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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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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쇠 같은 슬픔의 시간' 속의 시들
*윤관영(시인)
정확히 말하면, 이시영의 말을 빌리자면, 〈지금〉은 '무쇠의 슬픔의 시간'이다. 총과 폭탄이 난무하고 애 어른 할 것 없이, 남녀 불문하고 죽어 나자빠지고 있는데, 그것은 신문에서 보이는 사진이요 전달되는 - 움직이는 - 뉴스일 뿐이다. 아직은 나의 일이 아니다. 나의 슬픔이 아니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 것을 '무쇠 같은 슬픔의 시간'으로 읽었더랬다.
바그다드의 한 병원 앞에서 주름이 깊게 패인 노인이 간밤의 미군 공습으로 아들이 죽었다며 오열하는 사내의 가슴을 끌어안고 있는데 거북등처럼 갈라진 그의 왼손에서 째깍째깍 시계가 가고 있다. 무쇠의 슬픔의 시간은 12시 25분.
―「바그다드/로이터 뉴시스」전문, 『시와 사람』
이 시는 정확히 두 문장이다. 다소 긴 문장이 바로 '바그다드/로이터 뉴시스'의 내용이고, '12시 25분' 앞에 붙어있는 '무쇠의 슬픔의 시간'이 유일한 화자의 개입이자 해석이다. 시인이 읽는 시의 독법. 나라면 어땠을까 하는, 어떤 의문이 대치된다. 아마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정지될 수 없는 슬픔을 끌고 가는 초침은 12시 25분' 어쩌고 했을지 모르겠다. 물론 이 시에는 앞의 기사를 그대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시치미떼기로 인용할 수 있는 감정의 절제가 깔려있다. 아니, 그 기사를 보고 어떤 시적 충격을 받고, 또 울음 우는 모습에 압도된 것이 아니라 시계조차 슬픈 어떤 것을 읽어낸 것이 이 시의 미덕이다. 그것을 '무쇠의 슬픔의 시간'이라 읽은 것이 이 시의 개성이다. 이시영의 단시는 많은 시에서 이러한 패턴을 유지하고 있으나 이 시는 예외다.
이시영이 〈지금〉을 '무쇠의 슬픔의 시간'으로 읽는다면 허수경은 '그렇게 웃는 날들이 계속되는 날'로 읽는다.
그렇게 웃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낯선 이들이 이곳으로 들어와서 퍼런 큰 새를 타고 다니는 동안, 아이들은 폭탄을 주머니 속에 넣고 다녔다, 나귀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검은 기름이 솟아났다, 검은 기름 속에서는 아주 오래 전에 사라진 사람들이 끈적거리면서 나타나 오래 전에 헐린 집에 대해서 물었다, 그때마다, 그 강변에 꽃이 피었다, 붉거나 흰 꽃들이었다, 바람이 불면 꽃은 지고, 꽃 진 자리에서 열매가 돋아났다, 돋아난 열매는 우는 여자의 눈동자 모양을 하고 있다, 열매를 먹으면 갑자기 마음속에 쟁여둔 슬픔으로 가는 마음이 사라졌다, 자지러지게 웃고 싶어서 강변으로 나가서 그렇게 웃었다, 아이들의 주머니 속에 든 폭탄이 터져 아이들이 공중에서 흩어졌다, 그런데 그렇게 웃는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우는 여자의 눈동자 같은 열매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웃는 날들이 계속되었다」전문, 『문학동네』
이 시영이 기사를 인용하여 건조하게 비극적인 상황을 보여주는데 비하여 허수경은 비의적으로 그 상황을 전한다. 아니 전할 뿐이다. 전할 뿐 판단을 하지 않는다. 아니, 판단하지 않는 것이 그의 전언이다. 노림이다. 비극적이나 그냥 전달된다. '아이들의 주머니 속에 든 폭탄이 터져 아이들이 공중에서 흩어졌다'고 말할 뿐, 그 뿐이다. (아, 그래서 절대 그 뿐일 수가 없다) 그런데 그런 날들이, 그렇게 웃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웃는 나날이, 웃기는 날들이, 정말 웃기지도 않는 나날이 복수형인 '날들'로 존재하고 있는 '지금'이다. 내겐 이 시가 '모성에 의한 변주'의 결과로 여겨진다. 시에서는 '여자'라고 명명되지만, 뭐랄까, 찐 떡이 절편으로 나오는 것 같은, 어떤 변주, 변형 말이다. 물론 그 변형이 쫄깃한 절편을 만드는 것이지만 이 비극을 - 전쟁 - 어떻게 드라이하게만, 사실적으로만 전달할 수 있는가. '쟁여둔 슬픔으로 가는 마음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어떻게 변할까, 아니 변주될까. 나는 그게 궁금하다. 아니 궁금한 쪽으로 가야할 것만 같다. '우는 여자의 눈동자 같은 열매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데, 나는, 우리는 극도로 무기력하다. 아니 하기만하다.
강을 건넌 지하철이 굴속으로 들어갔다
강남 어느 역을 지나서이던가
맹인 가수가 찬송가를 불렀다
지팡이를 들어 바다를 가르듯
양편으로 사람들이 갈라졌다
바구니에 놓여 있는 동전 몇 개가
검은 안경 위에서 반짝였다
문득 바퀴소리가 아득해졌다
계시를 받듯 지팡이가 박자를 맞추고
노래의 길이 환하게 뚫렸다
김민형, ―「맹인가수」전문, 『시안』
시인이 어떤 시가 참 좋다라고 인정하는 지점은 어디일까. 내게는 이렇다. 동일한 화자의 입장이 되었을 때, 나를 넘는 어떤 울림이 올 때가 그 지점이다. 그러니까, 나보다 어떤 면에서 내공이 높다고 여겨지는 지점이 새로움일 수 있겠다. 물론, 재능이 느껴지는 시도 있다. 솜씨가 만만찮다고 느껴지는 시도 있다. 그러나 정말 좋은 시는 재능이나 솜씨가 느껴지지 않아야, 그것이 드러나지 않아야 좋은 시가 아닐까 한다. 재능이 있는 시는 재능을 보여줘야 하니까, 대개가 길다. 또 산문시가 많다. 사실 시가 길면 재인용해서 다루기가 어렵다는 치명적인 약점도 있다.
나도 이 시의 화자처럼 자하철 속에 있었던 적 있다. 주어와 서술어의 의미로 보면 그냥 전달이다. 그런데, 그냥 전달 자체가 의미가 있다. 노래가 들려올 때, 아무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나도 '노래의 길이 환하게 뚫리'게 비켜주는 노력은 했던 것 같다. '문득 바퀴소리가 아득해졌다' 정도가 화자의 개입인데, 거두절미, 내가 아득해진다.
갈매기가 모두
'모두'라는 말보다
'일제히'라는 말이 어울리네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일제히 침묵을 입에 물고
일제히 날아갈 태세로
너무나 일제히
그것 때문에 얼마나 피곤한가
나는 자유 때문에 쓸쓸한 놈
나는 혼자서 갈매기를 보고
갈매기는 일제히 나를 의심하네
―「갈매기가 일제히」전문, 『리토피아』
이 시는 이생진 시인의 시다. 축구를 볼 때, 약자를 응원하게 되듯이, 시를 고르는 입장이 되면 가능하면 젊은 - 무명의 신인에게 기회를 주려고 하게 된다. 또 시를 고르다 보면 뭔가 쓸거리가 잘 잡히는 시를 고르게도 되지만, 내게는 그냥 보여주기만 해도 좋은 시를 고르게 된다.
시골로 이사와서 혼자, 오랜 시간 외로워 봐서 안다. 대개의 좋은 시는 잠시잠깐의 어떤 열림으로 오지 않는다. 나도 어줍잖게 시골에 오래 있으면서 '고요는 탱탱하다' 어쩌고 까불기도 했지만, 아무 것도 없는 - 파도는 그냥 파도니까, 그냥 칠 뿐이니까 - 속에서는 움직이는 어떤 것에 눈이 간다. 생명 있는 것의 움직임에 눈이 간다. 그리고 그 눈이 간다는 것은, 그 집중은 사실 외로움에서 나온다. 그러한 화자의 관찰이 '모두'가 아니라 '일제히'라는 것을 발견하게 한다. 그리고 그 물음은 내게 온다. '나는 자유 때문에 쓸쓸한 놈'이라는 화살이 온다. 순전히 지나가는 얘기지만 좋은 곳에 산다는 것은 어떤 댓가를 지불해야 하는데, 기본적으로는 이런 외로움을 지불해야 한다.
모과꽃처럼 살다 갔으면
꽃은 피는데
눈에 뜨일 듯 말 듯
벌은 가끔 오는 데
향기 나는 듯 마는 듯
모과꽃처럼 피다 갔으면
빛깔로 드러내고자
애쓰는 꽃 아니라
조금씩 지워지는 빛으로
나무 사이에 섞여서
바람하고나 살아서
있는 듯 없는 듯
―「모과꽃」전문, 『시작』
모과나무 묘목을 옮겨 심은지 4년이 되고서야 모과꽃이 피었다. 사과나무와 배나무, 복숭아나무는 3년 차부터 수확을 했다. 그것도 시에서 보듯 '눈에 뜨일 듯 말 듯'이었다. 흰 빛에 엷은 분홍빛이 도는 꽃. 아마도 모과가 향이 많이 나고 칼칼한 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요즘에는 이런 품격을 유지하는 시도 드물다. 다른 잡지에서 뒤꼍을 다룬 시도 좋았다. '모과꽃처럼' 살아 '모과'같은 열매 맺으면 좋을 것 같은 계절이다.
―여보, 카섹스가 뭐래유?
요즘의 성풍속이 TV에 방송되자
계집이 사내에게 물었다
―병신, 자동차 안에서 방아 찧는 것도 몰러?
마당의 모깃불이 시나브로 사위어갔다
이튿날 사내는 계집을 경운기에 태우고
감자밭으로 감자 캐러 나갔다
산비둘기가 싱겁게 울고
암놈 등에 업힌 메뚜기는
뙤약볕이 따가워 뺨 부볐다
―여보, 우리도 카섹스 한 번 해 봐유
―뭐여?
―경운기는 차 아니래유?
사내는 경운기를 냅다 몰았다
계집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바소쿠리 가득 감자를 캐면서
계집이 사내를 핼긋핼긋 할겨보았다
―저, 병신
사내는 욕을 하며
구들장보다 뜨거워진 경운기에
계집을 태웠다
―「방아타령」전문, 『시와반시』
오탁번은 왜 '성'에 관한 시를 쓸까. (그 방면의 어떤 재주가 느껴지는 것도 아닌데.) 그건 간단하다. 써지니까 쓰는 거다. 덧붙인다면 그게 뭔가 맞아 떨어지니까 쓰는 거다. 그의 성에 관한 시는 대개 '서사'가 있다. 이 서사가 음담패설로 떨어지기 쉬운 약점을 그는 눙치기로 극복한다. 이 게 형상화의 힘이다. (내겐 '계집'이란 말이 와닿는데) 나이 쉰(50) 정도 된 아줌마라 해도 '카섹스'를 모르지 않겠지만, 여기선 그런 전제를 눈치 챈다하더라도 웃으면서 내려가게 하는 힘이 시에 있다. 하필 간 게 왜 감자밭이냐 묻지 마시라. 그렇다고 이 시의 재미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니까. '경운기는 차 아니래유?'가 전제되지 않으면 그러니까, 이 시는 성립이 안 되는 거다. 나라도 '저, 병신'하면서 경운기를 냅다 몰겠지만 계집은 하필 엉덩방아를 찧는다. '구들장보다 뜨거워진 경운기'야 감자 캘 때나 되어야 가능한 얘기겠지만 내겐 '계집을 태웠다'는 말이 여러 의미로 들린다. 그러니까 여기선 계집의 능청이 더 큰 거다. 아, 무서운 여심이여, 핼긋핼긋한.
시골의 경운기는 요즘 노인네나 몬다. 50대만 되어도 4륜차 '세레스' 정도는 몬다. 그런데 이 시는 그런 사실을 알고도 따지고 싶지가 않다. 그러니까, 그게, 이 시의, 힘이다.
그 여자는 무릎 부근이 성감대였다
무릎 아래 종아리나
그 위를 쓰다듬어주면 금세
상기된 얼굴이 되곤 하였다
둘만의 은밀한 시간
거기에 살짝 손끝이라도 대고 간질여주면
진저리를 치며,
깜박 넘어가도 좋을 음악 소리를 내곤 하였다
풀벌레들 중 몇몇은 다리로 운다는데
다리 관절 어디에 울음통이 있어
가을밤이 자지러지도록 울어주곤 한다는데
그 여자는 아마도 풀벌레들의 후예인가보았다
그래, 풀벌레들 가늘디가는 다리를 물려보았나보았다
살면서 어디에 무릎 꿇을 일 그리 많았던지
구두코가 다 벗겨지도록
오르내릴 계단은 또 얼마나 많았던지
가끔씩 쥐가 나서 주물러주던 다리
장난스레 쓰다듬으면, 끄집어내린 치마 속에 숨어
곱게 눈을 흘기던 그 슬픈 무르팍
손택수, ―「풀벌레 울음소리」전문, 『문학동네』
여기서 '그 여자'는 풀벌레, 즉 '다리로 운다'는 풀벌레겠지만, 아니기도 하다. 나도 무르팍이 성감대라는 여자를 안 적이 있긴 하다. 그야 물론 서로간 수작이 통하는 나이 때의 얘기지만 여기서는 다리를 공명해 우는 풀벌레의 이야기다. 두 다리를 잡힌 방아깨비가 그 가는 다리로 제 몸을 일으켜 세우는 그 힘이, 제 몸의 울음이겠지만 생은 결국 제 몸무게를 들어올려야 하는 게 생이다. '구두코가 벗겨지도록'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고, 그것은 결국 '쥐가 나도록' 일해야만 한다. 개구리가 제 턱주가리에 울음통을 가지듯, 풀벌레 중 어느 것은 당연히 '다리 관절 어딘가에 울음통이 있'겠거니와 사람 또한 저마다의 울음통이 있겠다. 생의 지난함 드러내는 말 중에 '다리가 다 후둘거린다'는 말만큼 울리는 말도 드물다. 사람이 이상도 하여서 아름다운 것을 기억하기 보다 '슬픈' 것을 기억하나니, 유일하게 그것이 사람의 아름다움이 아닌지 싶다. '그 슬픈 무르팍'은 '곱게 눈을 흘기'기까지 했으니, 어찌 기억치 아니하랴.
어디선가 낙타 얘길 하면서 지하 수만 리에 뿌리를 내리고 촉수를 내린 선인장 얘기가 결합된 시를 본 적 있다. 서정의 주봉과 부봉을 결합하여 중층화 시킨, 풀벌레와 그녀의 교직이 이 시다. 여자를 보면 무르팍이 이쁜가 봐야겠다. 편견이라도 그런 편견 정도는 이쁠 터.
수선
짜깁기
세탁, 다림질
연중 무휴 영업합니다
세탁소 앞을 지날 때마다
유리창에 반쯤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걸린
그 붉은 글씨를 보며
세상에 고쳐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으면
하루도 쉬지 못하고 단내를 푹푹 쏟아 내는가 싶어
세탁소 앞을 기웃거렸다
아스팔트가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오후
세탁소 처마 밑으로 길게 내 걸린 T.V 속 풍경은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로 시끄럽고
더 이상 짜깁기 힘든 낱말로
하루종일 심사가 뒤틀린 세탁소 아저씨
한번도 만나 본적 없는 총리님 바지를 씩씩 다림질 한다
오늘도 세탁소 안에서는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어디선가 멈추지 못한 기억들은
또박 또박 새로운 풍경속으로 걸어가고 있다
한동안 기억을 잊은 듯
어지러운 발자국들 사이에서 작업을 끝내고
세탁소를 빠져 나온 생생한 모습들
완벽한 변신이다
세탁소에선 더 지독한 입 냄새가 났다
내일은 날 맡길 차례다
김은숙, ―「세탁소 풍경」전문, 『창조문학』
그러니까, 여기서 '세탁소'는 세상의 다른 이름이다. 어찌 보면 세상은, 아니 타락한 세상은, 그러니까 -특히 TV에 나오는 사람들- 수선과 짜깁기, 다림질을 연중무휴로 해도 안 되는 인간들이다. 세상은 이미, 수선을 넘어선 타락의 극점에 있고, 또 흠집을 메우는 짜깁기 따위로는 어림도 없는 세상이다. 다림질도 잠시잠깐의 번듯함이지, 곧 구겨지는 잡탕이 세상이다. 말은 세상이라고 했지만, TV에 나오는 분들은 이미 '단내를 푹푹 쏟아내'며 사는 사람들과는 형질이 다른 별개의 인간이다. 여북했으면 정현종이 정말 '너무들 하시는 우리들의 몫이여' 라 했을까. 사는 것 자체가 전쟁인 사람들, (물론 정치인이야말로 자신의 입장을 관철하기 위해 전쟁하듯 열심히 산다)은 자신의 단내 뿐 아니라 변신된 몫의 '지독한 입냄새'까지 그 몫으로 떠안고 있는 모순을 이 시는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내일은 날 맡길 차례다'는 사족이 되는 거지만) 번듯한 놀음을 떠받치는 어쩔 수 없음이, 세탁소 풍경 속에 있다.
시흥에서 소사 가는 길, 잠시
신호에 걸려 버스가 멈췄을 때
건너 다방 유리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내 얼굴 속에서 손톱을 다듬는, 앳된 여자
머리 위엔 기원이 있고 그 위엔
한 줄 비행기 지나간 흔적
햇살이 비듬처럼 내리는 오후,
차창에도 다방 풍경이 비쳤을 터이니
나도 그녀의 얼굴 속에 앉아
마른 표정을 다듬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당신과 나는, 겹쳐 있었다
머리 위로 바둑돌이 놓여지고 그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이 시는 『실천문학』에 실린 신용목의 시 「소사 가는 길, 잠시」의 전문이다.
화자는 지금 버스 안에 있고 '시흥에서 소사 가는 길, 잠시/신호에 걸려 버스가 멈췄을 때'의 그 순간에 있다. 그 정지의 순간은 '건너 다방 유리에 내 얼굴이 비쳤다'는 것을 알게 하는 순간이다. 그 것을 알게 하는 순간은 또 다시 '내 얼굴 속에서 손톱을 다듬는, 앳된 여자'를 보게 하고 또 '머리 위엔 기원이 있고 그 위'를 보게 하고 더 고개를 들어 '한 줄 비행기 지나간 흔적'을 보게 하는 순간이다. 그 순간은 그 역도 마찬가지이니, '나도 그녀의 얼굴 속에 앉아/마른 표정을 다듬고 있었을 것이다'라는 추측을, 아니 사실을 낳는다. 또 다시 그 추론은 '그렇게 당신과 나는, 겹쳐 있었다'는 결론까지 다다른다. 그러나 그 상황은 '머리 위로 바둑돌이 놓여지고 그 위로/비행기가 지나가는 줄도 모르'는 상황이다. 나는 아는, 그러나 어쩌지 못하는, 아니 어쩔 필요가 없는 상황이다. 순간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처럼, 찰나의 나를 강타하는 흔듦이다. 주장하지 않으나 주장되어지는, 의도하지 않으나 의도되어지는, 인과가 없으나 있는, 순간이나 영원인, 인연이 아니나 인연인 어떤 상황이 있다. 좋은 줄도 모르게 좋은 시다. 내겐 그렇다.
나는 도라지무침이나 더덕구이를 잘 먹지 않는다. 그거야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그것을 한 입에 넣기에는 뭔가, 어떤 죄책감 같은 것이 느껴져서 그렇다. 장에 가서 흰 쟁반 위에 할머니들이 까서 얹어놓은, 돌려가면서 손톱으로 까놓은 그 것의 무리를 보면 정말이지 환하다. 나의 거부 속에는 할머니들의 손톱 밑이 아리는 어떤 노동을 조금 아는 것도 한몫을 한다. 더덕은 좀 다른데, 귀한 거라고 하면 일단 저어하는 무엇이 있어서고, 몽둥이에 얻어터져 그 상처로 양념을 빨아들인 것만 같아서 손이 잘 안 간다. 게다가 그 맛은 구워서 내는 맛 아니던가. 그렇게 따지자면 먹을 것 하나 없다는 핀퉁이가 나올 테지만 어떤 편견이 도라지와 더덕을 대하는 내게 금제가 가해진 것만 같다. 『창조문학』에 실린 신인 이경자의 시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는 내가 가진 도라지에 대한 생각을 환기한 작품이다. 신인인 만치 격려의 의미로 전재하면서 평을 접는다.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순백의 잇속에 꽉 찬
텅 빈 언어
목구멍 막아 버린
슬픔 몇 조각
할 말이 넘쳤나
네 스스로 터져 버린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말을 하고 말았다
낫달 눈웃음에 덩달아
피시식 흘려버린
침묵의 노래
비밀이야 비밀이야 하면서도
네가 내 비밀이길 바라는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입을 닫아 버렸다
말문 막혀 버렸다
들켜 버린 마음 속
부끄러 부끄러
두 눈 감고 서 있는
두 귀 막고 서 있는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창조문학/2004/봄호>>
^첨 써본 '계간 시평'입니다. 꼼꼼히 읽어주시고 조언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여름호에 봄호 시평을 쓸 예정이니까, 좋은 시에 대한 정보도 주시고, 자료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가뇽
댓글목록

정겸님의 댓글
정겸 작성일
문예지의 시평을 집대성 하셨군요. 언제 이런 작업을 하셨는지 그 힘이 대단 합니다.<br />
또한 필자님의 관찰려과 세심한 눈초리 정말 무섭군요<br />
각 문예지의 특징적 향기 배어나오는 느낌이 듭니다.<br />
고생 많았어요 가뇽아우님. 2월28일 봅시다.

안명옥님의 댓글
안명옥 작성일시를 읽는 재미가 있었어요 시를 선택한 예리함도 있었어요 잘 읽혀지면서도 얼른 읽을 수 없게하는 힘이 있었어요 다음 시평도 기다려 지네요

윤관영님의 댓글
윤관영 작성일
-겸이 헹님아하고, 이쁜 안 시인하고 감사해여. 더 잘 쓰도록 노력할게여.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뇽<br />
-사실, 지금은 아쉬운 부분이나 모자란 부분에 대해서 얘기해 주어야 제게 도움이 되는 때입니다. 솔직한 말씀 부탁드려여/가뇽

허청미님의 댓글
허청미 작성일
윤시인님, 놀랍습니다<br />
<계간 시평>을 읽고 이런 방대한 작업 언제 하셨는지 거듭 놀라울 따름입니다<br />
꼼꼼하고 때로는 날을 세워서 중심에서 언저리로, 언저리에서 과녁의 심부까지<br />
촘촘하게 씨 날의 북질이 오고 간 시평의 필이 톡톡한 세필입니다<br />
<br />
실은 그간 게으름을 피우다 이번 월레회때 윤시인께 혼날까봐 이제서야 꼼꼼히 묵독을 했지요<br />
이제 평론가로 전업을 하셔야 될듯 싶네요<br />
내 시 읽기에 물고 하나 트고 갑나다<br />
건필 하시기를.<br />

윤관영님의 댓글
윤관영 작성일-허 시인님, 관심과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시고 건필하세요. 가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