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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집에 / 들어 / 놀다 /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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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관영
댓글 2건 조회 2,239회 작성일 04-01-02 09:35

본문

   하두자 詩集 『물의 집에 들다』 評

  《물의 집에 / 들어 / 놀다 / 오다》
―윤관영(시인)


1. '물의 집에' 들면서

시집 평을 하다보면 약간의 어려움이 있다. 일단은 객관적으로 빠트린 부분 없이 다루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 것은 평을 좀 일반적으로 흐르게 하고 딱딱하게 만든다. 다른 하나로 그 시집의 특화된 부분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방식이 있는데, 이렇게 되면 글이 좀 개성적으로 된다. 이 방식은 그 시인의 특징이 좀 분명한 대신에 놓치는 부분을 감수해야 한다. 그게 시집 해설일 때는 그래서 좀 만만치가 않다. 종합적으로 다루어야 하기에 테마별로 분류한다 해도 글이 좀 평면적으로 되고 만다. 여기서 나는 후자의 방식으로 다룰까 한다.
다소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두자(이하 '그')의 시집 『물의 집에 들다』를 그냥, 내 나름의 방식으로 평을 해볼까 한다. 객관적인 방식으로는 시집 해설자 이경교 시인이 썼으니까, 조금 주관적일 수 있겠으나 내 나름의, (어쩌면 오독을) 독법을 선보이기로 한다.

'물의 집에' 들기 위한 준비로 그의 안내를 참고해 본다.
시인, 그 스스로가 말하는 자신의, 그 길은 이렇다.

'나는 꽃필 무렵부터 단풍 들 때까지, 물길만 지나오며 물의 집 한 채 짓느라 부산했다. 무수한 시간이 저 물굽이 너머 묻혀 버렸다. 하여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좀 단호하다. 그는 단호하게 '물의 집 한 채 짓느라 부산했'고, 또 '후회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여기서 일반적으로 그의 안내를 따라가다가 놓치는 부분에 주목하고자 한다. 또한, 시는 시인의 의도를 비켜갈수록 좋은 시라 믿는다. 어떤 경향성이나 기질을 가지고 시를 쓸 수는 있으나, 의도하는 바를 따라 시를 쓰는 것은 그 의도가 보여 종종 실패한다고 본다. 물론 이 말은 시인이 시도하는 연작을 두고 하는 말일 수가 있고, 여기서 시인은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방법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좋은 시는 쓰다 보니, 어떤 경향성이나 어떤 특징으로 불려지고 모여져 제대로 시가 되지, 의도를 밀어가는 것은 사주 좋은 날을 택해 애를 낳으려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물론 어떤 경향적 의지는, 아니 의지조차도 시인의 내면에서 미는 어떤 힘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기는 하다.


2. 시적 방식으로써의 대상과의 완전한 합일

그의 시에서 성취가 높은 시는 '시적 대상'과 일체(일치를 넘어선)가 된 경우이다. 이 것이 일치가 아닌 것은 하나가 완전히 소멸되어 다른 완전한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1+1이 1(+혹은 알파)인 것이다. 검을 다루는 사람이 검과 하나가 되는 단계처럼 말이다. (이때는 검이 중요하지는 않다.) 이 때 검은 心劍이 되며 시전자의 의도대로 구현되는 이기어검이 된다. 그의 일신의 공력 정도와 구사되는 초식을 선보인 개성적인 시로는 다음 시에서 그 진경을 볼 수 있다.    

차가운 흰 나비떼들 퍼덕이며, 날아드는 여름날의 환상 내 입 안에서 살금살금 녹아나는 우윳빛 날갯짓을 느낀다 삼키기에는 너무나 부드러운 속살 같은 따스함이 스며 있다 내 손등에 내려앉은 눈 조각처럼 들여다볼 사이도 없이 스며들고 마는 아주 잠깐의 사랑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서 나와 함께 머물다 빛의 향기가 되어 내 안을 밝힌다

따뜻한 아이스크림 하나가 내 입술과 포옹하며 스스로 제 몸을 허물고 있다
―「얼음은 따뜻하다」전문

무림의 고수는 자신의 내공을 쉽게 내보이지 않지만 부득이하게 보일 경우엔 손쉬운 것으로 내보인다. 가령 손바닥 위에 작은 돌을 공력으로 태워서 먼지로 소멸시켜 버리거나 손가락으로 튕겨서 촛불을 끄거나 한다. 좀 의미심장한 기 싸움이 되는 경우엔 찻잔에 공력을 실어서 상대에게 보내거나 하기도 한다. 소재로 보면 별것 아닐 수 있는 '아이스크림' 하나로 보여주는 그의 공력과 초식은 어떠한가.
'얼음은 따뜻하다'는 전제에 일단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이(제목)부터 심상치 않은데, 얼음을 따뜻하게 보는 거(볼 수 있다는 거), 그 거 만만치 않은 내공이다. 이를 전제로 초식이 펼쳐진다. '아이스크림'은 '차가운 흰 나비떼들 퍼덕이'는 생명체로 전화되고, '환상'을 불러일으키는데, 거기서 우윳빛 날갯짓(어쩌면 '요동')을 느낀단다. 그런데 그 날갯짓에는 '부드러운 속살 같은 따스함이' 있다. '따뜻함'이 아니다. 그것이 그에게 스며드는 것은 손등에 스며드는 눈조각 같은데, 그처럼 안타깝게도 잠깐도 아주 잠깐의 사랑이다. 여기서 그가 '사랑'이라 이름지은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사랑이 되면서부터는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서 나와 함께 머무'는데, 그것은 빛의 향기가 되어 내 안을 밝히는, 그러니까 나와 아주 일체가 된 시적 대상이다. 그 사랑의 방식은 일체가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가 허물어져 소멸되지만 '내 입술과 포옹하며 스스로 제 몸을 허무'는 주체적인 현재형이다. 어쩔 수 없이 당하는 아이스크림이 아니다. 이 것에 주목해야 된다.


3. 시적 방식의 내용으로서의 관능

앞에서 내가 그의 초식을 읽는 것이 오독일 수 있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면서 나는 그의 시에서 '일체'를 말했다. 여기서 일체는 일치나 합일을 넘어선, 주체의 기꺼운 하나됨을 뜻한다. 게다가 그는 그것을 '사랑'이라 명명했음에도 그의 시에서는 그것을 '관능'으로 읽는(혹은 보는) 사람이 없다. 사실 「얼음은 따뜻하다」에도 아주 잠깐의 사랑을 아쉬워하는 '관능'이 내재되어 있다. (여기서 '관능'은 성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의 시에서 '관능'을 읽어내지 못한 것은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대상이 소멸되기에 쉽게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한다. 위에서는 그 방식을 말하게 되었기에 관능의 내용을 다루지 못했는데, 그 시 자체에도 '관능'이 풍부하게 나타나 있다. 그 '관능의 내용과 방식'을 여실히 보여주는 시가 아래 시가 아닌가 한다.  

몸을 비추던 햇살이
일렁이는 그림자를 거두어 가면
서 있던 나무 한 그루 쓰러지며
그가 걸어 나온다
가물거리던 햇살이 옷자락을 털고
검푸른 몸속으로 넘실거릴 무렵
헛귀 같은 외로움 안다는 듯
내 팔목을 잡는다
무작정 나에게 스며들고 싶다며
빛으로 스며드는 중이라고 속삭이며
부드럽게 나를 안아 올린다
있는 듯 없는 듯, 희미하게 깔려 있던
사무침의 넋들이 순간 번쩍인다
그가 밀어 올린 섬광의 빛이
내 몸 구석구석, 소리 없이 번진다
사방으로 풀어지는 불길
내 이마는 신열로 달뜬다
―「노을에 지다」전문

물론 여기서 '그'는 '노을'이다. 그런 그는 나에게 주체적이다. 아니 극단적이다. 나의 의사와 생각과 느낌 따위에 관심이 없다. 그런 '그는 걸어나온다' 그리고 '내 팔목을 잡는다' 그리고 '무작정 나에게 스며들고 싶다며/빛으로 스며드는 중이라고 속삭이며/부드럽게 나를 안아 올'리는 그다. 그러고 보면 제목, '노을에 지다'가 관능으로 가는 길을 막는 하나의 장치란 걸 알 수도 있다. 나간 김에 좀더 나가보자.
이 시에는 여자(모성)가 남자(남성)를 받아들이는 과정과 방식이 잘 드러나 있는데, 거꾸로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방식으로도 볼 수 있다.
'몸을 비추던 햇살이/일렁이는 그림자를 거두어 가면/서 있던 나무 한 그루 쓰러지며/그가 걸어 나온다' 사람의 이 만큼한 극적인 등장도 드물다. 등장이 극적이라는 것은 기억을 포함한 감정적 충격까지 동반하게 마련이다. 이어지는 만고불변의 진리 - 여자는 무드에 약하다는 것. 이 시에서는 '가물거리던 햇살이 옷자락을 털고/검푸른 몸속으로 넘실거릴 무렵'인 그 때, 모성이 만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아니 만물에 열려있는 때인 것이다. 그런데, 이 때를 놓치지 않고 그(여기선 시에서의 '그')가 '헛귀 같은 외로움 안다는 듯' 여인의 외로움의 본질을 찌르면서 '내 팔목을 잡는다'. 어찌보면 딴 생각할 틈을 안 주는 급습이다. 다음이 중요한데, 아무리 그래도 여인이 자신의 몸을 여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은 수용을 한다고 마음을 먹어도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이 여인에겐 있다. 그런데 이 능숙한 자는 '무작정 나에게 스며들고 싶다며' '빛으로 스며드는 중이라며 속삭'이면서 부드럽게 그녀를 안아 올린다. 다음으로 그 과정은 '있는 듯 없는 듯, 희미하게 깔려 있던/사무침의 넋들이 순간 번쩍이'고 '그가 밀어 올린 섬광의 빛이/내 몸 구석구석, 소리 없이 번'지는 체험을 동반한다. 그 카타르시스는 섬광의 빛만큼이나 찰나다. 그렇지만 '내 이마는 신열로 달뜨'고 주변은 '사방으로 풀어지는 불길'이 진행 중이다.
그런데 그가 카타르시스를 얻는 관능의 대상은 자연이다. 여기선 '노을'이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아니란 얘기는 아니다. 자연에서 그런 카타르시스와 그의 갈증을 해소함으로 해서 그는 여행을 많이 다닌다. 그의 많은 시편이 여행에서 얻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4. 관능의 상대로서의 느티나무

'노을에 지다'가 接神의 한 방식, 관능의 결합의 방식 혹은 분위기를 말하고 있다면 여기(이 시집)서 그 상대는 '느티나무'로 형상화되어 있다.  
최근에 발간된 리토피아의 사화집에 꼬리말로 들어간 <詩에 대하여> 쓴 그의 해설은 많은 것을 눈치채게 해 준다.

'숲길 헤매다 아름드리 느티를 만났다. 햇살이 비늘처럼 쏟아지며 그의 등에 머물렀을 때, 찬란히 빛나던 그의 실팍한 어깨 단단한 몸매를 지닌 그는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의 가지를 무성히 달고 있었다. 바깥 세상을 서성일 사이도 없이 그의 안으로 들어가 우주와 교감하는 소리를 들었다. 바람의 숨소리, 땅속의 뿌리가 촉수를 뻗어가는 소리, 잎들이 잎맥 촘촘히 짜는 소리도 들었다.'

여기서 느티나무는 남성적인 이미지다. '느티'는 아름드리이며, 또 실팍한 어깨와 단단한 몸매를 지닌 그다. 그는 그런 그와 교감하고 있다. 물론 교감의 방식은 바라보면서 듣는 방식이다. 듣는 방식이 그에게 깊게 가게 만든다.

느티나무 남자를 만나 내 등을 기대네
아늑하고 넓은 가슴에
잔잔한 잠을 뿌려놓고 싶네

나이테를 돌아가며 새겨진 풍화
타오르는 흔적을 보네
육신을 떠난 영혼의 무게일까
먹장 같은 어둠을 벗어난 푸른 사내의 잠일까
둥지에서 삐져나온 곁가지
새살 돋는 사내의 이빨 사이 박혀 있는 그늘
단단하고 고요하네

흐르는 하늘과
저무는 산 그리메 목에 두르고
그 환한 목질로 젖은 발 말리고 싶은.
―「화석정에서 만나다」전문, 『내 중심은 늘 사선이다』

'느티나무 남자'는 내가 등을 기대게 되는 편한, 아니 나를 이해해주는 존재다. 그런 그이기에 넋 놓고 잠마저 뿌려놓고 싶은 존재다. 사랑하는, 그래서 존경하는 '느티나무 남자'에게 그는 '풍화'와 '흔적'을 통해 그를 전면적으로 이해하는, 아니 이해하려는 사유에 돌입한다. 그런, 한 없는 경외의 그에게 그는 '환한 목질로 젖은 발 말리고 싶은' 염원을 하게 된다. 다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노을에 지다'가 접신(관계)의 어떤 체험이라면 '느티나무 남자'인 그는 경외의 상대일 뿐 어쩌지 못하는 절망의 상대이기도 하다. '느티 안에 빈 방이 있네 나, 거기 닿지 못할 때마다 붉은 반점을 일으키네 외로운 새가 되네, 상처로 불을 켜고 따스한 그 방 기웃거리네 몸을 눕히던 어둠 속에서 나, 한 겹씩 지워지던 때가 있네'(「느티나무 방」부분) 그러니까 그는 그 자체로 충분해서 그가 어찌해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다만 나는 그의 품에서 편안하다는 것, 그것은 위안이다. 안타까움, 그것은 내 스스로의 문제가 아니던가. 그러니까, '느티나무'가 있고 '느티나무 방'이 있는데, 여기서 그 방은 그 만의 절대적인 방도 된다. 몸에 힘을 빼고 맡겨야 하는 어떤 장소 말이다. 무협지에 보면 죽을 마음으로 절벽에 몸을 던졌는데, 그는 살아난 것처럼. 왜냐하면 몸에 힘을 전혀 주지 않아, 늪 같은 호수에 떠서 천천히 떠밀려 나갔던 것처럼 말이다.


5. 절대 상대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고투

관능의 상대, (여기서는 완벽하다는 의미에서 절대상대라 할 수 있는데) 그 '절대상대'에게 절대 결합이 불가능한 것은 무조건적인 지향을 낳는다는 면에서 볼 때, 어떤 간절함은 그에게 가는 길을 모색하게 한다. 그것도 철저하게, 또 몇 가지 방식으로.
그의 절망은 그가 돌아다니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냥 돌아다니게만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슬픔은 사물을 내 안으로 끌어들이게 했다. 뭐랄까, 모성성을 발동시킨 측면이 있다. '왈칵, 목 메이는 어느 날의 입덧'(「3월이 지다」부분)처럼 말이다. (그런 모성성은) 꼭 모성성 만이랄 수는 없지만 '절대상대'에 대한 절망은 그로하여금 사물을 깊게 보게 만들었다.

〈1〉본다
'네게서 멀어지는 내 마음도 저 가지들을 닮았다'(「가지치기」부분)고 나뭇가지 하나도 의미로 보게 되고, '하늘과 땅이 서로 맞닿은 그곳에서/부서지며 헤어지는/소용돌이 물굽이를 보았지요/헤어지는 것만이 다시 만나는 것임을/아는, 강물이/소리 내어 우는 눈물을 보았지요'(「강이 쓰는 편지」부분)에서 보듯 흐르는 강물도 감정이입이 되어 보게 되는 강물이지 그냥 흐르는 강물이 아니다. 내가 편지를 쓰는 그리워 하는 강이 된다.
그의 보는 행위는 그 정도를 넘어서서 '풀밭에 앉아 풀을 들여다 본다 풀의 빛을 들여다 본다'(「풀의 나라」부분)로 나가는데, 자세마저 바뀌어 그윽하고 깊게 사물을 보는 경지로 나가고 있다.

〈2〉듣는다
몸의 열림은 조금은 순차적인 부분이 있다. 보이는 끝의 절망이, 아니 보이지 않을 때 소리를 듣게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에게 보이는 것은 그 보이는 것 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있는/문호리 마을의 낡은 예배당에서/물소리를 듣는다……내 열 손가락의 기도/강섶을 돌아 나오는 갈대처럼 휘청인다'(「문호리 예배당」부분)

좋은 경치에 가서도, 보는 것이 충일하면 들리지 않을 것도 그는 듣는다. 그런데 그것은 보고 듣는 것이 순차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복합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자작나무가 비추는/너의 전생을 따라/내가 너의 안쪽을 기웃거릴 때/바이칼 호수 밑바닥,/물의 선율이 숨 쉬는 소리가/네 몸에서 들린다'를 넘어서서 '수초 사이로 헤집고 지나가는 물고기 비늘들,/수면으로 날던 새들의 부리도 보인다'로 인식이 전환되기도 하다가, 마침내는 '네 몸이 바로 시간의 문신이다'는 선언까지 나가기도 한다. 그것은 '여름날 바이칼에서 건져온 돌멩이' 하나인데 말이다.

〈3〉나를 보고 듣는다
보고 듣는 한계는 그로 하여금 자신을 스스로를 뒤돌아 보게 한다. 그것도 외면이 아닌, 내면을 뒤돌아보게 한다.

어둠이 익어 갈수록, 강의 속살도 깊어진다 솟구친 대궁마다 푸른 상처로 길들여진 갈대 새벽강 골짝마다 파문이 인다 누가 저 물길을 건너고 있는가 미루나무 가지 끝에 쏟아지던 별들의 운행일까 고요한 시간, 새들의 날갯짓일까 조금씩 물이랑 너머로 안개의 그림자 점점 멀어지고 살아있는 물무늬 따라 세상 밖으로 건너야 할 길 아득하다 푸른 잔등을 적시며 돌아오는 내 안의 물길 고요 속에 갈라지는 내 몸의 물길이 보인다
―「내 몸의 물길」전문

이미 정경은 나의 내면에 자리잡아서(합일되어) 어둠은 익어가는 존재이고 강은 속살을 가진 존재가 된다. 그런 정경은 그에게 의문을 자연스럽게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답을 요구하는 의문은 아닌데, '∼가', '∼까'의 형태로 되물음 되어진다. 그러한 되물움은 끝내 나에게로 오는데, 아득함을 동반하면서 끝내는 '내 안의 물길 고요 속에 갈라지는 내 몸의 물길이 보이'게 한다. 그러니까, 여행이라는 것은 어떤 안타까움이 밀어 가기도 하지만, 이런 충일을 불러오기에 가는 것이기도 하다.
조금 멀리간 여행은 자신의 근거지와 더불어 감정교차를 불러오는데, 그것이 본원적인 감성을 불러온다. 원초적이라 해도 맞을.

자작나무와 앙가라 강물이 어우러져 있는 이, 르, 쿠, 츠, 크 끊어지는 음에서 푸른 곰팡이 냄새가 난다……설해림을 지나온 차가운 강물에선 살빛 뽀얀 여자들의 노래와 보드카 술잔이 찰랑이기도 하는, 자작나무 숲 축축한 마을에서 창을 닫고 있던 오래된 집들이 내 뼛속을 툭툭 건드린다 젖은 막장 말리던 사북, 폐광촌 냄새가 낡고 고요한 집에서 걸어 나와 이르쿠츠크 거리에서 떠돈다 삭아서 푸슬거리는 곰팡이 남루한 손금에 젖은 귀울음 나, 버리지 못한 그를 만난다(「이르쿠츠크」부분)

후각적 이미지(냄새가 난다)를 지나 시각적 이미지(찰랑이기도 하는)를 넘어 촉각적 이미지(툭툭 건드리는)가 이 시 이, 르, 쿠, 츠, 크(결코 붙여쓰고 싶지 않은)엔 있다. 그것은 외국이라는 공간이 그를 환기한 원초적인 정서가 되겠다. 그 극단의 외로움이 젖은 귀울음을 듣게 하고, 또 '버리지 못한 그를 만나'게 한다. 내겐 '끊어지는 음에서 푸른 곰팡이 냄새가 난다'는 수일한 이미지가 좋다.


6. '물의 집에'서 나오면서

좋은 시집을 보고 예의처럼 부족한 부분을 건드려야 된다고는 생각지는 않는다. 부족한 부분을 지적해야 균형이 맞는 것처럼, 그래서 그 게 예의에 맞는 것처럼, 성찬만 늘어놓은 어떤 말의 면피처럼 부족한 부분을 지적해야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이 평을 누가 시켜서 쓰는 것이 아니듯, 내가 좋은 것을 좋다고 하듯, 아쉬운 부분도 있음을 밝힌다.
  
그의 시에선 체험이 충분한 깨달음으로 체화 되지 못했을 때 '얼어붙은 나의 심장에서 줄줄이 나부끼는/하염없는 적막을 낚아 올리는 것 아닌지'(「얼음낚시」부분)같은 근본적이지 못한 회의, 가벼움을 가져오기도 한다. 그의 시는 직접적인 체험보다는 지속된 관념의 비빔이 제격이다. 다른 하나로는 일회적으로 주어진 어떤 사건에서의 시적 충격은 '내 삶의 더께 진/마음을 본다'(「일주문 앞에서」부분)에서 보듯 가벼움을 보여줄 수 있다.

만날 울릉도에서 살 수는 없지만, 없기에 1회적인 충격일 수 있겠지만 아래 시는 좋다. 여행이 주는, 여행 속에서 얻는 시적 결과물인데, 난 그의 여행이 한 없이 부럽다. 특히 좋은 시를 볼 때 더 그렇다.

밀물과 썰물이 살갗을 부빌 때마다

우욱대며 일어서는 비바람

옆으로 옆으로 곤두박질치더니

더 이상 밀려나지 않겠다는 듯

벼랑 끝 비탈 쪽으로

단단히 뿌리의 눈을 달았다

묵언 정진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시퍼런 파도 날도 죽이고

낮게 엎드린 울릉도의 향나무

하얀 뼈만 남은 사리의 향기

나는 그의 시적 방식으로, 절대적인 그에게 가는 방식으로 그만의 관념의 비빔을 권하고 싶고 또 아래 시에서 그것을 보고 있다. 뭐랄까, 그것은 불분명하면서 분명하다. 있는 듯 하면서 없고, 없는 듯하나 있다. 뭐야, 이거, 싶으면서도 한 번 더 보게 만든다. 관념의 비빔이라고 했지만 어떤 비의, 모호함, 그러니까 황홀경과의 결합 같은 것이 좀 맞는 부분이 아닌가 한다. 그 길로 갈 때 한 가능성이 열리지 않을까 한다. 오독을 접는다.

홀로 낯을 붉히며 꽃들이 옷을 벗고 있다

한 겹씩 벗을 적마다 더 은밀해지는 기억의 꽃밭

찢기지 않기 위해 숨겨 둔 허물의 날개옷을

부리 고운 새가 물고 날아간다

물방울에 젖은 꽃잎, 쓰라린 자욱들

그리움에 베인 상처 낭자하다
―「꽃이 지다」전문

추천2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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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우선님의 댓글

백우선 작성일

  우와---! 시집 한 권 한 번 죽 다 읽기도 힘든데, 이렇게 꼼꼼히 읽고 분석하고 집필까지 했으니 놀랄 노짜네요. 이 글 읽기도 힘들어서요, 앞 부분 좀 읽다가 일단 포기하고(미루고) 이 글을 쓰네요. 나도 살찔 틈 없이 이것 저것 바쁘지만, 윤 시인은 &lt;리플도사&gt;라고나 할까요, 참 바지런도합니다. 리토피아 문학회 활력소지요. 비타민--? 친화력, 순발력, 유희력(?)도 대단하고요. 홈피 방문 고맙고요. 어쨌든 새해 복 마---------------------------------------------------------------니 받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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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영님의 댓글

윤관영 작성일

  -헹님아, 말씀 고맙습니다. 이제 고갈되어서, 당분간 평은 쉴까 합니다. 연말, 연휴 내내 힘들게 작업했어요. 이제 제 욕심 좀 차려야할까 봐요. 조금 지독하게요. 새해엔 건강하시고, 건필하시길 빌어요.<br />
-가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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