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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미러 속의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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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승용차 한 대
오르막 산길에 버려져 있다
깊이 패인 헛바퀴자국에서
산길을 오르고 싶은 필사의 흔적을 알 수 있다
번호판은 탈색되어 앞 범퍼에 힘겹게 매달려 있고
투명했던 앞 유리는 병든 폐부처럼 뚫려 있다.
바람이 빠져나간 네 바퀴의 홈에는
거친 황토와 모래알들이 촘촘히 박혀 있다
운전자가 없는 운전석
하이웨이 주유소 상표가 부착된
크리넷스티슈 박스가 구겨져 있다
조수석, 손 달력에는
반라의 여인이 말 잔등 위에서
자유의 여신상처럼 소주병을 높이 치켜들며 찡긋 웃고 있다
달리는 동안 운전자는
저 여인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유혹을 받아 왔을까
깨진 차 유리문으로 차안에 갇혀 있던
욕망의 잔재들이 영혼처럼 빠져 나가고 있다
실명한 양쪽 헤드라이트 앞으로
어둠이 눈치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다
사선으로 깨어진 백미러를 본다
황토 빛 빗살무늬토기 한 점 클로즈업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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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남태식님의 댓글
남태식 작성일
이제는 어느정도 일상적인 것이 되어버린 풍경을 세밀화로 잘 묘사하셨네요. 군더더기 없이, 감정이입을 최대한 배제한 채.<br />
시 잘 읽었습니다. 건필을 빕니다.

윤관영님의 댓글
윤관영 작성일
-버려진 것애 대한 연민! 맞나? 아무려나, 시풍이 좀 바뀐 듯 싶은데, 전혀 바뀌지 않은 것도 같아요. 드라이한 묘사 같으면서도 감정이 개입되어 있고, 세심한 관찰 같으면서도 해설은 있는 듯 싶습니다. 그래도 제겐 이 시가 좋군요. 그도 그럴 것이 어떤 상태에 대한 묘사여서 그래오, 제겐. <br />
-갑자기 우리 동네 응달마을 가는 길에 버려진 인천 넘버의 프라이드가 생각나는데, 조금 열려진 틈으로 넝쿨이 기어들어 내부를 초록으로 만들어놓던 정경도 기억되네요. 암튼, 헹님아가 좋은 시 올려 좋군요. / 승기 시인 출판기념회에서 못 뵈게 되어 아쉬워요 / 가뇽

허청미님의 댓글
허청미 작성일
'황토 빛 빗살무늬토기 한 점'으로 남은 버려진 차에서<br />
오랜 유물에 숨은 내공을 투시하는 기계처럼 담담하게 서술하는<br />
화자의 시선이 인상적입니다<br />
사선으로 깨진 백밀러 속 영상위의 빗금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묵언에 귀를 기우려 봅니다.<br />
좋은시 한 편 잘 읽었습니다

서동인님의 댓글
서동인 작성일
잘 지내시죠?<br />
뵌지 오래된 것 같습니다. <br />
정겸 시인님, 좋은 시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