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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경희 평론집 『질주와 산책』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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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주와 산책〉을 하시는 엄경희 평론가께
1.
엄 평론가님, 잘 지내시죠?
이번에 출간하신 책 『질주와 산책』을 읽고 느낌이 좋아서 이렇게 몇 자 적습니다. 『리토피아』 겨울호에 실린 이성혁 평론가의 북리뷰를 보고 읽게 되었습니다만, 시 평집이라는 점이 와닿아 구해 읽었습니다. 평론집이라는 것이 왜 그렇게 가격이 높은 것인지 - 잘 팔리지 않는 것 값이나 높이자는 심사로 여겨지기도 하고 - 무엇보다 시 해설과 소설 해설을 함께 묶어 놓은 평론집이 많아 구입해 읽기가 썩 내키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겐 엄 평론가의 책이 시 해설서라는 점과 더불어 이성혁 평론가의 글 중에 지나가는 말이었지만 '꼼꼼한 읽기'라는 말에 끌려서 읽게 되었습니다.
책 뒷면 표지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더군요.
'『질주와 산책』은 문학평론가 엄경희의 두 번째 평론집이다. 질주가 자본주의의 무한증식욕망을 가리키고 있다면, 산책은 그 속도를 넘어선 곳에서 시간과 욕망을 참다운 주인으로 인간적인 삶을 누리고 싶다는 필자의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첫 평론집 『빙벽의 언어』에서 보여주었던 냉정함과 꼼꼼함은 여전하고, 좀더 깊고 넓어진 시야가 돋보인다.
필자는 언제나 시와 시인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바탕으로 글쓰기를 진행시키고 있지만, 과도하게 의미 부여된 작가의 작품에 대해서는 그 성과와 한계를 분명하게 지적한다. 이 점이 그의 평문의 미덕이자 그에게 지속적인 신뢰를 보내게 한다.'
저도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이 글에 동의를 합니다. 첫 평론집을 읽지 않았으니 '좀더 깊고 넓어진 시야가 돋보이'는지는 모르겠으나 '냉정함과 꼼꼼함이 여전하'다는 의견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평론집이 '냉정함과 꼼꼼함'을 갖추기는 얼마나 힘든지요. 그런 면에서 엄 평론가의 『질주와 산책』은 미덕을 갖춘 좋은 책이라 사료됩니다. 저는 평론가의 평론집을 재는 잣대로 꼼꼼한 읽기를 듭니다. 애정을 가진 꼼꼼한 읽기야말로 시를 쓰는 시인이나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기본 자세이자 훌륭한 무기라 생각됩니다. 제가 평론가 고 김현 선생을 존경하는 것도 그가 애정을 가지고 폭 넓게 시를 대하고, 좋은 시를 좋게 읽고 평하고, 또 남이 읽(어내)지 못한 작품을 읽고 그것이 자신에게 어떻게 좋(았는)은지를 썼기에 훌륭한 평론가라 생각됩니다. 무슨 자신만의 거대한 이론을 가져서라기 보다 평론가로서 성실한 그였기에 글과 인격에서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적이고, 사소한 것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저는 편집위원으로서 성실하게 '리토피아문학회'에 오시는 모습도 평론과 연관된 성실성으로 읽고 있습니다.
2.
저에게 평론집은 시인인 나 자신을 뒤볼아볼 수 있는 훌륭한 거울이었습니다. (요즘은 참 게으르게 읽고 있습니다만) 나의 모순을 알게 만들고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정보서이기도 했습니다. 혼자 시 공부를 해야했던 저는, 일테면 김현 평론집을 읽거나 아니면 다른 평론집을 읽다가 좋은 시집이라고 소개하면 구해서 읽고 하는,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길을 헤쳐 나가는 좋은 안내서였습니다. 미련할 정도로 이 방식을 따른 것은 하나의 방식은 지속적일 때 위력을 발휘한다는 믿음에서 였습니다. 작품을 읽는 폭과 깊이가 평론집을 통해 이루어졌고, 그것은 실전-시쓰기-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서문에 쓰신 말. '다양한 작품을 읽으면서 가급적이면 정확히 보고 풍부하게, 그리고 그것을 솔직하게 언어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는 말과 그 말에 대한 회의를 고백적으로 한 말에 대해 공감합니다. 저에겐 이 선언과 고백이 다만 시인의 입장에서, 시를 쓰는 내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 것인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질주와 산책』은 제게 몇 가지 도움이 되었습니다. 구입해 읽어야할 책을 알게 된 것이 그 하나고요,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었다가 놓친 부분을 다시 확인하게 된 것이 다른 하나(이것도 책을 구해서 읽어야 합니다만)입니다. 그리고 인문 지식으로서 나의 사고의 영역이 넓어지고 깊어진 것, 그리고 (잡스럽게 쓰는-제가 그러고 있으니까) 평론 어법과 시에 대한 다양한 시각적 접근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 그리고 단단한 문장도요.
3.
그러면 구체적으로 제게 엄 평론가의 『질주와 산책』이 제게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 편케 얘기해 보겠습니다. (사실, 편지글 형식으로 잡은 것도 평의 한 방식일 수 있고 무엇보다 감상을 따라가기에 적합한 방식인 것 같아서 택했습니다.)
'왜 틀에 박힌 체제와 목차를 계속 고수하고 있는가.'고 엄 평론가가 고민하셨던 점을 저도 뛰어넘지는 못하고, 목차를 따라 제 독서 감상을 열어 보겠습니다.
∏제1부
1부는 작품론이나 개인 시인론이 아니고 그렇다고 본격적인 문예이론의 장도 아닌 것 같아요. 어떤 현상에 대한 분석과 더불어 그 근거로써 작품을 들어, 분석과 대안, 혹은 이론과 작품이 균형있게 어울려 읽는 재미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여성시에 대한 평문을 읽으면서도 그 호흡을 따라 편케 읽어지고 끄덕여지는 것도 이론과 근거로서 든 시의 힘에 있지 않나 합니다.
―여성시의 풍요와 결핍
저는 '여성'시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두렵습니다. 그건 이 평을 쓰신 엄 평론가도 비슷하셨을 것 같기도 하구요. (두려워서 이만 넘어갑니다.)
다만,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무성했던 평들, 각 계간지를 넘어선 모든 계간지들의 평은 참 어찌되는 것인지, 이 시점에서 제겐 그게 궁금합니다. 최영미와 양선희와 박서원의 시는, 과도하다는 것은 의표를 찔러 주목을 받을 수는 있으나 받치는 힘이 적어 시간이 갈수록 그 허약함이 드러난다는 것, 그리고 그 바탕에 애정이 없는 적대감은 끝내 사람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느껴 보게 합니다.
―역전된 불온성을 투시하는 아이러니적 상상력
저는 유하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냥 대단한 시인이라는 생각듭니다. '압구정동'을 집중적으로 얘기하면서 '하나대'를 다른 축에 놓고, '천일마화'를 주축에 두고 '자전거'를 얘기하고 '세운상가'를 내세우면서 서정적인 어떤 무엇을 보조축으로 하고 있습니다. 저는 같은 시인으로서 그의 자질과 시적 전략을 내세운 무서운 형상화 능력을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만, 질투하기 보다는 저 스스로를 갈무리해서, 능력을 키워야겠죠.
이 평은 독특한 평 같으면서도 평이한 평이라는 느낌이 드는 평입니다.
―상상력을 억압하는 교조적 목소리 ―시인들이 쓴 어른을 위한 동화
'교조적 목소리'라 말들어 싸다는 생각, 저도 듭니다. 정말 읽기도 힘드셨을 터인데, 수고하셨다는 말 외엔 정말 ---
―과잉된 욕망을 가로지르는 세 편의 시
'모든 신성한 가치가 종말을 고했다고 일찍이 니체가 예견했듯이 열정을 상실한 우리 시대에 시적 아우라는 일견 퇴색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더 이상 비극과 위대함을 숭배하지 않는 이 시대를 파고드는 것은 현란한 도시적 욕망이며, 이 욕망 속에서 모든 창조의 어머니이며 정령의 담지자인 시인의 아우라는 좁은 영토로 내몰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시의 자리로 밀고 들어오는 코미디와 키치와 엽기와 온갖 삼류 문화를 저지할 방법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평준화와 몰개성이 휩쓸고 간 자리, 그 비인간적 상황이야말로 인간의 고귀함과 존엄함을 얘기해야 하는 역설의 토대라 할 수 있다.'
'시인의 아우라는 좁은 영토로 내몰리고 있음이 분명하다'는데, 나는 그것을 절박하게 느끼고 있는 것인가. '비극적 상황'이 '역설의 토대'라 할 수 있다는데 내겐 어떤 대안이 있는가. 공감해서 밑줄을 쳐 옮겼음에도, 솔직히 제게도 여전히 답답한 일일 뿐입니다.
'아름답고 심오한 아우라는 혹독한 내적 고통의 대가에 의해 생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내적 고통과 절박함을 소거한 채 시인이라는 이름만을 소유할 때 그것은 그 어떤 장식보다도 겉만 화려한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천박한 시대야말로 그러하다. 따라서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되고 싶은 자기 기만적 욕구의 팽창은 물질 사회의 또다른 단면이 아닐 수 없다. 공허와 결핍을 포장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이름이 시인인 것이다.'
시를 처음에는 '허영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다만 저도 진짜로 가는 길은 모르고 있죠. 다만 사기치지 않고, 아닌 것을 그렇다 하지 않고, 솔직하고 소박하게 등등 … 진정 행세하지 않겠다는 다짐만 강할 뿐, 참 시인의 길은 제 고민이지만 대안은 없습니다. 그러니 좋은 시를 쓰겠다는 맹세같은 마음도 마음뿐이기 쉽죠. 그런 마음이기에 등단 만 10년에 시집 하나 없어도 버틸 수 있기는 해도, 그것이야말로 고도한 나의 허영일 수 있으니, '시인'이란 말만 들어도 그저 어색할 뿐입니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자연이 이처럼 시인들의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된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생명을 보육하는 가장 궁극의 자양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과학의 힘으로도 다 설명할 수 없는 생명적 신비를 자연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며, 자연이 생명 현상의 섭리를 드러내는 위대한 경전 역할을 변함없이 떠맡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감춤과 드러냄의 천변만화는 시인들을 몽상의 심연으로 이끌기에 충분한 마력을 지닌다. 따라서 자연은 시인들의 감정과 사상을 매개하는 가장 거대한 은유의 저장고라 할 수 있다. 본격적인 자연시는 자연을 한낱 소재적 차원으로 여기거나 시의 정서를 유발시키는 배경이나 수사 정도로 삼는 태도를 지양하고, 자연과 시인의 정신이 어떤 방식으로든 혈연적 유기체가 될 때만이 배태된다.'
'대책없는 서정시'라는 말이 있죠? 형식에 대한 고민 없이, 같은 방식으로 시를 풀어가는. 이를 피해가려다 보니, 사실 시골에 와서 놓친 시도 많습니다. 어떤 틀을 벗어나려는 노력을 했지만, 벗어나는 것이 나를 공허하게 하는,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 바닥을 끌어안지 않으니 뭔가 밑빠진 독같은 측면이 있었습니다. 최근 『시와 사상』에 올해의 좋은 시로 실린 이진명의 시는 제게 시사해 주는 바가 많았습니다.
한밤중 빗소리에 잠 깬 일 기쁘구나
외진 데 사는 동생네 허름한 단층집에서 하룻밤을 자다가
무섭도록 커단 빗소리에 잠 깬 일 다시없이 기쁘구나
무더운 깊은 밤 폭우
무섭도록 커단 빗소리 들었던 것이 어느 옛날옛적 일이던가
불과 10년 전의 옛날옛적
내 홀로 살던 문간방의 한지문 밖 한밤내 머리맡을 때리던 장대비
한지문을 축축이 적시고
문틀을 불게 해 여닫지도 못했던
한지 아래께로는 곰팡이꽃이 파르르르 피어 번지던
찬바람이 불고서야 곰팡이꽃들은 죽어
썩어 검은 자국을 낡은 바늘땀처럼 흐트려놓았지
그 옛날옛적 빗소리의 밤이 기억난 일이 별처럼 기쁘구나
서울의 초고층 밀집 아파트 공중에 매달린 내 집에서라면
도저히 만날 길 없었을 별 같은 얘기
소리가 죽은 집, 죽지는 않더라도
이상하게 참는 신음이여
소음, 잡음, 밀폐음의 디딜 곳 없는 허공중에서라면
무섭고도 커단 빗소리는 생시(生時)가 되지 못하고
흐리멍덩 잠꼬대로 바뀌었을 것이다
여기 현관 밖 흙마당과 머리 누인 방바닥이 한바닥이 되었기에
나는 소리를 만난 거다. 만나고 만 거다. 빗소리
소리의 소리다운 춤, 소리의 소리다운 목청
소리의 질주, 소리의 불, 소리의 생생한 독락(獨樂)
소리의 초후통첩 같은 모든 것을
먼동이 오려는가 본데 얼굴 전혀 돌리지 않는
머리맡 부딪는 소리 쳐다보며 눈물 고이는 일 기쁘구나
― 「기쁜 일」전문, 『실천문학』02년 겨울호
이 시에는 도시에 사는 화자의 절박함이 핏줄처럼 숨쉬며 섬세하게 포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시적 정황 중에서도, 그것을 대하는 화자의 절박성이 서정적 깊이와 폭을 더한다고 볼 때, 자연과의 교감에서 제겐 좀 당연한, 아니 일상적인 일이 많다는 거죠. 따라서 제게는 이러한 절박감이 적고, 단지 누리고 산다는 것만큼은 놓치지 않고, 또 비가 오면 저도 좋아서 문을 조금 열어놓고 그 소리를 들으며 잘 정도입니다. 그런데, 풍요속에서는 오히려 그 풍요로 인해 놓치는 것이 많다는 거죠. 이제는 그런 투정이 필요한 게 아니고 대체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풍요의 풍요 속에 있기에 나름대로 개성화시킬 것은 무엇인지 이번 기회에 깊이 고민해 볼 생각입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대응 전략으로서의 생태문학
문학은 본래적으로 생태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생태문학은 쓰다보니, 생태문학으로 분류될 수는 있어도, 맘 먹고 덤벼든다고 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은 듭니다.
―생태학적 존재론 / 정진규와 정현종의 자연시
좋은 시는 본래적으로 생태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분들. 나이 들어가면서 더 건강한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정진규 시인과 가벼운 것을 가볍지 않게 쓰는, 아니 무거운 것을 가볍게 쓰는, (아니) 정현종 시인 - 兩 정 시인은 생태(학)적 존재(론)라 보여집니다.
―상처받은 '가이아'의 복귀 / 여성시에 나타난 에코페미니즘
사내 꼬투리로서 피해가려는 마음만은 아닙니다만 우호적인 사내마저 불편하게 하는 시도 있습니다. 때로 우호적인 사내도 사내라는 이유만으로 여성에게 적대적일 수 있구요. 그렇다고 밍밍하고 달큰한 여성시를 좋아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저는 최근에 읽었습니다만 김선우의 시가 좋습디다. 그리고 문정희 시인에 대해서는 어떤 편견이 있었습니다만 소개한 시처럼 좋다면 최근 시를 구해서 읽어볼 예정입니다. (아시는 정보있으면 댓글 좀 부탁드립니다)
∏제2부
제겐 2부를 참 좋게 읽었습니다. 개인 시인론이기에 문예이론으로부터 비켜나 있고, 또 한 권의 시집해설이 주는 좁은 폭으로부터 비켜나 있어 이미 알고 있는 시인은 다시 알게 되는 계기가 됐고, 놓치고 있던 부분은 새로이 각인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계기가 지나면 잊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을 일깨우는 것이 평론집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박정대와 박성우론이 그랬습니다.
―화해의 밭에 맺혀 있는 神聖(신성)/구상論
지적하신대로 '종교적 사유를 근간으로 하는 신비주의적 형이상학으로 평가된 바 있다.'는 생각으로 공부의 끈을 놓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시선집 정도라도(미래사 판으로-좋은 대안있으면 얘기해 주세요) 공부해 볼 생각입니다.
―허무의 깊이와 형이상적 상상력/권영진論
꼼꼼한 근거로 시를 들었음에도, 열심히 썼다는 생각이 들 뿐, 이상하게 끌리는 게 적습니다. 다시한번 읽어보죠, 뭐.
―회의주의자의 푸른 眼光/오규원論
뭐라까? 개인적으로 오규원 신도랄 수 있는데, 그간 손 놓고 지냈네요. 제가 가진 평소의 생각을 벗어난 지적에 밑줄을 치느라 바빴습니다. 제겐 '도보고행자', '각성'이란 말이 끌렸습니다.
―벽 속을 비추는 세 개의 등불/강은교論
엄 평론가께서 '아쉬움'이라 칭했지만 제겐 좀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초기시의 그 강렬한 섬찟함이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벽속의 편지』와 『어느 별에서의 하루』로 갈수록 안타까웠고, 솔직히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를 살 때에는 여러 가지로 아까웠습니다.
―풍경, 혹은 고통의 표정/노향림論
제가 시집을 제대로 읽는 방법 중의 하나로 읽고 평을 써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을 읽고 평을 쓴 바 있습니다. 시각적 이미지와 빈번한 직유에 대해서 제가 말한 게 있더군요. 지금은 웃겨요. 다만 시쓰는 방식, 시에 육체성을 입히는 형상화가 단일한 방식에 의해 굳어진다면 좋은 시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그것은 한 편 한 편의 시를 보면 괜찮은 듯 싶어도 전체를 묶어놓고 보면 같은 반찬의 밥상을 받은 것처럼 물리거든요. 맞나(?) 그래도 좋은 시인이지만…
―추운 음악들/박정대論
평론으로 보면 제일 끌리는 시인입니다. 책 사보죠. 게다가 제가 제일 취약한 부분이 음악인데 … 결코 '아름답지'않은데 인정하게 만드는 아름다움을 저도 감식해 보고자 합니다.
―비천한 세계로 열린 따뜻한 몽상/박성우論
한 마디로 한 시인을 말할 수 있다면 그건 복이자 한계죠. 그러나 무사가 검이나 장풍이나 도나 창이나 활이나 권이나, 그 여럿 중에서 하나에만 능해도 일가를 이루듯, 자신에게 맞는 결은 있죠. 솔직히 알레고리가 명확한 이미지로 다시 각인되는 데는 엄 평론가의 평문이 한 몫했습니다. 알레고리스트는 못 되어도, 적어도 자유자재로 구사해야 하고, 또 그 무기를 잊고 있지는 않아야죠. 그래요, 좀 잊고 있었네요.
∏제3부
3부는 시집평이네요? 사실 글을 써보면 시집평이 더 어렵던데요. 그건 아마도 시인과 평자의 거리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만. 시집에 붙은 평문을 평론집에 내시는 평자는 좀 문제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시집에 실린 평문은 기본적으로 시집 발간을 축하하는 의미가 전제되기에 객관성을 띠기도 어렵고(객관성을 띨 필요성이 적기도 하고) 이미 시집으로 발표된 평문을 다시 평론집에 넣는다는 것은 읽은 사람은 또 읽으라는 말도 되고 안 읽은 사람은 꼭 일어야 되는 좋은 평문이라는 전제 같아(끼워넣기가 아니라면) 오만일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사실, 제가 더욱 염려하는 바는 애초에 이 두 마리 토끼를 전제해 쓰이기에 이도저도 아닌 글이 되기 싶다는 노파심도 있습니다. 저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치부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평론집을 사보는 입장에서는 안 그렇죠. (맞나여?)
―따뜻하고 허허로운 존재의 귀환/신경림 시집 『뿔』
시 잘 쓰고 인간적이고 인격적이기는 힘든데, 저는 신 선생님에게서 이 둘의 결합을 본답니다. 그러고 보니, 시집 『뿔』이 없는 것 같아요. 그 시기를 놓친 거죠. 사서 봐야겠네요.
―제자리, 혹은 상생의 중심부/신현정 시집 『염소와 풀밭』
휴지부에 대한 적절한 구사도 잊고 있었네요. 특히나, 알레고리 만큼은 아니지만. 사서 읽자.
―꿈 속으로, 함정 속으로 달리는 사랑/김상미 시집 『잡히지 않는 나비』
엄 평론가, 좀 웃기는 얘기인데요. 저는 사람을 보고 나면 그 사람의 시집을 보는 편입니다. 그 시인의 이미지가 있는 상태이지만, 텍스트를 좀더 믿는 편이거든요. 김상미 시인을 만났는데 시집을 읽은 바가 없어서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어렵게 읽었었습니다. 그 다음에 만나서 시집 얘기를 했는데 제가 "검은, 나비떼ㄴ가 하는 시집 잘 읽었습니다."했습니다. 그런데 김 시인이 "검은, 소나기떼"라고 해서 시집 내용은 얘기도 못했지요. 내용이 어려워서 열심히 여러 차레 읽었더랬는데 말이죠. 괜히 아는 척한 것 맨치로, 아직까지도 얼굴을 보면 미안해요.
'잡히지 않는 나비'인데, 나비라고 주장을 하면서도 '꿈 속으로, 함정 속으로' 자꾸 가면 어떡하죠? 저야 그냥 따라 읽을 뿐이겠지만. 읽어봐야죠. 긴밀한 사이니까.
―시로 쓰여진 설법, 그 위태로움/차창룡 시집 『나무 물고기』
솔직히 사서 읽고 싶지 않아요. 좋은 말씀이라면 '명심보감'도 있으니까, 억지의 흔적을 대할 때만큼 면구스러운 것도 없구요.
―마라톤과 춤 사이에서 뒤로 걷기/이홍섭 시집 『숨결』
사서 천천히 읽어보면, 아주 천천히 읽어보면 될 시집 같군요. 평론집을 읽고 책을 구입한다는 전제에는(제겐 김현이 좀 절대적이었는데) 그건 소개하는 사람이 인격을 건다는 느낌까지 올 때의 얘기입니다. 그러니, 꼼꼼한 독서는 말할 것도 없고, 소개하는 즐거움이 풍기는 면까지 평론 속에는 있더라구요.
―21세기 인간론/이순현 시집『내 몸이 유적이다』
시집은 한 3가지 종류가 있는 것 같아요. 좋은 시집, 불편하지만 읽고 공부해야할 시집, 그냥 시집. 이순현 시집은 2번째에 해당하는 시집 같아요. 시를 쓰다보면, 솔직히 평론가 눈치를 보게 되는데, (주목을 받는 것이나 튀는 것 말고도) 평론할거리가 되는 시, 평론의 여지가 있는 시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것에서 오는 병폐가 있는가 하면, 또 시의 영역을 넓히는 역할도 하죠. 다만, 이런 시는 생명력이 짧다는데 문제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공부할거리는 있으나 기껍지는 않은 것이 이런 시집의 아쉬움이 아닌가 합니다.
―좌절된 소통의 기호들/조하혜 시집『도넛, 비어 있음으로 존재한다』
이순현 시집과 유사하나 좀 다르군요. 그런데 이 시는 구해 읽어야할 것 같아요. 왜냐? 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니까. 때론 억지 공부가 진짜 공부가 될 때가 더 많거든요.
엄 평론가님, 제가 읽어낸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책 제목의 '질주'는 열심히 읽어내고 쓰시는 모습을 그리게 하고 '산책'은 고민하고 사색하는 엄 평론가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지 않는가 싶은 느낌이 독서 감상으로 오는군요. (성씨마저 엄하게 읽는 의미로 다가와서 더 좋았습니다)
기회가 닿으면 첫 평론집도 사서 열심히 읽어 보겠습니다. 좋은 평론 많이 쓰셔서 시인도 살고 엄 평론가도 잘 되시고, 서로 상생되는 시간되었으면 좋겠네요. 저도 시 잘 써서 엄 평론가의 시평을 받아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건필은 늘 하시니까, 건강하시길 빌면서 물러갑니다. 안녕히
2004/1/윤관영
ps-명절날 윗풍이 심한 방에서 읽기도 했었는데, 여러 날 걸쳐서 읽었는데, 정말 읽는 재미가 쏠쏠한 책이었습니다. 회원 여러분들도 꼭 보시고, 한층 업그레이드된 모습으로 만나길 희망합니다. 엄 편집위원은 책 출간 축하드리고요, 진흥기금 받으신 책이니, 소주 한 잔 쏘세여(가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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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승기님의 댓글
김승기 작성일우선 엄 경희 님에게 평론집 출간을 늦게나마 축하를 드립니다. 그리고 윤시인님의 부지런함에 찬사를 보냅니다. 윤시인님은 평론집을 일고 시를 selction 하시고, 시공부를 하셨다는 말씀에 그거 좋은 방법일 수 있구나 생각이 드네요. 저는 맨날 혼자 해왔는데.... 오늘 엄경희 님에 <질주와 산책>, <미당과 목월의 시적 상상력> 두 권 책을 주문했습니다. 저도 윤시인님 흉내 한 번 내 보렵니다.

윤관영님의 댓글
윤관영 작성일
-이 평이 교보문고 북글에 승인이 났다고 메일 왔네요. 기분이 좋네요. 기왕지사 쓴 것 그렇게라도 쓸모있다니, 얼마나 좋아요.<br />
-김 시인, 공부 열심히 하세요. 시도 공부하는 만큼 쓰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공부한다는 것은 그만큼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는 거니까, 가장 좋은 대안 같아요. <br />
-가뇽

장성혜님의 댓글
장성혜 작성일윤시인님의 글을 읽고 제가 아는 분이 전화 통화 중에 엄선생님의 질주와산책을 구입해 읽어야겠다는 얘기를 하더라구요. 윤시인님 엄평론가님한테 광고비 받아야 되겠어요. 우연히도 저는 도서관에서 빌려와 읽고 있는 중이었어요. 빙벽의 언어도 전에 읽어 보았는데, 저는 핵심을 찍어 주면서도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와서 엄선생님의 글을 좋아합니다

백우선님의 댓글
백우선 작성일먼저 가뇽 시인의 정성에 박수를 보냅니다. <사람 사랑하는 방식>으로 남의 글을 읽고 리플을 다는 거라고 얘기했지요? 글 읽기가 어려운 것은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인 듯하네요. 가뇽 시인을 통해서 엄경희 선생의 글을 맛보았는데, 원본을 찾아 보아야겠습니다. 엄 선생에게도 축하를 보냅니다.

윤관영님의 댓글
윤관영 작성일
-지금 박성우의 '거미'란 시집을 보고 있습니다. 어린 친구의 녹록치 않은 詩作을 느낍니다. 그런데, 정말 부끄러운 것은 신경림 선생님의 '뿔'이란 시집이 제게 있더군요. 그것은 평을 쓰면서도 제가 읽었던 기억이 분명치 않았던 것으로 보아, 시집을 대충 읽은 것이지요. 그러니, 아예 안 읽었다면 읽어야겠다는 분명한 생각이라도 있었겠지만 읽었으니, 마음 속에서 지운 것이지요. 신 선생님의 시집을 공부하려고 덤벼야 되는 시집이라 생각치 않아서였던 것 같습니다. 다시 읽었는데, 역시 제대로 읽는 것이 제대로 된 공부이자 제대로 된 시를 쓰는 첩경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역시 엄 평론가의 <질주와 산책>은 제게 고마운 책입니다.<br />
반성이 되는 지점이었습니다. 저는 사람 좋고, 시가 좀 부족한 시인이 주는 안타까움은 연민이어서 참 아프기만 합니다. 그래서 저는 노력하는 시인을 참 좋아합니다. 노력하고 공부하는 즐거움을 아는 회원들이 많이 많이 생겨서 서로간 상생되는 관계였으면 합니다. 저도 노력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리토피아회원 여러분!!!<br />
-가뇽

남태식님의 댓글
남태식 작성일
엄경희 작가님의 평론집 '질주와 산책'을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글 읽는 재미가 너무 좋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글이라도 읽는 재미가 붙지 않으면 소용없거던요. 저처럼 어수선한 머리로 항상 지내는 사람에게는 더더욱요.<br />
건필을 빕니다. 다른 모든 우리 회원님들에게도요.<br />
청송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