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작품
2009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소설/김숙희
페이지 정보

본문
[신춘문예 - 소설] 보리수 여인숙 / 김숙희
춤추러 가지 않을래. 배낭끈을 잡고 있는 녀석의 눈빛이 반짝였다. 나는 보리수여인숙 입간판 앞에서 녀석의 하얀 스니커즈 운동화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운동화 콧등에 때도 한 점 없는 어설픈 녀석이 따라붙으면 슬쩍 구미가 당겨온다. 녀석은 내가 메가박스 앞에서 모자를 고를 때부터 쭉 지켜보았다고 했다. 녀석이 찍, 침이라도 내 갈기며 날라리티를 냈더라면 내가 어딜 봐서 너랑 춤출 것 같아 보이니, 라고 톡 쏘아대며 앙큼을 떨어댈 생각이었다. 그러면 열에 아홉은 뻔한 내숭인 줄 알아채고 더 끈질기게 따라붙을 것이다. 그런데 녀석은 좀 달랐다. 신발도 구겨 신지 않았고, 무엇보다 짧게 깎은 머리가 마음에 걸렸다. 저런 소심치들은 한 쪽에서 조금만 튕겨도 이내 포기하고 만다. 따분하긴 하지만 저런 범생이 스타일이랑 한 번쯤 노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 잘하면 크리스마스 이브에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 수도 있으니 말이다.
내가 활동하는 무대는 메가박스다. 그렇다고 네, 고객님을 외치며 팝콘을 튀기고 음료수나 따르는 단순 알바생은 아니다. 그보다 좀더 주의를 요하고, 좀더 치밀하고, 좀더 숙련된 기술을 요하는 일을 한다. 쉽게 말해 영화관을 찾는 관객들에게서 삥을 좀 뜯는 정도라고 이해하면 된다. 나는 그 일을 피차 얼굴 붉히지 않는 선에서 깔끔하게 마무리를 한다. 이런 은밀함 때문에 간혹 삥 뜯는 것과 소매치기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하기는 하다. 나 같은 생계형 삥 뜯기 소녀에게 굳이 소매치기라는 죄목을 붙인다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사회가 정의로 가득 찬 골 때리는 곳이었다면 나는 지금쯤 소년원에서 피 터지게 자리싸움이나 하며 지내고 있어야 했다.
오늘도 볼드몬트와 눈이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나는 한두 건 더 올릴 작정이었다. 볼드몬트의 시선에서 벗어난 곳에서 손을 찔러 넣었는데 고개를 돌리고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짓궂은 초딩 녀석들이 날달걀을 던져도 꼼짝하지 않던 볼드몬트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손을 빼고 여자친구의 허리를 감고 있는 얼빠진 녀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오빠, 나야, 나 모르겠어. 죽었다 깨어나도 알 턱이 없을 나를 보고 녀석이 뒤통수를 긁어대며 기억을 더듬었다. 어머, 죄송해요. 아는 오빤 줄 알고. 나는 가뿐히 뒤돌아서 손을 털고 볼드몬트의 시야를 벗어났다. 어쩌면 볼드몬트가 내 정수리를 넘어 대각선 방향 어디쯤을 멍하니 보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스쳤다. 빌어먹을, 하긴 먹잇감을 발견해 낸 눈빛치곤 맥이 없긴 했다. 지레 겁을 집어먹고 쇼까지 하다니. 아무튼 매표소 앞에 분장대가 설치되고 난 뒤부터 은근히 신경이 쓰이긴 했다. 하필 분장대 위치를 매표소 앞으로 정했는지 영화관 매니저 놈의 멱살을 잡고 따져 묻고 싶었다. 소녀가장, 아니 독거소녀의 생계를 이따위로 방해해도 되느냐고, 말이다. 볼드몬트가 360도 회전이라도 하게 된다면 이 바닥에서 재미보기는 글러먹었다.
특수 분장을 전공했다는 영화관매니저는 한 때 부진했던 관람객 동원 실적을 만회해 보려는 듯 캐릭터 분장을 궁리해 낸 모양이었다. 요즘 애들에게 순정만화 캐릭터 따위보다는 볼드몬트가 보다 강력하게 시선을 잡아끌 것으로 생각한 것 같았다. 매표소 앞에 사람의 키를 훨씬 넘긴 분장대가 세워지고 망토를 걸친 볼드몬트가 철퇴를 들고 서있게 되었다. 볼드몬트는 해리포터시리즈에 불쑥불쑥 나타나 아이들을 괴롭히는 악당이다. 우습게도 그깟 혈통 때문에 악마의 영혼을 선택한 볼드몬트는 분장용 대머리 모자를 쓴 것과 뭉개진 코 이외는 원작과는 별반 상관없이 푸르죽죽한 낯빛에 선명한 흉터 자국, 푸른 입술로 한껏 괴기스러움을 발하고 있었다. 마법의 지팡이 대신 철퇴를 들고 있는 볼드몬트를 보면 매니저다운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매니저의 의중이나 방침, 분장수준 등을 시시콜콜하게 전해주는 꼬봉을 심어둔 것은 아니다. 몇 달간 메가박스 돌아가는 것을 지켜본 통밥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이렇게 헛방을 짚은 날은 일찍 손을 터는 게 상책이었다. 메가박스를 나와 딱히 무언가를 살 생각은 아니었다. 그래도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하며 메가박스 앞을 빈둥거리다 좌판에서 모자를 뒤적이고 있던 터였다. 녀석이 그 순간부터 지켜보고 있었다니, 같이 춤을 추기 위해 여기까지 따라왔단 말이지. 나는 춤이라고는 도무지 못 출 것 같이 생긴 녀석의 뒤를 따라 골목을 빠져나왔다. 재수 없게도 녀석의 목덜미가 너무 희었다. 녀석의 점퍼 뒤에 붙어있는 상표를 슬쩍 넘겨봤다. 모르는 상표였다. 이렇게 후진 시장상표를 입은 녀석이 따라붙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명품 상표만 믿었다가는 된통 당한다. 정교하게 만든 짝퉁을 걸치고 다니는 놈팽이들은 대개 언젠가는 진짜 명품을 손에 넣고 싶어 했다. 내 등골을 빼먹다 결국 제 발로 나가떨어진 그놈이 그랬다. 나는 자꾸만 눈에 밟히는 녀석의 목덜미를 따라 지하 어느 후진 나이트로 들어갔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촌스럽게 스포츠머리란 말인지, 나도 모르게 내 뒷덜미에 손이 갔다.
나는 머리를 짧게 자르지 않는다. 머리를 짧게 잘라 어린 티가 나면 이런 후진 곳도 드나들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무엇보다도 내 머리 모양이 분장대 위에서 내려다보는 볼드몬트의 눈에 익게 된다면 이곳에서는 손을 털어야 한다. 그래서 모자도 자주 바꿔 쓰고 머리 모양도 자주 바꾼다. 옷을 더 껴입어 체형을 바꿔보기도 하지만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볼드몬트 눈을 속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나이트로 들어간 뒤 어떻게 녀석과 함께 몸 한 번 부비지 않고 그곳을 나와 방까지 끌고 왔는지, 순전히 술 탓이었다. 휴대폰을 열어보니 새벽 2시를 넘기고 있었다. 녀석은 예상대로 춤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녀석 하는 꼴이 놀아본 지 오래이거나 아예 놀아본 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녀석이 테이블 모서리에 붙어있는 주문용 손전등을 바라보며, 왜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느냐고 했다. 꼬치꼬치 캐물을 만큼 너한테 관심 없어. 나는 그렇게 내뱉으면서도 녀석의 시선이 가는 곳을 놓치지 않았다. 녀석에게는 춤추자고 마냥 엉겨 붙기에도 왠지 만만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나는 비스듬히 앉아 다리를 꼰 채 병째 맥주를 홀짝였다. 녀석이 맥주를 잔에 붓고 연신 들이켰다. 녀석이 그러든 말든 나는 스테이지로 나가 맥주를 홀짝인 만큼 몸을 흔들었다.
그곳을 나온 녀석은 맞은 편 주유소 2층에 있는 렌트카 회사에 전화를 한 것 같았고, 밤새도록 달려도 지치지 않는 성능 좋은 차를 보내달라고 한 듯도 했다. 렌트카 회사에서 어디로 차를 보내면 되느냐고 묻는 듯 녀석은 3번 공중전화 박스 앞으로 보내 달라고 했다. 미친 놈, 옆에서 듣고 있자니 거칠게 수화기를 놓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무튼 녀석은 그때 그 순간 나를 어찌해 보려고 꼼수를 쓰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래 잘 가, 라고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기에는 뭔가 아쉬웠다. 술김에 녀석에게 휴대폰 번호를 알려준 것도 같았고, 그때 녀석도 마땅히 갈 곳이 없다고 했던가. 녀석이 내 꽁무니를 따라오다가 보리수여인숙 앞 입간판 앞에서 비틀거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간판 글자를 한자씩 또박또박 따라 읽다가 피식 웃으며 그럼 여기 우물도 있겠네, 라고 혀 꼬인 소리를 해댔다. 나는 시답잖은 녀석의 말에 대꾸라도 하듯 입간판을 발로 툭 차버렸다. 그리고 녀석을 달고 파라다이스호텔도 아니고 하다못해 낙원여관도 아닌 케케묵은 보리수여인숙 마당을 지나 내방까지 왔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더듬자 정신이 조금 드는 듯 했다.
얼핏, 문 밖에서 휠체어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빌어먹을, 주인여자다. 여자는 좁은 복도에서 조심스럽게 휠체어 방향을 바꾸며 늙은 여우같이 내 방을 엿볼 것이다. 여자는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재봉틀을 힘차게 밟던 산업역군이었다고 했다. 보리수여인숙보다 더 늙은 주인할머니가 죽자 하나뿐인 딸이 주인이 되었고 주인이 된 여자는 재래시장에서 이불 천을 끊어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그녀의 싸구려 테트론 천이 바람에 풀려 마치 상여 휘장처럼 휘날렸고, 그 날 여자는 왼쪽 다리를 잃었다고 했다. 자식이 있나 남편이 있나, 잘만 보살피면 보리수여인숙은 네 것이 될 수도 있을 거다. 양부모가 나를 보리수여인숙에 밀어 넣으며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혹덩이를 떼어내듯 그 말만을 남기고 왜 황급히 떠나버렸는지 짐작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귀찮아진 고아계집애를 팔아버리는 것으로 말끔히 혹을 떼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 따위야 아무렇거나 나는 상관없었다. 나는 단지 잠을 잘 곳과 먹을 것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휠체어 끄는 소리가 잠시 멈추었다. 녀석의 숨소리인지 여자의 숨죽이는 소리인지 가늠하기 힘든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여자는 첫날 나를 들이며 휠체어 바퀴에 양손을 걸치고 앉아, 기집애 눈빛이 그렇게 독살 맞아서야 어디다 써 먹겠니, 라고 중얼거렸다. 그 말은 네 양부모가 너를 넘긴 이유가 다 있구나, 로 들렸다. 초등학교 오학년 '자라나는 새싹'의 눈이 독살스럽다고 대놓고 말하는 여자는, 오히려 그 점이 마음에 든다는 표정으로 고양이 한 마리를 고르듯 나를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솔기가 나가 얼기설기 꿰맨 남색 추리닝의 태극마크에 눈을 박으며 옷이 그것뿐이냐고 물었다. 나는 방 한가운데 놓인 앉은뱅이 재봉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봉틀 바늘에는 아메바무늬가 빽빽한 붉은색 테트론천이 물려 있었다. 나는 뒤엉켜 있는 아메바의 수를 세며 여자가 그만 입을 다물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의 목소리는 앉은뱅이 재봉틀이 힘없이 돌아가는 소리같이 덜컹거리고 낮았지만 내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를 충분히 감 잡게 해 주는 목소리였다.
삐이그으더억. 문 밖에서 여자가 조심스럽게 휠체어를 틀며 방향을 바꾸고 있다. 몇 번의 반복음이 들려야 여자가 내 방문 앞을 벗어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탐색을 끝내는 마지막 바퀴소리다 싶자 어김없이 복도 끝으로 굴러간 휠체어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녀석은 속이 불편한지 자꾸 몸을 뒤척였다. 녀석의 깎아 올린 뒷덜미를 바라보며 어렴풋이 나이를 가늠해 보았다.
나는, 성문 앞 우물가에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 단꿈을 꾸었네… 이리 내 곁으로 오라 여기서 안식을 찾으라,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귀에 막 익힐 즈음 중학교를 때려 치웠다. 음악시간에 재수 없게 안식이라는 낯선 단어에 눈물이 쏟아졌고 나는 노래를 끝까지 부르지 못했다. 내가 울어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었고 죽고 싶도록 쪽이 팔렸다. 누구에게 들킬세라 책상에 엎드리고 있던 나를 음악선생은 교탁 앞으로 불러냈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내 불량스런 눈빛이 맘에 들지 않았다며 셀 수도 없이 뺨을 갈겼다.
그날 볼이 퉁퉁 부어 프런트 앞을 지나는데 여자가 나를 불러 세웠다. 혀를 끌끌 차던 여자는 내 얘기에는 아랑곳없이 일손이 재빠른 계집애를 한나절이나 학교 같은 엉뚱한 곳에 빌려줘야 하는, 그런 억울함 같은 것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눈빛으로 나를 반겼다. 나는 성문 앞 우물가에 성스럽게 서 있어야 될 나무가 어쩌다가 손님도 들지 않는 허름한 여인숙 마당에 서있게 되었는지, 보리수를 보며 한참이나 생각했었다.
녀석이 몸을 뒤척이다가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리자 이내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나기 시작했다. 나는 누군가의 지갑을 빼내기 전 숨 먼저 고른다. 그런 다음 지갑을 빼낼 때까지 상대의 가족이나 친구로 보이기 위해 잠깐이지만 그들의 딸이나 여동생처럼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언젠가 일을 끝내고도 지하철까지 따라가 곁에 앉기도 했다. 잠시지만 누군가의 딸이나 여동생이 되는 기분, 뭐 그런 기분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 지금도 그런 기분이랄까. 이상하게도 녀석의 곁에서는 호흡을 조절하지 않아도 숨이 골랐다. 나는 녀석의 옆에 조용히 누웠다. 그리고 습관처럼 방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벽에 촘촘하게 걸린 모자와 벽걸이 선풍기, 앉은뱅이 경대와 17인치 텔레비전, 알루미늄 주전자가 흐릿하게 눈에 들어왔다. 낡아빠진 물건들이 눈에 익어서인지 젠장,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이곳에 뭐 이렇게 낡아빠진 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역시 계집아이 방이군, 할 정도의 소품들도 끼어 있다. 내가 가슴팍에 품고 있는 쿠션과 앉은뱅이 경대 앞의 곰 인형은 처음 삥을 뜯던 날 사들인 물건이다. 녀석 머리맡의 간이 옷장도 큰맘 먹고 사들였다. 나는 쿠션을 품에 안고 녀석 옆에 누웠다. 그리고 다리가 온전히 붙어 있던 한때 여자가 밤새 재봉틀을 돌려 만들었다는 이불의 귀퉁이를 가슴께까지 끌어올렸다. 담배 구멍이 숭숭 뚫리고 아메바가 꿈지럭대는 이불을 덮고 눈을 감으면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깜깜해지면서 아무런 생각 없이 잠들 수 있었다. 나는 녀석의 곁에서 눈을 감았다.
여자가 보이지 않는 틈을 타 콧구멍 같은 프런트 앞을 빠져나왔다. 재수 없게 여자와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귀찮게 발목이 잡혀 오늘 오전 작업은 망칠 것이다. 방에 남아있는 녀석이 걸리긴 했지만 녀석이 언제 방을 나가든 내가 알 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녀석을 흔들어 깨워 세면장의 위치와 12시가 넘으면 추가요금이 붙는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물론 하루 숙박비 정도는 뜯어냈다. 녀석이 나를 어찌해보겠다면야 녀석이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뽑아내도 모자랄 판이었다. 하지만 아침까지 잠바조차 벗지 않는 저런 소심치에게 나를 덮칠 기미는 없어보였다. 알아서 나가. 내 얘기를 말 없이 듣고 있던 녀석이 어깨를 오므리며 머리를 내려 깔았다. 어느 자세를 취하든 녀석의 목덜미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녀석을 따라 나이트에 들어설 때도, 엎드려 잘 때도, 재수 없게 앉아있을 때도 그랬다. 나는 여인숙 마당을 지나오다 문득 내 뒷덜미가 궁금해졌다.
나는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건설로, 라는 주소가 따라붙는 골목을 천천히 걸어 나왔다. 보리수여인숙이나 골목을 끼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낡은 건물은 모두 건설로 라는 주소가 따라 붙는다. 건설로, 건설이 필요한 거리라고 이해하면 된다. 번지가 따라붙긴 하지만 이 골목에서 번지는 중요하지 않다. 구질구질하기는 모두 마찬가지다. 도심 한 가운데 이런 집들이 있다니, 메가박스 맞은편에서 내린 사람들이 가끔 신기한 듯 흘깃거리고 지나가지만 누구하나 걸음을 멈추지는 않는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골목을 빠져 나올 때까지 크리스마스 트리 하나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골목만 빠져나가면 거리에 온통 크리스마스 장식과 캐롤송뿐인데도 말이다. 제때 장식하고 제때 노래 불러주고, 그래서 맞은 편 쪽 사람들은 화려하게 축복을 받는 것일까. 골목을 벗어나자 건물 전체에 붉은 리본을 매단 메가박스 건물이 커다랗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매표소 앞에서 볼드몬트가 없는 분장대를 여유 있게 올려다보았다. 오늘 같은 날에는 매니저가 한두 시간씩이나 여유를 부리며 특수 분장을 해댈 시간이 없다고 했다. 물론 이런 정보는 입이 빠른 알바생 곁을 조금만 얼씬거려도 얻어들을 수 있는 정보들이다. 특히 매니저의 등 뒤에 수시로 가운데 손가락을 뻗어 욕을 날리는 매점 알바생의 입이 가장 빨랐다. 매표소 전광판에서 번호 넘어가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팝콘기계에서는 팝콘이 함박눈처럼 터져 내렸다. 초딩들은 닌텐도를 주머니에 박아 넣고 줄줄이 츄러스를 들고 설탕가루를 날리며 돌아다녔다.
버터에 튀긴 팝콘 냄새 때문인지 속이 쓰렸다. 깊이 눌러쓴 모자를 벗고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밥은 먹고 나가지' 자신도 잘 챙겨먹지 않는 아침밥을 문자메시지까지 날려가며 챙기다니, 어젯밤 나의 행적을 취조하기 위한 꼼수다. 녀석은 지금쯤 방을 나가고 없을까. 나는 여자가 보낸 문자를 지우고 컵라면과 삼각 김밥으로 속을 채웠다. 편의점을 나와 매표소가 한 눈에 들어오는 의자에 앉아서 미련해 보이는 계집아이 하나를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는 계집애 옆에 슬쩍 따라 붙었다. 닌텐도는 반값에만 넘겨도 주머니가 빵빵해진다. 계집애의 분홍색 닌텐도는 날밤을 새도 끝나지 않을 정도로 게임이 깔려 있을 것이다. 불법 알포까지 깔린 것은 반값에다 몇 만원은 더 받아 챙길 수 있다. 재빠르게 분홍색 닌텐도를 가방에 챙겨 넣고 뒤돌아서는데 휴대폰 진동음이 느껴졌다. 재수 없게, 계집애가 돌아보는 통에 하마터면 십년감수할 뻔 했다. 녀석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준 게 화근이다. 혹시나 해서 켜두었는데. 네 언니야, 나는 쌩까는 표정으로 계집애에게 웃어보였다. 계집애는 삥긋 웃더니 가버렸다. 나는 매표소 앞을 벗어나 문자를 확인했다. 화장실이 급하구나. 빌어먹을, 나는 비상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닌텐도를 넘기고 오는 사이 여자가 휠체어에 그대로 오줌을 싸질러 놓고 있었다. 나는 벽면에 세워둔 목발을 집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씨발, 지랄같이, 정말 이럴 거야?"
휠체어를 앉은뱅이 재봉틀이 있는 쪽으로 힘껏 밀어젖혔다. 여자는 발톱을 세우고 요란하게 앙탈을 부리고 있는 고양이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듯 나를 보고 있었다. 그것 봐라, 하는 여자의 그 재수 없는 표정을 안다. 잘못 걸려들었다가는 며칠은 꼼짝 못하고 여자의 수발을 들어야 한다.
"프런트에 들러서 아침밥이라도 먹고 했음 얼굴보고 말하려고 했는데……."
뻔한 핑계인 줄 알지만 따져 물어 봤자 결국 말은 꼬리를 물고 어젯밤에 달고 온 놈이 누구냐, 로 끝날 것이다. 차라리 그쯤에서 끝나면 다행이었다. 오갈 데 없는 것, 먹여주고 재워주고, 은공도 모르는 천하에 독살 맞은 계집 쪽으로 말을 틀면, 나는 독살 맞은 계집을 들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줄 것이다. 아무튼 오늘 같은 날, 이깟 여자의 술수에 휘말려 오후 작업까지 망칠 수는 없었다. 나는 이를 앙다물고 바닥에 흥건한 오줌을 닦아냈다. 그리고 여자를 휠체어에서 끌어내렸다. 자꾸만 불어가는 여자의 몸이 이제 힘에 부쳤다. 나는 여자의 의족을 떼어내고 아랫도리를 모두 벗겨냈다.
"씨발, 좆같이 누가 이 짓을 하겠어? 누굴 호구새끼로 아는 모양인데."
벌린 가랑이를 내려다보며 매몰차게 말했다.
"오늘따라 다리가 자꾸 쑤셔오는 통에 그만……."
여자가 전에 없이 자꾸만 말끝을 흐렸다. 잠시지만 그게 먹힌다는 것을 이 교활한 여자가 알게 된 것이다. 여자의 속옷까지 갈아입히고 나니 이마에 땀이 맺혔다. 휠체어를 끌고 복도로 나왔다. 살이 뜯긴 마루가 삐걱거렸다. 휠체어를 세면장에 밀어 넣고 물을 한바가지 부어 오줌을 씻어 냈다. 휠체어가 마를 때까지 여자는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할 것이다. 하지만 목발 사이로 의족이 덜렁거리며 떠있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는 여자는 휠체어가 마를 동안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여자 대신 프런트에 앉았다. 여자는 손님이 들 리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를 이렇게 붙들어 두는 게 수라고 생각한다. 나는 프런트 문을 열고 마당을 내다보았다. 지루하게 이어진 마당 끝으로 잎이 져서 빈 가지만 남은 보리수나무가 보였다.
"몹쓸 짓은 하고 다니지 않는 게 좋아."
밑진 감정을 되찾아보려는 듯 얄팍하게 힘이 들어간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내가 처음 놈팽이를 끌고 왔을 때도 그런 소리를 했다. 잘만 하면 구질구질한 이곳을 벗어 날 수도 있겠다, 어설프게 판단한 게 잘못이었다. 놈은 나보다 한 수 위였다. 장판 밑에 깔아 놓은 돈까지 모두 털어갔다. 것 봐라, 누가 널 거두겠느냐는 표정으로 여자가 실의에 차 있던 나에게 혀를 끌끌 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죽이고 싶도록 미운 건 그놈이 아니었다.
"몹쓸 짓? 씨발, 그런 몹쓸 짓이 나한테는 생계거든."
나도 모르게 모처럼 아주 솔직하게 말했지만 여자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렇다고 딱히 다른 계집애들이 하듯 건전한 아르바이트 중 하나를 하고 있을 거라고 믿는 눈치도 아니었다. 나는 여자를 돌아다보았다. 길게 뻗은 인중 밑으로 거칠게 일어선 두툼한 입술. 여자는 갈라진 입술을 벌리며 투숙기간에 따른 숙박비를 간단하게 설명할 뿐 이제 보리수여인숙에 들고나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여자가 잘려나간 다리 쪽에 뭉개지듯 흐트러진 치마를 애써 편편하게 폈다.
"내가 한창 때, 봉제공장에서 나만 잡으면 만사 오케이였어. 내 밑으로 미싱사들이 줄줄이 굴비처럼 엮어 들어오니 그럴 만도 했지."
맘먹고 오줌까지 싸놓고 불리했던 전세를 돌리려는 심사라니. 그래봤자 이제 허름한 여인숙에서 이불 한 채 만들기도 버거운 신세다. 그런 처지에 여자의 말에 자꾸 힘이 들어간다. 젠장. 나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쉴 새 없이 주절대고 있는 여자를 뒤로 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방이 참 따뜻하네. 쪽지 한 장을 남기고 녀석은 가고 없었다. 나는 이불속으로 몸을 파고들었다. 이상하게도 아무리 기억을 하려고 해도 녀석의 얼굴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오후, 메가박스는 쉴 틈 없이 돌아가는 발전기처럼 수증기를 뿜어내며 돌아갔다. 밀려나오고 밀려들어가고. 사람들은 메가박스로 몰려들었다. 엘리베이터 안은 만원이었고 분장대가 비어있는 매표소 앞은 천국이나 마찬가지다. 가방이나 뒷주머니에 대놓고 손을 넣어도 알아채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아, 이쯤이다 싶으면 손을 털어야 한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아마추어가 아니다. 나는 번호표를 뽑아들고 매표소 앞으로 갔다. 매니저가 초췌한 모습으로 매표소 하나를 꿰차고 있었다.
"고객님, 어떤 것으로 예매하시겠습니까?"
매니저가 불안한 음색으로 말했다. 나는 매니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요즘 어떤 영화가 좋으냐고 물었다. 하지만 매니저의 눈은 한쪽 손에 쥐고 있는 휴대폰에 가 있었고 반복해서 폴더를 여닫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매니저는 초조한 듯 입술을 자근거리며 씹어댔다. 내가 다시 아저씨, 하고 부르자 매니저는 귀찮은 표정으로 그건 고객님이 알아서 판단하라고 했다. 빌어먹을 인간, 그런 삐리한 소리로 고객을 대하다니. 나는 포스터를 훑으며 시간을 끌다가 온통 화염과 불길로 배경을 꽉 메운 포스터를 발견하고는 표를 끊었다. 오늘 같은 날 감동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쪽을 택하게 된다면 눈물을 찔끔거리며 훔친 지갑이나 닌텐도를 되돌려 주는 불상사가 생기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축복된 하루를 끝내고 골목으로 들어선 것은 자정이 가까워서였다. 물론 모자를 넣은 쇼핑백을 옆구리에 끼고서 말이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건설로 골목은 어느 것 하나 선명한 것이라고는 없다. 건설로 표지판이 붙은 입구 전봇대 불도 꺼져 있다. 그나마 멀리 흐릿하게 여인숙 입간판 불빛이 보이면 빌어먹을 안도감 같은 게 느껴지곤 했다. 일단의 소속감도 생겼다. 그런데 흐릿하게라도 켜져 있던 여인숙 입간판 불이 꺼져 있다. 불길한 예감에 입간판을 앞뒤로 흔들어 보았다. 동네북처럼 발길에 차여 가끔 전기선이 떨어지기도 했는데 전기선은 제대로 연결되어 있었다. 좀처럼 간판의 불을 켜는 일만은 잊지 않는 여자였다. 코끝까지 차있던 흥이 순식간에 깨졌다.
프런트 방에도 불이 꺼져 있었다. 아무렴 어때, 라고 마음을 다지다가 빌어먹을, 혹시나, 싶은 마음이 불현듯 일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프런트 문을 왈칵 열어젖혔다. 그리고 성급히 벽면의 스위치를 올렸다. 여자가 어이없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었다.
"씨발, 불은 왜 꺼놓고 지랄이야!"
나는 순간적으로나마 잠깐 당황하고 놀랐던 나 자신에게 화가 치밀었다. 여자가 지금 당장 죽어나자빠진다 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설사 경찰이 내 뒷덜미를 잡아챈다고 한들 나는 절대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런 내가 당황하고 놀라다니. 나는 이렇게 예측하지 못하는 일이 불쑥 코앞에 닥쳤을 때 느닷없이 속내를 내보일 정도의 아마추어가 아니다.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어색하게 짝을 이루고 있는 여자의 다리를 태연하게 내려다보았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성한 다리 놔두고 못난 다리만 쓰다듬게 되는구나."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분홍빛이 도는 의족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그러면서도 시선을 비껴 연신 나를 힐끔거렸다. 여자가 쓰다듬던 의족을 바나나 한쪽 떼어내듯 뚝 떼어냈다. 소시지 끝처럼 쪼그라진 다리가 훤하게 눈에 들어왔다.
"보통 놈이 아냐. 착실한 것 같아 보이는 놈들일수록 뼛속까지 건달인 법이다. 내가 조심하라고 그랬지. 어디 제대로 된 놈이……."
결국 녀석이었어. 씨발, 시위처럼 불을 꺼놓고 이따위로 신세 한탄을 늘어놓는 이유가 그거였단 말이지. 늙은 여우가 그따위 잔 미끼로 나를 유인하다니. 나는 늙은 여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을 힘껏 닫아버렸다.
녀석을 발견한 것은 불을 막 켰을 때였다. 녀석이 흰 목덜미를 내보이며 엎드려 있었다. 문을 열 때 온기가 느껴진 것은 그 때문이었을까. 녀석은 심사가 꼬일 대로 꼬인 여자의 곱지 않은 시선을 견디며 내방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나는 말없이 쇼핑백에서 모자를 꺼내 벽에 걸었다.
"온통 모자뿐이네. 모자 모으는 게 취민가 보지?"
녀석이 잠에 취한 목소리로 손등 위에다 턱을 괴고 말했다. 녀석의 목덜미가 훤하게 드러났다.
"넌, 언제나 니 마음 가는 대로 모자를 골라 쓸 수 있어 좋겠다."
시답잖게 모자 따위가 부러움이 되다니. 꼬질꼬질한 여인숙에 빌붙어 살면서 그깟 재미로 모자를 사들인다고 생각하는 녀석에게 모자를 사들이는 이유를 시시콜콜 말할 수 없긴 했다. 빌어먹을, 녀석이 피식 웃으며 길지 않게 하는 말을 방심하고 듣고 있다보면 뭔가를 자꾸 되짚어보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훤하게 드러난 녀석의 뒷덜미만 보면 이상하게도 맥이 풀렸다.
"왜 하필 나야?"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녀석과 더 말이 오가기 전에 먼저 쐐기부터 박아야 했다. 녀석이 왜 나인가에 대해 감동적으로 설명해 온다면 피차 얼굴을 보고 삥을 뜯는 것처럼 쪽팔리는 일이다. 나는 녀석에게 과장된 목소리로 나 같은 독거소녀에게 재수 없게 빌붙을 생각이라면 큰 오산이라고 잘라 말하며 서둘러 방 값을 받아냈다. 꼼수라고는 없을 것 같은 녀석의 뒤통수에 대고 이불까지 같이 덮을 생각은 말라고 오히려 큰소리를 쳐댔다. 그리고 방을 나와 버렸다.
나는 복도에 서서 끝에서 끝으로 닿아있는 내방과 프런트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삐이그으덕, 틀어진 마루 살을 밟으며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마루판은 조심하면 할수록 마루 살이 어긋나는 소리가 길고 경망스러웠다. 나는 프런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불더미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있던 여자가 성급히 상체를 일으키는 시늉을 했다. 나는 이불더미로 가서 이불 한 채를 확 잡아 빼내 바닥에 그대로 내팽개친 후 발로 이불의 네 귀퉁이를 대충 펴냈다. 그리고 여자를 끌어다 이불 위에 눕혔다. 두어 뼘 사이를 두고 나도 몸을 뉘었다.
남편이 있나 자식이 있나, 너만 잘하면. 여자는 양부모가 나를 이곳에 밀어 넣으며 했던 말처럼 보리수여인숙은 내 것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여자가 이런 식으로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미끼를 던지기 시작한 것은 내가 놈팽이를 달고 오면서부터였다. 여자는 코딱지 같은 허름한 여인숙이 남편이고 자식이고, 누구든 길들이고 잡아맬 수 있는, 대단한 무엇인 양 여겼다. 먹여주고 재워주며 자라나는 새싹의 은공을 챙기려는 여자는 이 허름한 여인숙에 나를 짱박아 넣고 호구새끼로 길들이고 싶겠지. 하지만 나는 여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계산이 빨랐다. 이제 이깟 여자 하나쯤은 내가 너끈히 속여 넘길 수 있다는 것을 여자는 모르고 있을까. 여자가 내 손을 잡아 아랫도리로 당겨간다. 씨발,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오르며 헛구역이 났다.
메가박스 안은 조조 손님들로 붐볐다. 마음만 먹으면 한두 건은 손을 푸는 기분으로도 해 낼 수 있다. 분장대도 훤하게 비어 있지만 내키지 않았다. 살다보면 이렇게 의욕이 사라지는 날도 있는가 보다. 아침에 방으로 돌아가 보니 녀석이 가고 없었다. 녀석이 일찍 사라진 것을 보면 아주 놀고먹는 놈팽이는 아닐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하루 종일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원, 여자가 가끔 내 행적에 의문을 품듯 문득 녀석의 하루가 궁금해졌다. 나는 음료수를 홀짝이며 매표소 앞에 앉았다. 츄러스를 흔들며 설탕가루를 날리고 다니는 초딩 녀석들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내가 정말 녀석에게 전화번호를 제대로 알려주었는지 생각을 되짚어 보았다. 그때 수염을 깎지 않은 매니저가 초췌한 모습으로 매표소 앞을 지나갔다. 그리고 관람객들이 나오는 비상출구 쪽으로 사라졌다. 그곳은 매니저의 방과 반대 방향이며 창고가 있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분장대와 벽면이 닿아 있는 곳이기도 했다.
삐죽이 열린 문틈으로 매니저의 모습이 보였다. 망토의 깃을 세운 볼드몬트가 등을 보이고 매니저를 향해 앉았다. 아직 머리를 감추지 않은 볼드몬트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책상 위에는 볼링핀을 뒤집어 놓은 것 같은 머리 모형의 틀이 세워져 있고 분장 도구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매니저가 흰색 와이셔츠 소매 깃을 걷어 올렸다. 그리고 잠시 조각품을 감상하듯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볼드몬트를 지그시 넘겨다보았다. 나는 매니저가 볼드몬트의 머리카락을 어떻게 감쪽같이 감추는지 내심 궁금해졌다. 이제 곧 분장을 시작하겠지. 볼드몬트의 머리카락을 감추고 코를 뭉갠 뒤 얼굴에 보리수여인숙 입간판 같이 흐릿한 청색으로 바탕을 칠하고 왼쪽에 5~6센티의 흉터를 그려 넣을 것이다. 그리고 목에 굵고 짙게, 문신 같은 핏줄을 새겨 넣고 입술은 푸른색으로 마무리를 하겠지.
느긋하게 감상을 끝낸 매니저가 분장을 시작하려는 듯 볼드몬트의 등 뒤로 가서 망토 깃을 접어 내렸다. 매니저가 볼드몬트의 등 뒤에서 움직일 때마다 머리카락을 감추지 않은 볼드몬트의 뒷모습이 얼핏 얼핏 보였다. 짧은 머리와 흰 목덜미, 머리카락을 감추지 않은 볼드몬트의 뒷모습이 왠지 눈에 익었다. 매니저가 볼드몬트의 머리카락에 젤을 묻혀 펴 바르고 납작하게 빗으로 빗어 내렸다. 잠시 후 머리모형 틀에서 반지의 제왕에서 골륨이 뒤집어 쓴 것 같은 대머리 모자를 벗겨내더니 조심스럽게 볼드몬트의 머리에 씌웠다. 그리고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듯 머리 주변을 돌며 섬세하게 매만졌다. 그런 다음 분칠을 하듯 파우더를 펴 바르자 볼드몬트의 머리카락은 감쪽같이 감추어졌다. 나는 볼드몬트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바닥을 보인 음료수를 빨대로 빨아 당겼다. 몰래 지켜보기에도 지겹다고 생각하는 순간 매니저의 팔 동작이 멈춰지며 몸이 서서히 앞으로 기울었다. 나는 이미 바닥을 보인 음료수를 확인하듯 빨대를 뽑고 캔을 흔들어보다 멈칫 했다. 빨대 목 부분의 스프링이 펴지며 음료수가 얼굴에 튀었다. 나는 얼굴을 닦을 염도 내지 못하고 그들에게 시선을 박았다. 그때 볼드몬트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비스듬히 틀며 눈을 감는 매니저가 눈에 들어왔다. 매니저가 볼드몬트의 목을 끌어안으려는 듯 두 팔을 목뒤로 올리자 볼드몬트는 순간 몸을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우스꽝스럽게 대머리 모자를 덮어쓰고 고개를 돌린 볼드몬트의 옆모습이 얼핏 녀석의 얼굴과 겹쳐졌다. 빌어먹을, 녀석이다. 나는 입에 물고 있던 빨대를 그대로 놓쳐버렸다. 녀석은 더는 뒤로 물러날 틈이 없는지 버티듯 양손을 뒤로 뻗어 의자를 꽉 잡았다. 안간힘을 쓰듯 힘줄이 도두라진 녀석의 손목을 보면서, 순간 나는 죽도록 얻어터지던 음악시간이 자꾸만 생각났다. 일찍 나갔더구나. 씨발, 여자가 보낸 휴대폰 문자 위로 눈물이 툭하고 떨어졌다.
당선소감 - "먼지 낀 이야기 다시 닦을 수 있게 돼 기뻐"
금 나와라 뚝딱!
나를 밀어주시는 사물과 친한 어느 자그마한 신께, 올 한 해 내게 도깨비 방망이를 내려주지 않으셨나, 하고 문자를 날렸다. 그러셨단다. 요즘 금 나와라 뚝딱, 이라는 주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식탁이 낡아서 바꿔야 하는데, 하면 재활용 장소에 근사한 식탁이 나와 있고 튼튼한 책장이 필요한데 하면 신기하게도 책장이 그곳에 나와 있었다. 하다못해 커튼 봉까지 완전 서비스를 하셨다. 그렇게 재활용품으로 밀어주시더니 한 해의 마지막을 장식하며 정말 커다란 선물을 주셨다. 이렇게 자꾸 받기만 해서 되는지, 문득 불안해진다.
나의 화려한 외모(?)를 보면 구질구질하게 생기지는 않았다고 하는데 막상 나랑 같이 다녀 보면 구질구질한 짓으로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을 용케들 알게 된다. 사람들이 그렇게 나를 알아채는 것이 어느 한때까지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구질구질한 덕분에 이웃도 많이 생겼다. 알고 보니 다들 그런 구석이 있었다. 그런 구석을 내보이지 않으려는 사람일수록 여리고 상처가 많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내 안에 들어있는 이야기들도 마찬가지이다. 반질거리고 윤기가 흐르는 것은 별로 없다. 모두 하나씩 꺼내서 박박 닦아야 하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먼지를 뒤집어쓰고 들어있는 이야기를 내가 꺼내 닦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정말 감사를 드린다. 이제 뭔가가 조금 보이기 시작했다. 그게 발전의 밑거름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마지막으로 미흡하지만, 이렇게 소설을 쓸 수 있게 길을 잡아주신 박영숙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더불어 나의 사랑하는 가족과 그리고 금성탐험대를 밤새워 읽던 어느 한 소녀의 유년시절에 이 상을 바치고 싶다.
김숙희 / 1965년 충북 진천 출생. 부산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2007년 문학도시로 등단.
심사평 - 인물과 거리 두고 응시하는 '절제력' 돋보여
예심에서 일곱 편의 소설이 올라왔다. '엄마의 양갱'은 서사의 중심인 화자의 상상이 자연스럽게 읽혀지지 않아 소설 전체가 겉도는 느낌을 준다. '맥거핀'은 열쇠수리공 남자와 전각하는 여자의 외면과 내면을 현미경을 들여다보듯이 묘사한 것은 인상적이나, 두 사람의 관계를 작가가 억지스럽게 연결시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콩나물'은 인물의 내면 감정이 과잉으로 흘러 서사가 부자연스럽게 전개된다. 콩나물과 죽은 아이를 연결시키는 것도 어색하다. '새벽길'은 소재의 특이성으로 관심을 불러일으키나 삶과 죽음의 형식을 깊이 있게 형상화시키기에는 문장의 밀도가 모자란다. '보물찾기'는 이야기가 작위적인 느낌을 주는 데다, 화자의 심리 묘사가 단순해 긴장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장롱에 갇힌 남자'는 화자에 의해 장롱 속에 봉인되는 '치매 엄마'와, 빈 집을 털다 발각되자 스스로 장롱 속으로 들어가는 화자의 모습이 상징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당선작인 '보리수 여인숙'은 인물과 거리를 두고 차분히 응시하는 작가의 절제력이 돋보인다. 이 절제력 때문에 인물의 내면 감정이 과잉으로 흐르지 않았고, 문장의 안정감과 섬세함이 확보되었다. 화자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인물에 생명감이 부여되는 것도 작가의 절제력 덕분이다. 화자의 생명감에 비해 상대적으로 '볼드몬트'의 생명감이 떨어진다. 화자와 '볼드몬트'의 관계에서 극적인 긴장감이 떨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가의 과감한 상상력이 아쉽다. 본심=현기영/소설가·정찬/소설가
예심=정인/소설가·함정임/소설가
- 이전글2009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동화/조명아 09.01.19
- 다음글2009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시조/박미자 09.01.1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