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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과 비상의 접경에 존재하기---백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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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1건 조회 2,215회 작성일 04-07-11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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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강빈 시집 <한 다리로 서 있는 새>(리토피아, 2004)

(해설)

중심과 비상의 접경에 존재하기


백 인 덕
(시인)




1. 존재 근거로서의 자연의 두 면모面貌

시는, ‘모든 시적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다’라는 엘리어트의 말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한 마디로 정의되기 어렵고 더더욱 일반화된 개념으로 환원시킬 수 없다. 그 이유는 결국 모든 시는 주체와 대상과의 갈등과 대립, 극복과 화해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손쉽게 주체의 자리에 ‘시인’을 놓을 수 있다. 그러나 ‘대상’의 자리에는 부득불 ‘주체’ 그 밖의 모든 것이 자리하게 된다. 이는 크게 갈래지어 자연, 사회, 우주라 이름할 수 있지만, 이 세 가지는 모두 주체의 현실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이므로 결국에는 주체인 시인과 대상인 현실만이 문제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개의 시인들이 각기 다른 시의 스펙트럼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그 또한 크게 보아 대상의 세 요소들 중에 어느 것이 보다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느냐에 있어서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가 바로 ‘시적 인식’의 내용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우리 시의 전통에 있어서 ‘자연’의 역할은 다른 어떤 요인보다도 유구하고 강력하다. 그렇지만 현대시(이때 ‘현대시’란 현대라는 시간적 자각과 시인 각자의 시 의식의 정도를 지칭한다)라는 관점에서 볼 때, 시인들이 대상으로 하는 ‘자연’은 전통적인 자연관과는 다른 모습을 띄게 될 수밖에 없다. 이를 김준오는 “자연의 중립화라고도 하는 이 자연관은 자연을 인간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실제 그 자체로 보고 묘사하자는 태도다. 일체의 인간적 관점을 배제함으로써 비정성非情性으로서의 자연 개념은 자연이 신의 창조물로서 인간에게 혜택을 준다는 낙관론과 자연이 타락의 소산, 사악한 것으로서 인간에게 적의의 힘이 된다는 비관론을 아울러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시론>, 문장사.)고 현대적 자연관을 설명하고 있다.
어언 시력 반세기를 바라보는 임강빈 시인은 1956년 ≪현대문학≫지를 통한 등단과 1969년 첫 시집 <당신의 손>(현대문학사)을 상재한 이후 줄곧 자기발견으로서의 자연을 놓지 않은 집념의 시인으로 널리 알려졌다. 따라서 이번 시집, <한 다리로 서 있는 새>의 시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 또한 그의 자연관을 규명하는 것으로부터 열리게 될 것이다. 사족이지만, 임강빈 시인의 작품에서는 결코 낭만적 자연관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때 낭만적 자연관이란 두 가지 원리, 다시 말해 동화同化와 투사投射의 방법이 사용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동화란 시인이 모든 자연을 자신 속으로 끌어와서 그것을 내적 인격화하는 원리를 말하며, 투사란 시인이란 정체가 없기 때문에 그가 계속해서 어떤 다른 존재를 채우는 것, 자연 속에 자신을 상상적으로 투여하는 원리를 말한다. 이러한 원리의 부재는 부득불 임강빈의 자연을 다른 시각에서 접근할 것을 요구한다.

울지도 않는 기러기의 침묵
어둑어둑한 밤하늘에
날갯짓만 환상처럼 보인다
볏가리 군데군데 놔두고
이 땅을 지나가려 하는가
옛적 다정다감도 비껴서려 하는가
―<기러기> 2연

지나가는 자연을 나는 보고 있지만
자연은 나를 놓치고 지나칠 때가 많다
거리 탓일까
먼 산등성이와
가까운 산은 색깔부터 다르다
있던 것이 안 보이고
없던 것이 불쑥 나타나는
낯선 차창 밖 풍경
―<자연> 1연

임강빈 시인의 초기 시 세계를 다룬 어느 평자는 “임강빈의 대 자연적인 자세는 다분히 서구취향의 관점을 부양시키면서 자연 속에 존재로서의 의미를 반영하는 신선하고도 고적감 넘치는 자연의 속성을 발현하는 경계에 닿아 있다고 보겠다.”( 하현식, <한국시인론>, 백산출판사.)고 그 특질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서구취향의 관점’이란 앞에서 언급한바 ‘자연의 중립화’의 태도를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깊은 가을 밤 하늘에 기러기가 나는 것은 수많은 정감을 불러일으킬 듯도 하건만, 인용 시에서 시인은 그러한 정감은 고사하고, ‘옛적 다정다감도 비껴서려 하는가’라고 무심한 질문만을 던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자연을 나는 보고 있지만/자연은 나를 놓치고 지나칠 때가 많다’라며 마치 시인과 자연이 별개의 주체인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결국 자연을 그 본래의 모습대로만 묘사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태도는 자연을 도외시하거나 경시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이러한 태도는 자연 속에 자아를 억지로 밀어 넣지 않겠다는 일종의 방법론적 결단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가을 하늘이 높다
나부끼는 만국기 아래
시골 초등학교 운동회
일학년은
몇 갑절 몸집이 큰 공 굴리기
둘이서 갸우뚱갸우뚱 굴린다

쇠똥벌레는 단연 프로급이다
따가운 햇볕
응원도 없이
물구나무서서
묵묵히 쇠똥이나 굴린다
땅거미 질 때까지
―<쇠똥벌레> 전문

임강빈의 자연을 대하는 태도는 위의 시처럼 대비를 통해 드러난다. 1연의 ‘일학년, 만국기, 운동회’는 2연의 ‘쇠똥벌레, 응원, 묵묵히’와 대비된다. 대비란 두 대상간의 유사점, 또는 차이점을 찾아내 각 대상의 특징을 드러내는 방법인데, 시인의 경우 ‘인간/자연’이라는 대비에서 ‘교훈’의 발견은 언제나 자연 쪽에 가깝다. 지나친 확대 해석일지도 모르지만, 1연은 ‘운동회’라는 시어로 미루어볼 때 놀이나 축제의 장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2연의 쇠똥벌레는 그 행위가 일상이며 노동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노동보다 놀이에, 일상보다는 축제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만 위의 시는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쇠똥벌레의 묵묵함이 더 자연스러운 것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대비는 가령, <요설饒舌>의 경우에는 ‘참새들’의 수다와 ‘지껄이기 좋아하는 사람’의 대비를 통해서 드러난다. 이 작품에서도 ‘너무 경박하다’ 먼저 소리를 지르는 것은 사람이고, 그 조급함으로 인해 자연스러움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감정이입’을 통한 자연과의 합일을 지양하면서 대비를 통해 자연의 교훈을 추구하는 임강빈의 자연관의 한 면모를 확인했다. 그러나 자연을 외적인 비교의 대상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은 시인이 자연을 통해 끈질기게 확인하고자 했던 한 면모, 어쩌면 진면목을 놓치게 된다. 그것은 어떻게 자연이 존재의 근거로서 시적 인식의 배면에 확고하게 자리할 수 있었으며, 또 표면에 부상했을 때 보여주는 존재자의 모습은 어떠한가일 것이다.

계곡 아래로 단풍이 왔네
잡다한 것 버리고 혼자 왔네
반나절이 훌쩍 지나고
뭔가 허전한 것 같아
술도 없이
공연히 마시는 시늉만 했네
햇살은 너무 부시고
진홍빛 잎잎이 손을 흔들며
그냥은 견딜 수 없어
미리 취했네
단풍과 반반 취하기로 했네
―<반취半醉> 전문

계곡 아래 단풍이 왔을 때, ‘아, 곱다’라고 감탄만 하는 존재는 인간적 관점에서 자연을 그저 하나의 피조물로 바라보는 자이며, ‘아 아프다’라고 탄식을 쏟아내는 존재는 ‘감정이입’을 통해 자연을 인격화하는 또 다른 인간적 관점의 소유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임강빈의 경우 이 두 관점은 일찍이 지양되었고, 그 결과가 바로 위의 작품에서처럼 나타난다. 여기서 자연과 시인은 서로 부르고, 응답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혼자’ 찾아온 ‘단풍’이 ‘허전’해 보여서 시인은 ‘공연히’ 없는 술을 마시는 체하며 응대한다. 그 결과 시인과 자연은 ‘반반취하기로’ 일단의 합의에 도달한다. 결국 이 작품은 ‘대화’의 한 전형이라 할 수 있는데, 대화란 상호 이해를 통해 자아의 확장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존재의 근거를 확보하는 유용한 수단이라고 할 것이다. 임강빈 시인의 시 세계의 전모를 알지 못하는 필자로서는 단언하기 매우 힘들지만, 이번 시집만을 놓고 본다면 그 대화의 깊이를 다음과 같은 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청진기 없이도 환부를
알아낼 것 같습니다

당신은
가을 환자입니다

넌지시 와서는
핏빛입니다

당신 몸에는
아직 피가 돌고 있습니다

아픈 곳
쉬 찾아낼 것 같습니다
―<단풍> 전문

청진기 없이도 환부를 알아낼 수 있는 이해의 깊이는 ‘단풍’을 죽음이라고 보는 일반적 인식을 뛰어넘어 ‘당신 몸에는/아직 피가 돌고 있습니다’ 즉 ‘단풍’ 들음마저도 살아있음의 표지로 읽는 인식의 깊이를 보여준다. 이러한 인식이 ‘자연’이 아니라 ‘자아’로 향했을 때의 모습은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2. 회상의 위안과 귀향의 불안 사이의 서성임

시에 있어서 기억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는 그 이해가 이미 일반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실 시는 현재의 충격적인 체험이나 강렬한 열망에 의해 쓰여지지 않는다. 현재의 그러한 상태는 일종의 모티프로서 과거의 체험, 정확히는 체험의 기억을 ‘동기화’하는 역할에 머무를 뿐이다. 그러므로 쓰여진 모든 시는 기억의 현재화된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을 ‘회상回想’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데, 회상이란 인간의 생애 중 가장 친밀한 사건들, 일회적이고 특수한 사건들을 개인적 인식의 단위로 단순화하고 구성하는 ‘개인적 기억’으로서 비공유성非共有性을 그 본질로 한다. 이 회상은 최종적으로 훼손된 자기의 회복이라는 기능을 갖는다.

육십년 전
처음 만나 잡았을
동창생의 손
―<악수> 부분

손님이 와서 닭 잡는 날이면
제일 싫은 일이 번번 내 차지가 됐다
―<조류독감> 부분

육십년 전의 씁쓸한 기억
한바탕 필름을 돌리고 있다
일곱 빛깔의 무지개로 떴다
―<씁쓸한 기억> 부분

이번 시집에서 뚜렷하게 ‘회상’의 내용을 시로 구체화한 작품들을 다시 두 가지로 갈래지을 수 있는데, 그 하나가 바로 위에 인용한 작품들처럼 ‘유년기’ 이후의 기억을 담고 있다. 이것은 분명한 자기회복을 지향하는바 ‘돈벌이’ 때문에 가출한 ‘열다섯 소년’ 시절의 ‘씁쓸한 기억’을 ‘중대한 사건’(<씁쓸한 기억>)이라고 표현한 것과 ‘일곱 빛깔의 무지개로 떴다’는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위의 작품들은 당시의 느낌들 거의 가 다 사상되어 현재는 자아의 일부분으로만 확인될 뿐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갈래는 ‘유년기’ 때의 회상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으로 작품 편수는 압도적이다. 이는 다시 ‘외갓집’의 이야기와 ‘일제 때’의 체험을 담은 것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한잠을 자고 나면
외할머니는
윗목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고 계셨다
쪼르르 내려오는 소리
그 소리에 다시 잠이 들었다
아침이면
노란 대가리가 쑥 올라 있었다
―<적막寂寞> 부분

유년기의 체험을 회상하는 이유는 대략 두 가지로 추론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이른바 원죄의식에 의한 것으로 김종삼의 경우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서구 전원시에서 일컫는 ‘유년동경’인데, “어른들의 비전보다는 어린이의 비전이 훨씬 더 깨끗한 본성에 의해 뒷받침되어 있고 우수한 것으로 인식되었다.”(이건청, <한국전원시 연구>, 문학세계사)는 이유에서이다. 임강빈의 경우에는 후자의 경우라 할 수 있다. ‘노란 대가리가 쑥 올라 있었다’는 것은 빠르고 온전한 성장에의 희구希求가 담긴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그 외갓집은 ‘흩어진 별들을 한 줄로 서게 하면’(<외갓집>)이라고까지 상상할 수 있었던 공간이므로 강력한 동기가 되며, 이러한 시절에 대한 회상은 ‘한 번은 꼭 뵈어야겠는데/주소가 불명이라’(<외할머니>)고 탄식하는 현재적 결핍이 더욱 심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기다란 다리를 한 새야
한 다리로 서서
넌 참 용하구나

양복바지에
나머지 다리 하나를 마저 집어넣을 적에
중심을 잃을 때가 있다

한 다리로 서 있는
너의 재주는 훌륭하구나

마침 조용조용 함박눈이 내리고 있다
한국의 산천
눈 내리는 풍경을 실컷 구경하여라

아랫도리는 춥지 않느냐
떠날 채비는 됐느냐

너의 깃털이 하얗다
함박눈도 그렇다
비상할 때는 참 황홀할 거야
―<한 다리로 서 있는 새> 전문

귀향에는 설렘과 두려움이라는 양가적 감정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시인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시인이란 시작 속에서 종말을 읽고, 끝에서 시작을 조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임강빈 시인의 이번 시집에도 그러한 징후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나는 이것들을 일반화해 ‘불안’이라고 정의하고 그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위의 작품은 시집의 표제시로 ‘중심’ 잡기의 어려움과 ‘황홀한 비상’의 홀가분함이 동시에 드러나 있다. 또한 시인의 오랜 시작 방법처럼 ‘긴 다리의 새’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

어지간히 끝내고
어서 오라는 환청이었다
―<환청幻聽> 부분

생로병사는 짧다
내리는 눈처럼 가볍다
―<문병問病> 부분

떠난 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 같네
―<여권旅券> 부분

나도 차츰 회복 중이라 각별하다
―<분盆> 부분

빠뜨린 것이 없나 챙긴다
빈손이라 오히려 여유롭다
허전한 느낌이다
어떤 형벌이 또 기다리고 있을까
―<준비물> 부분
잎이 떨어지며 다른 잎을 툭 치지만
그런 긴장감도 없다
조용히 늙어가면 된다
―<햇볕> 부분

경이로운 시와 대할 때
그런 경지가 부럽다
주저주저하다가 남는 진부
이 진부가 붙어 있는 것을 보면
나의 만년은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다
―<만년晩年> 부분

귀향의 양가적 감정이 실려 있는 부분들을 두서없이 모아 보았다. 귀향을 준비하는 심정은 때때로 물리적 자연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일 수도 있지만, 시인의 경우 시적 인식의 확충이나 변모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자의식에서 출발하는 경우도 있다. 임강빈 시인의 경우는 ‘경이로운 시와 대할 때’는 ‘나의 만년은/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다’라고 토로하고 있으니 후자의 경우는 결코 그 이유가 될 수 없다. 전자의 이유는 ‘시적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므로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3. 유연한 지조와 교훈의 긍정성

시인들이 ‘시’로써 자신의 초상肖像을 그릴 때, 필경 그 심정은 참담할 것이고, 그 초상을 보는 이의 심정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 이유는 시인이라는 존재는 얼마간은 나르시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그것은 보다 본질적인 것에서 기원하는데, 모리스 블랑쇼는 “시를 파고 들어가는 자는 모든 우상을 포기해야 한다. 모든 것과 결별해야 한다. 진리를 지평선으로 삼지도 말 것이며, 미래를 그가 머무를 곳으로 삼지도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희망을 가질 권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절망해야 한다. 시를 파고 들어가는 자는 죽은 자이다. 심연과 같은 자신의 죽음과 해후하는 자이다.”(<문학의 공간>)라고 그 참담함의 이유를 명쾌하게 말하고 있다.

차안에서 누군가 말을 꺼냈다
또 변두리네요
시상식 마치고 가는 길이다

다음엔 서울 입성하세요
음, 그럴까
무심히 한마디 내뱉는다

상을 위해 시 쓰지는 않아
넉넉한 시골 바람은 언제나 맑지
따지고 보면 서울도 변방인걸

창 너머로 휙휙 지나가는
불빛 가속이 붙었다
그 행렬 때문에 넋두리를 멈췄다

참 잘했다 싶다
―<스케치> 전문

임강빈 시인이 직접 그린 ‘스케치’에서 그는 분명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 ‘상을 위해 시 쓰지는 않아’ 그 결과는 ‘참 잘했다 싶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넋두리’가 아니다. 시로 그리는 초상 속에 분명 아픔과 실의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는 시를 살면서 ‘무명으로 오히려 홀가분하다’(<이 들판은>)고 느꼈고, ‘아깝다/가난했던 나의 전성시대’(<놓쳐버렸다>)라고 호기 있게 말하지만, 또한 ‘누추하게 살아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라고도 하며 ‘이 가난에서 벗는 날은/파릇파릇 새싹이/시가 되는 날이다/시가 부자 되는 날이다’(<가난>)라고 자신도 하지만 ‘내 시도 대충 이렇다/정상을 올려본다/아무래도 힘겹다’(<산울림>)며 원망의 감정 또한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 잘했다’는 인식은 결국, ‘하나하나 벗기기로 한다/역시 알몸이어야/시가 살아난다/황홀하다는 것을 다시 알았다’(<시만 쓰면>)는 경지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그 유연한 지조는 우리 시사詩史에 다음과 같은 교훈을 교설敎說이 아닌 이미지로 보태주었다.

떠나려는 이 가을
악수만으로는 안 될 것 같다
은밀하지 않은 곳에서
꼭 한 번은 포옹하고 싶다
―<가을 포옹> 부분

오랜 사랑은
빙정氷點 언저리에서 머물다가
손을 잡아주는 일이다
따스하게 감싸주는 일이다
―<사랑> 부분

똑바로 앞으로는 갈 수가 없다
정면충돌을 피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랴
―<참게> 부분

임강빈 시인의 이번 시집이 선생의 거의 반세기에 이르는 시력에 열 번째로 상재되는 것이지만 이 시집이 어느 만큼의 위치를 점하게 될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는 전통적인 자연관을 확실하게 지양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자아의 존재 기반으로 하여 자연이 끊임없이 드러내 보여주는 의미와 가치를 이처럼 아름다운 ‘표현(이미지)’을 통해 다시 우리에게 들려주었다는 그 점은 아마도 오래도록 ‘참 잘했다’는 시인 스스로의 평가 이상으로 기억될 것이다.
추천4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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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성님의 댓글

김재성 작성일

  한 시인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일은<br />
그렇게 뼈속의 뼈를 들여다보는 일이겠습니다.<br />
말 속으로 들어가 말의 고리를 들추고, <br />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물려 세상을 받치는 그물이 되는지 <br />
살아내는 게 왜 그토록 몸서리쳐지는 일이며, 그토록 아름답고 뜨겁고 가벼운 지 <br />
담담하게 드러내 보이는 저 명치(明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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