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종권의 서정시 읽기
선운사 동백/문인수 시(독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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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동백
너하고 나하고 그해 늦봄 저물녘에 선운사엘 왔었네.
나는 혼자 또 이 가을에 선운사엘 왔네.
동백 없어도 동백에 끌렸겠지,
피거나 지거나 목청 붉은 비린내여.
필 때 화들짝 뛰어오른 꽃, 질 때 거침없이 뛰어내린 꽃,
그 반동에 놀랐네. 친구여,
너는 죽어
나는 살아
하늘에, 따에 찧은 엉덩방아를 기억하네, 돌아보네.
-문인수 시집 ‘적막 소리’에서
문인수
1945년 경북 상주 출생. 1985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뿔’, ‘홰치는 산’, ‘동강의 높은 새’, ‘쉬!’, ‘배꼽’ 외. 김달진문학상, 노작문학상, 미당문학상 수상.
감상
나는 아름다운 꽃의 세련되고 감미로운 향기를 잘 맡지 못한다. 그 향기에 익숙하지도 않고, 어울리지도 않고, 영 끌리지도 않는다. 내가 가장 친숙하고 또한 경이롭게 받아들이는 향기는 어린 시절 냇가에서 맡던 비릿한 풀냄새이다. 토담 밑에서 도무지 죽지 않고 해마다 푸르게 솟아나는 시누대의 강렬한 풀비린내이다. 사람들은 어느새 기기묘묘한 향기들을 위해 온갖 화초들을 집안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 비릿한 풀냄새가 거의 섞여 있지 않다. 나는 이 비릿한 풀냄새를 야생인 채로, 잡초인 채로, 버려진 채로, 그저 홀로 신명나는 생명력을 뿜어내며 피워내는 태초의 원시적 냄새로 이해한다. 그래서 작품 속의 ‘피거나 지거나 목청 붉은 비린내’도 이런 냄새이려니 하고 받아들인다. 피거나 지거나 무슨 상관이랴, 죽는 날까지 사라지지 않는 피 속의 독한 냄새 이미 깊숙이 배어 시도 때도 없이 비린내로 피고 있으니. 동백을 보려고 선운사엘 가느냐. 붉게 핀 동백꽃 보려고 늦은 봄에 또는 가을에 선운사엘 가느냐. 아니다. 동백꽃이 품어대는 목청 붉은 비린내가 마냥 부르기 때문이다. 이제는 인연이 다했어도 그 비린내가 죽는 날까지 그립고 또 그립기 때문이다. 동백이야 피거나 말거나 선운사 동백숲에 가득한 동백꽃의 풀 비린내는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너와 내가 동백꽃 그늘 아래에서 하늘에 따에 찧었던 엉덩방아가 아직도 너무나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완숙한 향기는 원시적 에너지가 아니다. 이미 정점을 돌아서도 한참이나 돌아버린 별 볼 일 없고 보잘 것 없는 냄새일 뿐이다./장종권(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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