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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의 현실(산문. 090801 들소리신문)/김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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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나이든 분들은 공감할 것인데, 필자는 학생 때 어떤 번역서를 읽으며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혹시 내가 머리가 나쁘지 않은가'하며 책을 덮고 좌절한 적이 있다. 몇 년 전 다시 그 책을 들춰봐도 여전히 난해한 것은 마찬가지. 이제 필자도 책 한 수레 정도는 읽었고 명색이 작가인지라 결국 말이 안 되는 번역이 문제라는 결론을 내렸다.
과거에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일제 때 일본어를 배운 분들이 일어 번역은 물론이고 다른 외국 서적도 일어판을 중역하였으니 번역은 작가의 부업에 불과했고, 일반대중서는 퇴직 노인이나 절간 스님의 소일거리였다. 그러나 요즈음은 상황이 많이 달라져 일어판 중역은 보기 힘들고 일본어도 아무나 번역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과거의 관습이 우리 출판계에 남아 있다.
가끔 도서관에 가서 일본문학 작품이 꽂힌 서가를 유심히 살펴보라. 어떤 유명 번역가의 책은 여러 출판사를 통해 평균 한 달에 한 권씩 서가에서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모 번역가는 지금까지 몇 권을 번역했는지 세는 것을 포기했다고 한다. 즉 이것은 번역가가 그렇게 많은 책을 쉼 없는 노동으로 펴내야 웬만큼 돈을 벌 수 있다는 서글픈 증거이기도 하다.
수치로 밝히건대 분량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본어의 경우 대개 책 1권당 200만 원의 원고료로 계약하여 오로지 한 달 내내 번역에만 몰두할 경우 평균 1.5권∼2권을 낼 수 있다. 즉 한 달에 300∼400만원의 수입이라는 계산이다. 요즘 시절 그 정도면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번역가가 될 정도의 언어 능력을 갖추는데 투자한 시간과 돈, 또 매번 출판사의 마감 독촉에 쫓기면서 외출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엉덩이에 종기가 날 정도로 컴퓨터에 달라붙어 있는 것은 큰 고역이 아닐 수 없다. 또 요즘은 원문을 직접 읽을 수 있는 독자가 많아 혹시나 인터넷에 번역 이상하다는 댓글 하나만 떠도 상처를 받게 되니 번역을 대충할 수도 없다.
소설가라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으니 번역가만이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외적인 원인으로 우리나라 출판 시장 규모가 작고 고급 독자가 부족하다는 것을 아쉽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번역의 질을 보고 책을 선택하는 독자가 절대적으로 적으니 번역가도 자신의 노력을 알아주는 소수의 독자를 위해 소신껏 원하는 책만 번역할 수 없고 출판사도 굳이 높은 원고료를 주려하지 않는다. 더구나 요즘은 외국 유학 다녀온 번역가 지망생이 많으니 어느 번역가가 나서서 출판사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는 선진국의 문턱에 와 있는데 그 문턱을 여태껏 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문화수준이 아직 경제를 따라잡지 못한 것이다. 그 나라 번역가들이 받는 대우는 문화적 선진성 여부를 판단하는 하나의 척도라 생각한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출판사와 번역가, 그리고 독자가 함께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들소리신문. 2009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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