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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못한사랑/하얀산에또눈은/내려쌓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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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못한 사랑
하얀 산에 또 눈은
내려 쌓이고
우에다 고센고쿠 1933ー1997.
사랑을 이루었어도 산에는 눈에 내리고 이루지 못하였어도 산에는 여전히 눈이 내린다. 눈 내리는 산은 그 자리에서 여전히 존재하지만,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과 입장이 달라 산이 달리 보일 뿐이다. 이룬 사랑은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여도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눈 내리는 산은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우리의 자연은 더 가깝게 다가온다. 사랑을 잃은 사람은 눈 내리는 산이나 밤하늘의 별과 달을 본 적이 오래되었을 것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그가 아직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였다 해도, 과거의 사랑을 그리워할 뿐이라 해도 이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낀다. 사실 사랑을 이룬 순간은 짧고 사랑을 갈구하는 순간이 더 길게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기에 ‘고백하지 못한 사랑’이 오히려 완성된 사랑보다 더 깊은 사랑의 상태가 아닐까. 그리하여 시(詩)라는 형태로 승화되는 발기력(發氣力)은 짝사랑이 더 강하지 않나 생각한다.
사랑은 자연의 요구이다. 자연의 생명은 사랑에 의한 잉태로 영원히 이어진다. 그래서 사랑하는 순간에 우리는 자연과 하나가 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은 스스로 아름다워질 뿐 아니라 적어도 자신의 아름다움만으로도 다시 세상을 아름답게 할 수 있으니, 사랑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고 말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싶은 마음에 첫눈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첫눈을 기다리는 마음은 바로 사랑의 마음이다. 사랑의 마음은 세상의 추함을 흰 눈으로 아름답게 덮어버리고 다시 또 그 위로 눈을 거듭 내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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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남태식님의 댓글
남태식 작성일
끝내 사랑의 말 하지 못하고 돌아서오는 마음은 무겁기만 합니다. 하루에도 열두번도 더 만나면서도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는 번번이 하지 못하고 돌아서오지만 만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쉽지만 즐겁고 행복한 나날이었습니다. 어느날 그 사람은 떠나게 되고 헤어져야 하는 시간을 앞에 두고 이번에는 꼭 말해야지 하면서 만난 그 사람 앞에서 끝내 사랑의 말 하지 못하고 헤어집니다. 이별의 슬픔을 가슴에 꼭꼭 눌러담으면서 눈 쌓인 고개를 넘는데 어쩌나요, 그 눈 쌓인 고개에 또 눈 내려 쌓입니다. 슬픔은 쌓인 눈에 또 눈 쌓이듯 쌓이고, 고개를 넘는 발걸음은 점점 더 무거워지기만 합니다. '말 못한 사랑, 눈 쌓인 고개에 또 눈 내려 쌓이고'<br />

남태식님의 댓글
남태식 작성일
하이쿠를 읽으면서 때로 많은 감상에 젖어듭니다. 이번에도 미처 다음 하이쿠에 빠져들지도 못하고 여즉 이 하이쿠에 빠져서 이런 저런 흘러간 추억에 젖어들고 있습니다. <br />
'허허허 그대 떠난 뒷하늘에 / 눈이 나리고 / 부신 듯 나는 눈을 가린다 / 이 눈 녹으면 / 죽었던 땅도 풀리고 / 말랐던 물꼬도 터질 거라며 / 어훠이 모두들 즐거워하지마는 / 이 눈 녹아도 / 풀리지 않을 가슴 안은 나는 / 마른 입술을 깨물으며 / 소리 죽여 두 손으로 눈을 가린다 / 가린 눈 사이로 그래도 눈물은 흐르고 / 허허허 그대 떠난 뒷하늘에 / 눈이 나린다 (82년 습작시 '봄눈')<br />
'......눈이 내리리라 예상됩니다 / 언제나 되풀이되는 기상통보관의 / 이 근거 있는 거짓말에 우리는 꿈으로 부풀었지만 / 우리의 꿈은 자라기도 전에 늘 깨어져 / 눈이 내리리라 눈이 / 이제는 더 이상 부풀 꿈 없는 오늘도 / 여전히 되풀이되는 통보에 뒤따르는 / 뻐언한 기다림 ......' (85년 졸시 '길2'에서)<br />
첫눈 내리는 날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끝내 만날 수 없었던 사랑과, 너무 빨리 타올랐다가 스러져버린 사랑이 안타까와 불이 꺼지고도 꽤 오랫동안 뗄 수 없었던 그 사람의 자취방 골목과, "청소년 여러분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라는 라디오 안내방송과 동시에 하던 공부 멈추고 몽유병자처럼 파도소리 따라 바다까지 달렸던 그 밤과,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고 두문불출하다가 어느 날 다시 찾았을 때는 이미 멀리 떠나간 사랑과......., <br />
돌이켜 생각하면 시간이 길던 짧던 사랑은 늘 빨리 타올랐다가 급하게 스러졌구나 싶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스러진 그 많은 사랑 중 잊거나 버린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 사랑은 참 어리석기도 합니다. 이 어리석음이 또 아름다움이라면 그리할 수도 있겠지만요.<br />
작가는 위 하이쿠를 아주 정적으로 번역하셨는데 오늘 아침 문득 '雪嶺'에 눈이 멈추었고(사실 하이쿠 원문은 유심히 안 보았거던요) 순간 내 눈 앞에 또 다른 그림이 활짝 펼쳐져 동적인 그림을 그려보았습니다. 이런 그림이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본 것도 아니고 사실 겪은 그림이거던요. 저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느 한 시절 이런 그림 속을 걸어갔을 겁니다.<br />
'사랑의 말 끝내 못하고 돌아서가는 눈 쌓인 언덕에 또 눈은 내려 쌓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