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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와 소녀(사화집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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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승기
댓글 0건 조회 2,000회 작성일 05-11-23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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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대와 소녀 >
                             김   승  기

  꼬불거리는 노루 재를 단숨에 넘는다. 아이들과 집사람, 시합이나 하듯 번갈아 노래가 한창이다. 덩달아 나도 흥얼거리다 보니 어느새 불영계곡. 조금 더 차를 달리니 동해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야! 바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같이 합창을 한다. 이번 가족 여행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올해는 우리 식구 중에 삼재가 셋이나 된다고 연초부터 어른들이 걱정을 하시더니 그 보란 듯이 딸아이가 학교에서 놀다가 팔이 골절이 되었다. 딸아이가 다 나을 만 하니, 또 내가 운동을 하다 다리를 다쳐 우리 집 하루하루가 절룩거렸다. 다시 또 집사람까지 손목에 카팔터널증후군이 왔고, 연이은 병치레 끝에 이제야 겨우 시간을 내다보니 애들도 집사람도 모두가 신이 나 있다.
  드디어 죽변의 봉평 해수욕장. 선약한 모텔에 여장을 풀고 곧장 바다로 달려간다. 탁 트여 오는 가슴 위로 파도가 밀려와 마중을 한다. 아이들과 집사람은 벌써 부서진 파도의 흰 거품에 발을 적시며 깔깔거린다. 나는 백사장 기슭에 덜퍼덕 주저앉는다. 즐거워하는 그 모양을 바라보며 정말 오랜만에 아무 걱정 없이 미소를 상쾌한 바람결에 실어 본다.
  그 뜨겁던 햇살이 조금 옅어지면서 반짝거리던 바다가 조금은 검은빛이 돌기 시작한다. 작은 배들이 집을 찾아 드는 새들처럼 항구를 향해 종종 걸음을 하고 갈매기들이 장난을 치며 그 뒤를 쫓아간다. 바라보는 바다의 왼쪽에 있는 죽변항 뒷산 위엔 노을이 장관이다. 노을이 슬금슬금 내려와 바닷물로 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방파제 끝머리에 그림같이 서 있는 하얀 등대, 그 등대를 보는 순간 불현듯 한 생각이 내 뇌리를 스치면서 한 소녀와 청년의 얼굴이 그 위로 클로즈업되어 선다.

  벌써 육년 전인가. 이 곳 죽변에서 두어 시간 거리에 있는 한 작은 도시의 모 병원, 그곳에서 내가 정신과 과장으로 있을 때 일이다. 어느 가을 날 스무 살 가량의 훤칠한 키의 조용해 보이는 청년과 50대 여자 한 분이 외래를 방문했다.
  여자 분은 아주 초조하고 안절부절 했으나 청년은 전혀 무관한 듯 태연하게만 보였다. 여자 분이 서둘러 말을 시작했다. 같이 온 청년은 자신의 아들로,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다가 열흘만인 어제서야 집에 돌아 왔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가족도 몰라보고 어머니인 자신도 어머니라 하니 그저 그런가 보다 하는 식이라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여인은 울먹였다.
  안정을 시키고 좀 더 자세히 차근차근 이야기를 해보라고 하니 그 말인즉, 청년은 현재 울산에서 자취를 하면서 재수를 하고 있었는데 10일전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다고 했다. 갈 만한 곳은 다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어서 재수 학원을 찾아가 아들의 가출 전 행적을 물으니 친하게 지내던 한 여학생이 있었으니 그녀에게 물어 보라고 했다. 그 여학생을 만났고 그녀로부터 그의 가출 전날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여학생은 울진군 죽변이 집으로, 좀 떨어진 울진 읍이 집인 청년과는 같은 고향이었다. 객지에서 만난 고향 사람이기도 해 두 사람은 항상 같이 다닐 정도로 아주 친하게 지냈다. 그녀는 청년을 남성이라기보다는 친구로만 생각했는데 청년은 그렇지 않았고 여인으로서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어 했다. 여학생은 그런 그가 점점 부담스러워져서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밝혀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업이 끝난 후에 그를 불러내 둘이 자주 가는 호프집에서 만났다. 자신은 청년을 남성으로 생각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며 좋은 친구로 지내자고 했다. 그녀의 말에 청년은 심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았고, 청년은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술을 마신 뒤 헤어졌는데, 그 다음 날부터 학원에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청년은 10일째 되는 날 저녁쯤에야 초췌하고 지친 모습으로 울진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보고도 인사도 없이 멍하니 꼭 모르는 남처럼 굴고 태도가 이상했다. 그런 그의 행동을 처음에는 꾸짖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정신에 이상이 있는 것 같아 병원에 데리고 왔다고 했다. 외래로는 치료협조도 잘 될 것 같지 않고 병원도 그의 집과 거리가 멀어서 관찰과 확실한 진단을 위해 나는 그를 입원시켰다.
  입원한 청년은 말없이 좀 우울한 표정으로 지냈고 갑갑하다며 퇴원시켜 달라고 했다. 입원 당일과 그 다음날 아침, 두 차례에 걸쳐 면담을 했는데 그가 말을 하지 않으려 해 면담은 아주 어렵게 진행되었다. 청년은 날짜나 시간, 일상적인 상식들은 기억을 했으나 행방불명 전날까지의 자신과 관계 된 모든 인적 사항을 기억하지 못했다.
  행방불명된 10일 동안의 행적을 청년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아침에 자취방에서 깨어나니 속이 메스껍고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전날 술을 많이 마셨나 본데 어디서, 누구와 마셨는지 통 기억이 나지 않았으며 자기가 누군지,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더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고 하얀 등대와 누구인지 모를 한 소녀의 얼굴만이 자꾸 떠올랐다. 그는 당혹스러웠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편했다. 그는 자신이 누군가를 찾아 나섰고, 수첩에 적혀있는 주소들을 하나하나 방문 했다. 그래서 행방불명된 그 10일 동안 순천, 서울 등 열 몇 군데를 헤매 다녔다.
  학원에서 친하게 지내던 그 소녀에 대해 물으니, 그는 전혀 기억을 못했고 오히려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면담 중 그는 자신의 기억상실증에 대해 답답해 하기는 했으나 전혀 걱정하는 빛은 없었다.
  입원 이틀째 되는 날 아버지라는 사람이 찾아와 다짜고짜 환자 면회를 요청했다. 환자의 적응을 위해 2주까지는 규칙상 면회가 안 된다고 했으나 외항 선원인 그는 한 번 출항하면 몇 달 후에나 집에 올 수 있다며 꼭 아들을 만나야겠다고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는 면회를 허락하고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걱정하던 바와 같이 아들을 만나 본 아버지는 아들이 ‘퇴원시켜 달란다’며 다짜고짜 퇴원을 요구했다. 그는 설득이 안 되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환자를 외래로 계속 치료하기로 하고 퇴원 시켰다.
  그 후 청년은 외래를 한 번만 방문 했을 뿐, 병원에 오기를 거부해 청년의 어머니만이 병원을 몇 번 더 방문했다. 그의 어머니는 청년이 집에서 남처럼 구는 행동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일기처럼 매번 적어 가지고 왔다. 그나마 그녀의 방문마저 끊겼고 그 후 청년이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을 알 수 없었다.

   한 소녀, 아니 한 여인의 가슴속으로 애절히 다가가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던 그! 그런 자신이 저주스러웠고, 그는 그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차라리 모두 다 지워 버리고 싶었던 것 같다. 다가서면 도망가는 그 안타까움, 그 아픔에 마침내 연처럼 뚝 끊어져 울산에서 울진 읍까지..... 그는 모두 지워 버렸으나 소녀와 그가 살고 있는 죽변항 등대는 지울 수 없었고, 감정과 현실의 연결이 끊어진 기억의 섬으로 소녀와 등대를 남긴 것이다. 혹시 그 청년도 내가 앉은 이 자리에 그녀와 함께 앉은 적이 있지 않았을까?
  아빠! 아이들이 달려와 내 어깨 위에 올라탄다. 집사람도 다가와서 뭘 그리 생각 하냐며 애들 모기 물리니 빨리 방으로 들어가자고 재촉한다. 어느새 바다에는 어둠이 깔려 있었다. 방파제 끝 등대엔 불이 들어오고 멀리 오징어 배들도 하나 둘 불을 켠다. 그래 사람도 끊어질 수 있는 거야. 혼자 중얼거리며 일어서는 나를 아이들과 집사람은 도대체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모텔로 향하는 나의 등 너머로 파도가 달려와 뭐라 주절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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