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종권의 서정시 읽기
최향란 시/호박 한 덩이/독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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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향란
여수 출생. 2008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밖엔 비, 안엔 달.
최향란 시/호박 한 덩이
굴러들어온 호박 한 덩이 덥썩 받은 지 일 년,
누렇게 데굴데굴 굴러 내게로 온 녀석 방치하다가
이제야 바라본다.
죽이라도 쑤자고 들어 올리는데
아뿔싸, 반 쯤 벌어진 밑둥에서 기다림이 무작정 쏟아진다.
쏟아져 내린 호박 속 오글오글 벌레가 기생하고 있는데
내 욕심도 오글오글 함께 기생하고 있었구나.
아, 저렇게 움츠리고 애써 살고 있었구나.
나도 모르게 손 뻗어 기다림 길었던 씨앗을 거둔다.
딸려오는 벌레를 툭 털어내는데 왠지 울컥하다.
벌레와 내가 눈이라도 마주칠까봐
슬며시 흙으로 덮어주며 내 욕심도 덮어지거라.
이제야 깨어나는 호박 한 덩이
버려야할 것을 버린 호박과 나 가벼워진다.
-최향란 시집 <밖엔 비, 안엔 달>에서
감상
비우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다. 비우고 나면 다시 가득 채울 수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쉽사리 비우지 못한다. 버릴 것에 대한 연민도 작지 않아서일 것이다. 다시 채울 일에 대한 두려움도 있어서일 것이다. 그런데 용기를 내어 비우고 나면 이토록 시원해질 수도 있나보다. 버리고 나니 애틋하게 여겼던 것들이 마치 벌레처럼 보이기도 하나보다. 손바닥 뒤집기는 쉬워도 마음 바꾸기는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손바닥 뒤집듯이 마음을 바꿀 수 있는 지혜도 필요하다. 호박 한 덩이로 돌아온 시인의 겸허한 반성은 새로운 출발의 건강한 에너지를 얼마든지 짐작하게 한다. 내 속에 가득한 것은 진정 소중하고 가치 있는 그 무엇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미 썩을 대로 썩어 당장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비워도 찰진 알맹이는 영혼의 밑바닥에 깊숙이 가라앉아 있게 된다. 그리하여 과감히 비우고 난 빈 자리에 새로운 것들을 차곡차곡 채우는 향도가 될 것이다. 비우는 일에 겁내지 말자./장종권(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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