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종권의 서정시 읽기
지문/권혁웅 시(리토피아문학회 사화집 제9집)
페이지 정보

본문
지문
권혁웅/1967년 충주 출생. 1997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황금나무 아래서.
네가 만질 때마다 내 몸에선 회오리바람이 인다 온몸의 돌기들이 초여름 도움닫기 하는 담쟁이처럼 일제히 네게로 건너뛴다 내 손등에 돋은 葉脈은 구석구석을 훑는 네 손의 기억, 혹은 구불구불 흘러간 네 손의 사본이다 이 모래땅을 달구는 대류의 행로를 기록하느라 저 담쟁이에서도 잎이 돋고 그늘이 번지고 또 잎이 지곤 하는 것이다
감상/“골짜기의 여신은 영원히 죽지 않고 만물을 창조해 낸다. 이를 현빈玄牝이라 한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이 말은 대학시절, 장석남 교수님과 권혁웅 교수님께서 지어준 시 창작 모임명이다. 그리고 현빈의 첫 번째 창작집 찬조시로 위에 시 ‘지문’을 실어주셨다. ‘도움닫기 하는 담쟁이처럼’의 밑줄을 긋고 한 참 바라본 기억이 난다. 손가락 끝마디 안쪽에 있는 살갗의 무늬 또는, 그것이 남기고간 흔적 ‘지문’은 그렇게 시인의 창조력에 의해서 손 밖으로 솟구쳐 오른다. 논리의 틀을 지키고 있는 시는 몽환적이지 않다. 그 대신 논리에 의해 제압된 몽환은 잎의 양분과 수분의 통로가 되어주는 ‘엽맥’처럼 시 안에서 지성을 갖추고 구불구불 흘러간다. 나의 몸은 ‘네가 만질 때 마다 회오리바람이 인다.’ 네가 다녀간 흔적은 잃어버릴래야 잃을 수 없는 ‘지문’이 된다. 하지만 그것 또한, 원시의 기억은 아니다. 너는 내게 ‘사본’의 기억인 것이다. 네가 닿을 때마다 먼지와 모래알로 이루어진 공기의 소용돌이가 내 몸에서 일어나고 ‘회오리바람’은 언제든지 용오름이 될 수 있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 ‘회오리바람’이 토네이도가 될 수도 있는, 너는 내게 그런 존재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모래땅’에 있다. ‘모래땅’은 모래와 바람이 전부인 영락없는 황무지이다. ‘도움닫기하는 담쟁이처럼’ 네게 건너 뛰어간 ‘온몸의 돌기들’ 은 담쟁이 속 잎 처럼 ‘모래땅을 달구는 대류의 행로를 기록하느라’ 다시 한 번 도움닫기를 한다. ‘잎이 돋고 그늘이 번지고 또 잎이 지곤 하는’ 사이 기억은 구불구불 흘러가 네 손의 원본을 찾아 올 것이다./김보숙
- 이전글산/김경훈 시(독서신문) 12.01.26
- 다음글향기로운 배꼽/길상호 시(리토피아문학회 사화집 제9집) 12.01.1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