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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박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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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없다 / 박송이
우리의 책장에는 한 번도 펼치지 않은 책이 빽빽이 꽂혀 있다
15층 베란다 창을 뚫고 온 겨울 햇살
이 창 안과 저 창 밖을 통과하는 새들의 발자국
우리는 모든 얼굴에게 부끄러웠다
난간에 기대지 말 것
애당초 낭떠러지에 오르지 말 것
바람이 불었고
낙엽이 이리저리 굴러 다녔다
우리는 우리의 가면을 갖지 못한 채
알몸으로 동동 떨었다
지구가 돌고
어쩐지 우리는 우리의
눈을 마주보지 않으면서
체위를 어지럽게 바꿀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멀미를 조금씩 앓을 뿐
지구본에 당장 한 점으로
우리는 우리를 콕 찍는다
이 점은 유일한 우리의 점
우리가 읽은 구절에 누군가 똑같은 색깔로 밑줄을 그었다
새들은
위로 위로
날아
우리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새들의 발자국에 미안했다
미끄럼틀을 타는 동안
우리의 컬러링을 끝까지 듣는 동안
알몸이
둥글게 둥글게
아침을 입는 동안
우리의 놀이터에
정작 우리만 있다
당선소감
나는 작년 이맘 때 대학 노트에 이렇게 쓴 적 있다. '숲은 만져 본 적 없는 울음의 낯선 천국이다. 숲은 헐벗은 동공이다. 그리고 메마른 바람이 지나치는 언젠가 살아본 그만그만한 표정이다.' 나는 자주 숲길에 들어섰고 숲에 난 길을 따라 무작정 걷곤 했다. 숲은 늘 낯설고 평온했다.
종종 숲에서 길을 잃었고 숲길을 한참 걷다보면 어느새 어둠이었다. 숲 어딘가에 퍼질러 한나절 먹먹하게 울고 싶다가도 간혹 숨이 턱턱 막혀왔기에 느리고 길게 호흡해야만 했다. 내가 한 때 메마른 심장으로 숲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싶었음을 고백한다.
노트에 나를 적는 밤이 짧아지기를 바란다. 나 아닌 다른 여행자의 숲길에서 나 아닌 무수한 여행자들에게 말 걸 수 있는 밤이 오래 찾아 들기를 바란다. 이것은 내가 여태 사랑해 왔던 모든 사랑을 되찾는 작업이 아니라 내가 앞으로 마주할 모든 사랑을 준비하는 과정임을 안다.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먼 거리에서 서로의 여행과 마주하는 것일까. 나는 여전히 숲길을 따라 걷는 중이다. 내가 무심결에 지나쳤을 숲길 사이로 한 무더기의 빛이 쏟아져 내린다. 나는 내 사랑에 대답해야 할 의무를 갖고 싶다. 나는 빛의 표정으로 또 다시 살고 싶어진다.
한남대 국어국문학과 신익호 지도교수님과 여러 교수님들께, 문예창작학과 김완하 교수님을 비롯한 교수님들께,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지만 멀찌감치 어떤 절실한 힘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는 모든 애인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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