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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인 7인선 <다층 2006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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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층 가을호에 실린 시 3편입니다.
부끄럽지만 올립니다.
< 클림트를 읽다 >
비가 내리고 있어, 구스타프 클림트의 <입맞춤>을 보다가, 양귀비꽃 가득 핀 들판, 시베리아 호랑이가 죽어가는 화면을 보다가, 창 밖 가득 내리는 비, 눈 쌓인 들판 올가미에 걸려있는 호랑이, 빗소리가 주파수에 맞춰 내리고 있어, 사랑은 꼭 한 이불 속에 누워 있어야 하는 걸까? 붉은 색의 햇살은 양귀비 같이 저물어 가는데, 겨울엔 잠 좀 실컷 자고 싶은데, 사슴들은 다 어디로 달아난 걸까, 다시 우기(雨期)가 찾아온 걸까. 종일 비만 내리고, 그 겨울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고, 사냥개들이 떼를 지어 달려들고, 붉은 피가 몽글몽글 쏟아지고, 사랑이 그렇게 빨리 내 곁을 떠날 줄은 몰랐어, 잊혀지는 건 참 멋진 물보라야, 비가 뭉글뭉글 내리고 있는데, 들판은 온통 물보라야. 슬픈 눈빛으로 저무는 우기의 하오(下午).
< 서른 다섯 마리의 뱀 >
서른 다섯의 저녁 식사는
눅눅한 벽지를 타고 흐르는 습기처럼 스며든다.
동공이 풀린 채 누워있는 고등어,
살점을 뜯어낸 자국이 벽에 걸린 못자국처럼 파인다.
입을 열지 않아 그 무게를 가늠할 수 없는 침묵.
기억이 물방울을 만든다, 굴러가다 멈춰서는,
저녁 식사는 늘 그렇게 또르르 또르르
어머니와 아버지를 향해 스며들다 멈춰선다.
한 세월 스르륵 옷을 벗고 입안으로 굴러드는 밥알들,
물에 풀어놓으면 또 다시 밥알들이
길을 가르쳐 줄 것이다.
내가 지나온 길엔 늘 똬리를 튼 뱀이 허물을 벗고 있다.
< 빙하를 꿈꾸는 K씨 >
한 평생 바닥에 붙어사는 새 한 마리,
꺼억꺼억 오래된 관절을 풀며
접어둔 잡지 한 귀퉁이의 미끈한 허벅지를 어루만진다.
바닥에 들러붙은 똥개처럼 눈만 꿈벅꿈벅
밤새 시간의 프로펠러를 거꾸로 돌리며
무료한 복숭아뼈 너머 발 끝에 툭툭 떨어지는
가족들의 빛 바랜 바람을 건드려본다.
어느 새 바닥에서 다시 바닥으로
자고 일어나면 방바닥엔 항상
절망처럼 누룩곰팡이가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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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장성혜님의 댓글
장성혜 작성일
제주에 있어서 그런가요? <br />
김 시인님의 시에서는 남국의 색채와 내면의 리듬이 읽혀져 좋아요.<br />
자기만의 목소리로 좋은 글 계속 많이 쓰세요.<br />
바다 건너 있는 것들은 모두 그리움이네요.

유정임님의 댓글
유정임 작성일이시 읽으니까 잊혀지려했던 효선씨 얼굴 또렷해집니다. 여전하군요. 세편의 시 잘 읽고 갑니다.

남태식님의 댓글
남태식 작성일
그렇지요, 처음엔 그저 내리는 비였는데, 안개처럼 흐릿하게 아득하게 다가오는 기억이었는데, 오래도록 내리는 비를 보고 있으면 잊혀지지 않는(잊지 못하는) 기억은 주파수처럼 내리는 비를 타고 재생되고 또 반복되어 가슴에 스며들지요, 가슴에 스며들어 몽글몽글 마침내 피를 쏟아내기도 하지요, 마음만 변하지 않으면 변하지 않는 게 사랑이라고 믿었던가요, 몸 떠나면 마음도 함께 떠난다는 걸 알았을 때는 뱀 서른마리, 서른다섯마리 쯤 내 온 몸에 또아리 틀고 있지는 않던지요, 마침내 비는 물보라처럼 뭉글뭉글 끓다가 거품처럼 사라지는데, 아아, 어쩌나요, 사라지며 남은 멍우리도 시간이 지나니 다시 뭉글뭉글 뭉쳐올라 마침내 몽글몽글 몽오리지더니 꽃이 또 되는군요, 회억해서 피는 꽃, 시가 되는군요, 시가 되었군요.<br />
딸내미 병실에서 치료받는 시간에 병실 복도에 앉아 '클림트를 읽다'를 읽으며 혼자 감상에 빠져 비처럼 음악처럼 이런저런 생각에 빠졌었는데, 순간 비가 내리는 착각 속에서 빠졌던 생각들을 생각나는대로 적어봤습니다. 시 너무너무 잘 읽었습니다.

김효선님의 댓글
김효선 작성일
따님 아픈 건 어떻게 나았는지 모르겠네요...치료받는 시간에 제 시를 읽었다고 하니...부끄러우면서도 한 편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많이 아픈 게 아니라서 그랬겠지...하는 마음으로요...실은 제가 비 오는 날을 너무 좋아해서요...전 원래 음지식물이었거든요^^ 지금 쓰고 있는 시가 그래요...서른 다섯의 연작으로 <내가 음지였을 때...>라는 시를 쓰고 있어요...아직 완성되진 못했지만요^^ 제 시 잘 읽어줘서 너무너무 고맙습니다.<br />
장성혜 시인 그리고 유정임 시인....너무너무 보고 싶네요...저도 마찬가지로 바다 건너 있는 것들은<br />
모두 그리움입니다...건강하세요!!

남태식님의 댓글
남태식 작성일
병원이라서 많이 아픈 거라고 생각하셨나 보네요. 아프지는 않아요. 정기적인 치료라서 저는 늘 병원 복도에서 책을 읽다가 졸다가 하면서 기다리지요.<br />
효선 시인의 시 정말 좋았습니다. 사실은 서른다섯마리의 뱀에 더 눈길을 주고 있었는데 순간 클림트로 날아거버렸지요. 무언가가 나를 사로잡은 건데 그게 무언지 처음엔 알았는데 자꾸 읽다보니 사라져버렸어요. 한평생 바닥에 붙어사는 새 한 마리도 오래 제 눈길을 붙잡았는데 역시 클림트가 날름해벌렸지요. 이 시의 감동이 첫 줄을 쓰지 못해 오래 메모하던 한 시의 첫 줄을 만들어주었다는 말 한 마디 더 하고 이만 씁니다.<br />
건필하시고, 이 가을에도 좋은 작품 많이 생산하시기를 빌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