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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슬픈 전설의 그 뱀을 다시 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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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남태식
댓글 3건 조회 2,457회 작성일 07-01-03 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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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듯하게 잘 깎은 푸른 무덤 앞에서 죽은 이를 위한 예를 갖추고 일어섰을 때 그 뱀은 문득 내게로 와 내 벗은 발등 입술로 닦았다 아 그 날의 신선함이여 발등을 타고 아랫도리까지 단숨에 올라 불끈 솟던  전율이여 뱀이 다시 내게로 왔을 때 그는 페이지 가득 슬픈 전설 주저리주저리 달고 있었다

  그 뱀 이끌고 나는 슬픈 전설의 유목을 떠났다 유목의 생활은 메마르고 거칠기만 했던가 때때로 그 뱀은 미모사 향기 가득 한 꽃 머리에 인 6월의 신부 앞세우고 슬픈 전설의 페이지 벗어나 내게로 왔다 아 그 날의 황홀이여 야성의 화관이여 여인이여 순결한 이미지여 슬픈 전설은 월계관과 가시 없는 면류관 양 손에 들고 의기양양 유목의 길 앞장섰다

  미처 손등 다 까지고 발등 다 부르트기 전에 우물이 있는 잘 깎인 푸른 풀밭 만났다 나는 드디어 오랜 유목의 생활 끝내고 천막을 쳤다 아 그 날의 환호성이여 하늘의 축복이여 힘차게 울리던 박수소리여 푸른 풀밭 한없이 푸르고 그 속 알 수 없이 깊은 우물에서는 끝없이 샘솟는 소리 들렸다 나는 곧 그 뱀을 잊었다

  그리고 십년,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강산은 변하지 않고 우물만 말랐다 귀 너무 얇은 푸른 안개와 입술 너무 두꺼운 붉은 안개만 겹겹으로 쌓여 푸른 풀만 말랐다 우물에도 있는 길은 자주 안개에 가려 하늘까지 닿지 않고 땅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끌어올린 두레박엔 마침내 텅 텅 빈 바람소리와 안개만 수북하게 담겨 나와 흐릿하게 보이던 길마저 잃었다

  지금은 울증(鬱症)의 시간, 아, 뱀, 그 뱀은 어디로 갔는가, 뱀이여, 우리가 함께 맞은 조증(燥症)의 시간은 이미 지나고 울증의 시간 다가왔다 짐 다 내려놓은 빈 들판으로 가리니 잊은 뱀이여 나오라 마른 풀밭 마른 우물 다 버리고 나와서 날카로운 이빨 한껏 드러내고 입 벌려다오 내 그대의 입속으로 들어가 고래 뱃속에 든 요나처럼 슬픈 전설의 오랜 유목 다시 떠나리라

  * 1~2연의 ‘슬픈 전설, 미모사 향기, 꽃, 6월의 신부, 화관, 여인’등의 이미지는 천경자의 그림에서 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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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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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임님의 댓글

유정임 작성일

  전 남시인님의 뱀이야기를 들을때마다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그 가슴에 도사리고 혹은 끌어 안고 있는 그 뱀때문에 남시인님이 시를 쓴다는 생각을 합니다.<br />
천경자님의 화첩을 낱낱이 보고 있다고 언젠가 말하더니 마음속에 품고 있는 그뱀이 또 서리서리 몸을 풀어냈군요.<br />
2007년 건강하시고 좋은글 많이많이 보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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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식님의 댓글

남태식 작성일

  유정임 시인님 고맙습니다. 2007년에도 건강하시고 건필하십시오.<br />
좋은 작품 많이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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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식님의 댓글

남태식 작성일

  '추억함'이 '과거지사', '회고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현재형의 제목으로 바꾸었습니다.<br />
그런다고 시가 '미래지향'으로 읽힌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읽혔으면 하는 바램은 있습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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