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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평론/강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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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5,551회 작성일 09-01-19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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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 평론] 목소리'들', 혹은 냄새'들'의 세계 - 편혜영 론 / 강희철


1. 출구 없는 나라의 앨리스
시작은 있으나 결말이 없는 스토리는 근본적으로 허무를 조장한다. 샤르트르 식으로 말해, 세계의 개진이 없는, 오직 시작만 있는 이야기라니. 달리 말해 희망과 낙관을 지나치게 서둘러 폐기한 이야기에 열광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편혜영의 첫 소설집 '아오이 가든'(문학과 지성사, 2005)의 텍스트들이 그러하다. 거기에는 뚜렷한 결말이 없고, 긴장감도 없으며, 속도감 또한 없다. 다만 똑같은 템포로 섬뜩하고 역겨운 이미지들을 점액질같이 흘릴 뿐이다. 동물들과 사람들은 가차없이 시체로 돌변하기 일쑤이고, 시체는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다시 일상의 피곤함을 견디며 살아가기가 다반사인 이야기들의 암울한 반복. 거기에다가 ‘시체’들이 이야기를 전개하는 기묘한 상상력은 공포영화에서 흔히 만나는 영화적 줄거리를 반추하게 한다. 그러므로 편혜영의 소설에서 출구 없는 세계를 부유하는 좀비들의 운명을 떠올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물론 B급 영화처럼 편혜영의 소설이 흔한 이야기라 하더라도 '아오이 가든'에 실린 단편들에서 변함없이 일관되고 있는 작가의 세계관, 혐오스런 것에 고집스럽게 매달리고 있는 그 서사가 이 세계에 완전히 투항한 결과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서사적 집요함은 어떤 대상과의 대결과 저항, 그 극복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즉, 어떤 대상에 대한 특별한 저항의식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 텍스트 안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그 특별한 저항상대가 무엇인지 뚜렷이 알기 어렵다. 다만 소설이 전제하는 것은 ‘암울한 세계’이며, 누구도 이 현실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만을 강조하고 있을 따름이다. 편혜영의 소설들은 오염되고 더럽혀진 세계의 암울한 ‘지금’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미래’도 낙관할 수 있는 지점이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역설적이지만 바로 이 지점이 편혜영 소설이 우리에게 일종의 묵시록을 펼쳐 보여주는 중추로 여겨지게 만들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편혜영의 소설은 독자에게 아주 곤혹스러운 질문 하나를 던진다. 그것은 썩어 들어가는 도시문명을 부패하는 대상들로 알레고리화해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지금-여기의 상황에서 무엇을 대안적으로 사유할 수 있겠는지 대답해보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그러나 부패하는 대상들로 알레고리화된 도시를 그려냄으로써 말하려는 그 ‘무엇’이 과연 무엇이란 말이란 말인가? 우선은 ‘자본주의’의 체계 안에서 뿔뿔이 개인화된 ‘시체들’이 다름 아닌 우리의 현실임을 직시하게 만드는 소설적 장치가 여기에 답하는 첫 번째 열쇠가 될 수 있다.
「저수지」나 「문득」에서 시체를 살아있는 인간처럼 다루기도 하지만 「마술피리」에서는 실험용 쥐를, 「퍼레이드」에서는 서커스를 하는 코끼리를, 「동물원의 탄생」에서는 철장을 탈출한 늑대를 인간의 삶과 대비해 바라보게 하면서 ‘동물’을 알레고리화해 인간을 ‘사육’되는 동물로 성찰하도록 만든다. 편혜영은 ‘알레고리’를 통해 시체와 사육된 동물들을 인간과 동일한 등가체계 안에서 살펴보게끔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시체와 인간을, 죽은 자와 산 자를 같은 의미로 바라보는 것은 ‘환영’인 ‘살아있는 시체’를 실재할 수 있는 것처럼 만들기에 가능해진다. 이 상상은 소설 속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님을 알 때, 우리는 ‘자본주의’를 투영하는 것으로 이 소설을 이해할 수 있다. 자본주의에서 모든 상품들이 유통될 수 있는 것도 모든 것이 균질적인 것으로 놓여 질 수 있다는 ‘등가체계’의 ‘환영’에 의해 가능해진 것이다. 모든 대상들이 ‘환영’을 통해 서술되거나 판매될 수 있다는 지점에서 편혜영 소설의 알레고리는 자본주의 자체를 투영하는 것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의 대상이 아니라 오직 ‘환영’을 통해서만 자본주의와 인간의 삶을 알레고리화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작가 자신조차 어쩔 수 없는 시각의 한계로 받아들이게 한다. 이 때문에 자본주의의 악순환을 따라가서는, 그리고 선형적인 텍스트의 악몽만을 읽어내서는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 편혜영 소설들에서 우리 삶의 역사에 묻어있는 이미지들을 선별하거나, 환영을 마치 현실처럼 게워내는 화자의 흥미로운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알레고리’로 점철된 서사의 덫을 비껴나가며 정작 우리가 사유할 틈새들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끝내 소설적 재현의 그물망에 봉합되지 못/않는 기호들로 소설 텍스트를 벗어나야만 볼 수 있는 숨겨진 의미들이다. 그래서 편혜영의 소설에서 출구가 없는 이야기들의 연쇄를 쫓아 헤맬 필요가 없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이상한 세상을 ‘탈출’할 수 있는 상징인 ‘시계를 찬 토끼’를 쫓지만 언제나 실패했던 것처럼 결국 잠에서 스스로 깨는 것 외에 이상한 나라를 벗어날 길은 없다.


2. 발설되지 않는 젠더, 그 여성성
먼저 편혜영 소설에서 드러나는 편향된 서술자의 시각에 주목해 보자. 그의 소설에서 남성이든 여성이든 간에 사건을 이끄는 주인물이나 화자는 ‘성적 관계’를 표현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성적 관계란 것이 꼭 이성적 대상에 국한 된 것이 아니기에 시체를 애호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고, 성 관계의 희열보다 오히려 가학적이고 피학적인 ‘고통’ 자체를 더 좋아할 수도 있다. 이렇게 인간의 ‘성(性)’은 함부로 일반화 할 수 없는 지점에 있다. 편혜영의 소설은 이 ‘성(性)’의 프리즘에서 쏟아져 나올 수 있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활용하지 않는 점이 특이해 보인다.
예를 들어 「맨홀」에서 남성 화자인 ‘나’는 C라는 친밀한 관계의 여성에 대해 “나는 C의 젖가슴을 만지거나 살갗이 얇아 푸른 핏줄이 도드라진 배를 쓰다듬었다.”라며 친근한 신체적 접촉 이외에 ‘성 관계’를 욕망하는 남자의 시선은 그려지지 않는다. 기묘하게도 남성과 여성의 관계지만 화자가 남성적 욕망을 지니지 않고 있기에, 마치 여성과 여성의 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동성애’적인 친밀감을 넘어설 수 없는 듯 보인다. 남자와 여성의 일반적인 ‘성 관계’는 소설 속의 주인물들에게서는 절대 구현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화자의 동성애적인 친밀감 밖에 있는 부정적 대상, 예를 들어 폭력적인 남성으로 그려지는 P는 주인공인 ‘나’를 향해 “야, 내가 몇 달 전에 어떤 년을 따먹었는데”라는 둥, “개걸레처럼 너덜거리는 년”이라는 둥의 남성적인 성적 폭언을 서슴지 않는다.
부정적 대상을 통해 성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이끌어 내기는 하지만, 그것은 남자와 여자의 성관계에 대한 ‘부정성’ 안에 머물러 있다. 그렇기에 편혜영 소설의 주인물과 화자가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성적 욕망의 대상과 표현방식은 없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단 한번 특별하게도 「밤의 공사」에서 주인물인 남자가 자신의 아내와 부부간의 성 관계를 가지긴 하지만 역시나 앞서 전제한 남녀의 일반적인 성관계를 ‘부정’하는 원칙에 놓여있음을 다시 확인하게 만들 뿐이다.
「밤의 공사」는 3인칭 소설이지만 주인물인 남성 주인공을 중심으로 성관계를 묘사하는데, “흥분한 아내가 등을 할퀴며 그를 다그쳤다. 그는 재게 엉덩이를 놀렸다. 아내의 살이 출렁거렸다. 벌거벗은 아내의 몸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라며, 남편은 붙잡고 자신의 성욕만을 채우는 모습으로 아내를 그려내고 있다. 식탐이 강하고, 아이를 잘 때리는 성격의 아내에 의해 이끌리는 성 관계는 일방향적인 성적 편력에 의한 것으로, 부부관계에서 아내가 남편보다 권력 우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것은 일반적인 부부관계가 아니다. 화자의 감정이 이입되었다고 볼 수 있는 남성 주인공을 통해 성적 욕망을 진행시킬 수 있음에도 화자는 남성 주인공을 성적 지배를 당하는 ‘여성’과 다름없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남성’과 ‘여성’의 위치만 바뀌어 남편이 여성적인 만큼 아내가 남성적으로 그려지게 되었다. 이는 화자의 목소리가 소설의 중심인물인 남성 주인공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맨홀」에서 보았던 남자 P처럼 완전히 악한 인물로 타자화 하지 않은 이상 화자는 언제나 주인물의 입장을 ‘남성적 욕망’과 관련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남편에게 화자의 목소리가 여성성의 형태로 집중된 대신 오히려 여성인 아내가 완전히 적대적인 타자로 성적 욕망을 폭력적으로 분출하게 된 것이다.
이런 서술의 태도를 견지해 보면, 화자는 주인물들을 젠더의 편차 안에서 바라보고 있으며, 이것은 작가가 거의 자동적인 혹은 무의식적인 ‘동일시’ 속에서 주인물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물론 특별히 여성성을 ‘배제’하기 위한 원칙을 둔 작가의 원칙에 따라 작가가 서술자의 목소리를 제어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스토리와 사건의 편차, 그리고 성적 편차까지 각양각색으로 대상들을 그려 넣을 수 있는 화자의 서술태도가 작가에 의해 개성 없이 규제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사실 화자의 목소리는 작가의 목소리와 다른 것이다. 만일 그럼에도 각기 다른 소설들이지만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작가 스스로가 완전히 규제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면, 화자의 목소리나 주인물들에 대해 작가 스스로가 ‘동일시’의 착각을 버릴 수 없다고 발언하는 셈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가 그려낸 세계가 곧 현실이라고 작가 스스로 인정하는 것으로 그것은 곧 ‘작가의 내면’이라고 까지 말할 수 있게 된다. 대상을 포착하는 방식이 곧 작가의 내면일 수는 없다. 그것은 지독한 동일시이지 알레고리는 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화자나 주인물이로 표현되는 일반적인 성관계가 부정되는 것은 작가가 지닌 세계관의 문제에 관련해서만 주제의 일관된 태도를 견지해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의 곳곳에 드러나는 부패하는 도시의 암울한 세계관은 일종의 희생적인 모성애로 그려져 왔던 여성성의 근원을 부정하는 형식으로 출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소설 '아오이 가든'에서, “고양이의 배를 봉합하는 것으로 수술은 끝났다. 떼어낸 자궁은 금세 악취를 풍기기 시작했다.”며 동물로 여성성 부정의 알레고리를 진행시키는가 하면, “시커먼 가랑이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가랑이가 찢어질 듯 아프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정말로 누이의 가랑이는 붉은 속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찢어져 있었다.”며 임신을 하게 된 여성의 ‘질’을 황폐화시켜버리는 묘사로 그 부정의 강도를 계속해서 높여나가고 있다. 화자가 ‘성 관계’를 직접적으로 발설하지 못하면서 오직 ‘여성성’만을 공격하는 태도는 ‘자학’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 자학적으로 보이는 동력은 놀랍게도 편혜영의 등단작품인 「이슬 털기」(대한매일신문, 2000년 신춘문예 당선작)에서 ‘사랑’을 잃어버린 여주인공이자, 소설 내적 화자가 규정지은 미래상을 미리 예감하게 하는 것처럼 인과론적 필연성을 보여준다.
「이슬 털기」에서 여주인공은 자신을 임신시킨 남자와 자신의 아이를 동시에 잃게 된다. 이것은 자신의 임신한 사실을 몰라주는 남자에게 아이를 지워버릴 것이며, 당신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던 저주의 ‘목소리’가 실현된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이제 찾을 수 없는 것으로 인정된 죽음의 세계로 가버렸다. 잃어버린욕망의 실체들이 되어버렸기에 금방 생동하며 느낄 수 있던 것으로 다시 그들을 눈앞에 불러오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 된다. 이제 사랑의 의미를 온전히 고통으로만 받아들어야 하는 현실 앞에 오직 역겨운 냄새와 그 냄새를 풍기는 물질들로 사물들을 감각하게 된다.

나는 우욱, 먹은 것을 토해내고 질질 침을 흘렸다. 대학병원 전체가 장례식장 인 듯 어딜 가나 전을 지지는 기름내와 비릇한 육개장 냄새, 만수향내가 났다. 포르말린 냄새가 지독해서 물도 마시지 못하다가 그의 하관식 날, 나는 정신을 잃었다.
―「이슬 털기」 중에서

여기서 딱 한번 언급되고 있는 이 ‘역겨움’에 대한 묘사들을 볼 때, 사랑하는 것들을 죽음의 뒤안으로 보내 버린 뒤 느끼게 되는 한 여성의 슬픈 상처가 불쾌한 냄새들로 전이되고 있음을 살필 수가 있다. ‘사랑’은 ‘죽음’으로 치환되고, 남은 것은 사랑할 것이 없는 ‘역겨운 세계’의 냄새뿐이다. 역겨운 세계는 곧 자신의 ‘자궁’의 이야기로 전이된다. 결말에서 여자는 다시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임신하게 되지만, 죽어버린 자들을 아직 상처로 간직한 여자는 자신의 자궁 안에서 양수가 터지고 있음에도 새 생명에 대한 ‘탄생’을 지켜보는 어머니가 되지 못한다. 앞에서 보였던 장례식 장의 모습처럼 다시 정신을 잃는 것으로 서사를 닫아버림으로서 다음에 태어날 ‘아이’에 대한 모성애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산 자 보다 죽은 자에 대한 사랑, 이미 지워지거나 다른 대상으로 대체되어야 할 죽은 자에 대한 사랑을 포기할 수 없는 ‘순수’한 여성의 집착 앞에서 다시 사랑할 ‘욕망’의 대상은 있을 리 없다. 또 그러한 욕망은 ‘발설’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순수한 마음을 지키는 자의 내재적인 규율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이제 그 죽은 자에 대한 ‘순수’한 선택에 의해 모성애 없이 잉태된 ‘아이들’의 끔찍한 서사가 담긴 소설집 '아오이 가든'을 마주하게 된다. 여기에서 죽은 자에 대한 사랑의 왜곡된 힘들, 그 욕망들이 어떻게 어머니의 모태와 같은 상징인 ‘집’이 격파되는 양상으로 변주되고 있는지 ‘아오이 가든’이라는 매력적인 제목과 함께 천천히 살펴나가 보자.

3. ‘아오이’ 가든 혹은 ‘야오이’ 가든
앞서 「이슬털기」에서 사랑을 저주하며 사랑하는 것들을 죽음으로 내 몰아버린 한 여성의 저주는 이제 자기 자신, ‘여성성’에게 돌려진다. 이제 남성적 주체를 사랑하는 여성성이 배제된 세계는 ‘아이’를 낳는 모성애까지 철저히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다음의 소설집 '아오이 가든'을 통해 역겨운 냄새의 세계와 모성애 없이 배태된 버려진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내게 된다.
「저수지」는 돈을 벌러 떠난 어머니가 통나무집 곳곳에 숨겨놓은 과자를 찾아 먹고 살아가는 세 형제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이것은 잔혹한 동화,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집’을 연상케 한다. 그 동화에서는 아이를 살찌워서 잡아먹는 마녀가 등장했지만, 이제는 ‘과자집’을 미끼로 아이들을 버려두는 모성을 잃은 마녀, 어머니를 그려낸다. 그 아이들은 이미 오래전에 굶어 죽었던 것으로 계속 통나무집을 지키며 썩어가고 있는 시체들일 뿐이다. 그들을 생명력이 있는 것으로 불러내는 화자에 의해 삶을 살아가지만 어떠한 분노나 동요를 하지 못하는 ‘살아있는 시체’라는 환영으로만 삶을 영속해 간다.
「아오이 가든」의 결말 부분에서 개구리의 형상으로 배태되는 아이들은 성경에서 역병이 돌아 메뚜기 떼나 개구리 떼가 창궐했다던 한 고대 도시의 저주와 닮은 이야기 꼴이다. 다만 다른 점은 “피로 물든 누이의 가랑이에서 나온 것은 다리가 가늘고 몸통이 큰 개구리였다.”의 내용처럼 자궁에서 개구리를 방출시키는 이미지다. 가장 안정적이어야 할 ‘모태’가 이렇게 비상식적인 상상으로 그려지는 이유는 분명하다. ‘집’, ‘모태’, ‘가족’ 등이 가진 기존의 안정적인 이미지들을 격파하겠다는 앞서 「이슬 털기」에서 보였던 신념 혹은 주술이 계속해서 반영되고 있는 까닭이다. 그렇기 때문에 왜곡된 이미지로 표현된 모태에서 개구리와 같은 기형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인과론일 것이다.
「마술피리」는 아예 동화의 제목을 차용하기도 하는데, 도시에서 방치해서 키워지는 어린 동생과 실험실에서 약물실험을 당하는 쥐를 같은 입장으로 바라보고 있고, 「맨홀」에서는 하수구의 틈새에서 살아가는 방치된 아이들과 어른들의 참담한 삶을 보여주고 있다. 「만국박람회」에서는 보잘 것 없는 도시 주변부의 허허벌판을 만국박람회장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곳에서 벌어지는 것은 과학의 발전과 미래의 신기술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아이들을 싸움꾼으로 삼는 도박판, 광대들이 벌이는 초라한 마술쇼 등이 얽힌 난장판으로 기형적인 박람회가 펼쳐지는 내용이다.
소설들 곳곳에서 버려진 아이로 성장한 인간들이나 사랑을 온전히 받지 못한 아이들의 비루한 형상과 마주하게 된다. ‘사랑’하는 것들을 이제는 쓰지 못할 재료로 애도한 뒤 출생하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오이 가든'이란 소설 단편집을 통해 펼쳐지는 것이다. 이 ‘버려진 아이들’이 중심이 되는 단편집의 내용들은 근대 이후의 아이들은 결국 어떻게 ‘사육’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하나의 알레고리를 형성해 낸다.
한국 사회에서 부모들은 이제 삼각편대를 형성했던 가족사를 잃은 채 ‘외기러기’가 되고, 아이들은 변화하는 시절에 따라 떠돌아야 하는 ‘철새’의 습성으로 자라나고 있다. 우리의 현재는 과거와 미래에 의해 완전히 내맡겨진 것으로 현재는 단지 억압된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견뎌내야 할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이렇게 현대사회의 음울한 이면이 알레고리화된 소설의 인간들과 시체들은 묵묵히 공포스런 삶을 아무렇지 않게 견뎌내고 있는 것으로 형상화된다. 모든 것은 아마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시작된 악착같은 생활력이라 긍정하고 싶겠지만, 편혜영의 소설들이 보여주는 암울한 세계처럼 자본주의의 제도는 삶을 조금 더 효율적으로 사육시킬 방편만을 찾을 뿐 타자의 입장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다.
소설집 '아오이 가든'은 이렇게 끔찍스런 알레고리를 차용하면서도 이와 상반되게 유난히 동화적인 모티브를 서사 안에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 동화 속의 주인공들이 모습이 마치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가 한 집에서 갈등 없이 어울릴 수 있는 것처럼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자매애’같은 유대감은 너무나 각별하다.
「저수지」에서 세 형제는 분명히 남성 아이들임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쥐어뜯거나, 밀치는 행동 이외에 난폭한 싸움을 하지 않으며, 어머니가 없는 상황에서 첫 째는 어머니의 흉내를 내며, “조금만 기다려. 엄마가 계란 프라이 해줄게.”라며 마치 소녀들이 소꿉놀이를 하듯 동생에게 계란 모양의 과자를 건네주는 ‘어머니 되기’ 역할극을 한다. 「마술피리」에서는 누나가 자신의 여동생을 마치 실험용 쥐가 죽어가는 것처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결말 부분에서는 죽어가는 여동생을 업고 동화 속 ‘마술피리’ 효과처럼 쥐의 무리들이 따르면서 하염없이 먼 길을 걷는 환상의 세계를 만들어내면서 여동생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아오이 가든」에서는 “누이와 나 중에서 누가 손위인지도 구별할 수 없었다. 우리는 서로 반말을 했고, 그녀도 우리더러 서로에게 말을 함부로 한다고 나무라지 않았다.”라고 남동생인 화자는 어머니를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그녀’라고 지칭하고, 누이와 마치 자매처럼 어울려 지내고 있다.
동화적인 환타지와 동성애적인 관계로 채워진 소설들은 이 소설집의 첫 단어인 ‘아오이’를 ‘야오이’라고 보이게 할 만큼 여성만의 특별한 시선 안에서 이야기가 서술되고 있음을 체감하게 한다. 이외에도 ‘아오이 가든’이라는 괴이한 합성어는 이 소설집이 지닌 ‘여성성’의 괴이한 변이를 설명하는 특별한 기호가 되기도 한다. ‘야오이’라는 발음과 비슷한 여성들의 환타지가 반영된 동성애 취향뿐만 아니라, 근대의 폭력 앞에 놓인 지점에서 ‘아오이 가든’은 특별한 우리나라의 세계상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아오이 가든’이 홍콩의 한 주택단지로 우리를 벌벌 떨게 했던 사스(SARS)의 공포가 시작된 발원지를 작가가 소설 제목으로 삼았다고 한다. 일어‘あおい’와 영어‘garden’가 뒤섞인 이 엉터리 합성어에는 역사적인 무의식이 숨겨져 있다. 푸른 혈관을 터트리면 피가 나오는 것처럼 ‘아오이’는 우리 삶에서 단지 푸른색이 아니라 일제강점기를 거쳤던 고통의 선혈들을 푸른색의 무의식으로 치장한 단어로 단순히 선명한 기호로 발음되는 색깔의 아름다움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 덧붙은 ‘가든’은 유럽의 시각에서 바라보자면 하나의 정원, 잘 가꿔놓은 인공림을 의미하는 도회적 세계관의 반영물이다. 그들의 제국주의적 시선이자 근대적인 세계상, 세계를 자본주의라는 ‘인공림’으로 바꾸려하는 욕망과 무의식의 기호로 보인다. 아직도 이러한 폭력적인 세계관은 자본주의 안에서 끊임없이 악순환 되고 있다. 웃기게도 우리나라에서 ‘가든’은 이렇게 잘 가꾸어진 인공림이 아니라 육고기를 구워먹는 한적한 전원식당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의 역사에서 일본에 대한 무의식보다 유럽에 지배당했던 무의식의 지평이 이렇게 왜곡된 ‘전치’를 만들만큼 얼마나 은폐되어 있는가를 실감하게 한다.
우리 문화의 씨줄과 날줄은 이렇게 엄청난 근대적 무의식들이 기입되어 있다. 사실 ‘아오이 가든’은 우리만의 기표가 아니라 ‘근대성’ 전체를 아우르는 아이러니이며, 오직 억압된 타자들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괴이한 ‘단어 합성법’이다. 이 근대적 억압의 기호 밑바닥에 ‘여성’이 놓여 있었다. ‘푸른 정원’을 왜곡되게 발음하는 억압된 그들이 ‘야오이’적인 성적 편향을 갖는 것은 타자들만의 기묘한 연대이자 기묘한 감수성이다. 이러한 여성들끼리의 ‘환상’과 ‘독특한 단어 합성법’ 없다면 그들은 남성적이고 권력적인 기표를 자신만의 언어로 다룰 방법을 갖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비단 여성의 타자적 위치뿐만 아니라 우리가 순수한 한국어만으로 대화할 수 없는 것처럼 근대 제국주의에 있어서 주변부의 ‘여성성’ 지녔던 모든 국가들이 가진 언어들이 지닌 정확한 역사적 현실, 그 표상일 것이다.

4. 자본주의를 그려내는 악취의 알레고리
자본주의 사회는 갖은 냄새들의 세계이다. 오로지 악취가 진동할 뿐이지만, 편혜영의 소설은 ‘여성성’을 공격하는 특별한 공격 의식 이외에 ‘냄새’를 통해 대상들을 포착하면서, 우리의 ‘신체적 감각’을 문제 삼는다. 이것은 앞서 여성의 모태가 담당했던 두 가지 이분법적 상징, 안착할 수 있는 모태와 안착할 수 없는 모태의 이분법에서 화자가 선택한 공격적인 목소리와 닮은꼴이긴 하다. 그래서 안착할 수 없는 모태를, 세계를 그려내는 상으로 삼았던 것처럼, 역시 ‘향기’ 없는 ‘냄새’를, 세계를 그려내는 데에 주력한다.
남성성이 지니는 지배적인 서사방식이 ‘시각’에 주목하는 만큼, 편혜영의 소설은 그 권력적인 주체가 지닌 담화방식을 굴절시키는 발화방식으로 ‘후각’이라는 감각에 주목하도록 만들고, 끝내 ‘냄새의 세계’로 독자를 이끈다. 이를 위해 ‘아오이 가든’이란 왜곡된 단어 합성법처럼, 남성적 주체의 일반화된(보편적인) 시각적 감각에 대비될 수 있는 주변화된 감각인 후각을 고집한다. 요컨대 ‘냄새’를 서사의 전면에 배치하여 우리에게 악취를 진동시킨다는 것이다.
쥐의 배설물, 구더기, 썩은 고기들, 타액들과 다양한 점액질들의 냄새들, 입냄새, 피비린내 등이 넘쳐나는 소설들은 텍스트 곳곳에서 강력하게 분사되고 이 냄새가 일으킨 현기증 속에서 소설의 인물들은 시각적 기호의 확실성을 박탈당한다. 가령 「사육장 쪽으로」('사육장 쪽으로', 문학동네, 2007)에서는 개에 물린 아들을 병원으로 보내기 위해 사육장을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지형을 구분하는 시각적 감각을 잃어버린 채 계속해서 사육장 쪽으로만 가고 있는 황당한 상황이 그것이다. 또, 「분실물」('사육장 쪽으로')에서는 잃어버린 서류 때문에 공포에 휩싸이는 한 직장인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가 정작 두려워하는 대상인 직장 상사의 모습을 정확히 떠올리지 못하기도 한다. 이 뿐만 아니라, 대상을 시각적으로 재연하지 못하는 일들은 「금요일의 안부인사」('사육장 쪽으로')에서도 드러나는 데 딸을 둔 주인공인 아버지는 이웃 주민들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며, 고등학생인 자신의 딸이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다고 체념한다. 그리고 「동물원의 탄생」('사육장 쪽으로')에서는 한 남자가 동물원에서 탈출한 늑대를 잡아야 하는데 종국에는 늑대와 털옷을 입은 사람을 구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시각적인 언어로 사물을 분류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우리에게 불편한 냄새들을 무기로 사물들을 흩어 버리는 듯 한 작가의 전략적인 글쓰기는 시각을 특권화한 (근대적) 주체의 안전한 자리를 요동치게 만든다. 달리 말해 궁극적으로 (근대적) 주체가 얼마나 폭력적으로 구성되어 온 것인지를 폭로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냄새를 통해 표현하는 ‘악취의 세계’는 대상을 인식하는데 가장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된 후각을 다시 ‘복원’시키며 우리의 삶을 안정적인 궤도로 이끄는 자본주의적으로 (시각화된) 모든 ‘향기’를 서사의 바깥으로 몰아낸다. 이런 발화방식은 개성적인 문체를 산출한 원인이기도 하며, 타자로 한계 짓고, 억압을 가속하는 와중에 얻은 새로운 ‘감각적인 목소리’의 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냄새를 ‘복원’시키는 데는 먼저 ‘시체’들과의 조우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편혜영의 소설집 '아오이 가든'의 첫 페이지가 뜬금없는 문구, ‘안녕, 시체들’로 시작하는 것은 살아 있는 시체들, 즉 주체를 이탈시키는 과정이 없다면 그러한 불쾌한 ‘냄새’를 맡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편혜영의 소설이 시체와 시취를 환대함으로써, 말소되는 삶을 애도하지 않음으로써, 세계는 산 자와 죽은 자가 뒤죽박죽되는 알레고리로 연동되고 바로 이 지점이 ‘냄새’가 서사의 근간에 있도록 만든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냄새는 ‘스미는 것’이라는 물리적 속성을 떠올려보자. 냄새는 호흡의 와중에 신체에 부지불식간에 엄습하는 감각의 일종이다. 마치 입자들의 브라운 운동처럼, 아무리 지우려고 애써도 타자의 ‘체취’는 막을 수 없다. 달리 말해, 방향제가 지우고 싶었던 ‘냄새’를 흔적으로 보관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라면, 편혜영의 소설 역시 자본주의적 ‘향기/악취’가 지울 수 없었던 ‘냄새’가 지배적 목소리와 시선의 배면에 흐르고 있음을 정확하게 포착한 결과로 이해되어야 한다.
물론 타자의 목소리를 타자의 목소리 그 자체로 드러낼 수는 없고 이미 지적했다시피, 다만 주체의 목소리를 ‘전유’하는 방식을 통해서만 그 목소리가 가능했다는 것을 다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즉, 주체의 목소리와 시선을 강탈해가는 ‘타자’의 ‘냄새’가 편혜영의 소설에 가로놓이는 것이다. 요컨대, 편혜영의 소설은 주체와 타자 사이에 견고하게 새워져 있는 강력한 ‘벽’을 넘어서는 ‘소통’을 요구하는 ‘강력한 냄새의 분자들’로 채워져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 강력한 알레고리가 ‘유행’과 ‘용도’로 형식화할 위험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멸한 것들을 귀환시키거나 말소된 것들을 불러들이는 이른 바 ‘환상’의 도움 없이는 편혜영의 소설은 기록될 수 없는, 불가능한 작업방식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잘 알다시피, 편혜영의 알레고리가 ‘환상’과 ‘현실’을 등치시키는 게 아니라면, 환상은 환상으로 그리고 실재는 실재로 남겨두면서도 ‘그것’들을 그것 자체로 다룰 수 없게 됨으로써, 현실을 현실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삭제해버릴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더더욱 완벽한 매트릭스(matrix)를 구축할 수도 있다는 것!


5. ‘한계’를 넘어서는 사유를 꿈꾸며
소설 속 화자는 텍스트 내의 세계를 말해주는 유일한 존재다. 이러한 화자에게 마음껏 말하도록 특별한 목소리를 부여하는 작가는 자신이 가진 ‘세계상’을 텍스트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연금술사라 비유할만하다. 연금술사 들이 갖은 세상의 질료들을 넣어서 궁극적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 흔히 ‘황금’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숨겨둔 욕망은 그보다 더한 꿈을 향해 치달렸다. 그것은 신처럼 ‘인간’을 창조하려는 욕망이다.
지금까지 편혜영의 소설을 살펴보면서, 그가 구축한 서사의 흐름 또한 ‘황금’과도 같은 작가만의 ‘세계상’을 직조하는데 멈춰있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물론 그의 첫 소설집 '아오이 가든'은 정확히 그만의 세계상을 구현하는데만 주력하고 있는 점이 돋보였으며, 불쾌한 냄새들이 진동하는 세계에 죽은 것들이 오히려 우리의 삶을 고민하게 만드는 실체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소설집 '사육장 쪽으로'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세계로 전환된다. 이것은 근대적 성과를 전유하는 여성의 독특한 목소리로 구현된 ‘알레고리’가 약화된 것처럼 보인다. 시체들이 살아있을 수 있었던 알레고리의 ‘환영’은 버려지고, 오직 시체가 남긴 ‘냄새’만이 남겨진 셈이다.
사실 이것은 이제 텍스트 속에 인간을 재창조하기 위한 진화과정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동성애가 녹아있는 동화적 모티브들을 버림으로써 세계는 더욱더 파편화되고, 소설 속 인물들은 이제 현실에서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는 좀 더 명확한 ‘시체’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작가의 ‘시체’ 만들기는 진화했고, 그것은 이제 인간이 되었다. 더욱더 강력해진 알레고리가 파편화된 일상의 무서움들을 불러낸다. 여기에서 절대 폐기할 수 없는 독특한 여성의 목소리가 인물들을 여전히 동성애적으로만 관계하도록 하지만, 제어된 목소리의 ‘한계’가 타자를 사유하게 하는 유일한 지점이기에 그것을 ‘한계’로만 바라볼 수 없다. 오직 ‘한계’만이 우리를 넘어서게 함으로.

당선소감 - 고집·편견 직시하게 한 '목소리' 덕분
'관계'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운다고 생각했다. 타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많은 것들을 배우고 있다고 착각했던 나날들.
거기서 내가 감추었던 매끄럽지 못한 결들, 옹이들이 소리 없이 뒤틀어져 가고 있음을 몰랐었다.
아니 지금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끊임없이 나의 고집과 편견들을 직시하게 해주는 '목소리'들이 있어 그나마 이렇게 부끄러운 글을 쓸 수가 있게 된 것 같아 감사의 말을 전한다.
지금은 없지만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확인시키는 나의 아버지, 그리고 스승으로서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조갑상 선생님과 박훈하 선생님께 먼저 감사드린다.
공부하는 삶을 기꺼이 긍정해 준 가족들에게는 미안한 마음뿐이다. 공부하고 소통하는 법을 가르쳐 준 선배들과 후배들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한다. 책임감이 늘었다. 앞으로 그만큼 신경통도 늘겠지만, 기꺼이 '환대'할 것이다. 그게 살아있다는 생각을 한다는 나의 증거들이므로.


강희철/1977년 제주 출생. 경성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심사평 - 이론 녹여내는 솜씨 글쓰기 능력 신뢰

역시 글쓰기가 문제였다. 대상의 선택이나 분석과 해석은 평론에 있어 글쓰기 전단계에 속한다. 아무리 좋은 대상을 선택하였다하더라도 텍스트와 이론에 조응하는 깊은 감수성이 느껴지지 않는 글은 평론이 되기에 부족하다.
투고된 16편 가운데 우선 평론 미달을 제쳐내고 분석과 해석에서 부족함이 있거나 맥락을 놓치고 있는 글들을 가려내었다. 이리하여 선자에게 남겨진 글은 네 편.
이원의 시집을 분석한 '두 실존의 원심적 공간, 시간의 만다라'의 경우, 여기저기 나타나는 비약으로 글의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고 맥락적 해석이 부족한 점이 흠이 되었다. 영화 '세븐 데이즈'와 '추격자'를 대상으로 한 '질주 네트워킹과 비극적 세계'는 해박한 이론의 도입이 돋보였으나 이러한 이론이 텍스트 해석과 보기 좋게 섞이고 있진 못했다.
분석과 해석이라는 점에서 이윤기 감독의 '여자, 정혜'와 '멋진 하루'를 다룬 '몸 밖의 시선, 몸 안의 시선'은 일정한 수준을 보였다. 하지만 더러 문단 구성이 미흡하고 접속부사의 빈번한 사용으로 글쓰기가 단조롭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최종 우리에게 남겨진 글은 소설가 편혜영 론인 강희철의 '목소리'들', 혹은 냄새'들'의 세계'이었다. 이론을 텍스트의 결과 맥락을 따라 녹여내는 솜씨와 더불어 글쓰기의 기본 능력을 신뢰할 수 있는 평론이라는 데, 우리는 이견을 갖지 않았다. 더 큰 정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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