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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시와반시 2004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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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떠나려고 한 적이 있었네.
몸 속을 회오리치며 갈겨대던,
중심은 어떤 깃대를 세워도 비틀거리며 넘어지고
새벽 댓바람마다 굴뚝앞에 주저앉아버린
내 유년의 반토막,
기억은 그저 바람이었네.
참을 수 없을 만큼 바람을 포식하고 돌아온 날은
저녁내내 발끝이 바닥에 닿지 않아
문 밖의 가려움을 참지 못했네.
세월의 고지서들이 다리를 저는 동안에도
아부지는 습자지처럼 얇고 가벼운 바람처럼
내 스물 두 번째 페이지에 각혈하고 있었네.
어느날 아부지의 얼굴에 거미줄이 슬기 시작하면서
바람,
바람이 나를 떠나고 있었네.
* 슬픈 전설의 22페이지/천경자 화가의 그림
<견고한 벽 그리고 무정부>
사랑은 언제나 틀 안에 잠들어 있다………………………고 믿는 남자………………가볍게 핸드백 끈을 달랑거리는 여자와 치른 사막에서의 메마른 정사(情事)…………………그게 다야?…………………하고 묻는 여자………………………남자는 젖은 풀섶 사이로 길을 만들고……………여자가 하이힐을 신고 또각거리다가 맨발로 풀섶에 뛰어 든다…………………고 툴툴대는 남자……………………의 구두를 발끝으로 툭툭 치는 여자……………………사상(思想)이 엉망인 검정구두에 물든……………………남자……………………의 눈물……………………에 달려들어 비꼬는 싸늘한 시선의 여자와……………………강물로 뛰어 든 남자………………………의 구두…………………를 뜯어먹는 피라니아……………………그림이 당신을 끌고 가는 건 어쩌면 낡은 성(城)………………………풀숲에 가려진 견고한 벽……………………그 너머………………내 무의식에 깃발을 꽂는 남자
<2004년 시와반시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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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남태식님의 댓글
남태식 작성일
장성혜 시인님, 우리가 그날 용문산 절을 오르면서인가 내리면서인가 얘기했던 천경자 화백의 그림이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였던가요? 아님, 다른 '전설....'이었던가요?<br />
'뱀과 꽃과 소녀'를 이야기 했었는데 김효선 시인은 '바람'까지 보았네요.<br />
바다는 바람을 버리고 이야기 할 수 없지요. 내 고향 울진도 그렇지만 제주바다의 바람은 내 고향 울진보다도 더하더라고요.<br />
바람, 아, 바람,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바람, 갈피를 잡을 수 없던 그 스물 두살의 바람과 바다.<br />
김효선 시인, 오늘은 연속해서 좋은시 읽습니다. 건필!

김효선님의 댓글
김효선 작성일고맙습니다...이렇게 졸시를...그날...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지금도 그 서운함이 가시지 않습니다^^ 제가 오래전 부터 좋아하던 그림이었습니다. 제목에 누가 되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우연찮게도 그날 그림이야기를 하셨군요^^ 멀리서도 통하는 것 같아 기분이 우쭐해집니다. 가을바람이 쌉쌀합니다.

장성혜님의 댓글
장성혜 작성일
바람은 늘 떠나지만 떠나지 않는 슬픈 추억 같은 것.<br />
머리에 뱀을 이고 장미를 든 목이 긴 여자의 슬픈 이미지 생각하면서.....<br />
천경자 화가의 그림을 좋아하고 뱀을 좋아한다는 남시인과<br />
사나사 가면서 했던 얘기들도 떠올리면서......<br />
걸어가다가 더워서 나무 그늘 아래 서 있으면<br />
김재성 시인이 긴짐승 나와요 하던 말도 생각나고......<br />
<br />
견고한 벽 ...... 그리고......<br />
...... 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네요.<br />
<br />
<br />
<br />

윤관영님의 댓글
윤관영 작성일
-이장욱, 정말 평 잘 쓰대여~ 언젠가 '시와 반시'에 쓴 평을 보았다가 창비에 쓴 '오감도들' 평을 보니 부러움을 넘어서 부끄럽더라구여. 그건 그렇고 그의 평 중에 김언의 시'걸어다니는 지도'에 '이 지도에는 비오는 날이 빠져 있다'는 말로 이미 시가 되었다고 하는데, 효선 시인의 시 '바람을 떠나려고 한 적이 있었네'는 김언의 첫 싯귀같은 울림을 줬답니다. 다만 아버지 얘기에서 좀 흐지부지 된 감이 있지만, 그래도 시 좋습니다. <br />
-나에겐 '견고한 벽 그리고'가 참 와닿고 좋게 느껴집니다. 남 얘기이면서 내 얘기인 것이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또 남 얘기만 아닌 것으로 와닿는 것이 형식적인 재미와 더불어 참 좋게 느껴지는 군여. <br />
-효선 시인, 우리 막내가 그 날 일찍 가서 좀 서운했는데, 내가 서운한 소리한 건 아닌지 모르겠수. 다만 기다려서 좀 솔직했다 믿어주기 바라우. 2만 <br />
-가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