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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동화/조명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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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 동화] 배는 지금 간질간질 / 조명아
내 몸은 점점 가라앉았습니다. 더 깊은 곳으로. 끝없이.
나는 이제 서서히, 정신을 잃어갑니다….
"얜 뭐야?"
"글쎄, 바위인가?"
"아닌 것 같은데."
정신을 차리고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어요. 하얗고 조그만 물고기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뭐, 뭐야?"
"그건 우리가 묻고 싶은 말이라고. 넌 대체 누구야?"
까만 줄무늬 물고기가 휙, 하고 나타나 쏘아붙였어요.
짭조름한 초록빛 물. 꼬르르륵, 꼬르르륵, 물방울 소리. 나풀나풀 해초들이 이루고 있는 숲 사이로 쉼 없이 왔다갔다 바쁘게 오가는 물고기들. 이끼가 잔뜩 낀 바위에 따글따글 붙어 있는 전복과 따개비들.
맙소사. 나는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버린 것이었어요. 끙끙,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모래더미에 푹 처박힌 내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엄청나게 큰 쓰레기를 버렸나봐."
물고기들이 갸웃갸웃 고개를 까딱이며 내 몸을 이리저리 살폈어요.
"난 바위도, 쓰레기도 아니야. 난 배라고."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어요.
"배라고? 배가 왜 여기에 있어?"
"배는 바다 위를 떠다니는 게 배 아냐?"
"나라고 여기가 좋아서 온 줄 알아?"
나는 볼멘소리로 말했어요.
"그럼 여기에 왜 왔는데?"
까만 줄무늬 물고기가 뾰로통한 입을 삐죽이며 말했어요.
나는 입을 굳게 다물었어요. 눈물이 나오려는 걸 꾹꾹 참느라 힘이 들었지요.
"난파선이로군."
꼭 소나무가지처럼 머리가 긴 식물이 말했어요.
"난파선? 그게 뭔데요, 해송 할아버지?"
물고기들이 해송 할아버지 곁으로 휘리릭, 몰려들었어요.
"부서지고 고장이 나서 가라앉은 배란다."
까만 줄무늬 물고기가 깨진 창문과 망가진 뱃전을 들락날락하며 살피기 시작했어요.
"음, 정말이네.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분위긴데?"
나는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지요.
"저리 나가!"
"여기도 꽤 좋은 곳이야. 물살이 세서 맛있는 플랑크톤이 아주 많거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난 플랑크톤 같은 거 필요 없어. 풍랑을 만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답답한 바다 밑에 올 일은 없었을 거야."
이번엔 까만 줄무늬 물고기가 기분이 상한 것 같았어요.
"그래? 그럼 다시 바다 위로 떠올라 보시든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홱 하고 고개를 돌리는 모양이 정말 얄미웠어요.
"그만들 하거라."
해송 할아버지가 조용히 말씀하셨어요.
"이 세상에 이유가 없는 일은 없단다. 네가 여기까지 가라앉은 것도 분명 이유가 있을게다."
"이유? 큰 덩치로 자리만 차지하고 있겠죠. 난 버릇없는 난파선이 나타났다고 소문을 내러 가야겠어요."
까만 줄무늬 물고기가 휙 하고 공중제비를 돌더니 꼬리를 흔들며 사라졌어요.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니?"
"풍랑에 휩쓸려 큰 암초에 부딪혔어요."
나는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어요.
"고생이 많았겠구나. 노련한 배들도 갑자기 불어 닥치는 풍랑에는 속수무책이지."
해송 할아버지의 머리카락이 느릿느릿 움직였어요.
"전에도 난파선이 가라앉았던 적이 있나요?"
"가끔 있었단다."
"그 난파선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보았어요.
"좀처럼 적응을 하지 못했지. 바다 밑이 마음에 들지 않아 끊임없이 불평만 하던 배도 있었고, 이제 끝이라며 절망하던 배도 있었단다."
"그래서요?"
"결국 모래에 파묻혀버리거나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지. 끝내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았으니까."
갑자기 물살이 무겁게 느껴졌어요. 바다 위를 떠다니기만 하던 내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나는 자신이 없었어요.
"까만 줄무늬 물고기의 말이 맞아요. 난 아무 쓸모없이 자리만 차지할 뿐이에요."
"그렇게 생각하니?"
해송 할아버지의 긴 머리카락 사이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동자가 보였어요.
"네."
나는 시무룩하게 대답했어요.
"네가 만약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한다면 바로 그 순간, 너는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거란다."
"난 배라구요. 바다 밑이 아닌 바다 위에 있어야 할 배 말이에요. 배는 떠다니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부서지고 고장이 난 내가 여기에서 뭘 할 수 있겠어요? 모두 나를 비웃을 뿐이죠.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봐야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내가 다시 바다 위로 떠오르는 기적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절망에 빠진 채 점점 사라져갔다는 난파선들이 생각났어요. 나는 억울하고 슬퍼졌어요.
"주변 환경을 바꿀 수 없고 기적을 바랄 수도 없다면, 네 자신을 한번 바꿔보렴."
"내 자신을요?"
"바다를 바라보는 네 마음 말이다."
바다.
바다는 언제나 좋은 친구였어요. 내가 거침없이 앞으로 달리면 바다는 새하얀 물길을 만들어 주었어요.
"우와, 저 배 좀 봐. 정말 빠른데?"
"아주 크고 화려하군. 저 배에 타려면 돈이 아주 많이 들겠지?"
사람들이 나를 두고 이렇게 말할 때면 어깨가 저절로 으쓱해졌어요.
모든 배들이 나를 부러워했어요. 넓은 바다 구석구석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지요. 바다를 가장 잘 아는 건 바로 나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바다가 넓고 넓다는 것만 알았지, 이토록 깊고 깊다는 것은 알지 못했어요. 깊고 깊은 바다 밑에 내가 모르는 세상이 언제나 있었다는 것도요.
내가 버려진 난파선이라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어요. 어린 물고기 몇 마리가 호기심에 입을 오물대며 다가왔다가 엄마 물고기에게 혼쭐이 나고 돌아갔어요.
"지지! 그런 것 만지는 거 아니야."
나는 화가 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어요. 차가운 바닷물이 나를 자꾸만 움츠러들게 만들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만 있다면, 다시 한 번 최선을 다할 텐데.
이유가 없는 일은 없다던 해송 할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났어요. 내가 바다 밑에 가라앉은 것도 이유가 있었던 걸까요?
"큰일 났어요! 큰일 났어요!"
까만 줄무늬 물고기가 헐레벌떡 바쁘게 헤엄쳐 왔어요.
"앞바다에서 기름을 잔뜩 실은 배들끼리 부딪혔대요. 앞바다는 지금 난리가 났어요. 배에서 흘러내린 기름 때문에 바다가 엉망이 되고 있대요!"
"정말 큰일이구나."
해송 할아버지가 걱정스럽게 말씀하셨어요.
"거기 살던 물고기들이 모두 집을 잃었대요. 모두들 피난을 가느라 야단법석이에요. 이리로 몰려올지도 몰라요!"
까만 줄무늬 물고기가 호들갑을 떨며 바쁘게 움직였어요.
"어머, 누가 몰려온다구요?"
연산호가 머리에 붙은 이끼를 털어내며 우아하게 말했어요.
"난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낯선 물고기들과 함께 지내는 건 싫어요. 그렇지 않아도 여긴 물고기가 많은 곳이라 비좁잖아요? 불청객은 정말이지 하나로도 충분해요."
연산호가 나를 쳐다보며 못마땅한 말투로 말했어요. 연산호의 긴 속눈썹이 물결에 살랑살랑 날렸어요.
"음, 하지만 그들이 정말 기름을 피해 여기까지 온다면 내칠 수야 없는 일이지."
해송 할아버지가 심각하게 말씀하셨어요.
"바위틈도 해초 숲도 이미 만원이에요. 물고기들이 집을 지을 공간은 더 이상 없다구요!"
까만 줄무늬 물고기도 목소리를 높였어요.
바로 그 때, 갑자기 물살이 거세어지기 시작했어요. 저 멀리 커다랗고 검은 날개가 천천히 날갯 짓을 하며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어요.
"그들이 왔어요! 앞바다 물고기들이에요!"
거대한 날개는 수많은 물고기들의 무리였어요. 가까이 다가온 그들은 매우 지쳐보였어요. 부축을 받으며 겨우 헤엄을 치는 물고기들도 있었어요.
"사람들이 흘린 기름 때문에 살 곳을 잃었소. 여기는 플랑크톤이 많아 살기 좋은 곳이라 들었소. 우리도 함께 살 수 있도록 해주시오."
우두머리로 보이는 물고기가 말했어요. 다부진 체격에 눈이 톡 튀어나온 물고기였어요.
"여기는 자리가 없어. 우리가 살기에도 모자란 곳이라구."
까만 줄무늬 물고기가 말하자 조그만 물고기들이 고개를 끄덕끄덕 거렸어요.
"맞아, 맞아."
"지금 텃세부리는 거요? 우리 중에는 알을 밴 물고기도 있소!"
눈이 튀어나온 물고기가 험악하게 말했어요. 하지만 모두들 모른 체 외면할 뿐이었어요.
그러자 눈이 튀어나온 물고기가 해송 할아버지 앞으로 헤엄쳐 갔어요.
"어르신, 여기서 살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사정은 딱하나, 여기에 더 이상 집을 지을 공간이 없는 건 사실이라네. 플랑크톤은 많이 있으니 배불리 먹고 가시게."
해송 할아버지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어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집이에요!"
앞바다 물고기들 중 누가 소리쳤어요.
"왜 하필 여기에 와서 난리람."
연산호가 한숨을 쉬며 우아하게 말했어요.
"뭐요?"
앞바다 물고기들이 발끈하며 앞으로 나왔어요. 그러자 텃세를 부리던 물고기들도 지지않고 맞섰어요. 당장 싸움이라도 날 것 같은 분위기였어요.
그 때, 어디선가 조그만 아기 물고기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엄마, 엄마. 여기 들어와 보세요. 아주 넓어요."
모두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어요. 아기 물고기 한 마리가 내 몸 속에 들어와 요리조리 헤엄을 치고 있었어요.
"오, 정말이구나. 물고기들이 살기에 아주 안성맞춤이야!"
"어디, 어디? 나도 좀 들어가 보자."
앞바다 물고기들이 앞 다투어 나에게로 몰려들기 시작했어요. 나는 갑자기 벌어진 일에 정신이 없었어요.
눈이 튀어나온 물고기가 내 앞으로 다가와 진지하게 말했어요.
"부탁입니다. 우리들이 들어가 살 수 있게 해주십시오."
"네, 네?"
나는 당황해서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어요.
"여기가 아니면 우리는 살 데가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앞바다 물고기들이 간절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어요.
"무, 물론이에요! 어서 들어오세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어요.
"야호!"
"이제 살았어!"
앞바다 물고기들이 환호성을 질렀어요.
"정말 잘 되었군!"
해송 할아버지가 흐뭇하게 웃으셨어요.
"고맙습니다. 이제 안심하고 알을 낳을 수 있겠어요."
"여기라면 상어가 와도 문제없겠어!"
"어이쿠, 저도 신세 좀 지겠습니다."
앞바다 물고기들이 활짝 웃으며 내 몸 속으로 들어왔어요. 그들은 부서진 창틀, 망가진 선실, 배 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터를 잡았어요.
"네 덕분에 바다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구나."
해송 할아버지가 따뜻하게 말씀하셨어요.
"불청객들이 이제 식구가 된 건가요? 뭐, 어쩔 수 없죠."
연산호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어요.
나는 이상하게도 자꾸만 웃음이 났어요.
"바보냐? 왜 혼자 실실대고 있어?"
까만 줄무늬 물고기가 슬쩍 다가왔어요.
"간지러워서. 헤헤헤."
물고기들이 간질간질 내 몸 안을 돌아다니니 웃음이 끊이질 않았어요. 웃으면 웃을수록 자꾸만 행복해졌어요.
까만 줄무늬 물고기가 자꾸만 주위를 휘휘 돌았어요. 그러다가 심각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어요.
"나도 여기로 이사 올까나?"
당선소감 - 이제 겨울의 기억은 따뜻할 것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당선 연락 전화를 받고도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추운 날씨가 싫어 항상 겨울은 싫다 말하던 저이지만, 앞으로 겨울은 저에게 따뜻한 기억을 가져다 줄 것 같네요.
지난 5월, 친구와 함께 떠난 제주도 여행에서 난생 처음 잠수함을 타보았습니다. 수심 40m 깊이의 바다 밑에 가라앉은 난파선을 만나게 되었어요. 얼마나 답답할까, 얼마나 슬플까, 하는 생각에 집에 돌아오고도 한동안 잊혀지지가 않았습니다.
무기력한 난파선과 같던 저에게 이렇게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꼭 꿈을 꾸는 것 같아요. 이제는 물고기 집이 되어 행복할 그 녀석의 기분이 꼭 이럴 것 같네요.
제 자신보다도 더 저를 믿어주시는 부모님과 가족들, 따뜻한 응원을 아끼지 않았던 소중한 친구들,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즐겁고 신나는 마음과 더불어 책임감을 잊지 않는 작가가 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조명아 / 1983년 부산 출생. 2007년 동아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현재 논술 지도 중.
심사평 - 조곤조곤한 말솜씨 눈길 사로잡아
150여 편이 넘는 응모작을 몇 편을 제외하고 꼼꼼히 읽었다. 그만큼 작품의 수준 차이가 줄어들었다는 뜻이다.
박홍재의 '꿈꾸는 학교', 이지해의 '용우', 박현경의 '동생을 데리고 화랑에 갔어오', 이현아의 '고흐 아저씨와 물렁물렁 크레파스', 김은경의 '메시지 나라', 조명아의 '배는 지금 간질간질'을 두고 밤을 새웠다.
'고흐 아저씨와 물렁물렁 크레파스'는 제목에서부터 발상이 참신하고 재미 있는 내용이지만 도입부에 비해 뒤처리가 너무 안이하고 허술하다.
'메시지 나라' 역시 참신한 내용이다. 몸이 신용카드처럼 압축되는 과정이나 중앙통신로 떠돌이 메시지 같은 상상력은 요즘 어린이들의 일상에 금방 안테나가 세워질 만하다. 그러나 판타지 안에서의 일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일에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배는 지금 간질간질'은 평범한 이야기, 끝이 짐작되는 이야기지만 화자의 조곤조곤한 말솜씨가 자꾸만 발목을 잡고, '배는 지금 간질간질'이라는 제목이 끝부분에서 별처럼 반짝여, 불투명한 등장인물과 약간의 고의성이 단점으로 작용함에도 불구하고 당선작으로 뽑았다.
축하와 함께 정진을 빈다. 부디, 한 번의 당선으로 별똥별로 사라지는 별보다 수많은 별 속에 묻혀 있다가 새벽에 반짝이는 아름다운 별이 되기를 당부드린다. 동화는 누군가의 가슴 속에 오래오래 묻혀 있으면서 별처럼 반짝이는 씨앗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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