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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연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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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가 뭉쳐있는 오후
청자다방에 앉아 창밖을 본다
사람들도 자동차들도 벌레들도 생각들도 음습한 곳을 향하여
느긋하게 혹은 조급하게 이동하고 있다
벽시계의 진자 소리만 일정할 뿐
누군가 연발로 쏘아 올린 도넛 담배연기가
서서히 자전을 하면서 카운터 앞을 지나간다
참지 못하고, 마담이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켠다
작은 파문으로 담배 연기가 조금씩 일그러진다
빨갛게 제헌절이라고 쓰인 달력 앞을 지나고
난초들이 가지런히 놓인 화분대 위를 지나 서쪽 벽에 걸려있는
김홍도의 춘화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
운무가 여인의 주위를 감싸고 있다
상투머리 사내가 여인의 허리를 옹골차게 부둥켜안고 있다
깨기 적삼 사이로 봉긋하게 솟아 있는 두 봉오리에
전율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봉숭아 꽃잎처럼 벙긋 벌려있는 여인 입속으로
희미한 햇빛 몇 줄기가 스러진다
마담이 담배 한 대 피어 물더니 한숨을 길게 내쉰다
수백년간 달아올라 있는 춘화 속 환희의 삶이
담배 연기 속에서 흐느적거리고 있다
추천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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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승기님의 댓글
김승기 작성일음습한 곳, 동그란 도넛, 마담, 하품, 춘화, 여인을 감싸는 담배연기, 상투머리 사내, 솟아있는 두 봉우리, 전율, 봉숭아 꽃입 벙긋 벌려 있는 여인의 입, 답배 한대, 한숨......꿈틀거리는 리비도가 형태를 바꾸어 부착(Cathexis)되며 하나의 긴장된 공간을 잘도 그려내고 있네요. 정 시인님은 일상에서 시적 포인틀 참 쉽게 잘 포착하시는 것 같습니다(역시 화성 분 이십니다). 참 잘 읽었습니다.

남태식님의 댓글
남태식 작성일
'지연'을 들먹이는 발언을 하시다니, '지연유감'입니다.<br />
하지만 동갑내기(?) 발언이라서 넘어-갑니다.

윤관영님의 댓글
윤관영 작성일
=이름을 바꾸시더니, 시풍까지 바꾸셨나봐요. 너무 좋습니다. 갑자기 끊은 담배를 다시 피고 싶은 마음입니다. 건조한 묘사와 더불어 현실과 춘화 사이의 무리없는 묶고 풂이 좋습니다. 이제서야, 질퍽거린다는 것의 의미를 좀 알듯합니다. 건필을 <br />
-가뇽

정겸님의 댓글
정겸 작성일
애연가들에게는 <br />
좀<br />
죄송했습니더 ^^<br />
가뇽님의 평....좀 쑥스럽네요 ^^<br />
암튼 고맙습니다.<br />
즐거운 주말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