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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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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1>
문을 여니 까만 적막이 가득하다. 불을 켜니 소파 밑으로 얼른 숨어 버린다. 책을 읽고 있으면 슬금슬금 기어 나와 냉장고 소리를 크게 돌린다, 공연히 컴퓨터 엔진 소리를 크게한다. 여적 그 시끄러움에 기대어 숨 쉬고 살았건만, 그 일상들에 새삼 이렇게 비틀대는 것이고 보면, 저 까만 적막은 오래된 내 묶은 언어인 것 같고, 내가 꼭 풀어야 할 숙제인 것 같고.....
<적막2>
집체만한 귀뚜리가 울고,
귀뚜리만한 내가 그 울음 듣는다
운동장만한 달이 높게 떠 있고,
들국화만한 내가 그 달빛을 맞는다
혼자서 이방 저방 불을 켜지만,
어디에도 지워질듯 나는 너무나 작고
가을은 주체 못할 만큼 커다랗게
부풀어
있다.
<적막3>
당신은 오도카니 혼자 누워 당신의 방귀소리를 들어 본적 있는가? 빈 벽에 팅팅 부딪치다가 잔뜩 커져 돌아 온 당신의 방귀소리를 문득 만나 본적 있는가? 한 밤에 쓸쓸한 그 방귀소리가 괜시리 눈물겨워 그 방귀소리 꼭 껴안아 본적 있는가? 그 동안 내가 되지 못하게 너무 커져 있었다. 적막은 내가 작아진다는 말이다. 비로소 다른 것들이 제 모습으로 커진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던 세상을 내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얘기다. 당신은 오도카니 혼자 누워 당신의 방귀소리를 문득 절절히 만나 본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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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윤관영님의 댓글
윤관영 작성일
-정말 혼자라는 것이 <적막>이란 놈과 친하게 만든 것 같아, 부러우면서도 안 부럽기도 합니다. '나는 지금 한 잔의 술을 주문할 지도 모른다'는 시가 얼핏 기억되는데, 더한 <적막> 속에서 좋은 시 더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좀 심한 주문인가?) 적막을 넘어선 적멸 속에서(말은 잘하고 있다_내가 생각해도) 더한 성취이루길 빕니다.<br />
-적막3, 참말로 좋군요.<br />
-가뇽

남태식님의 댓글
남태식 작성일
하루 종일을 귀 열어 두었다가 돌아와 혼자 누워 귀를 닫으면, 그래요, 정말 들어야 할 소리가 들리지요. 하루 종일 열어둔 귀로는 도대체 들을 수 없던 소리와 숨결과 흐름들이 귀를 닫으면 그때서야 환하게 너무나 화안하게 들리지요.<br />
시 잘 읽었습니다.<br />
같은 홀애비로서 공감이 많이 갑니다.

장성혜님의 댓글
장성혜 작성일
적막이 셋.<br />
읽을수록 좋고,<br />
더 절절한 적막 속에 머물다 갑니다.

유경희님의 댓글
유경희 작성일
읽을소록 고요해지는 시네요<br />
사람은 정말 자기 인격만큼의 시를 쓰는 것 같아요<br />
<br />
좋은 시 들려주셔서 감사드려요

허청미님의 댓글
허청미 작성일
'적막'이라는 것,지독한 스토커라는 생각 자주 하지요<br />
제목은 잘 모르겠는데 조영남의 노래 중에'누가 내 곁에 있으면 좋겠네'라는 가사가<br />
생각나는군요. 실은 누가 곁에 있어도 적막은 따라붙더라구요<br />
적막의 심연에서 빙하 아니면 용암이 분출할 것도 같은, 순수 결정체 옥시를 줄줄이<br />
물레질 하십시요. 오랫동안 발목을 잡혔네요 적막에게. 좋은 시 잘 보았습니다.<b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