 받고 귀신을 잡기 위해 파키스탄에 간 거야!
무대 점점 어두워진다,해병대 군복을 입은 해병전우회장(이하 해병)이 성명서를 발표한다.
해병 김만수 해병이 왜 파키스탄에 갔느냐?호랑이는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잡아요.네!김만수 해병은 귀신처럼 숨어있는 테러리스트를 소탕하기 위해 스스로 인질로 붙잡힌 겁니다.세계 평화를 위한 김만수 해병의 희생을 우리가 헛되이 하면 되겠습니까?테러리스트를 쓸어버리고 김만수 해병을 구합시다,여러분!
이에 질세라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띠를 두른 한 기독교 단체 대표(이하 기독교)가 성명서를 발표한다.
기독교 할렐루야!김만수 신도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 홀로 미개한 땅 파키스탄에 간 것입니다.배고픔과 병으로 죽어가는 파키스탄을 어린 영혼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사탄과 악마의 소굴로 몸소 걸어 들어간 것입니다.김만수 신도,죽으면 천국 갑니다.하나님의 뜻을 전파하다 죽은 자,반드시 하나님의 땅에서 영생을 누립니다.하지만 김만수 신도는 반드시 살아 돌아와서,하나님의 뜻으로 사는 자는 사탄의 총칼 앞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음을 간증해야 합니다,여러분!
암전.
2장
무대 밝아지면,다시 거실.아버지의 방문에는 빛바랜 해병대 군복이 훈장처럼 걸려 있다.군복엔 반짝이는 십자가 목걸이가 걸려 있다.아들과 딸,인터뷰를 하고 있다.
아들 아버지는 언제나 해병대 정신과 기독교 정신을 실천하며 사셨지만,단 한 번도 저희들에게 그것을 강요하시진 않았습니다.저희에겐 언제나 관대하셨죠.그래서 저희 가족은 교회에 나가지 않은 거고,저도 해병대에 가지 않은 겁니다.하지만 자신에게만큼은 엄격하셨습니다.항상 먹고사는 문제로 인해 세계평화와 전도에 자기 한 몸을 바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셨죠.(동생에게)그렇죠?
딸 (대답하지 않는다)
아들 감사합니다.여기까지 하죠.
일상의 거실로 되돌아온다.
딸 오빠,거짓말 진짜 잘하더라.
아들 다 우릴 위해서야.(답답하다는 듯)그래,너 연기하고 싶어 했잖아.그냥 지상 최대의 연속극에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거라 생각해.
딸 지상 최대의 사기극이겠지.
아들 사기라니?이건 아버지,어머니,그리고 너의 생명이 달린 중대한 문제라고.
딸 그럼 오빤?
아들 나는 예비 법관으로서의 양심을 팔고 있잖아.법조인으로서의 내 인생은 오늘로 끝이라고.후회는 안 해.가족을 위해 나 스스로 포기한 거니까.
딸 그토록 바라던 게 이루어졌네.
아들 신문에 니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실릴 걸.졸지에 대중의 관심을 받는 스타가 되는 거지.넌 그냥 내 계획대로만 따라와.그럼 모든 게 잘 될 테니까.
딸,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아들,자리에 눕는다.TV를 튼다.TV에선 코미디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다.아들,잠시 웃는다.그때,TV에서 뉴스 속보가 흘러나온다.
소리 뉴스 속봅니다.조금 전 파키스탄에 납치된 김만수씨에 관한 새로운 소식이 입수되었습니다.인질범들의 구체적 협상 조건이 담긴 테이프가 몇 시간 전 알 자지라 방송국에 우편으로 전달되었다는 사실이 알 자지라를 통해 보도됐습니다.
무대 어두워지면,어둠 속,눈이 가려지고 양 손이 결박당한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아버지의 모습.아버지의 몸엔 폭탄으로 보이는 물체가 매달려 있다.폭탄을 두른 아버지의 뒤로 소총을 들고 얼굴에 복면을 한,한 명의 무장 단체 요원이 아랍어로 된 성명서를 읽는다.인질 석방을 위한 본격적인 협상이 진행된다.외교통상부 관계자,해병전우회장,기독교단체장,무장단체 요원이 나온다.동시통역사가 진행자의 역할을 수행한다.과장된 무장단체 요원의 몸짓을 따라하며 통역을 하는 동시통역사.가족들도 토론의 장에 불려 간다.이들은 토론에 참여한 방청객으로,패널의 말을 듣고 반응한다.
동시통역사 우리는 김만수와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는 탈레반 인질 10명의 맞교환을 요구한다.
외교통상부 인질범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것이 국제사회의 철칙입니다.테러리스트의 석방이라니요?국제사회의 비난이 불 보듯 뻔합니다.
해병 일단 교환합시다.교환하고 나서 아예 싹쓸이해 버리자고요.해병 1개 연대면 초토화시킬 수 있습니다.
기독교 하나님은 김만수 형제를 사랑하십니다.잘못된 길로 빠진 테러범들도 사랑하십니다.일단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고,테러범들이 하나님 앞에 참회할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무장단체 요원,무언가를 말한다.
동시통역사 요구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몸에 감긴 폭탄을 터뜨리겠다.
기독교 오,지저스!당장에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십시오.
해병 저런 사지를 찢어죽일 놈들.
외교통상부 인질 맞교환은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미국 정부와의 합의가 전제되어야…….
기독교 세계는 모두 하나님의 나라입니다.미국도 하나님의 나랍니다.우리는 형제입니다.형제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라면 미국은 어떤 조건도 내세우지 않을 겁니다.
해병 미국은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하는 나랍니다.국민들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군사작전도 불사합니다.안보문제라면 해병 전우회라도 특공대로 보냅시다.해병대는 예비역도 귀신 잡습니다.
무장단체 요원,황당한 표정이다.한참을 고민한 끝에 무언가를 말한다.
동시통역사 협상시한은 내일 낮 12시!
기독교 자,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김만수씨의 무사 생환을 촉구하는 예배를 올립시다.다 같이 일어나십시오!기도합시다!(손뼉을 치며,찬송가를 부른다.)
해병 전우여,해병의 힘을 보여줍시다.김만수 해병,우리가 구해옵시다.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반동에 맞추어 ‘팔각모 사나이’를 부른다.)
상대에게 질세라,목청 높여 노래한다.무장단체 요원,어이없다는 표정이다.가족들,무언가를 말하려 하지만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아 제지당한다.무장단체 요원,무언가를 말한다.
동시통역사 다만…….
모두 숨을 죽인 채,통역이 되기를 기다린다.
동시통역사 미화 100만달러를 지불한다면,인질을 석방할 용의가 있다.
‘와~’,기독교 단체와 해병전우회가 서로 끌어안고 환호한다.
기독교 기적입니다!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해병 저 놈들,겁먹은 거야!해병대의 패기에 얼어버린 거야!
그때,시민단체장(이하 시민단체)이 나타난다.젊은 여성이다.
시민단체 국민의 혈세를 함부로 낭비할 순 없습니다!
해병 지금 사람 생명보다 돈이 중요해!
기독교 하나님은 그 무엇보다도 인간의 생명이 중하다 말씀하십니다.
시민단체 도대체 그 많은 돈을 어디서 마련합니까!외교부 예산에서 마련하시겠습니까?아니면 국방예산에서 마련할까요?종교인에게 세금을 거둘까요?
침묵.
해병 솔직히 100만달러면 바가지 아니야?
기독교 목사님들,항상 베풀기 때문에 배고픕니다.
해병 정부가 나서서 협상금 내려야 하는 거 아니야?
기독교 자,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김만수씨의 협상금을 낮추는 예배를 올립시다.다 같이 일어나십시오!기도합시다!
해병 전우여,해병의 힘을 보여줍시다.김만수 해병 협상금,우리 깡으로 깎아봅시다.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시민단체 잠깐!왜 팔각모 사나이죠?여해병도 있는데!이건 남녀 차별이에요!
서로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느라 바쁘다.참다 못 한 어머니,토론장으로 뛰어들어 말한다.
어머니 사람 목숨 가지고 지금 뭣들 하시는 거예요!그 돈,우리가 갚을 테니,일단 살리고 봐요!
침묵.
외교통상부 정부는 인질 석방을 위해 미화 100만불을 지불할 용의가 있음을 무장단체 측에 공식적으로 통보합니다.단,추후 김만수씨 가족에게 협상 과정에서 들어간 비용 일체를 청구하되,도의적 차원에서 이자는 받지 않겠습니다.이상.기자회견을 마칩니다.
가족만 남기고 모두 사라진다.어머니를 노려보는 딸과 아들.
딸 에이- 씨!
아들 도대체 왜 나서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요!
침묵.
아들 젠장 무덤에 들어가서도 청구서 받게 생겼군.
딸 둘이 알아서 잘 해봐.그 돈 갚느라 내 청춘 낭비하고 싶지는 않아.
아들 니 청춘은 금값이고,내 청춘은 똥값이냐?
딸 오빤 장남이잖아.
어머니 니들은 걱정 말아라.내가 갚으마.일을 하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아들 뭐 생명보험이라도 들어놓은 거 있어?
그때,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아무도 문을 열려 하지 않는다.문을 두드리는 소리.마지못해 딸이 현관문을 연다.
딸 에이 씨!누구야!
얼굴을 내미는 검은 양복의 대부업체 직원.
대부업체 여기가 김만수씨 댁이죠?
아들 인터뷰 안 해요.그냥 가요.
아들,문을 닫으려 한다.대부업체 직원,필사적으로 문을 막아서고 안으로 들어온다.
대부업체 (주머니에서 계약서를 꺼내 들이밀며)하지만 계약서상에는…….
아들 약속 취소합시다.
대부업체 그러면 법적인 문제가…….
아들 기자양반.기자 양반이 양심이 있어야지.아무리 특종이 밥 먹여 준다 해도,당사자가 원치 않는 취재를 하면 쓰겠어!
대부업체 기자라니요?전 희망캐피탈에서 나왔는데요,김만수씨 대출금 관계로.
아들의 표정이 굳어진다.대부업체 직원 얼굴에 미소를 띠고,친절하게 말한다.
대부업체 경황이 없을 줄은 압니다만,국가에서 청구한 돈을 먼저 갚으시느라 연체 이자가 산처럼 불어나는 상황에 처하게 되시는 건 아닐까 걱정이 돼서 찾아왔습니다.상환일은 앞으로 삼일.만약에 그 기한 내에 갚지 못하시면,김만수씨의 협상금 중 일부를 차압할 계획입니다.뭐,확실히 돈을 갚으시겠다는 약속만 해주시면 도의적인 차원에서 일주일정도 기한 연장을 해드릴 수 있습니다.
암전.
3장
어머니가 가사도우미를 하는 아파트의 베란다이다.의자 위에 올라가 창과 창틀을 닦는다.매우 힘겨워 보인다.허리가 아파 쉬는 어머니.크게 하품을 한다.어머니,다시 창을 닦는다.창을 닦는 속도가 느려지고 어머니,꾸벅꾸벅 존다.그 모양이 위태롭다.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는 어머니.초겨울 낮의 나른한 햇살에 평화롭게 잠든 어머니.잠시 후,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어머니,그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존다.누군가 현관문을 다급하게 두드리는 소리.그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존다.휴대전화가 울린다.휴대전화 소리에 놀란 어머니,균형을 잃고 창문 밖으로 떨어질 뻔한다.다시 균형을 잡고 전화를 받는 어머니.
어머니 여보세요.
아들,무대 오른쪽에 나타난다.
아들 나예요!
어머니 웬일이니.아침밥은 챙겨먹었니?
아들 지금 그게 중요해요?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
어머니 잠깐만…….누가 왔나보다.조금 있다가 다시…….
아들 문 열면 안 돼요.
어머니 왜?
아들 경찰이에요.
어머니 경찰?
아들 아래를 봐요.
어머니,아래를 내려다본다.무대 왼쪽,고개를 쳐들어 위를 바라보고 있는 일군의 사람들.
어머니 어디 구경거리라도 있니?
아들 엄마.
어머니 나를 왜?
아들 자살하려는 줄 아니까요.
어머니 (큰 소리로)저기요!전 죽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아들 미쳤어요?당장 죽을 것처럼 행동하세요.
어머니 왜 그런 거짓말을 하니.
아들 우리를 살리는 거짓말이니까요.아버지 얘기를 해요.사람들의 동정심을 유발해서,돈을 모으는 거예요.
딸,무대 왼쪽에 나타난다.
딸 (비명을 지르며)엄마!죽으면 안 돼!내려와 제발!
사람들,딸을 쳐다본다.
어머니 (창 밖을 내다보며)저 아래서 소리 지르는 애,미애 아니니?
딸,실신한다.사람들,딸의 얼굴에 물을 붓고,뺨을 때린다.
어머니 어머,쟤 왜 저래.어디 아픈 거 아니야?
아들 연기하는 거예요.
어머니 내려가 봐야겠구나.
아들 가만히 계세요.제가 그러라고 시킨 거예요.극적 효과를 위해서.모든 게 제가 짠 시나리오예요.얘기를 시작하세요.더 이상 시간이 없어요.사람들 관심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으니까요.일단 제가 시키는 대로만 하세요.
어머니 도대체 이게 뭐하는 건지.
아들 (화를 내며)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좀 하세요.이게 우리에겐 마지막 기회고 희망이에요.(사이)저는!
어머니 (작은 목소리로)저는.
아들 크게!그래서 저 사람들한테 들리겠어요?
어머니 (큰 소리로)저는.
사람들,딸을 내팽개쳐 둔 채,고개를 쳐들어 어머니를 바라본다.
아들 파키스탄에 피랍되어 있는 김만수의 아내입니다.
어머니 (큰 소리로) 파키스탄에 피랍되어 있는 김만수의 아내입니다.
아들 제발 제 남편 좀 살려 주세요.
어머니 (큰 소리로) 제발 제 남편 좀 살려 주세요.
사이.사람들,웅성거린다.
아들 저는 죄인입니다.
어머니 (큰 소리로)저는 죄인입니다.
아들 협상금을 마련할 돈이 없어,차라리 남편이 죽기를 바랐습니다.
어머니 (큰 소리로)협상금을 마련할 돈이 없어,차라리 남편이 죽기를 바랐습니다.
아들 이젠 우세요.
어머니 (큰 소리로)이젠 우세요.
아들 (화를 내며)진짜 울라고요!
어머니의 실수에 사람들 동요한다.실눈을 뜬 채 상황을 지켜보던 딸,갑자기 일어나 소리를 지른다.
딸 (비명을 지르며)엄마!죽으면 안 돼!
사람들,딸을 쳐다본다.어머니,우는 시늉을 한다.
아들 더 크게 울어요.
어머니,대성통곡을 한다.사람들,고개를 쳐들어 어머니를 바라본다.
아들 좋아요.사람들 반응이 오기 시작했어요.자 이번엔 발을 하나 밖으로 빼세요.
어머니,망설인다.
아들 뭐 하세요!빨리요!
어머니,발을 하나 뺀다.중심을 잃고 휘청거린다.사람들 웅성거리며,눈을 가린다.
아들 아주 좋아요!어,잠깐….저게 뭐지?큰 일이에요.옥상에서 구급대원들이 내려와요.(사이)그냥,뛰어내려요.안전 매트 때문에 죽지는 않을 거예요!
어머니 여기서?
아들 여기서 끝나면 해프닝이지만,뛰어내리면 충격이 돼요.남편들은 남편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던지려 한 어머니를 보며 잠시나마 사라졌던 자신의 존재감을 되찾을 수 있겠지요.주부들은 가슴 속에서 싸늘하게 식어버린 남편에 대한 순수한 사랑의 불씨를 되살릴 수 있을 거고요.그리고 그런 기회를 준 어머니에게 기꺼이 자신들의 지갑을 열겠지요.따지고 보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에요.
어머니,망설인다.
아들 어머니!빨리요!그들이 와요!
어머니,뛰어내린다.딸,비명을 지르며 실신한다.암전.
4장
거실.어둠 속,아들과 딸이 나란히 앉아 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다.
아들 얼마야?
딸 기다려.
딸,조심스럽게 클릭을 한다.
아들 (손으로 자릿수를 셈하며) 9억 5천 백…….
딸 7십 4만 5천원.
아들 (환호하며)됐어.성공이야.
딸 (아들을 기쁘게 끌어안으며)지금도 계속 들어와.
아들 (감격에 겨워)고생 끝났다.
딸 이게 다 오빠 아이디어 덕분이야.
아들 니 연기가 큰 몫을 했지.(비명 지르며 쓰러지는 흉내를 내며)아!
딸 근데 솔직히 아깝다.협상금을 다 모은 걸 알게 돼도,사람들은 계속 돈을 보내줄까?
아들 그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어?계좌추적 해 보는 것도 아니고.
딸 더도 말고 한 5억만 더 들어왔으면 좋겠다.
아들 우선 집 한 채 사고,작은 가게 하나 내고,남으면 차 한 대 사고….
딸 왜 집하고 가게야?그냥 똑같이 반으로 나눠.
아들 가게해서 돈 많이 벌면,너 시집갈 때 한 몫 단단히 챙겨줄게.
딸 그럼 가게는 내가 할게.
아들 널,뭘 믿고.
딸 오빤,뭘 믿고?
어머니,현관문을 열고 들어온다.아들,어머니를 보며 반가워한다.
아들 다녀오셨어요.
딸 다녀오셨어요.
어머니,말이 없다.넋이 나간 사람 같다.어머니,외투를 벗어들고 딸의 방으로 들어간다.
아들 (은밀하게)어머니한테는 돈 얘기 하지마.괜히 신경 쓰시게 하지 말자고.
딸 남은 돈,모두 돌려주라고 할까봐 그러지?
아들 그렇게 되면 어머니나 너한테도 안 좋은 일이잖아.
어머니,옷을 갈아입고 나온다.아들,어머니를 부축해 자리에 앉힌다.
아들 (어깨를 주무르며)피곤하시죠.
어머니 일은 잘 처리됐니?
딸 아직 많이 모자라요.
아들 그래도 협상금 정도는 모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머니 한 시름 놨구나.
딸,조용히 방으로 들어간다.
어머니 큰일이다.일,그만 나오라는구나.협상금은 해결됐다고 해도,당장 사채 갚을 일이 막막하네.
아들 걱정마세요.이제 일 그만두셔도 돼요.어머닌 이제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스타잖아요.잡지 인터뷰도 줄을 이을 거고,방송출연 요청도 쇄도할 거예요.
침묵.
어머니 남 속이는 일은 그만하자.
아들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마세요.
어머니 나중에라도 진실을 알게 되면 어떡하니.
아들 용서하겠지요.모두를 위한다는 명분이면,모두 용서되는 시대니까요.
침묵.
어머니 뉴스에 니 아버지 소식은 없었냐?
아들 만날 똑같은 뉴스의 반복이죠.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
침묵.
어머니 니 아버진 벌써 죽은 게 아닐까?
아들 아버진 그렇게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니에요.의지가 강한 분이잖아요.평생을 자기 뜻대로만 살아오신 분이에요.심지어는 우리들까지도 자기 뜻대로 만드셨죠.
어머니 그래서 걱정되는구나.테러범들한테까지 제 고집 부릴까봐.
아들 걱정하지 마세요.(사이)도장 좀 주세요.일단 돈 좀 찾아서 아버지 협상금부터 보내야겠어요.
어머니 네 침대 밑에 있어.
아들 제 침대요?
어머니 거기가 제일 안전할 것 같아서.
침묵.
아들 그럼 쉬세요.
어머니 법아.
아들 네?
어머니 아니다.
어색한 침묵.아들,자기 방으로 들어간다.어머니,자신의 주머니에서 카드 명세표를 꺼내 본다.한동안 아들 방을 쳐다보다,고개를 푹 숙인다.그때,방문을 열고 뛰쳐나온다.
딸 큰 일 났어.
아들,자기 방에서 뛰어나온다.딸,TV의 전원을 켠다.
소리 다시 한 번 전해드립니다.무장단체에 피랍된 김만수씨와 관련된 새로운 동영상이 유튜브에 게시되었습니다.이 동영상은 알자지라에 의해 공개된 테이프의 원본으로 보이는데요.아마도 누군가가 테러범들의 컴퓨터를 해킹해 인터넷상에 올려놓은 것이 아닐까 짐작됩니다.
무대 어두워지면,눈이 가려지고 양 손이 결박당한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아버지의 모습.아버지의 뒤로 소총을 들고 얼굴에 복면을 한 두 명의 무장 단체 요원들. 한 명의 무장 단체 요원,커다란 아랍 칼을 들어 아버지의 목을 베는 듯한 시늉을 한다.옆의 다른 요원,아랍어로 된 성명서를 읽는다.아버지의 목에 칼을 대고 있던 무장단체 요원,칼을 떨어뜨리고,성명서를 읽던 무장단체 요원의 말이 꼬인다.그 순간,아버지가 피식하고 웃는다.갑자기,해병전우회장과 시민단체장이 무대 위에 난입해 설전을 벌인다.
해병 생명의 위협을 받는 순간에 미소라?이게 바로 해병대 정신입니다.
시민단체 돈 뜯어내려고 연기하다 실수하니까,지들끼리 히히덕거리는 거 아닙니까.이건 명백한 대국민 사기극입니다.정부가 얼마나 물러 터졌으면,이런 사기를 칩니까.
해병 해병대는 오로지 악입니다.
시민단체 진실이 명백하게 밝혀졌는데,아직도 사기꾼을 우상화하실 작정입니까?
해병 해병대는 오로지 깡입니다.
시민단체 속아서는 안 됩니다.어젠 김만수 부인이 국민을 상대로 쇼를 벌이더군요.누가 봐도 어설프지 않습니까?실제 자살하려는 사람은 그렇게 말이 많지 않아요!김만수 부인이 떨어진 건 의도된 거라고요.뒷조사를 해봤더니,김만수씨 빚이 조금 있더군요.
해병 그게 뭐요?요즘 은행 빚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시민단체 다 사채빚이라는 게 문제지요.여기 증거자료가 있습니다.
해병 뒷조사는 불법 아니에요?정의니 어쩌니 떠들어 대더니 다 가식이구먼?
시민단체 (당당하게)어쨌든지 결과가 이렇게 나오지 않았습니까!이건 다 정부의 무능 때문이에요.정부가 일을 확실하게 했다면,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거 아닙니까?뭐,가족은 진실을 알겠죠.내일 12시,외교통상부에 나와서 가족들이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할 것을 강력하게 건의합니다.
해병 네,해병대 정신으로 당당하게 진실을 밝히세요.
두 사람,사라진다.가족들,둘러앉아 있다.
딸 에이- 씨.좀 어떻게 좀 해봐.다 오빠가 벌인 일이잖아.
아들 (화를 내며)나도 지금 생각중이야.
어머니 솔직하게 이야기하고,돈 돌려주자.
아들 미쳤어요?
어머니 나쁜 의도로 그런 게 아니니까,용서해 줄 거야.
아들 그럼 나랑 미애는?평생 빚쟁이한테 시달리면서 살라고?
딸 차라리 죽어버리지!
침묵.
아들 일단 아버지가 왜 웃었는지만 밝히면,어머니가 벌인 자살소동에 대한 의심은 사라질 거예요.아버진 도대체 왜 웃었을까?
딸 저번처럼 그냥 모른다고 할까?
아들 오히려 더 의심할걸?
딸 모르는 게 사실이잖아.
아들 사실보다 더 사실 같은 거짓을 말해야 믿는 게 사람들이잖아.(사이)이건 어때?아버지는 무서우면 웃는 버릇이 있다.
딸 그러면 해병은 겁쟁이가 아니라고 말하겠지.
아들 그럼 이건?아버지는 지금 납치범들의 행동을 비웃는 것이다.웃음은 의지의 표현이다.
딸 그러면 시민단체에서 의심하겠지.그렇게 의지가 있는 사람이 사채를 끌어다 썼느냐고.
아들 (화를 내며)에이- 씨!
사이,가족들 생각한다.딸,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다.문갑 위,작은 액자를 들고 온다.
딸 이게 언제지?
어머니 아버지 생일파티 같구나.
딸 여기 날짜가….내가 여덟 살 때네?
아들 난 케이크 자르는 칼을 들고 있고.
딸 난 그 앞에서 편지를 읽고 있고.
아들 아버진 웃고 있어.
어머니 얼마 후,니 아버진 친한 친구에게 사기를 당했지.그 친구를 잡겠다고 전국을 헤매다가 정작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걸 보지도 못했고.
아들 그때부터였어.아버지가 웃지 않은 건.아버진,그때를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딸 죽을 거라고 생각해서?
어머니 마지막으로 웃었던 그때를?
그때,아들 휴대전화의 벨이 울린다.아들,전화를 받는다.
아들 여보세요.
무대 한 쪽,이브라힘의 모습이 나타난다.한국어를 제법 구사한다.
이브라힘 안녕하세요.
아들 누구시죠?
이브라힘 이브라힘이다.
아들 (잘 못 알아듣는다)누구요?
이브라힘 만수형님 같이 일하던 이브라힘이다.집에도 몇 번 갔다.
아들 이브라힘?
이브라힘 그래 이브라힘이다.지금 옆에 누구 있냐?
아들 가족들요.
이브라힘 노 폴리스?
아들 네.
이브라힘 만수형님,나랑 같이 있다.
아들 뭐라고요?
이브라힘 걱정 말아라.만수형님 다 좋다.
아들 무슨 소리예요?아버지가 왜 당신이랑 있죠?
이브라힘 믿어라.내가 만수형님 목소리 들려준다.
이브라힘,수화기에 녹음기를 가져다 댄다.아들,전화를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스피커폰으로 전환한다.
아버지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라.모든 건 다 내가 꾸민 일이다.대충 모든 게 내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구나.협상금이 전달되면,나는 협상금의 3분의1을 이브라힘 몫으로 떼어주고,나머지를 해외 계좌에 송치해 둔 채 한국으로 들어갈 거다.그 돈이면 내가 진 빚 갚고도 넉넉히 남으니까,사업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듯하다.(사이)일단 이브라힘한테 빌린 돈으로 그럭저럭 지낸다.솔직히 음식도 입에 안 맞고 잠자리도 불편해 죽겠다.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구나.(사이)메시지 받거든,그곳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이브라힘한테 좀 전해라.꼭!
어머니,전화를 끊어버린다.긴 통화대기음,암전.
5장
외교통상부 내의 작은 방.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가족이 앉아 있다.긴 침묵.
어머니 지금 몇 시니?
아들 7분 남았어요.
딸 시간, 뒤로 미뤄.
아들 무슨 꿍꿍이냐고 더 의심할 걸?
딸 그럼 빨리 결정하든가?뭐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난 아까 결정했어.
어머니와 아들,딸을 쳐다본다.
딸 난 우릴 속였다는 게,용서가 안 돼.
아들 그래서?
딸 협상금 주지 마.
어머니 그럼 아빤?
딸 어떻게 되겠지.
아들 이브라힘이 순순히 보내줄까?
딸 알아서 해결하겠지.
어머니 그래도 그럴 순 없다.
딸 왜?
어머니 니들 아버지니까.
딸 아버지다워야 아버지지.다 늙어서 그나마 엄마 대접 받고 살려면,엄마도 결정 잘해.어떡할 거야?
엄마,충격을 받은 듯 무너진다.
딸 에이-씨!시간 없어.빨리 결정해!아니면 나가서 내 맘대로 말한다!
딸,문을 열고 나가려 한다.
아들 아버지가 돌아오면 어떻게 될까?
딸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가겠지.난 더 이상 그렇게는 못 살아.그나마 아버지한테 빚이 있었으니까,우리가 숨이라도 쉬면서 살았던 거 아니야?아마 빚 갚고 나면 그 빌어먹을 가장의 권위를 내세워서 다시 우리 숨통을 조일 거야.우리가 빚이라도 진 것처럼 끊임없이 무언가를 청구하겠지.
아들 그래도 아버지는 돈은 잘 벌어 왔잖아.그걸로 우리도 한동안 먹고살았고.
딸 결정적인 순간엔 아버지 편드는 걸 보니까,오빠도 별 수 없는 남자구나.
아들 누구 편을 들어!솔직히 너한테 들어가는 돈이 나보다 몇 배는 많았잖아.
딸 돈을 주니까 그게 사랑인 줄 알았고.하지만 지금은 그게 사랑이 아닌 건 알아.난 그냥 먹이를 주면 반사적으로 꼬리를 흔드는 개랑 다를 바 없었어.
아들 네 허영심을 채우려면 돈이 필요하니까,그래서 꼬리친 건 아니고?
딸 마약이라도 발라 놓으셨는지,끊어버리기엔 너무 달콤하더라고.
아들 그 돈이 아깝다.내가 그 돈을 가지고 장사를 했으면 재벌 됐겠다.
딸 나도 더러워서 진즉에 독립하려 했어.근데 빌어먹을 집구석이 당장에 원룸 마련해줄 돈 한 푼 없는데 어떻게 해!우리 협상금 나눠 갖고,여기서 다 갈라서자.아빠야 그냥 납치범들한테 죽었다고 생각하면 되지.사실 우리한테 아빤 죽은 거나 다름없었잖아.그리고 엄마한테 한 가지 충고하는데,이 새끼한테 밥 얻어먹을 생각 하지도 마.말하는 본새가 아빠랑 똑같아.
어머니,딸의 뺨을 때린다.
아들 그 년 잘 맞았다!계집애가 주둥아리를 함부로 나불대더라고.어디 오빠한테 대들어!
어머니,아들의 뺨을 때린다.
어머니 이놈의 종자들 다 지긋지긋해.애비나 새끼나 다 돈 생각뿐이야.돈이 가족보다 중요해?(사이)그럼 나도 이참에 엄마 딱지 버리고,돈 한 번 밝혀볼까?(사이)앞으로 모든 일은 내가 알아서 해.토 달면 알몸으로 확 내쫓아버리는 수가 있으니까,조심해!
어머니,아들의 전화기를 빼앗아든다.이브라힘에게 전화를 한다.
어머니 여보세요?이브라힘?나야.김만수 아내.남편한테 전해.협상금이고 뭐고 땡전 한 푼 보내 줄 수 없으니까,알아서 오든지 거기서 살든지 맘대로 하라고. 뭐?난 모르는 일이니까,빌려준 돈은 알아서 받아!
무대 한 쪽,단상이 마련되고 누군가가 문을 두드린다.어머니,아들의 가방에서 협상금이 담긴 통장을 꺼내든다.그리고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하기 위해 단상에 오른다.
어머니 우선 제 남편 일과 관련해서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안겨드린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저희 가족은 남편이 왜 목에 칼이 들어온 순간에 웃었는지 모릅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머니 솔직히 전 남편의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예전에는 먹고사는 게 바빠서 얼굴을 볼 시간이 없었고,먹고살 만하니까 더 잘살아 보겠다고 바빠서 얼굴을 볼 시간이 없었고,욕심 부리다 쫄딱 망해먹고 나선 가족 볼 면목이 없다고 방에서 나오질 않아서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머니 남편이 왜 파키스탄에 갔느냐를 두고 말이 참 많았습니다.듣고 있으면 하나같이 다 그럴듯합니다.근데 자기들 맘대로 사람을 살렸다 죽였다 합니다.하긴 그게 직업이니까,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겠지요.그래도 이건 아닙니다.먹고사는 게 사람 목숨보다 중요합니까?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라고 해서 다 용서가 됩니까?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어머니,통장을 단상 위에 놓는다.
어머니 남편은 지금 무장단체에 붙잡혀 있는 게 아닙니다.같이 일하던 파키스탄 노동자가 임금체불에 대한 대가로 사기극에 가담해 달라고 협박한 모양입니다.네,베란다 사건은 다 쇼입니다.남편이 진짜로 붙잡힌 줄 알고, 사기를 친 겁니다.다들 엄청난 돈을 보내주셨더군요.‘이 끔찍한 땅에도 아직까지 온정이란 게 살아있구나.’라고 느꼈습니다.남편의 협상금에 보태라고 보내주신 돈,여기 그대로 있습니다.한푼도 건드리지 않았으니 다들 찾아가세요.하지만 이유야 어찌 됐든 제가 국민여러분을 기망했으니 책임을 져야죠.저를 사기 미수죄로 처벌하십시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머니 욕 하실 분들,실컷 욕하십시오.하지만 저도 기왕에 이렇게 된 거 욕 좀 해봅시다.자기만 배불리 먹겠다고 돈 떼어 먹은 최동렬,돈 제때 갚지 못한다고 인질 협상금까지 차압하겠다는 희망캐피탈,니들 그렇게 사는 거 아니야!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다.무대 서서히 어두워진다.
에필로그
어머니와 가족,거실에 둘러앉아 있다.어머니,상 위에 장부를 펼쳐놓고 있다.그 옆에서 아들은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딸은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 검색창을 띄워놓고 있다.
아들 일이 잘 해결되어서 다행이에요.사기 미수죄는 처벌할 수 없다는 거,정말 기막힌 아이디어였어요.
딸 덕분에 떼인 돈도 받아낼 수 있었고,사채이자도 탕감 받을 수 있었고.정말 연기가 죽여줬어요.
어머니 니들만 잘난 줄 알았지?니들이 누구 배에서 나왔는데!
아들과 딸,웃는다.어머니의 표정은 냉담하다.
아들 근데 아버지는 왜 안 돌아오세요?
어머니 그 인간 고생 좀 할 거야.이브라힘한테 돈 부쳐주면서 그랬지.그 인간 정신차릴 때까지 한 달 정도 파키스탄에서 일 좀 시키라고 했거든.
딸 그래도 좀 심한 거 아니에요?
어머니 그 인간이 한 거에 비하면 새발의 피야.그건 그거고,계산을 마저 끝내 볼까?
아들 근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돼요?
어머니 사랑을 돈으로 환산하는 거,이게 너희들 사고방식 아니니?싫으면 집 나가시든가.
아들 어디까지 했죠?
어머니 부부생활 항목.
아들 섹스를 하는데 들어가는 노동 비용을 20~24세 도시 근로자 평균 임금…….
어머니 니 아버진,평균에도 못 미쳤다.최저로 계산해.
딸 (자판을 두드리며)시간당 최저 임금은 삼천 칠백 칠십 원이야!
아들 그럼 반올림해서 시간당 사천원.칼로리 소모가 보통 노동의 10배는 될 테니까 시간당 4만원을 잡고…….
어머니 1시간까지 가본 적은 없는데?보통 30분 안에 끝났어.
아들 그럼 최저 임금의 이분의 일인 이만 원에 한 달 평균 20회 정도 관계를 맺는다고 치고…….
어머니 스무 번은커녕 열 번도 채 안 됐어.
아들 그럼 열 번으로 계산하면 40만원,그 대가로 얻게 되는 쾌락의 비용을 성매매를 하기 위해 지불하는 최소비용 회당 7만원…….
어머니 내가 칠만 원짜리밖에 안 돼 보이니?십만 원으로 해.
아들 거기에 엄마가 얻게 되는 쾌락의 비용을 오만 원 정도 더하고…….
어머니 난 절정에 다다른 적이 없었어.기껏해야 다섯 번에 한 번 정도?
아들 그럼 쾌락의 비용을 만원으로 계산하고,모두 더하고 빼면 대략 한 달에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지불해야 할 돈이 오십만 원,일 년이면 육백만 원.어머니가 결혼한 지 30년이 됐으니까…….
어머니 솔직히 너 중학교 들어간 이후로는 관계를 안 했다.
아들 그럼 14년치만 계산 하면,총 팔천사백만 원.
어머니,장부에 기재한다.
어머니 자,다음 항목은 가사 노동에 대한 미지급분에 대한 피해보상 청구.
딸 (자판을 두드리며)전업주부의 가사노동은 시급 이만 오천 원에서 5만원 사이래.
어머니 시급 사만 원 정도가 적당하겠구나.
아들 하루 평균 15시간의 가사노동을 했다고 가정하고…….
어머니 깨어 있는 동안은 다 가사노동 아니야?난 평균 5시간도 채 못 잤어!
아들 그러면 계산이…….
어머니 이리 내.넌 대학까지 나온 놈이 뭐 그렇게 계산이 느려.들인 돈이 아깝다.이러다 너랑 미애 청구서는 오늘 안에 만들지도 못하겠네.
암전.
●심사평 “사채업자 등 신랄한 풍자… 신인답지 않은 구성력 돋보여”
올해도 150여편의 희곡이 접수되었다.드라마 장르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커진 탓인지 터무니없이 미숙한 희곡들은 줄어든 반면 눈이 번쩍 뜨이는 작품은 여전히 찾기 힘들었다.
최근의 경제적으로 암울한 세태를 반영하듯 응모작들 중에는 사채의 덫에 걸린 가장,성매매 하는 딸,노숙자, 청년 실업자 등을 다룬 희곡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촛불시위,해외파병 등 정치적인 문제를 건드린 응모작들도 적지 않았다.
올해 당선작인 안재승의 ‘청구서’ 역시 최근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을 신랄한 풍자로 극화해내고 있다.파산한 후 빚을 갚기 위해 파키스탄에 건너가 자작 인질극을 벌인 가장(家長)을 둘러싸고 사회 구성원들과 가족들의 각종 오해와 부풀리기,속이기와 쇼하기와 정면 대처하기 등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그런 가운데 정부,언론,종교,각종 이익집단들,네티즌,사채업자,시민단체,심지어 가부장제에 대한 풍자들이 여기저기서 빛을 발한다.복잡하게 얽히는 에피소드들을 구성하고 몰아가는 솜씨,극적 언어의 구사,극 전체를 타고 흐르는 리듬감 등이 신인의 솜씨답지 않게 능란하면서도 발랄하다.다만 풍자의 대상들이 너무 많다 보니 주요 인물들의 캐릭터가 다소 혼란스러워지고 에피소드들이 너무 꼬이다 보니 마지막 청구서의 의미가 충분한 설득력을 지니지 못해 아쉽다.
당선작 외에 상가집의 부조리한 풍경을 스케치한 이계형의 ‘숲에는 바람소리’,연인들 간의 스쳐가는 관계를 그린 연성이의 ‘우는 사람들’,쓰레기 집하장 노인들의 애환을 다룬 최진희의 ‘섬에서’,폭력적 상황에서의 긴장과 분노를 표출한 조병여의 ‘묵은 안개’ 등이 심사대상으로 논의되었으나 각각의 작품들이 지닌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완성도 면에서 아직 부족하다는 평이었다.
손진책·김방옥
●당선소감 “시대의 아픔 그대로 보여주는 작가 되겠다”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 같습니다.삶은 더 척박해지고,이성은 점점 무력해집니다.하루하루가 마치 전쟁과도 같습니다.전쟁 속에선 모두들 먹고사는 문제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그러다 보니 세상이,주변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다.심지어는 자기가 누구인지조차 잊고 살아갑니다.이런 시대일수록 작가는 정신의 칼날을 더 날카롭게 갈아야 한다고 배웠습니다.웃음과 울음으로 시대를 포장하기보다는 시대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정신의 칼날로 시대의 병폐를 도려내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비록 관객의 몸이 뒤틀리고,심기를 불편하게 하더라도 배움을 정직하게 실천하는 작가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08년,두 번의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지켜봐 주시는 분들의 기대는 두 배로 커졌고,제가 느끼는 부담감 역시 두 배로 커졌습니다.하지만 당장에 두 배로 좋은 작품을 쓰겠다는 약속은 드릴 수가 없습니다.아직까지 제 작품 하나 온전히 책임질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하기 때문입니다.다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현실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약속만은 꼭 지키겠습니다.그리고 언젠가 제 작품을 온전히 책임을 질 수 있도록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이상한 놈의 엉뚱한 시도를 오히려 격려해주신 연극원 극작과 선생님들,글쓰기의 토양을 제공해 준 중앙대 문창과,연극이라는 놈을 처음 만나게 해준 나의 정신적 뿌리 노리터,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지켜봐주는 가족들 사랑합니다.마지막으로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 감사합니다.
■약력
1979년 서울 출생.
2005년 중앙대 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8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 예술전문사 과정 졸업.
2008년 제11회 신작희곡 페스티벌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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