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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시평>지리멸렬한 시대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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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관영
댓글 6건 조회 2,387회 작성일 04-06-11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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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멸렬〉한 시대의 시


  1. 이런 시대에 시는?

  (상략)/쓸쓸한 연애나 이별의 아픔에겐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를 팔고/노동의 현장에서 달려온 피곤에겐 환타지 시를/생활의 권태들에겐 연애시를 권한다/점점 고객들의 입맛이 까다롭고 다양하나/윤동주의 서시처럼 거울이 되어주거나/등불이 되어주거나 영혼의 노래나 자연을 찬미하는 시로/고객만족을 유지한다/시를 사주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발동하면/시 낭송 행사도 마련하여/쉬어갈 수 있는 그늘이 되려한다/(하략)
                                  ―안명옥,「시를 파는 가게 주인」부분, 『시와사상』

  다소 소박한 느낌을 주는 '안명옥'의 시는 시의 역할에 대해 되묻는 점이 있습니다. '시'를 파는 가게 주인인 화자는 '이별의 아픔'에겐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를 팔고 '노동의 현장에서 달려온 피곤'에겐 '환타지 시'를 권하고 '생활의 권태들'에겐 '연애시'를 권한다고 합니다. 수요자의 요구에 맞는 시의 공급인 셈인데, 요즈음의 시가 독자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생각하기는 하는 것인지 뒤돌아보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시인들이 '까다롭고 다양한' 고객들의 입맛을 고려하거나 '고객만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까요? 부정적인 생각이 먼저 듭니다. (저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시인들은 일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같은 시인이거나 평론가, 詩와 연관된 일 혹은 문학과 관련된 일을 하시는 분들을 독자로 상정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따라서 시가 독자를 설득하고 감동을 주는 것을 목적하기보다는 〈이 달의 시〉나 〈이 계절의 시〉 혹은 〈올해의 좋은 시〉에 뽑히는 것을 목적합니다. 좋은 시로 선정되어 재수록 되는 것은 좋은 일이나 選者의 눈에 들게 하려는 어떤 의도를 시가 내재하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이 일반 독자에게서 시를 더 멀어지게 하지 않나 싶습니다.
  얼마 전에 〈시낭송회〉에 다녀왔습니다. '시를 파는 가게 주인'의 진술처럼 '시를 사주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발동하면/시 낭송 행사도 마련'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시낭송회〉에 모인 사람은 모두가 시인이었습니다. 나머지 세 사람이 시인이 아니었는데, 그들도 시를 공부하고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즉 우리들만의 자축 행사인 셈이죠.
  이경림이 그의 시 「쓸쓸함의 결혼식」에서 '시 쓰는 쓸쓸함'에 대해 노래한 적이 있지만 지금 '시 쓰는 쓸쓸함'은 시인들이 자초한 바가 없지 않은 것만 같습니다.
  시를 쓰다보면 시 자체에 대한 욕심이 생기듯 시평을 쓰다 보니까, 시평에 대한 욕심이 자꾸 생깁니다. 조금 개성적으로 쓰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는 거죠. 그 욕심이 지나치면 자신이 원하는 평의 틀에 맞는 시를 선정하게 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데, 저로서는 제가 좋게 읽은 시가 출발이자 틀입니다.


  2. 극단에 처하면?

  이시영이 '무쇠의 슬픔의 시간'이라 명명한 극악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한국적 상황은 지금 '탄핵정국'입니다. 탄핵정국 자체가 어떻다기보다는 그러한 속에서 국민 개개인의 삶이 〈지리멸렬〉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일자리를 찾느라 고투하고, 자영업소들은 망해 먹기 일쑤여서 간판집만 불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간판집이 성업 중이냐? 아닙니다. 틀은 그대로 두고 판만 갈고 만답니다. '단전', '단수' 예고 딱지가 흔히 철문에 붙는 세상, 사는 것 자체가 문제적입니다. 이윤학에 의하면 개개인의 삶은 '덫에 치여 한쪽 다리를 못쓰게 된 까치'같은 모습입니다. '도움닫기를 해야 날아갈 수 있는' 존재들의 세상입니다.

날지 못하는 까치가 있었다. 덫에 치여 한쪽 다리를 못쓰게 된 까치가 있었다. (중략) 까치는 도움닫기를 해야 날아갈 수 있었다. (중략)
까치는 인간들 손아귀에 들어갔다 풀려나기를 거듭했다. 까치는 잡힐 줄 뻔히 알면서 번번히 기겁을 하고 달아났다. 날개를 펼쳐들고, 중심을 잡기 위해 바닥을 치면서 내달리던 까치를 보았다. 끊임없이 날개로 바닥을 치면서 내달리던 까치를 보았다. 자신의 몸을 바닥에서 쳐 올리던 까치를 보았다. 자신을 포기할 수 없는 까치를 보았다. 자신을 믿을 수 없는 까치를 보았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 까치를 보았다.
                                                          ―「절름발이 까치」부분, 『시작』

  '인간들 손아귀에 들어갔다 풀려나기를 거듭하'는 저당잡힌 삶. '잡힐 줄 뻔히 알면서 번번히 기겁을 하고 달아나야'하는 삶. '바닥을 치면서 내달려'야 하고, '끊임없이 날개로 바닥을 쳐'야 하는 삶입니다. 그것은 절망적이기에 '자신을 포기할 수 없'지만, 또 수 없는 실패만이 삶을 이루었기에 '자신을 믿을 수 없는' 존재의 삶입니다. 다만 '뒤를 돌아보지 않는 까치'라 하여 어떤 메시지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 또한 희망이 되지 못합니다. 목이 꺾인 새는 죽은 새라는 의미에서 보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삶이 희망적일 수 있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뒤를 돌아볼 하등의 여유가 없는 삶을 뜻하기도 합니다. 사는 것이 '덫'이자 가난이 '덫'인 자본주의 세상에서 한 쪽다리를 못 쓰는 불구는 생의 운명적인 전제인지도 모릅니다.
  극단적인 두려움 속에서 사람은 태아의 모습이 된다고 합니다. 또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어머니'가 아닌 '엄마'를 찾는다 합니다. 시난고난한 생은 나를 뒤돌아보게 하고, 그런 삶을 견디어온, 아니 견디어낸 나의 엄마를 찾는 일은 당연한 일인 지도 모릅니다.

(상략)
울엄니처럼
가슴 한복판에 뻥! 구멍을 안고도
주렁주렁
오동나무의 자식농사는
올해도 대풍이니
큰소리 지나간 자리에 깃들 큰 고요는
또 얼마나 깊을까
슬그머니 가을귀를 미리 당겨
소리의 그늘 속으로 미리 한발을
밀어넣네
                                  ―이화은,「소리의 그늘 속으로」부분, 『시와반시』

  내 가슴이 뻥 뚫려보고 나서야 엄니의 뻥 뚫린 가슴을 이해하게 되었겠지만, 진정성 있는 이해는 '큰소리 지나간 자리에 깃들 큰 고요'를 알게 합니다. 그러한 엄니에 대한 전적인 이해는 '슬그머니 가을귀를 미리 당겨/소리의 그늘 속으로 미리 한발을/밀어넣'어 어미의 중심으로 가는, 어미를 닮아가는 성찰을 낳기도 하구요.

닳고 닳은 통장
지출된 숫자 같은
앙상한 나뭇가지 하나 없어도
우리 엄마 통장 속에는 까치가 산다

고향집 감낭구 꼭대기
까치밥 같이 붉은 도장밥 먹으며
우리 엄마 통장 속에는 까치가 산다

상처도 밥이고
가난도 밥이고
눈물도 밥이고
아픔도 열리면
아픔도 열매란다, 얘야

까치발을 딛고
나 엄마를 따먹는다
내 몸 속에는 까치밥처럼 겨운 엄마가 산다
                     ―안현미「우리 엄마 통장 속에는 까치가 산다」전문, 『시작』

  희망의 전조인 '까치'를 이윤학이 비극, 아니 처참의 상징으로 그린 것은 당연합니다. 이미 희망은 절망의 다른 이름이 되어 버렸으니까요. 통장에 희망을 상징하는 까치가 날고 있다한들, 그것이 어찌 희망이 될 수 있을까요. 입·출금을 확인하기 위해 찍는 통장정리는 이미 현재적 삶에 어떤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 자신도 저의 어머님께 숱하게 들은 말이 있습니다.
  "이눔아, 남의 돈 먹기가 그리 만만한 줄 알어!"
  그래도 저의 어머님께 저는 까치 같은 존재였고 지금도 그렇지만 '상처'를, '가난'을, '눈물'을, '아픔'을 '열매'로 전환하기란 쉽지 않죠. 어미에겐 '까치'같은 존재이기에 살아야될 이유가 거기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3. 어쨌든 나의 문제다

  〈지리멸렬〉속에서 생은 이제 누구의 것도 아닌, 누구의 탓도 아닌 개개인인 나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내 안에 자리잡습니다. 따라서 자아성찰을 넘어선 천착은 누구의 문제도 아닌 나의 실존을 건드리게 됩니다. 생을 뒤흔드는 이 건드림은 남녀 간에 차이가 있습니다. 실존의 내용이, 끌탕의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죠.
  '이 땅에 태어난 여자들은/누구나 한때 군인을 애인으로 갖는답니다'(「군인을 위한 노래」부분, 『문예중앙』)는 문정희의 노래는 낭만적인 구석이 있습니다. 좀 사실적이기도 하구요. 이 것이 생을 이루는 실제화 되면 다르죠.

노을이 덜커덩 열리고 저녁 식탁을 지나면/어떤 결말처럼 반달 문/다시 볼이 통통한 소녀가 방에서 걸어나오고/덩치가 커진 탈은 더 큰 늑대를 찾아/두두리 그렇게 둥둥 소녀와 늑대와 양이/집채만큼 둥 커져서 캄캄함/터질 듯 무서운 가족들, 지붕들, 그러다 마을들
                                             ―정복여,「구름 결혼식」부분, 『실천문학』

  여기서 남녀의 결합은 '구름' 결혼식입니다. 허구이면서 허구가 아닙니다. 여자가 양의 탈을 쓴 늑대와 사는 것은 비극적 상황입니다. 소녀가 양의 탈을 쓴 늑대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지 않았다는 것이 더 비극적입니다. 이 상황은 반복되어 대물림되는데 '다시 볼이 통통한 소녀가 방에서 걸어나오고' 다시 반복이 될 때에 양의 탈을 쓴 늑대의 탈은 커져있고, 그래서 '캄캄함'이요, '터질 듯 무서운 가족들'입니다. 그런데 그게 마을을 이루었으니 어찌 비극의 절정이 아닐 수 있을까요.

애 낳고 싱크대 앞에 선 지 십년. 이 십년이 가시겠다는데 뭐라 부르리까. 애기라 하리까 늙은이라 하리까. 왼 발목이 특히 말할수없이 아팠으니 왼 발목이라 부르리까. 습포찜질 적외선 흡열 안, 안, 안티프라민이라 부르리까. 침 뜸 부항 그따위라 부르리까. 가긴 가는 십년. 열십자 녹십자 적십자야. 씹고 씹은 씹녀. 음식물쓰레기 국물 질질 흘리는 이 십년은 시간이 아니다. 신발이다. 양말짝이다. 미시시피다. 자주자주 섬뜩했는데, 불만이 많아 뚱한 애기야. 꿈이 많아 멍한 늙은이야. 신발장의 신발이란 다 후질러놓고. 마지막 빈대떡까지 간장에 찍어 먹고. 하나 둘 셋 욕심 열을 다 채웠으니 십년. 강산도 변한다는데. 십년. 면벽의 한 소식도 온다는데. 신변. 사직을 몽땅 행주 속에 묻고. 지지했지만 허랑하게도 십년이 가신다더라. 도대체 가긴 가는 이 십년을 뭐라 부르면 좋으리까. 허공중의 말고래. 하하, 용마의 비늘이라 부르리까. 말도 안 되는 胡亂, 십년. 썩은 고려 宮趾, 池의 한 잎 눈꺼풀이라 부르리까.
                                  ―「이 십년을 뭐라 부르리까」전문, 『시안』이진명

  이 시를 보면 '끝내 파먹을 것은 나 자신밖에 없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애 낳고 싱크대 앞에 선' 그 십년 세월에 대한 종합적 이해가 여기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런 인식에 다다랐으므로 잘 지냈을 십년 같이 여겨집니다만 그렇다하더라도 크게 달라질 것이 없는 현실을 놓고 보면, '지지했지만 허랑하게도 십년이 가신다더라' 라는 탄식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저절로 이해됩니다. 탄식과 넌더리와 자조, 이 어조가 꼭 화자의 것만이랄 수 없죠. 따로 해설이 필요 없는 싱크대 앞의 십년입니다. 갑자기 싱크대가 무서워지고, 애가 무서워지고, 남편이라는 사실이 무서워지는 십년입니다. 아, 몸서리의 십년.  

  '이 땅의 젊은 남자들은/누구나 군사분계선으로 가서/목숨을 거기 내놓고 한 시절/형제라고 부르는 적을 향해 총을 겨누고/절박하게 고통과 그리움을 배운다'(「군인을 위한 노래」부분, 『문예중앙』)고 문정희는 같은 시에서 노래합니다. '절박하게 고통과 그리움을 배'운 그들은 군대시절보다 더한 생활 전선에 뛰어듭니다. 생활 전선은 열외가 없으며, 또한 연습이 없는 실제입니다. 실패는 패배자일 뿐이고 낙오는 생활 파탄자를 의미할 뿐입니다.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생기 잃고 옹이 진 손과 발이며/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미안하다/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순한 너를 뉘었으니/어찌하랴/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어떤가 몸이여
                                                       ―김사인,「노숙」전문, 『문학동네』

  마치 육체를 이탈(肉脫)한 영혼이 그 육체를 객관적으로 관조하는 것 같은 시입니다. 어느 날 내가 본 나는 이렇습니다. '생기 잃고 옹이 진 손과 발이며/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 그런 존재가 되었습니다.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입니다. 그런 나의 육체를 보는 나는 이미 자신이 없습니다. 다시 한 번 힘을 내어보려 해도 혹사시킨 그 육체(어찌 육체만일까요?)에게 미안함을 풀 길이 없습니다. 그건 나의 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추운 한데잠의 육체를 떠나는 凍死의 혼의 말 같기도 하여, 그 어조가 너무 차분하여 그 슬픔이 배가되는군요.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니, 그러면 그 몸은, 혹사된 몸은 이제서야 구원을 받는 것일까요?

多足으로도
훌쩍 뛰어넘을 수 없는 고난의 가계를
악착같이 움켜쥐고
더듬더듬
더듬어 온
뼈대 없는 가문의 자손들

걸려드는 족족이
숱한 난도질을 당하면서도
서슬퍼런 칼날을 타고 넘는
끝끝내
고분고분 씹혀주지 않으리라
꿈틀거리는

먹통이라 부르지 말라

누대에 걸친 골수암이
깊을 대로 깊어져
뼈마저 녹아버린 통증의 멍울이 검게
솟구쳐 고인 것

德陽君 靖僖公派 十五代孫

그의 머리통이 단단해지고 있다
                                     ―이덕규,「낙지-진화 예측편」전문, 『현대시학』

  〈지리멸렬〉된 삶이 개개인을 극단적으로 압박할 때, 그 개인의 회한은 자신을 넘어 족보(德陽君 靖僖公派 十五代孫)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셈하여 올라가 봐야, 구차한 자신의 내력을 확인할 뿐이지만요. 이는 어미의 말을 빈 안현미의 고백적 진술과도 일치합니다. '상처도 밥이고/가난도 밥이고/눈물도 밥이고/아픔도 열리면/아픔도 열매란다, 얘야' 그러니까 '상처'와 '가난'과 '눈물'과 '아픔'은 나와 늘 붙어있는, 떨궈낼 수 없는 업이므로 이는 차라리 열매 삼아야만 살아낼 수 있다는 전대의 처절한 생 철학을 의미합니다. 이덕규는 자신을 낙지와 빗댑니다. '두 발'로 사는 상식적인 행보로는 존재할 수 없는, 그래서 多足의 역할을 할 정도로 처절하게 살아내야만 하는 가계를 '뼈대 없는 가문의 자손들'이라 자조합니다. '숱한 난도질을 당하면서도/서슬퍼런 칼날을 타고 넘는/끝끝내/고분고분 씹혀주지 않으리라'는 다짐은 살아내야만 하는 존재의 독기 어린 외침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독기 어린 다짐이라 하여도 다짐은 다짐으로 그치기 쉬운 것이 생이 아니던가요. 화자의 어조가 '∼리라'는 다짐이나 '∼말라'는 단정적 요구는 화자의 삶이 극단에 몰려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낙지의 먹물을 '뼈마저 녹아버린 통증의 멍울이 검게/솟구쳐 고인 것'이라 본 것은 〈지리멸렬〉한 삶이 추출해낸 바닥의 존재 확인이 아닐까 합니다.

헥헥헥, 그러다 잠이 들고
벽 뒤에선 애첩들의 비웃음 소리, 이년들!
근데 지금 왜 화냈지? 졸음이 몰려와 기억이 녹아내리고
또 밥상이 들어오고, 아무리 걷어 올려도 수만 겹을 껴입은 계집들의
속살은 보이지 않고, 왜 옷을 벗기고 있었지?
비웃음, 이년들!, 왜 화냈지?, 다시 밥상이다!
또 졸음이 오고, 내가 누구였더라? 와 밥상이다! 이년들!
마침내 항문이 열리며 우레가 빠져나오고
인분으로 방 안에 서역을 쌓아 부정한 것들의 접근을 막은 채

죽어간다
―서동욱,「왕은 죽어간다」부분,『세계의 문학』

  여기서 왕은 왕이 아닙니다. 나면서 당신입니다. 자조하고 자학하고, 또 '죽어가'는 존재. 물론 그를 위악하게 만드는 생의 조건이 문제입니다. 잠 들고, 비웃음 당하고, 화내고, 밥 먹는 이 반복을 어쩌지 못하는 무기력한 존재가 그이자 나입니다. '내가 누구였더라?'는 근본성찰에 도달하게 두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어쩌지 못하고 쓸려가는 생에 대한 쓸쓸한 자기 확인이 이 시에 깔려 있습니다.


  4. 〈지리멸렬〉해도 봄이다

  지금은 봄입니다. 지리멸렬해도 봄입니다. 춥고, 떨리고, 배고픈 시절이 가신 것은 아니지만 바위까지 생동하는 봄입니다. '나이테가 하나 더 생기는/이맘때면 온몸에 물이 돌아 출렁거리'는 봄, '구둣굽 또각또각 울리며/공원으로 큰길로 걷'게 하는 봄, '뭇 시선과 마주치고 싶은' 봄, '어쩌지요/벌써부터 어깨가 근지러우니/봄이 가까웠나' 보다고 느끼게 하는 봄, 가방 끈이 자꾸 흘러내'리는(신수현,「우수」부분, 『리토피아』) 봄입니다. 자조하고 자학하는 몸일지라도 피어나는, 피어나게 하는 봄입니다.

땅바닥에 포섭된 사람처럼 길게 엎드려
그는 정말 쪽 소리나게 땅바닥을 빤다.
예뻐 죽겠다는 표정이다.
땅바닥이 어질어질 흔들리는 듯도 싶다.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나오는 듯도 싶다.
그의 입이 혹 성기였을까?
땅바닥에 한 줄금 선혈이 비친다.
구경거리 났다는 듯 구름들이 몰려오자,
그는 다소 쑥스러운 낯빛으로 슬금슬금 뒷걸음친다.
선연한 핏자국이 섭섭한 듯 점점이 그를 따라나선다.
그는 대지 깊숙이 무슨 사랑을 심은 것일까.
그의 과수원에서 따온 복숭아를 맛본 사람들마다
휘청휘청 천상으로 기우는 상사(想思)에 빠져든다.
         ―정우영,「하늘 복숭아는 어떻게 지상에 열렸을까」전문, 『문예중앙』

  이 봄은 하늘과 땅이 상관하는 봄입니다. 그래서 '땅바닥이 흔들리는 듯도 싶'고 '신음이 새어나오는 듯도 싶'은 봄입니다. 그 결과 '땅바닥에 한 줄금 선혈이 비치'는 봄이며, 하늘과 땅 중간지대를 점하고 있는 구름마저 그 사랑의 소문(?)을 확인하고자 몰려드는 봄입니다. 대지에 심은 사랑이 복숭아로 열매 맺게 해 사람들로 하여금 '천상으로 기우는 상사(想思)에 빠져'들게 하는 봄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의 열매는 나중의 일이나, 봄으로 인해 天桃로 天道를  눈치챌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그런데 봄은 이처럼 하늘과 땅과의 교통을 불러오는 것만이 아니라 바다의 깊은 곳으로부터도 온답니다.

딴은 꽃가루 날리고 꽃봉오리 터지는 날
물고기들이라고 뭍으로
꽃놀이 오지 말란 법 없겠지
남해는 나무그늘로 물고기를 낚는다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짙은 그늘 물위에 드리우고
그물을 끌어당기듯,
바다로 휜 우듬지에 잔뜩 힘을 주면
푸조나무 이팝나무 꽃이 때맞춰 떨어져내린다
꽃냄새에 취한 물고기들 영영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말채나무 박쥐나무 꽃도 덩달아 떨어져내린다
木그늘로 너희들 목에 내린 그늘이라도 풀어라
남해 삼동 촘촘한 그늘 가득 퍼득대는 물고기를
잎잎이 어깨에 메고 우뚝 선 어부림
꽃향기는 수평선 너머로도 가고 심해로도 가서
낚싯바늘처럼 단숨에 아가미를 꿰뚫는다
꽃가루 날리고 꽃봉오리 터지고 청미래 댕댕이 철썩 철썩
파도소리를 흉내내며 뒤척이는 숲,
날이 저물면 남해는 나무들도 집어등을 켜든다
                                                  ―손택수「어부림」전문, 『창작과비평』

  바다의 물고기들에게 육지가 그리운 한때가 있으니, 그 때가 바로 육지에서 '꽃가루 날리고 꽃봉오리 터지는 날'입니다. 바다에는 없는 '꽃놀이'가 있으니, 물고기들은 '나무그늘'로 몰려듭니다. 저 죽는 것은 나중의 일이죠. 그 나무그늘로 '푸조나무 이팝나무 꽃이 떨어져내리'고 '말채나무 박쥐나무 꽃도 덩달아 떨어져내려' 물고기들은 꽃냄새에 취해 정신을 못차립니다. 바로 나무그늘로 물고기를 낚는 봄인 것입니다. (이래서 봄은 희망적입니다) '물고기를 잎잎이 어깨에 메고 우뚝 선 어부림'은 봄 아니면 만들 수 없는, 꽃향기 아니면 만들 수 없는 환상입니다. 이 꽃향기는 심해로도 가서 청미래 댕댕이마저 철썩거리게 하니, 이는 바로 나무들이 '집어등'을 켜드는 까닭입니다. 어찌 남해만 꽃이 피겠습니까만, 지상의 꽃향기는 바다의 물고기마저 감응하게 한다는 면에서 지리멸렬한 인간들에게도 희망인 것이죠.
  그러니 어떨까요? 이 봄에 망설이지 말고 봄마중 가는 것.

저 뻔뻔하게 막힌 하수구가
염치없는 방향제가
분홍색 리본으로 위장된 변기가
당신의 약점을 이용하여
너무나 기세등등
당신의 머리꼭대기까지 기어오를 것이 자명하므로
그래도 정 보고 싶다면
꼭 봐야 한다면
삼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완공이 덜 된
아직도 "공사중"이라고
봄마다 환한 팻말 내어 거는
순천 선암사 홍매화 먼저 보러 갈 것
                                             ―박경자,「모델하우스 보기」부분, 『다층』

  살기 위해서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 '모델'을 보고 하우스도 모델을 봐야하는 사람들. 그러나 모델은 모델일 뿐, 실체는 아닙니다. 모델하우스가 '당신의 약점을 이용하여/너무나 기세등등/당신의 머리꼭대기까지 기어오를 것이 자명하므로' 이 봄에 자꾸 속지말고, '삼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완공이 덜 된/아직도 "공사중"이라고/봄마다 환한 팻말 내어 거는/순천 선암사 홍매화 먼저 보러' 가라고 합니다. 속지 않는다 합니다. '선암사 홍매화'는 아직 "공사중"일망정, 속이지는 않는다는 거죠. 기실 진실은 완공될 수 없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순천에 있다네요, 이 봄 전수 다 가기 전에 한 번 들러보심이 어떨지요.
  

  5. 그래서 살아야 한다

  봄은 꽃부터 먼저 돋아나는 계절입니다. 견딘 세월이 만들어내는 역설만 같습니다. 바닥을 친다는 말처럼 더는 〈지리멸렬〉할 수 없는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생의 기운이 봄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 봄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죠.

내 안의 뼈란 뼈 죄다 녹여서
몸 밖으로 빚어 낸 둥글고 아름다운 유골
한 채를 들쳐 업고 명부전이 올려다 보인
뜨락을 슬몃슬몃 핥아 가는 온몸이 혓바닥뿐인 생(生)이 있었다
                                           ―서정춘,「달팽이약전(略傳)」, 『문학수첩』

  '온몸이 혓바닥뿐인 생(生)'인 달팽이도 움직이게 하는 봄입니다. 잎사귀 그 잔털도 달팽이에겐 '가시'라던데, 잎사귀 적시는 물기의 봄인 것입니다.

건강한 피부를 가진
인간에게 유일한 상처는
자궁입니다 상처가 아니면
어디에 미래를 경작할 수 있을까요
이 매음굴을 닦으시는
테레사 수녀님
모든 썩는 것은 생명이 되오니
우리가 창녀라는 사실은
우리가 성녀라는 사실보다
더 희망적입니다
                                             ―최종천,「마더 테레사」부분, 『창조문학』

  언제적이던가? 딸이 셋이었던 아비가 또 딸을 낳은 것을 두고 전화 통화를 하던 중 '또 도끼 맞았어요.' 했다는 말을 섬쩍지근하게 전해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 천형 같은 큰 상처 있기에, 아이도 낳는 것이리라 싶기만 합니다. '건강한 피부를 가진/인간에게 유일한 상처는' '자궁'이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다가옵니다. 남자의 반성이 나오는 대목도, 여성이 존중받아 마땅한 이유도 예 있는 것만 같습니다. 두엄더미의 김이 봄의 한 희망이듯 '썩는 것이 생명이 되'기에 이 세상도 절망하는 자들의 탄식과 아픔이 끝내 희망만 같습니다.
  
월요일 아침이면, 목청 좋은 강씨가 노란색 바구니를 들고 긴 아파트 복도를 지나간다 ......세-에-탁...... 바구니 속에는 구겨진 바지 가랭이가 물방울 무늬 원피스 속으로 슬그머니 들어가 있고, 목때 찌든 베이지색 와이셔츠와 실크 스커트는 부둥켜 안고 밑바닥을 뒹군다. 커피 자욱 얼룩진 지회색의 넥타이 체크무늬 반바지, 주머니가 많은 조끼, 빈털터리 주머니들이 혓바닥처럼 흘러 나왔다 철지난 바바리 코트에 박힌 빗방울 하나가 희미하게 웃었다
화요일 저녁, 휘바람을 불며 그들이 돌아온다 비닐커버 속에 납작 눌린 몸을 넣고 빳빳이 날세운 철사목이 되어 문 앞에 서있다 강씨가 벨을 누른다
―안녕하세요 댁의 거죽이 왔습니다―
                                                     ―「거죽들」전문, 『창조문학』채수옥

  20층 아파트 계단을 걷는 걸음걸이가 박자를 맞추어 '세에∼타악'하던 소리가 내 머리맡에 물을 붓고 가는 것처럼 느껴졌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울림의 공명이 길었더랬습니다. 이어지는 후렴구 같은 구두굽소리.
  봄은 또 거죽을 갈아입는 계절. 어려운 시절일수록 철사목이라도 빳빳이 세워 당당할 일입니다.
  숨 돌아 한여름 견디면, '도움닫기를 해야 날아갈 수 있었'던 까치처럼 서로에게 위로가 된다면 「그런 晩秋」가 오지 않을까 싶은 봄입니다.

개가 있고 소가 있고
말이 있다.
(몽고 조랑말)
밤나무가 있고
다람쥐가 있고, 왠일일까
떡갈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가을이 채 가기도 전에
함박꽃 같은 함박눈이 내리고
호랑이가 앞마당에 발자국을 남기고
들쥐가 눈에 불을 켠다.
햇발이 너무 짧다고,
시베리아 오지
芮芮族 족장의
처가가 있는 마을,
                                                      ―김춘수,「그런 晩秋」, 『시와반시』
『창조문학』04년 여름호


추천4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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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성님의 댓글

김재성 작성일

  윤선생님의 시안을 대할 때마다 마음이 편해집니다.<br />
시를 읽고, 느끼고, 느낀 것을 말하는 것, <br />
아름다운 것이 왜 아름다운지를 생각하는 윤선생님의 수고를 통해 <br />
나도 한 발자국, 저 드러내어진 시의 속살에 다가서는 듯 합니다.<br />
눈 밝아 시인의 아린 가슴 두루 헤아리는 손길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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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청미님의 댓글

허청미 작성일

  윤시인님,<br />
하선암 큰 바윗덩이 둥근 까닭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br />
모난 곳 정 치는 소리 듣습니다<br />
늘 시안을 크고 넓게 열어주시는 윤시인님께 고마움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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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선님의 댓글

김효선 작성일

  이 글을 읽다가 갑자기 눈물이 났습니다...아마도...시를 읽다가 누군가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는 것...그런 시를 써보고 싶은게 저의 소망이기도 합니다...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그런 시 ㅋㅋ...그럼 너무 진부한가요? 감정없는 시는 어쩌면 시가 아닐거라는 생각을...벌써 초여름이구...달도 보이지 않는 밤이구...며칠째 비가 내리지 않는...넘넘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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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섭님의 댓글

김영섭 작성일

  윤시인님, 자-알 계시지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시에 대한 그런 열정이 우리 모두를 있게 만드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들어와 읽기만해서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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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영님의 댓글

윤관영 작성일

  -&lt;계간시평&gt;을 쓰면서 정한 원칙이 몇 개 있습니다. 하나는, 성실하게, 폭넓게 읽고 써서, 글이 좀 부족하더라도 이 사람 참 열심히 썼구나 - 성실하게 썼다는 말 듣는 게 - 하는 말을 듣는 쪽으로 정했습니다. 둘은, 아는 만큼 아는 척한다. 괜히 나도 모르는 소리를 내가 늘어놓는 게 아니고 내가 이길 만큼의 소리를, 것도 솔직하게 낸다. 셋은 진심으로 좋은 시, 뭐라까 나를 건드린 - 오래가도 괜찮을 듯 싶은 시를 고른다. 넷은, 평을 쓰다보면 평 자체에 대해 욕심이 -자꾸 개성적으로 쓰고 싶다는- 생기게 되는데, 내가 정한 틀에 시를 집어다 넣는 것이 아니라 시를 정하고 어떤 틀이 잡히면 넣는다 입니다. <br />
-첫번째 평을 쓰고 나서, 두번째 평이 조금더 나아지긴 한 것 같은데, 조금 방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 평 자체에 대한 평이 제게 필요합니다. 의레적인 말씀 말고 평에 대한 평을 해주시면 제가 다음호 쓰는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이니, '시인님'은 불감당이니, 선배나 아니면 '부짱'정도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br />
-잘 지내시고여, 건필하시길 빕니다. 사랑합니다, 여러분!!! 가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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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명옥님의 댓글

안명옥 작성일

  윤시인님 시평 고맙습니다 잘 성실하게 읽고 갑니다 참 부지런하고 늘 한결 같은 모습 보기 좋습니다 시평이 점점 단단해지고 개성이 .......늘 건필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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