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작품
2009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희곡/변기석
페이지 정보

본문
[신춘문예 - 희곡] 물을 꼭 내려 주세요 / 변기석
등장인물
박강규 (41) 아들
송 주 (65) 어머니
무대
송주의 집.
주방과 거실의 구분이 따로 없는 소형아파트다. 무대 오른편으로는 거실, 왼편은 주방이다. 주방을 따라 무대 전면은 아일랜드 형 식탁이 있고, 무대 왼쪽으로 3인용 낡은 소파가 있다. 무대 뒤 벽면 중앙으로 반쯤 열린 현관문, 양옆문은 오른쪽을 안방, 왼쪽을 쪽방으로 한다. 객석을 향해 이어진 무대 전면은 베란다로 한다.
금방 사람이 거칠게 난 자리다. 사내의 흩어진 옷가지들이 쪽방에서 반쯤 열린 현관문까지 이어져 있고, 식탁 의자가 쓰러져 있다.
화장실에 대한 설명.
무대 전면 오른쪽, 덩그러니 변기만 자리한 화장실. 병풍처럼 가벽이 있고, 문을 열어 들고 날 수 있다. 객석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며 내부는 관객만 볼 수 있다.
프롤로그
송주 흩어진 옷가지들을 깔고 앉아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하고 있다.
막 샤워를 마쳤는지, 젖은 머리를 선풍기 바람에 말린다.
어깨 위로 수건이 얹어져 있고,
화려한 꽃문양의 브래지어와 집에서 입기 좋은 치마를 입고 있다.
나이 오십 줄의 송주는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인다.
손톱하나에도 정성을 다해 바르는 송주.
그러기를 한참, 다 바르고 손톱에 더운 입김을 훅, 끼쳐 본다.
그러다가, 허공을 향해 열손가락을 쫙 하고 펴 본다.
송주 (손을 바라보며) 썩을 놈. 하나도 안 아프다.
발톱에 매니큐어를 바르기 시작하는 송주.
다 바른 발가락 사이마다 솜뭉치를 끼워 넣는다.
끼워 넣다가 물끄러미 발가락을 바라보던 송주,
송주 (허공을 향해) 내 발가락은 아닌가봐. 강규 아빠.
매니큐어를 던지듯 내려놓는 송주, 배를 움켜쥔다.
발끝과 손끝을 든 채,
주춤한 걸음으로 재촉하듯 화장실(쪼그리고 앉는 변기)로 들어간다.
어두워지고, 화장실에 불 켜지면,
치마를 걷어 올리고 쪼그리고 앉아있는 송주.
사이.
일을 마쳤는지 휴지를 뽑다가, 휴지걸이 위 담배에 눈이 간다.
라이터를 잡는 폼도, 불을 붙이는 태도 영 어색하기만 한 송주.
가까스로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길게 빨아보는 송주.
피우던 담배를 빤히 바라보던 송주, 매운 연기 탓일까.
꺼이꺼이 목 놓아 울기 시작한다.
들려오는 노래, 산울림의 “무감각”
긴 사이.
칠년 후,
잦아드는 노래 소리 따라 스포트 꺼지고,
화장실을 빼놓은 집안이 밝아진다.
반쯤 열려있던 현관문이 조심스레 삐걱 소리를 낸다. 강규다.
강규는 배낭을 메고 있다.
수염이 더벅하고 모자 뒤로 머리를 묶었다.
낡고 두터운 외투에 가렸지만, 건장한 키에 아직은 보기 좋은 몸이다.
현관문이 조심스레 닫힌다.
크게 심호흡을 해보는 강규.
어질러진 방안을 휘돌아본다.
사이.
흐트러진 옷들을 개키기 시작하는 강규.
빨랫감을 개듯, 차곡차곡 접어놓는다.
다 개킨 옷을 배낭에 넣는다.
쓰러진 식탁의자를 세운다.
선풍기를 쪽방에 치운다.
어질러진 방안이 눈에 띄게 빨리 정돈되어 간다.
빈자리를 채우는 건 공간 아닌 시간이라는 듯,
사이.
객석 가까이, 베란다에 선채로 바깥 풍경을 바라보던 강규.
담배를 꺼내 문다.
강규 (혼잣말) 엄마? … 어머니?
머쓱한지, 긁적이듯 모자를 벗는데 어깨까지 머리가 내려온다.
천천히 어두워지는데, 강규의 담뱃불만이 이따금 명멸한다.
암전.
*
강규는 차림 그대로,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잠이 들었다.
화장실, 눈에 띄게 늙어있는 송주 양변기(변기가 바뀜)에 앉아 용변을 본다.
통화중인 송주.
송주 됐다 됐어. 저번에 준 김치도 썩게 생겼어. 동치미? (생각하다가) 그거나 좀 갖다 주던가. 경조 잘 있냐? … 감기? 쯧쯧. 사내놈이 빌빌해서…. 어째 바람 서늘하면 꼭 병치레냐. 심하면 병원가보고. 내가 데리고 갈까? (사이) 알았다. 끊어라. 나도 똥줄기 끊고 나갈랜다.
휴지걸이 위 휴대폰을 올려두고, 물을 내린다.
아차, 휴지가 없다.
주춤하게 치마를 채 가리지도 않고, 벌컥 차듯 문을 열고 나오는 송주.
종종 걸음으로 식탁 위 티슈통을 집어 든다.
강규를 보지 못하고, 그대로 다시 변기에 앉는다.
화장실 문이 활짝 열린 채다.
사이.
화장실을 나서며 그제야 강규를 보는 송주.
우둑하니 서서 바라본다.
코를 골며 자고 있는 강규.
송주 안방에서 얇은 담요를 가져와 강규를 덮는다.
주방으로 가, 먼저 식탁 위 밥통을 열어보는 송주.
식사 준비로 분주한 송주다.
사이.
깨어나는 강규.
밥을 차리는 송주의 뒷모습을 아스라이 바라본다.
강규 (헛기침)
송주 (칵, 가래침을 싱크대에 뱉는다)
강규 … 엄마.
송주 (부러 크게 도마에 칼 부딪히는 소리를 낸다)
강규 (혼잣말처럼) 어머니라고 해야 하나?
송주 (냉장고를 열어 찬을 꺼낸다)
강규 엄마!
송주 수선 떨지 말어. 영영 갔어?
강규 …
송주 영영, 왔냐?
강규 때릴 거면 맞고, 나가라면 나가요.
송주 (신경질적으로 냄비 뚜껑을 닫는다)
강규 둬요. 대충 떼우고 왔어요.
밥을 푸는 송주, 식탁에 내려놓은 사발이 애기 봉분처럼 봉긋하다.
둘의 눈이 처음으로 스친다.
강규 삼시 세끼 꼬박 챙겨 먹는다구요.
식탁 위 터무니없이 높게 쌓아올린 밥을 보자, 실없이 웃음이 터지는 강규다.
송주 그런 강규가 아직은 밉다.
강규 엄마, 아니 어머니. … 에이씨, 이제 나 뭐라고 해야 해?
송주 너도 이제 반 팔십이야.
강규 (실없는 웃음) 엄마는 나누기도 안 되잖어.
송주 뺄셈만 남았지, 뺄셈만.
강규 (애써) 맛난 거 뭐해주게요?
송주 너 줄 거 없어. 개나 주지.
강규 진짜 개라도 키우지 그랬어? 집구석이 뭐야. (냄새를 맡으며) 할머니 냄새나요.
송주 … 키웠지. 똥 못 참는 개.
강규 (생각하다가) 그럼 난 똥만 할래요. (뒤에서 껴안으며) 요렇게 피하지 못하는 똥. (웃음)
송주 … 얼마나 있게?
강규 얼마나 있었음 좋겠어요?
송주 (보다가) 쪽방에 불 안 들어와. 보일러 만져봐.
강규 군소리 없이 쪽방으로 간다.
송주 걸어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그제야 맘 놓이고 바라본다.
사이.
강규 (소리만) 이거 못 쓰겠는데? 죄다 녹물이야! … (걸어 나오며) 아주 꽉 막혔어. 내 일 사람 불러요?
송주 둬, 그냥.
강규 그럼 난?
송주 전기요 있어.
강규 그건 배겨서 싫어. 온돌이 얼마나 그리웠는데.
송주 (밥상을 차린다)
사이.
송주 밥 먹어.
강규 생각 없어요.
송주 차린 밥상, 제라도 지낼까.
강규 오는 길에 오뎅이 너무 먹고 싶잖아요. 꼬불꼬불한 오뎅을 열개나 사 먹었어. 세상 에, 이백원 하던 오뎅이 오백원이나 하데요?
송주 (자르며) 안 먹을 거야?
강규 (마지못해 앉는다) 좀 덜어요. 밥 귀신인가.
송주 밥을 덜어내는데, 처음은 많이 덜었다가 다시 조금 더 채운다.
그리 줄지 않은 양이다.
강규 (밥을 건성으로 넘기며) 질어졌다. 밥이.
송주 (소파로 걸어가 앉으며) 질기는, 그놈의 밥투정. 어디 가서 밥 빌어먹고 잘도 살았 겠네. 쯧쯧.
강규 말없이 밥을 먹는다.
송주는 강규가 밥을 먹는 동안, 손톱에 매니큐어 칠을 한다.
사이.
강규 김치가 싱거워졌어. 내 식성이 변한건가? 아님 나이 들면 혀도 맛이 간다던데, 엄 마도 그래요?
송주 (고집스레 매니큐어를 바른다)
강규 (김치를 휘저으며) 새우젓 안 쓰지 않았어요?
송주 (자르듯) 사온 거야. 배추 금값이라 사먹는 게 싸.
강규의 성의 없는 젓가락질만이 이따금 소리를 낸다.
사이.
들려오는 빗소리. 잦아들면,
강규 (베란다 밖, 바깥 풍경을 보며) 이 비 그치면 겨울이겠다. … 올해는 일년 내내 겨 울 뿐이네.
송주 겨울만 밟고 다녀서 머리가 그 모양이야? 폭도도 아니고. 나이 들어 꼴이 뭐야, 우 습게.
강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왜요? 어울리지 않아? 칼바람에 덜 춥기도 하고. (웃음, 뚝) 참, 복도에 이불 널지 않았어요?
송주 (바르던 매니큐어를 던지듯 내려놓으며) 아이고, 내 정신머리야!
송주 급히 현관문을 열어 뛰쳐나간다.
강규는 식탁을 정리한다.
송주 양손 가득 차렵이불을 들고 온다.
화려하지만 촌스러워 보이는 꽃문양의 오래된 이불이었으면 좋겠다.
송주 죄다 젖었어. 솜까지 죄다. 쯧쯧. 아, 좀 받아봐! 매니큐어 물들라.
강규 (이불을 받으며) 복도 걸어오다가 이 이불을 보는데, ‘아, 이사는 안 갔구나’ 했어 요.
송주 ‘아, 아직 죽진 않았구나’, 아니고?
강규 …
송주 (손톱을 보며) 옘병, 망쳤네.
송주 다시 자리에 앉아 매니큐어를 든다.
강규 (바투 앉아 매니큐어를 뺏으며) 줘요. 내가 해볼래.
송주 내가 해.
강규 (뺏어 들고는 송주의 손을 잡고) … 소잔등이다. 울 엄마 멋쟁이였는데….
강규 송주의 손톱에 물을 들이기 시작한다.
송주는 그런 강규를 오래도록 눈에 담는다.
긴 사이.
강규 다 됐다. 개똥도 약이지? (웃음)
송주 (엷게 웃는다)
사이.
강규 (보다가) … 잘못했어요.
송주 …
강규 (담배를 하나 꺼내 문다) 잘못했다는 거지, 잘못 살았다는 건 아니야. 잘못이라면, (길게 들숨을 몰아쉬곤 내뱉으며) 요렇게 숨을 쉬려고, 허공에 한 일초나 이초쯤 둥둥 떠 다녔던 게 잘못이었던 것 같아. (보며) … 숨 쉬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
송주 (재떨이를 내밀며) 니 일이초 때문에 칠년을 꼬여서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 들 숨만 쉬고 살아져? 들숨 실컷 마셨으면 날숨도 터져야지. 니 들숨에 다들 한숨이었 다. … (보며) 그게 니 죄야.
송주 담배를 하나 집어 든다.
담배를 태우는 모습이 세월에 농익었다.
강규 놀라지만, 애써 침착한다.
송주 (담배연기를 내뱉으며) 그새 비가 그쳤네. … (생각하다가) 담배를 태우는데 비가 와. 다 젖으면 남는 게 뭐냐, 흩어지는 연기뿐이지. (손으로 연기를 저으며) 이 연 기 같은 걸 잡으려고 비에 쫄딱 젖은 거야, 넌.
강규 … 그땐 모든 게 밀물 같잖아요. 여기 내 목까지 뭔가 꽉 들어차서… (목덜미를 어 루만지며) 여기가 너무 더웠다구요.
송주 그래, 이젠 썰물이냐? 물 들고 나는 변기에도 물때가 끼는 법이야. 하물며 사람 들 고 난 자리는 오죽할까. 다 니 짐이야. 경조 애미, 그리고 경조. … 나까지 책임지 라곤 안한다. 칠년이야, 자그마치 칠년. 너, 이제 밀물 썰물 그만하고 잔잔하게 살 때도 됐어.
사이.
송주 … 클수록 너를 빼닮아 가.
강규 … 경조, 혼자 키워요?
송주 재가 말린 적 없다. 너 그러고도 어머님, 어머님 깍듯했어. 하루하루 얹혀서 살아져 야지. … 난 걔 싫어. 속으로는 열독이 폈는데, (보며) 이젠 어머니 한다.
강규 (배를 깔고 드러누우며) 씻팔. 나 천국가긴 글렀네.
송주 (강규의 등을 세게 때린다)
강규 유관순처럼 나라도 구할 여자에요. 삶이 고문이어도 그걸 업으로 아는 여자니까. (가로 누운 채, 새 담뱃불을 붙인다) 엄마, 나 이제 어떡해?
송주도 대답 없이 담배 하나를 더 태운다.
강규의 들숨과 송주의 날숨이 교차한다.
긴 사이.
강규 (갑자기 생각난 듯) 좋은 술이 있어요. (벌떡 일어나 배낭을 뒤적이다) 네팔에서 만 난 스님이 주셨어. 동충하초로 담근 술이래요. (꺼내 놓으며) 여긴 귀해도 거긴 흔 하대요.
송주 (무심히 병 안을 들여다보며) 여기 흔하고, 거기 귀한 건 없을라고.
강규 칠년만의 상봉인데, 흔한 소주는 그렇잖아요. 가다가 있지. (애써 웃음)
송주 교자상에 대강의 찬과 잔을 준비하는 동안,
집안, 서서히 노을빛으로 물든다.
송주 불 좀 켜봐.
강규 (바깥을 보며) 해가 졌으니까, 낮술은 아니네. (웃음)
화장실 벽에 달린 스위치를 향해 걸어가는 강규.
스위치 두 개 중 하나는 거실, 나머지 하나는 화장실이다.
강규 고민하다 엉뚱하게 화장실 스위치를 고르면, 화장실에 불이 들어온다.
강규 (열린 문틈으로 화장실을 보고) 이야! 변기 바꿨네. (송주를 향해 돌아보며) 엄마는 구식인데, 변기는 신식이다. (웃음)
강규 다른 스위치를 고르면, 화장실 불 꺼지고
노을빛으로 물들었던 거실이 한결 밝아진다.
강규 항상 헷갈리잖아요. (스위치를 재차 껐다 켰다) 거실 불, 화장실 불.
송주 (따라서 눈이 간다) …
강규 (생각하다가) 밀물 썰물 그만하고 잔잔하게 살라고 했잖아요. 막힌 변기 탓이야, 처 음부터. … (앉으며) 저기 따로, 또 같이 붙어있는 스위치 때문이라구요. … 헷갈리 게 붙어있는 게 잘못이에요.
송주 (비꼬며) 이번엔 애먼 스위치 탓이야? 스위치가 안에 달렸다 치자, 사방 어두운 화 장실에서 스위치 못 찾으면? 그땐 꽉 막힌 벽 탓하면서 창이라도 하나 낼려고?
강규 … 적어도 실수는 없을 거 아니에요.
송주 좀 불편해도 실수는 줄여 가면 되는 거야.
긴 정적.
말없이 술을 연거푸 두어 잔 비우는 강규.
강규 그땐요. … 필요한 건 기회였어요. 충분한 건 실패였고. 누가 그러잖아요. 나보고 환승역인 줄 알고 내렸더니, 종점역이더라고. (보며)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정말.
송주 그래서, 이제 다시 순환행이야? 그때 차고 넘치던 건 기회였어. 넌 실패를 필요로 만든 거고.
강규 … 엄마, 나 정말 싫어하는구나.
송주도 술을 따라 마신다.
각자의 잔을 따로 채웠다 비우기를 반복하는 송주와 강규.
긴 사이.
강규 내 마흔이 항상 걱정이었어요. 밀린 숙제처럼…. 예습은 없고, 순 복습뿐이야. 틀린 문제를 가지고, 그때도 난 자꾸만 잃어버리는 지우개, 똑똑 끊기는 샤프심, 뭐 그런 거에 핑계였던 거 같아. … 숙제는 불어나는 데, 자꾸만 틀리잖아요. 자꾸만….
송주 대체 자꾸 뭐가 틀려먹었다는 거야?
강규 (취기가 올라) 숨을 쉬려고 허공에 떠도는 일이초쯤 되는 시간을 버거워하면 안 돼 요. 그 시간을 미뤄서도 안 되고, 운명을 습관처럼 모른 체하면 안 되고… (억누르 며) 그리고 또… 또…
강규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사실 송주는 모든 걸 알고 있다.
아들의 밀린 숙제와 처음부터 답이 없는 문제를….
송주는 강규를 위해, 울지 않는다.
송주 너 떠나던 날, 전화가 왔었어.
강규 (놀라서 보는, 무너지는 얼굴) …
송주 죄송하고, 죄송하대. 죄송할 짓 하지 말라고 했지. 그랬더니, 사내놈이 기집애처럼 울기만 하는데…. 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이) 그건… 아무 것도 잃 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야.
강규 (송주의 무릎을 베고 누워, 고개를 파묻는다)
송주 (강규의 너른 등을 매만지며) 왜 돌아왔어?
강규 …
강규의 어깨가 가늘게 떨린다.
송주는 그런 강규의 등을 쓰다듬을 뿐,
송주 (누그러져) 기억나니? 니가 지금의 경조만 했을 때 말이다. 다짜고짜 기저귀를 달 라고 보챘던 적이 있어. “다 커서 무슨 기저귀 말이냐.” 했더니, 여자들만 쓰는 기 저귀를 달래. … “얘야, 여자들만 한 달에 한번 빨간 오줌을 싸는 거란다. 너한테는 필요 없어.” 했더니, 다음날 넌 내 손을 잡고 변기로 끌었지.
강규 (바로 누워, 송주의 얘기를 듣는다)
송주 그래, 분명 빨간 오줌이었어. … 진홍색 수채 물감을 변기에 풀어놓곤 우겨댄 거 지. (강규의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그날 처음으로 너한테 매를 들었던 거 같 아.
송주와 강규의 지금은 화해도 비극도 아니다.
관계와 소통 사이의 중간쯤,
처음으로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중이다.
강규 … 아이가 갖고 싶대요.
송주 아니, 어떻게?
강규 입양, 있잖아요.
송주 (기가 차) 해서?
강규 … 내가 어떻게 그래요, 내가.
송주 맹랑해라. (비꼬며) 호적에도 올리고? … 개 분양도 아니고.
강규 그러곤 일주일을 말도 안 걸어요. 어르고 달래도 도통 말을 안 해. 그러다 걔가 묻 는 거예요. “형은 대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요?” 하는데, 턱하고 날숨이 터져. 대 답도 알고 끝도 알았던 거 같아, 걔는. 그것까지 속이고 싶지 않더라구요. “지금처 럼 너랑 하루 살아, 하루 행복하면 그만이다” 했죠. … 했더니, 나보고 썰물만 남은 꼭지점이래. 자긴 아직 아니라고.
송주 지구 반대편에서도, 어린 건 벼슬이라고?
강규 (재떨이에 침을 뱉는다) 드럽다 드러워, 침 탁 뱉고 나와 버렸지. 나오던 길에 생각 해보니까, 그날이 마흔 내 생일이잖아요.
송주는 속이 상해, 가득 따른 술잔을 털어낸다.
또 한잔 가득 따르면,
강규 (술을 빼앗아) 독한 술이에요. 이게 무슨 약도 아니고.
송주 … 그래, 이제 어쩔 셈이냐?
강규 (농으로) 살려고 왔어요. 엄마랑. (자조적으로) 근데, 자신은 없다.
송주 (조금 흥분) 왜 자신이 없어?
강규 (애써 장난스럽게) 요 몸이 벙어리잖아요. (입을 가리키며) 요 주둥이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송주 (화가 나, 김치가 담긴 접시를 그르치며) 이게 내 주둥이로 들어가라고 보낸 김치 야? 차라리 사먹었음 얹히지나 않지. 경조 애미 아직도 너 기다리는 거야, 어쩜 그 리 모질어!
강규 대답 없이 병째 술을 들이킨다.
강규 살 줄 아는 사람들은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는 사람들은 살 줄 몰라. 그 여자, 그 시간동안 희망을 버렸어야 했어요.
송주 … 나도 거기에 포함되는 거냐?
강규 …
송주 (담배를 하나 꺼내 문다)
강규 … 나이 마흔, 꼭지점에서 혼자 여행을 좀 했어요. 언젠가 티벳을 거쳐 네팔로 넘 어가는 길이었어요. 우연히 만나 지프를 같이 대여했던 영국친구가 있었어요. 하루 하고도 반나절을 쉬지 않고 달리는 험한 길이었는데, 네팔 카트만두에 무사히 도착 하고 그 친구가 그래요. 1박 2일간 차안에서 잠을 한숨도 못 잤다고. … 왜냐 물었 더니, 운전자가 밤길 운전에 그렇게 졸더래요. 핸들을 조금만 삐끗해도 천길 낭떠 러지를…. 조수석에 앉았던 그 친구는 졸음운전 하는 운전자를 깨우고 깨우다가 나 중엔 때리기도 하면서 그 밤의 생사를 넘긴 거였어요.
송주 황천길도 모르고 약이지.
강규 (조금 웃음) 그 길에서 나 혼자만 태평했던 거야. … 웃기지 않아요? 생각해보면, 1 박 2일 그 차안에서 한명은 나를 죽일 수도 있었고, 또 한명은 나를 살려낸 거잖 아. … 삶이라는 길이 있다면 내가 운전하고, 내가 선택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때 그런 생각이 들데요. 삶은 운명에 빚지는 거라고. (보며) 남들이 보면 곱빼기로 죽어도 시원찮을 죄인일지 모르지만, 하루를 살아도 운명한테 더는 빚지고 싶지 않 아요.
강규의 붉게 충혈된 두 눈이 떼꾼하니, 감긴다.
긴 사이.
송주 … 경조는?
강규 … 자격, 없잖아요.
송주 어쩜, 넌…. (비꼬며) 사내끼리 붙어먹는 놈들 핏빛은 새까맣기라도 한건지.
강규 엄마!
송주 경조는 무슨 죄야! 내가 자격으로 너 키웠어? 운명에 진 빚? 니 운명에 천륜은 이 자 값도 안 돼? 천벌 받을 소리 그만해, 너!
강규 … 벌은 … 벌은 내가 다 받아요.
송주 그런 벌이라면 몸으로 짊어져. 입으로 가볍게 치를 수 있는 게 아니야.
강규 (울컥) … 내가 걔를 울릴 거 같았어요. 내가 걔를, 그 조그만 핏덩이가 나 때문에, 울 수도 있겠구나. 그게 … 그게 겁이 났어요.
송주 (모질게 자르듯) 묻지 않았어. 묻지 않을 거야.
강규 (한손으로 마른세수를 한다) …
송주 미리 그렇게 알 수 있었다는 건, 칠년 후 오늘도 알았던 거야. 난 그때도 몰랐고, 앞으로도 모를 거다.
강규 … 돌아오는 게 아니었어요.
송주 (울먹) … 내가 묻자. 벌을 덜어? 내 죄는 뭐야? 난 이렇게 벌만 받는데…. (보며) 대체, 내 죄가 뭐야?
목 놓아 울어버리는 송주.
비틀대듯 일어나는 강규, 화장실을 향해 걸어간다.
역시나 헷갈린 채, 거실 불을 꺼버리고 화장실 불을 켠다.
그대로 문을 걸어 잠근다.
주저앉아, 거울을 보듯 변기 안을 오래도록 들여다본다.
이내, 괴롭게 토를 한다.
암전.
**
강규 게워낸 입을 닦으려 휴지를 찾는데, 없다.
대신, 휴지걸이 위 송주가 두고 간 휴대폰에 눈이 간다. 손이 간다.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어두운 거실, 전화벨이 울린다.
송주 (어둠 속, 소리만) 여보세요.
강규 …
송주 여보세요?
강규 … 엄마, 내릴 수 없는 물도 있어요.
전화를 끊어버리는 강규.
변기 안을 바라보며,
강규 아주 작은 바다를 보러갔어요
파문 없이 고여 있지 않은
바람이 고였던 자리, 내 목구멍 속 파도가
떠도는 마음마저 토해내는
둥근 수평선, 거울 같은 바다
물.을.꼭.내.려.주.세.요.
기도했어요, 시시한 기적처럼
잃어버린 말들, 썰물처럼 씻겨 가 버리게
밀물처럼, 게워냈던 열망 하나쯤 씻겨져 돌아오게
바람이 멎는 곳에서 항상 길을 묻던 나는, 나는
휴대폰을 변기에 던져버리고, 변기 물을 내린다.
화장실 문에 등을 기댄 채, 담배하나를 태우는 강규.
사이.
어둠 속 또 하나의 빛이 등대처럼 껐다 켰다 한다.
화장실 문 밖, 스포트.
등대의 불을 밝힌 건 송주.
송주도 화장실 문에 기대어 담배를 태우고 있다.
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등에 기대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는 송주와 강규.
강규가 들숨을 크게 들이쉬면, 송주가 날숨을 밭게 내쉬고 한다.
긴 사이.
그들의 호흡이 길어질수록 빛은 차차 소멸한다.
들려오는 노래, 산울림의 “무감각”.
스포트 잦아들면서, 암전.
막.
당선소감 - 오늘의 선물 바삐 잊고 다시 새벽으로
잘 뻗은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 위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경탄한다. 어릴 적 6년간이나 피아노를 배웠지만 바이엘을 뛰어넘을 수 없었던 나에게, 피아노란 언제나 동경과 경외의 대상이었다.
새벽녘 자판에 두 손을 올릴 때마다, 건반 위에 올려진 내 두 손을 그려보았다. 그럼 하얀 백지에 음표가 그려지고, 피아니스트가 연주할 때의 몰입이 이런 건 아닐까 작게 위안하곤 했다.
솔직히 이토록 설익은 노래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거나 혹은 소통을 바랐던 건 아니다. 고백하자면 나는 누군가의 뒤통수를 후련하게 갈기고 싶었다. 그러나 덜컥 사고를 치고 나니, 만질 수 있어서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눈먼 노래를 들을 사람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 마지막으로 내 곁을 지켜 주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내가 준 것보다 그들에게 받은 것이 항상 더 넉넉한 위안이었음을 밝혀 두며, 오늘의 선물은 바삐 잊고 다시 새벽으로 도망치고 싶다.
변기석/1983년 제주 출생. 2008년 동국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현 동국대 영상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 시나리오 전공 석사과정 2학기 재학 중.
심사평 - 극적 대사 시적 리듬으로 형상화한 삶의 슬픔
공연은 일회성이지만 텍스트인 희곡은 영원히 남는다. 희곡이 공연성보다 문학성이 우선시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Bomb'(김청승)은 특이한 소재와 실험적 기법이 보편적 공감대를 얻지 못했고, '바람의 계단'(백미향)은 현실적 리얼리티와 판타지의 스며듦이 부자연스럽고, '누가 그녀를 사랑했을까'(문성인)는 상대역의 대사를 자막으로 처리한 기법이 극적 리듬을 떨어뜨리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결국 '별당 막국수'(황석현)와 '물을 꼭 내려주세요'(변기석)만이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두 작품 모두 제각각 흠을 지니고 있으나 가장 단막극의 특성에 근접한 작품을 당선작으로 밀지 않을 수 없었다. '별당 막국수'는 따뜻한 일상의 풍경을 통한 낙관적 희망이 가슴에 와 닿았으나, 극적 응축의 미비로 긴장감을 살리지 못한 것이 가장 큰 흠이었다.
결국 상징적인 극적 대사와 시적인 리듬으로 살아감의 애잔한 슬픔을 아름답게 형상화한 '물을 꼭 내려주세요'가 당선의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이 작품은 시적인 상상력의 좋은 연출가를 만난다면 무대 위에서 보석처럼 빛날 것이다.
절제된 상징적 언어,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적인 리듬의 구성, 무엇보다도 시대와 인생의 핵심을 관조하는 주제의식만이 좋은 희곡의 필수 요소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 이전글2009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소설/김성문 09.01.19
- 다음글2009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평론/강희철 09.01.1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