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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버드나무 숲에 들다/외 1편/시와사상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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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헐거운 구두를 벗어놓고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다.
허름한 문밖으로 행인들은 밀린 외상값처럼 지난다. 구두 딱음과 구두 수선이 엉성한 글씨로 붙어있는 가게. 등 굽은 신기료 장수가 흐미한 백열전구에 눈 비비며 헐거워진 생을 깁고 있다. 한 땀 한 땀 그의 생의 내력도 기워지고 있다. 이따금 사람들이 오가는 골목, 충혈된 가로등은 지친 마담처럼 벽에 기댄 채 졸고, 그는 여전히 삼십촉 전구를 등에 지고 있다. 누군가 너덜거리는 일상 한 켤레를 던져두고 간다. 밀린 월세처럼 자꾸만 쌓여가는 구두는. 문 밖은 여전히 굳은 표정과 너덜거리는 뒤축을 가진 사람들, 딱음과 수선을 힐끔거리며 지나간다. 스치듯 잡은 구두통 속, 문득 잡히는 생이 헐겁다. 남루한 구두에서 거리를 서성이다 돌아온 안개 혹은 눈발이 묻어오기도 하고 어둠이 묻어오기도 하는, 파도처럼 출렁이는 잦은 기침소리. 몸 밖으로 부는 바람이 다시 목에 걸려 넘어지는 늦은 밤. 그의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전등 아래서 기워지고 있다.
새들이 수선한 구두를 신고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다.
<꿈꾸지 않는 계절>
어젯밤 꿈 속에서 외친 '안 돼'는 무엇이었을까. 그녀, 복사꽃 흩날리는 저녁처럼 아련했던 연둣빛 연애는 볕 안 드는 구석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목이 마르지 않아요. 절대로 물과 햇빛은 사양하겠어요. 아침이면 새들이 내 방으로 날아오지 않게 해주세요. 허름한 국밥집 간판처럼 너덜거리는 그녀. 먼지 앉은 거미줄이 옅은 바람에도 폴폴 날려요. 빌어먹을 슬픔이란 것도 저렇게 거미줄에 붙어 있어요. 거미줄에 목을 메고 죽은 거미들이 내 목을 간지럽혀요. 그러니 제발 날 햇빛 속으로 끌어들이지 마세요. 우울한 아침 식사를 하고 싶어요.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 구름이나 던져 주고 가세요. 아, 참 냄새나는 노린재 하나쯤 놀러와도 좋겠네요. 스멀거리는 그 냄새 속으로 인주를 꾹꾹 누르며 그가 다가오던, 간밤 내가 꿈 속에서 외친 '안 돼'는 정말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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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승기님의 댓글
김승기 작성일
김효선 시인에 시를 읽으면 너무나 새로워 지루할 틈이 없다. 현실에 대상과 시적 대상에 먼 거리가 주는 충격때문이리라. 그 먼 거리는 미시적 관찰, 그 것이 불러오기한 연상들인 단단한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있다. 대상과 가장 가깝다는 직유법 조차 생경하게 만드는 재주는 정말 놀랍다. <br />
이 현실과 시적 현실에 먼 거리, 이 포즈가 계속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단지 문학적, 언어적 장치가 아닌 사고의 두깨가 필요 하리라. <br />
계속 건필 하시길 빕니다. 오늘 서울로 날아오시면 더욱 좋고요.....

김효선님의 댓글
김효선 작성일허걱~~~~글을 다 썼는데 옆에 있는 저장을 안눌렀네요 ㅠ.ㅠ 딴엔 열심히 쓴다고 썼는데...새처럼 수선한 구두를 신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나요??^^ 제 시를 너무 좋게 읽어주신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그래두 힘이 무지무지 많이 나는데요^^...정말 이 몸이 새라면 당장이라도 날아갈텐데...조만간 아마 날아갈 듯도 싶네요^^....리토피아 식구들을 그리워하는 작은 새...아직 제주는 바람만 세차게 불고 비가 내리지 않네요...장마철 보송보송한 시로 끈적함을 날려버리시길...

김재성님의 댓글
김재성 작성일잘 읽었습니다. 늘 새로운 감성을 느낍니다.

남태식님의 댓글
남태식 작성일
발에 맞지 않는 헐거운 신발을 신은 듯한, 이 더위마저도 긴장을 풀어내지 못하는 일상 속에서 헐거운 신발이든 수선한 신발이든, 꿈을 꾸든 꿈을 꾸지 않든, 신발을 신고서든 신지 않고서든, 떠니고픈 날아가고픈 벗어나고픈 마음이 꿀떡 같습니다. 가위 눌리는 일상에서 하루에도 수십번씩 중얼중얼 안돼를 외치면서도 정작 꾸어야 할 꿈은 꾸지도 않고 그저 안돼 안돼 밀쳐내기만 하는 이 답답한 일상의 시작은 어디일까요? 끝은 있나요? 혹 효선 시인은 그 시작을 알고 있나요? 이 시를 쓰던 철이 지난 이 계절에는 혹 그 끝이 보이는가요?<br />
시 읽기하면서 혼자 끊임없이 독백하던 마음의 일부를 감상문이라고 올렸습니다. <br />
건강과 건필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