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종권의 서정시 읽기
고향/장종권 시(리토피아문학회 사화집 제9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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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장종권 시/1985년 현대시학 추천완료. 시집 아산호 가는 길, 꽃이 그냥 꽃인 날에 외. 장편소설 순애. 창작집 자장암의 금개구리. 인천문학상, 성균문학상 수상. 리토피아 주간.
십 년 넘은 고향 밤중에 찾아갔다가
도둑처럼 쫓기어 돌아왔습니다
어둠 속에 달라진 길들이 발끝에 자꾸 걸렸습니다
십 년 전에 넘보던 담장 너머의 그 아이
십 년 후에 용케 만나 악다구니로 사랑했습니다
잃어버린 우리들의 고향이 분명
거기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생활이 죄가 된 우리 서로
마음에도 없는 원수를 샀습니다
떠난 자는 떠난 자들끼리 아픈 자는 아픈 자들끼리
또다시 서로 떠나고 서로 아프게 한 것입니다
십 년 넘은 고향 밤중에 찾아갔다가
도둑처럼 쫓기어 쫓기어 돌아왔습니다
웬일인지 밝은 달도 숨어버리고
웬일인지 정겨운 토담길도 사라져버리고
글쎄요, 어느 사이 나는 꿈속에서처럼
아프리카 어디 토인 마을을 침입한
백인이 되어버렸습니다
감상/시는 즐거움을 축적하기 위하여 읽는 것은 아니다. 즐거운 일을 찾는다면 굳이 시가 아니어도 세상에는 충분히 많다. 그래서 나는 시 안에서의 ‘그러나’를 환영한다. 앞의 내용과 뒤의 내용이 상반되는 전복의 기점이 바로 ‘그러나’이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난 곳, ‘고향’을 우리는 정상 범위 안에 묻어두려 한다. 따듯하고 푸근한 이미지 밖으로 노출시키지 않은 채 고향을 박제 시킨다.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는 일상성을 잠시 떠나는 일이다. ‘그러나’로 일상을 비틀 수 있는 것이다. ‘고향’에는 분명 ‘잃어버린 우리들의 고향’ 이 있을 것만 같다, ‘악다구니처럼’ 사랑한 나의 첫사랑도 다소곳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고향으로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밝은 달도 숨어버리고’ ‘정겨운 토담길도 사라져 버리고’ 이내 나는 이방인이 되고 만다. 비극적 시선이 관통되어진다. 시인은 모든 게 달라져 있을 고향을 예감이라도 한 듯 ‘밤중’에 고향을 찾는다. 밤중이니 나와 있는 이, 반겨주는 이, 하나 없다. 밝은 달도 숨어버린 고향은 타향보다 낯설기만 하다. 이 낯선 밤중에 시인은 “정상범위” 안에 머물던 고향을 발견한다. 그리고 “불편”을 시도한다. 고향을 찾은 나를 ‘아프리카 토인 마을을 침입한 백인’으로 투영시키고, ‘도둑처럼 쫓기고 쫓기게’ 만든다. 어떠한가, 생각만 해도 “불편”하지 않는가. 이때 비로소 박제되었던 ‘고향’이 살아나는 것이다./김보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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