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종권의 서정시 읽기
앵두가 뒹굴면/김영남 시(독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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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두가 뒹굴면
김영남/199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정동진역 외.
잎 뒤 숨어 있는 사연들
일러바칠 곳 없는 동네
우물가 집 뒤란의 누나 방에
굴러다니는 피임약이여, 그걸
영양제로 주워 먹고 건강한 오늘날이여
―김영남 시집 가을 파로호에서
감상/우리들의 누나는 꽃 중의 꽃이다. 한국인들의 사춘기에 누나는 가장 격렬하게 작용한다. 아침마다 어머니의 정성으로 깨끗하게 빨고 풀물 들여 빳빳해진 교복 위의 하얀 칼라는 지난시절 사춘기 소년들의 가슴을 시리도록 설레게 만들었다. 밤새도록 봉숭아꽃잎을 싸매둔 누나의 손톱 역시 아침이면 황홀한 빛깔로 타올라 그 손톱 다시 보기 위해 밤늦도록 학교에서 돌아오는 누나를 기다리기도 했다. 누나가 벗어둔 양말 한 켤레 장갑 한 쪽에서도 우리는 누나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야릇한 향기를 맡고 자랐으며, 마당 한 가운데의 빨래줄에도 잘 걸리지 않는 누나의 속옷들로부터 우리는 여성의 존재를 알게 모르게 느껴가기 시작했다. 들일로 바쁜 어머니 대신 우리를 지키고 보살핀 손길 또한 누나의 따뜻한 손길이었다. 등하교길에 변함없이 우리의 손을 잡아준 이도 누나였다. 누나야말로 우리가 만난 어머니 외의 최초의 여성이었으며, 그 누나로부터 우리는 여성을 배웠고, 만나는 여성들마다에서 누나의 향기와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누나가 없는 사람은 사촌이나 이종이, 그도 없으면 고향동네의 푸근한 이웃 누나가 그 역할을 대신해주었다. 사춘기 소년의 눈과 귀는 오로지 누나의 하는 양에 집중이 되었으니 누나에 대한 궁금증과 신비로움은 극에 달했으며 그 가슴으로 우리는 여성들을 만나고 사랑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세상 모든 남자들의 가슴에서 타오르는 불이 누나로 인해 지펴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동시에 여성들은 모든 여성들에게 누나라는 이미지가 덧붙여져 있음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앵두가 익으면 가슴에 불이 붙는다. 앵두가 뒹굴면 몸살이 나게 되고, 그 잘 익은 앵두 누군가가 따가는 날에 우리는 세상을 잃는 듯한 충격에 빠지기도 한다. 누나로 인해 남성으로 거듭 나게 된 대한민국 남성의 한 명으로서 오늘도 가슴을 아리게 하는 누나의 비밀스러운 여성성에 갈채를 보낸다. 우리의 모든 여성들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그 시작이 누나로부터였으며, 그 끝 또한 누나일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장종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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