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종권의 서정시 읽기
향기로운 배꼽/길상호 시(리토피아문학회 사화집 제9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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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배꼽
길상호 시/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모르는 척. 현대시동인상, 이육사문학상(신인상) 수상.
흰 꽃잎 떨어진 자리
탯줄을 끊고 난 흉터가
사과에게도 있다
입으로 나무의 꼭지를 물고
숨차게 빠는 동안
반대편 배꼽은 꼭꼭 닫고
몸을 채우던 열매,
가쁜 숨도 빠져 나갈 길 없어
붉게 익었던 사과 한 알,
멧새들이 몰려와
부리로 톡톡 두드리다가
사과의 배꼽,
긴 인연의 끈을 물고
포로롱 날아간다
감상/배꼽은 탯줄로 연결되어 있던 자리이다. 모체로부터 양분을 공급받던 기관이 탄생 후에는 조그맣게 오므라든다. 그리고 배 위에 작은 흔적으로 남는다. 배꼽은 탯줄의 흉터이자 모체로부터 분리되어 첫 울음을 터트린 자리이다. 또한 까맣게 때가 앉기도 하고 모양새도 비슷비슷한 별 특색 없는 신체기관 중 일부이다. 이런 배꼽에도 향기가 있을까, 시인은 향기로운 배꼽이 있다고 말한다. 꽃이 낳은 생명. 열매가 바로 그것이다. 사과의 흰 꽃잎이 떨어지고 꽃이 진 자리에 남은 작은 열매를 시인은 향기로운 배꼽에 비유한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열매는 나무의 영양분을 받으며 자라나고 몸이 채워지면 금세 붉은 사과가 된다. 작은 열매가 몸이 채워지는 동안 나무꼭지와의 긴 인연을 우리는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멧새들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멀리서 날아와 무심히 부리로 톡 건드려 보고는 그저 사과의 배꼽을 물고는 포로롱 날아갈 뿐이니 긴 인연의 끈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멧새에게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향기로운 배꼽에는 항상 생명이 들어있다. 그리고 꽃이 진 자리에는 동글동글 작은 열매가 열린다. 날아가 버린 인연을 아쉬워하기도 전에 인연은 그렇게 또 다시 축적되고 있는 것이다./김보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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