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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을 추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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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감치 방패 샀다 비밀병기는 꼬리에 꼬리 물고 이어져 소담스럽게 풍성해졌다 풍성한 머리카락 한껏 치어들자 만성체증 가라앉은 속처럼 말들 꾸역꾸역 쏟아져 들어왔다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머리 감고 먹잇감 던졌다 말들은 꾸덕꾸덕 기어나가 안개가 되었다
먹잇감 찾아 인간의 동네 기웃대는 멧돼지 가족들처럼 얕은 바다에서 안개 수시로 출몰했다 때로 내장산 단풍처럼 빨갛게 물든 안개 온 동네 뒤덮었다 기어나간 말들은 멧돼지 가족들의 끈질긴 소풍놀이 먹잇감이 되어 어슬프게나마 일군 산밭 그 때마다 작살났다
태생의 비밀은 영원한 비밀이 될 수 없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들처럼 때가 되자 풍성의 주춧돌 숭숭 빠져나갔다 때마다 던진 먹잇감에 폐허가 된 산밭처럼 소담스럽던 풍성은 곧 화마 지나간 들판이 되었다
속 다 드러낸 풍성의 얼굴 하얗게 질려갔다 하얗게 질린 들판에 새싹들 꼬물꼬물 틔기도 했지만 솟구치기에는 힘 턱없이 부족해 무릎 꿇고 꾸벅꾸벅 졸다 가뭇없이 사라졌다
자주 목이 말랐다 물통을 열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머리카락들 물통바닥에서 수초처럼 흐느적거렸다 맛 볼 겨를 애써 지우고 바닥 기어오르는 물머리칼 잔치국수 먹듯 후루룩 들이켰다 불안한 잔치 이어지고 발끝에 엉킨 물머리칼 하늘하늘거렸다
다시 바람 언뜻 스치고 머리카락 우수수 떨어졌다 수채구멍 완전히 덮어버린 뿌리들 보며 달아나지 않고 남은 것들 여전 저렇게 많았던가 꿈속에서도 의아했다 선잠의 시간들 지나고 수도꼭지에 머리 들이미니 뿌리들의 빈자리 거추장스러웠다 눈에 밟히는 뿌리들, 또한 끔찍했다
머리 잘랐다 잘린 머리카락 꺽꺽 체한 울음꽃 송이송이 매달고 거머리처럼 핏줄 타고 올라와 바람목 잡아챘다 머리 잘랐다 울음꽃 차마 자르지 못했다 바람목 잘랐다 기어오를 길 잃은 울음꽃 마침내 뚝! 떨어졌다 뚝! 떨어지는 탄식 땅끝처럼 깊었다
댓글목록

김효선님의 댓글
김효선 작성일머리카락...그 한가닥으로도 충분히 하루종일 심기를 불편하게 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죠...머리를 감다 자주 우수수 빠져나가는 머리카락때문에 우울했던 날들이 많았었는데...그렇게 수챗구멍을 막고 세월의 뿌리만큼 잘려나가기도 하는 그것들....시가 좋아서 감히 어떤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그냥 좋다고 하기엔 뭔가 너무나 부족하고...감탄사를 갖다 붙이려니 유치하기 짝이 없고^^ 많은 생각들로 가슴이 벅찼노라고만...

장성혜님의 댓글
장성혜 작성일이상하네요. 김효선 시인이 가슴 벅차게 좋다는 글을 읽고 다시 읽으니 갑자기 더 좋아 보인는 것은? 머리카락을 저도 뿌리라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근심의 뿌리. 그래서 늘 짧게 자르곤 했었지요. 빠진 머리카락이 바라보는 절절한 느낌이 좋아요. 빠지고 잘라도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머리카락. 엉킨 마음의 뿌리.남시인님 들끓는 가슴에서 계속 좋은 시 머리카락처럼 많이 뽑아내시길...

남태식님의 댓글
남태식 작성일
1월부터 한 이야기 풀어내려고 자료를 모으고 있는데 반년이 다 지나가도록 첫 줄을 풀지 못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실타래처럼 엉킨 생각들도 한 줄만 제대로 풀리면 정말 술술 풀리는데 그 한 줄 풀기가 참 어렵습니다.<br />
머리카락에 관심 가져주신 김효선 시인님, 장성혜 시인님, 그 외 회원님들 모두 고맙습니다. <br />
제 안에서 머리카락이 빠져 나갔는데, 이제 머리카락에 빠진 저를 빼내어야 할 시간인 듯 합니다. 쑤우욱!!!하고요.<b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