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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線)에 대한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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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재성
댓글 5건 조회 2,643회 작성일 04-07-13 17:0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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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7. 내가 그은 금

젊었을 때 나는 한 여인의 가슴에
금을 그었던 적이 있습니다.
여인은 내가 그어준 금이 보기 좋다며
늘 고마워했습니다.
누구에게나 드러내고 자랑했습니다.
여인은 금으로 아이도 낳고
먹을 것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아이가 울면 금을 보여주며 달래고
상처에는 금을 조금 떼어 발라주기도 했습니다.
내가 멀리 출장을 갈 때면  
금을 보여주며 입을 맞추었습니다.

나는 여인의 가슴에 금을 그어준 게
참 잘한 일이라며 흐뭇해했지만
언제부턴가 금은 조금씩 지워져 갔습니다.
이사를 하거나 아이 병치레가 심할 때는
더 빨리 지워지는 듯 했습니다.  
어느 날 전셋집을 얻느라 기운을 다 빼고 들어와
여인의 가슴을 보았습니다.
내가 그어준 금은 이미 다 지워졌고  
아이에게 오래 물려 축 쳐진 젖만이  
고단하게 금이 지워진 자리를
덮고 있었습니다.


금 13. 동그라미

나는 동그라미를 아주 잘 그렸습니다.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동그랗게 그리는 버릇이 있었거든요.
다른 아이들은 컴파스나 원형자를 대고 그렸지만
내가 그린 것보다 더 동그랗지는 않았습니다.
손으로 그린 동그라미가
어쩌면 그리 둥그냐고 놀라워들 했습니다.

하지만 중심점을 잡는 건 늘 서툴었습니다.
원형자나 컴파스로 그리면
동그라미 가운데 중심점이 찍히지만  
손으로 그리면 아무런 흔적도 없으니까요.
둘레 어느 곳에서든 똑같이 멀어 있고
어느 곳이든 똑같이 다가서 있는 중심.
그런 점을 찾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어요.

이즘은 나도 원형자나 컴파스로
동그라미를 그립니다.  
중심점을 잡는 것도 어려울 게 없지요.
하지만 누구에게든 공평하게 다가서거나
멀어 있기는 아직도 쉽지가 않습니다.


금 16. 늪

대구시 동구 반야월에 한 늪이 있었습니다.
도시 한가운데 늪이라니, 물도 아니고 뭍도 아닌
어정쩡한 곳을 방치해 두고 있다니
이건 정말 불경스러워, 나는 그렇게 말하며
마을 사람들에게 금을 긋자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은 금의 오른 쪽이나 왼 쪽에 있어야한다고
어느 쪽도 아닌 것은 도시를 병들게 할거라고
내가 그렇게 말하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포크레인이 억새를 헤치고 늪으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뱀들이 미끄러져 나왔습니다.
재빠른 그들은 스윽 우리를 한번 흘겨보고는
곧 위쪽이나 아래쪽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공단에서 쏟아져 나오던 폐수로
늪은 이미 시커멓게 썩어 있었지만
포크레인이 삽질을 할 때마다 뻘과 함께
물고기들이 가득 퍼 올려졌습니다.
미꾸라지, 매기, 가물치, 개구리, 뱀장어......
썩은 물이긴 해도, 저들은 그럭저럭
먹을 것을 찾고 흘레붙고 새끼를 치며
겨울을 견뎌보려 했겠지요.

그렇게 들어내어진 늪에는
제법 깊은 호수가 만들어졌습니다.
물을 맑게 하기 위한 기포장치가 설치되어
더 이상 물 썩는 냄새도 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족하여 다시 그 곁에 금을 그어나갔지만
그 이후로는 누구도, 대구시 동구 반야월에서
뱀이나 물고기, 늪에서 끌려나오던 것들을
볼 수 없었습니다.


금 17. 불만

세상에 금이 얼마 없을 때
사람들의 불만은 그저
살림이 좀 어렵다는 것뿐이었습니다.
몇 일 먹을 양식만 있어도
춥지 않게 걸칠 것만 있어도
사람들은 금새 만족해했습니다.
그러나 위·아래 사방 곳곳에 금이 그어지자
사람들은 서로 다른 금을 견주어보면서
몹시 못마땅해졌습니다.
세상은 온통 더 많이 가졌거나
더 조금 가진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이제 배가 고프거나 춥다는 사람은 없지만
아무도 가난하다고 불평하지는 않지만
남들보다 더 가난하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은 다들 견딜 수 없어 합니다.


금 18. 도시계획가

어느날 굵은 뿔테안경을 쓰고 마을에 나타난 그는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이상한 금을 긋는 사람이었습니다.
신이 자연을 설계하듯, 자신은 도시를 설계한다는 말이
마을사람들에겐 아주 불경스럽게 들렸지만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야 늘 있는 법이어서
그리 대수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호기심 많은 여자들이 가끔 그의 방을 엿보기도 했지만
어둑침침하고 차양마져 내려진 방에서
그가 긋는 금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느날 그가 방에서 나와 책을 펼치자
이상한 금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습니다.
집을 지을 수 있는 금
나무가 자랄 수 있는 금
짐승들이 살 수 있는 금
장사를 할 수 있는 금
사람들이 살아선 안되는 금
자동차만 다닐 수 있는 금
높은 건물만 지을 수 있는 금

세상은 아주 소란스러워졌습니다.
사람들은 금을 피해 자리를 옮기고
금밖에 있던 나무들은 전기톱으로 잘려졌습니다.
금에 걸쳐 있던 집들은 헐려졌습니다.
장사를 할 수 없는 금에서 장사를 한 사람들은
손이 묶여 어디론가 끌려갔습니다.
금을 어긴 짐승들은 철조망 안에 갇히거나
도살장으로 끌려갔습니다.
다행히 금을 피했다는 사람도 있었고
금 덕분에 큰 돈을 벌었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간혹 헐려질 집에서 끌려나온 사람들이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작대기를 휘두르거나
돌팔매질을 하기도 했지만
금은 끄덕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잠시 그렇게 소란스러움이 지나가자
마을은 다시 비온 뒤처럼 조용해졌습니다.
금 안의 사람들에겐 일정량의 양식과 물이 주어졌고
쓰레기는 쌓이기 전에 치워졌습니다.
밤 사이에 부랑인들이 더럽힌 거리는
해가 뜨기 전 말끔히 청소되었습니다.
모든 학교에는 알맞게 아이들이 배정되었습니다.
금 사이에 버려진 노파들은 수용시설로 보내졌습니다.
마을 한 켠에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만들어지고
금 덕분에 큰 돈을 벌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화려한 유곽이 만들어졌습니다.
간혹 몸 외에 가진 게 없던 여자들이
유곽에서 가랑이를 벌리며 버텨보기도 했지만
금에 끼어 들지 못한 사람들은 순순히 마을을 떠났습니다.
마을은 다시 아름다워졌습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남아
이상한 금을 긋는 사람에게 경의를 표했습니다.


금 19. 보이는 것들

이즘 네가 긋는 금은
왜 그리 삐뚤삐뚤하냐고, 당신은  
말끝마다 나무라시지요.
하지만, 저는 늘 보고 있는 걸요.
강 위로 떠가는 것들이
흐름을 놓치고 가라앉는 모습
아슬아슬하게 금 위에 걸쳐 창을 닦는 사람들
머리띠를 두르고 금을 잡아끌거나
밀어내는 사람들
저는 늘 듣고 있는 걸요.
입 속에 오래 가두어
소리가 되지 못하는 말들
듣는 이 없이 말라버린 아이의 울음소리
허기져 잠들지 못하는 생쥐들  
헛배부르는 소리


금 20. 빚

이제 계절을 보낼 즈음이면
가슴엔 빨간 차압딱지가 남습니다.
밖으로 내어 뵈기 민망스러워
두터운 거죽 낱낱이 둘러 봐도
가슴에 그어진 금은 흉터처럼 드러납니다.
손가락 하나 내세울 것 없이 괜스레 나다니며
바람에게도 풀잎에게도 얹혀 살은 날들
그래 일곱에 일흔 번 용서받으며
너는 몇 번이나 용서하였지, 암만 몰아 세워도
이젠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하나 베풀 게 없습니다.
털면 먼지만 나는 주머니, 가진 거라곤
아직은 더운 피 조금과
몸 내 밴  옷 몇 가지뿐이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다 내어놓고
양말 한 짝이라도 벗어, 주어야 할 이에게
다 나눠주고 나면 바다로 가야겠습니다.
가서 옷을 벗어야겠습니다.


금 6. 내 가슴의 금

어렸을 때 아버지는 내 가슴에
금을 하나 그어주셨습니다.
금은 뚜렷하고 곧아서
아주 보기에 좋았습니다.
나는 누구에게나 가슴을 내보이며
아버지가 그어준 금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내 몸이 커지면서,
금은 점점 흐려졌습니다.  
내 몸이 굽고 살집이 변하는 대로
금은 구부정하게 휘어졌습니다.
금 때문에 나는 아주 불편해졌고
이제는 누가 볼까봐
옷을 벗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금 1.  금을 긋다

내 일은 종이 위에 금을 긋는 것이었습니다.
똑바른 금, 동그란 금, 휘어진 금
가늘거나 두꺼운 금
나는 금이 비뚤어지지 않게 자를 대거나
컴파스를 바르게 맞추면서
조심스레 금을 그었습니다.
누가 금을 잘 그었다고 얼러주기라도 하면
얼마나 우쭐해졌는지 모릅니다.

내가 그은 금은 다리가 되었습니다.
길이 되었습니다.
집이나 놀이터, 전깃줄이 되었습니다.
더러는 아무 것도 되지 않고  
그냥 지워지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길이 된 금에서 먹을 것을 얻었습니다.
금 옆에 집을 짓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다리가 된 금은 안전하게 물을 건네주었습니다.  
전깃줄이 된 금은 어두운 곳을 밝게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금에 찔려 상처를 입기도 했습니다.
금이 바르지 않다고 싸우는 이도 있었습니다.
금 때문에 손해를 보았다는 이도 있었습니다.
짐승들은 자리를 잃고 떠나야 했습니다.
나무들은 금 밖으로 나가지 않기 위해
몸을 움츠려야 했습니다.

나는 종이에 그은 금이  
그냥 금인 줄만 알았습니다.  
금들이 꿈틀거리며 무언가가 되어갈 때도
나는 아주 우쭐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거리에서 만나는 금 때문에
나는 슬퍼지거나 우울해 집니다.  
때로는 마음을 놓기도 합니다.
비뚤게 그어진 금 때문에 웃음이 나기도 하고  
불거져 나온 금 때문에 거북스럽기도 합니다.

이전에 나는
내가 그은 금이 똑바르지 않거나
매끄럽지 못해서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긋지 않아도 될 금을
너무 많이 그은 게 부끄러워집니다.





추천1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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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영님의 댓글

윤관영 작성일

  -금論도 총론이네여~ 쭉 읽으면서 내려왔습니다. 반갑습니다. 김 시인, 온다던 님 아니오고, 뭐 그런 한 구절 생각나는 밤입니다. 금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도 많이 가셨지만, 다시 확인 되는 부정적 인식은 강화되었습니다. 연작을 쓰기가 쉽지는 않았을 터인데, 오랜 시간 고투한 기록같아 그저 숙연해질 뿐입니다. 더위 먹고 기절하는 시절이 오기 전에 소주 한 잔 하십시다그려~ 잘 지내시고여, 건필하시길 빕니다. 가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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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선님의 댓글

김효선 작성일

  자화상...?인가요^^ 아님 우리들의 자화상인지도 모를 일이네요...저도 금(線)에 대해 쓴 시가 있는데...저랑은 분위기가 좀 틀리지만^^ 금지된 것과 아닌 것들의 경계...그 위에 놓인 삶...흠뻑 비가 내렸으면 좋겠네요^^ 시원한 아이스크림 사드리지는 못하지만 그런 시원함을 가진 여름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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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혜님의 댓글

장성혜 작성일

  시 잘 읽었습니다. 시도 좋고 시를 끌어가는 저력이 더 좋습니다.<br />
사람 관계.  특히 가까운 사람들과 자기 자신에 얼마나 많은 금을 긋고 사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은 금 지울 수 있고, 금 긋고 싶을 곳에만 그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br />
한번 그은 금 지울 수 없고, 그어도 그어지지 않는 금이 있고, 금 긋지 말아야 할 곳에 부질없는 금 그으며 살아가는 자신이 보입니다.<br />
더위와 우기의 터널을 지나며 대어 많이 낚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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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성님의 댓글

김재성 작성일

  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걱정하면서 살았지요. 아비의 직업이 무엇이라는 것을 <br />
내 어린 것에게 말해야할 때를 늘 삼가하고 두려워하면서...  <br />
사람을 위하여 짐승의 터를 빼앗고 내 삶의 편이를 위해 다름 삶의 터를 걷우는 게 <br />
애비의 일이었다는 것을 말해야할 때, 그 때 내가 변명할 수 있는 여지가 <br />
그렇게 넓지 않다는 것을 저는 지금 잘 알고 있습니다. 단지, 이렇게 말하는 것은 <br />
시가 고백의 한 형식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기 때문이지요...... 격려, 고맙습니다.<br />
<br />
(글구 김효선님, 말로만 그러지 마시고 아이스크림값 온라인으로 보내세요. <br />
우리은행 102-08-129628 입니다. 바로 입금 부탁합니다. 늦으면 이자 붙일 거예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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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선님의 댓글

김효선 작성일

  ㅎㅎㅎ 아이스크림 값보다 송금료가 비쌀 것 같은데요^^ 요즘 은행이자도 거의 없는데 뭐...붙이세요 ㅋㅋ 팥빙수값 나올때까지요^^여름을 나는 일이 어떤 계절을 나는 일보다 막막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이를테면 아무 생각없이 그럴 때가 아니 아무 생각하고 싶지 않은 날이 많거든요^^잘...지내세요...아무 생각없는 여름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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