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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윤-창간호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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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리토피아
댓글 0건 조회 2,224회 작성일 03-07-25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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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윤-창간호 평론

1964년 제주 의귀리 출생. 제주대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50년대 신문소설 연구]로 문학박사학위 취득
리토피아 2001년 봄호(창간호)에 작품 발표하며 평단 데뷔
제주대학교·강사, 제주4.3연구소 전임연구원
저서로 {신문소설의 재조명}(예림기획, 2001), {4.3의 진실과 문학}(각, 2003)이 있음


<김동윤 님은 신인상이 준비되지 않은 창간호에 작품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여 리토피아와 문학을 함께 출발한 바 리토피아의 첫 가족으로 대우합니다>

창간호 기획특집-문학의 권위와 위기 그리고 대중문학 현상

1. 허섭쓰레기들?

본격문학작품을 읽는다는 사람들은 나날이 줄어가는 반면 대중문화를 향유하는 대중들의 수효는 급증 추세라 한다. 굳이 수치를 들먹이지 않아도 몸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다. 부산영화제에 며칠만 가보면 안다. 경향 각지에서 몰려든 젊은이들이 PC방에서 새우잠을 자며 며칠 동안 남포동 일대를 누빈다. 서태지의 컴백만 놓고 봐도 문학 쪽에서는 비교 대상이 전무하다. 현존하는 작가 중 누가 몇 년 간 글 안 쓰다 다시 쓰기 시작한다고 대중들이 저렇게 광분할 것인가. 신문의 지면 배분에서도 만화가 소설을 추월할 날이 멀지 않은 게 확실해 보인다. 부디 만화만은…빌어 봐도 소용없다. 그러니 영화와 지면의 양을 다투는 일은 언감생심이다.

{드래곤 라자}와 같은 신종 무협소설이 서점가를 휩쓴 것도 벌써 오래 전 일이다. 입지전적 인물의 에세이류와 가벼운 우화류, 연애편지 삽입용 시집들의 높은 판매고도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

어떻게 이 지경까지 왔을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아니 이렇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좋은 책들을 읽지 않고 허섭쓰레기들에 젊음을 허송한단 말인가. 안타까울 따름이다.(김영하, [워크아웃 직전의 문학])

{현대문학} 2001년 1월호에는 '대중문화시대의 예술가'라는 흥미 있는 기획특집을 마련하고 있다. 여기에는 ['대중문화 속에서의 글쓰기'를 위한 실태조사 보고서]에 이어 최승호·장석남·최정례·함성호·정찬·이순원·김영하·이남호 등의 문인들과 영화인, 연극인, 음악인, 미술인 등이 쓴 [대중문화와 나의 작업]을 게재하고 있다. 위의 인용문은 그 특집에 실린 내용인데, 거기에 참여한 대다수의 문학인들은 위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처럼 문학의 위기를 외치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드높은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그 논의에는 거의 예외 없이 대중문화와 대중문학에 대한 좋지 않은 시선이 개입되어 있다. 위에 예시한 김영하의 글에서만 보더라도 '허섭쓰레기'라는 단어까지 동원하며 대중문학의 급신장에 눌린 작금의 문학적 상황에 땅을 치고 있다. 대중문화와 대중문학의 범람이 우리가 맞닥뜨린 문학 위기의 주범 중 하나라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대중문화나 대중문학은 이 시대 우리 사회를 타락시켜 대중들을 광분케 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온몸으로 막아야 할 찌꺼기 따위에 불과한가. 대중문학에 탐닉하는 독자는 자본이 만들어낸 상품에, 지배이데올로기에 대책 없이 무차별 폭격당하는 한심한 무지렁이인가. 여기서 우리는 이런 문제를 탐색하기 위한 방편으로 1990년대 이후의 대표적인 대중문학 작품들을 더듬어 봄과 아울러 그것들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온당하게 내려지고 있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대중문학에 대한 논의의 활성화와 문학 위기의 돌파구 마련을 기대하면서.

2. {소설 동의보감}에서 {가시고기}까지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국제사회의 지각 변동과 함께 우리 사회는 급변했다. 소련이 해체되고 동구 사회주의권이 몰락하고 독일이 통일되었다. 3당 합당과 1992년 총선에서의 여권 승리 등으로 권력에 대한 패배주의적 냉소가 번져갔다. 이러한 상황들은 우리 사회의 변혁운동을 주춤하게 했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민중문학과 민족문학의 목소리도 차츰 잦아들었다. 그러는 가운데 후기산업사회적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정보화니 세계화니 하는 구호와 더불어 영상시대니 사이버시대니 하는 시기 규정이 보편화되었고, 그 와중에서 대중문화가 우리 사회를 강력히 지배했다. 진정성을 토대로 현실변혁의 염원을 담아 전파하던 문학의 자리를 대중문화가 대신 꿰차고 들어앉은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대중문학도 이런 분위기에서 더욱 위세를 떨치기에 이르렀다.

1990년 이후 최근 10여 년 동안 출간된 우리 소설들 중 100만 부 넘게 팔려 이른바 '밀리언셀러'의 대열에 오른 작품들은 대부분 대중소설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이다.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1990), 이재운의 {소설 토정비결}(1991), 황인경의 {소설 목민심서}(1992),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1993), 김진명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1993), 이우혁의 {퇴마록}(1994), 양귀자의 {천년의 사랑}(1995), 조정래의 {아리랑}(1995), 김정현의 {아버지}(1996), 조창인의 {가시고기}(2000) 등이 1990년대 이후의 밀리언셀러다. 특히 {퇴마록},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소설 동의보감}, {소설 토정비결}, {아리랑}, {소설 목민심서}, {천년의 사랑}은 200만부 넘게 팔린 소설로 중앙일보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가 공동 선정한 '20세기 베스트셀러 20'에 오른 작품들이다(이 중에서 {영원한 제국}, {천년의 사랑}, {아리랑}은 순문학의 차원에서 많이 다루어진 작품들이기에 여기서 새삼 논의하지 않기로 한다. 그렇다고 이들 작품이 대중문학과 무관하다는 것은 아니다. {천년의 사랑}과 {영원한 제국}은 대중문학의 차원에서도 논의된 바 있다.). 이러한 최근 10여 년 동안의 밀리언셀러 소설들은 어떤 면에서 수백만의 독자들을 사로잡았을까. 먼저 작품별로 일별하고 나서 전반적인 특성을 짚어보자.

1990년대의 벽두에 출판계를 강타한 {소설 동의보감}은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갖가지 난관을 헤쳐나가면서 터득한 의술로 조선 최고의 명의가 된 허준의 삶을 형상화한 소설이다. 한만수의 [위인전과 '爲人傳']({창작과비평} 1992년 겨울호)을 참조하여 정리한다면, 이 소설의 성공 요인은 중심 소재인 한의학의 세계가 독자들에게 새로운 인식지평이라는 점, 신분상승의지와 의술시행자로서의 인격적 자질을 갖추려는 의지가 상호 대립되는 가운데 후자가 부각된 점, 인물들의 강렬한 개성과 이야기의 박진성 등 흥미요소가 많은 점, 텔레비전 연속극 대본을 개작한 소설이라는 점, 속도감 있는 사건 진행 등 시나리오작가로서의 역량이 발휘된 점 등으로 추출할 수 있다. {소설 토정비결}, {소설 목민심서} 등의 역사인물류들이 {소설 동의보감}의 열풍을 계기로 유행하며 더불어 밀리언셀러의 대열에까지 올랐고, 최근에는 [허준]이라는 텔레비전 드라마로서 최고의 시청률을 올리기도 했다.

국내편·세계편·혼세편·말세편 등으로 이루어진 {퇴마록}은 4명의 퇴마사들이 종교나 전설, 사례담 등을 토대로 마(魔)를 물리치는 이야기로, 추리, 무협, 심령 등 흥미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는 작품이다. 세상을 구하는 퇴마사 길을 걷는 주인공들은 평면적 인물이면서도 퍽 매력적으로 그려진다. 친구의 어린 딸의 고통에 속수무책이었음에 충격을 받아 의사를 그만두고 방황하다가 카톨릭에 입문했으나 파문당한 50대의 박 신부, 여동생을 귀신에게 잃은 것을 계기로 기인들을 만나 무예를 터득하고 월향검을 갖고 다니며 활약하는 30대의 이현암, 천부적인 영적 능력과 해동밀교에서 터득한 재주를 바탕으로 활동하는 10대의 장준후, 언니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퇴마에 나서는 20대의 현승희 등은 휴머니티를 지닌 호감을 살만한 인물들이다. 또 허무맹랑하다고만 할 수 없는 다소의 현실성과 직접적인 묘사가 환상적 분위기와 결합되면서 강한 흡인력을 지닌다. {퇴마록}은 권수를 거듭하면서 출간된 소설이어서 단절기법을 활용한 점도 엿보인다. 예컨대 '초상화가 부르고 있다'는 장이 국내편 1권에 절반만 수록하고 나머지는 2권으로 넘어간다든지 '블랙써클의 손길'이 세계편 1권과 2권에 걸쳐 있도록 편집한 것이 그것이다.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가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나 조앤 롤링의 번역소설인 {해리포터} 시리즈가 선풍적 인기를 끈 것은 {퇴마록}의 성공과 상관성이 있을 것이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굳이 이름을 붙여본다면 '시사무협소설'이라 할 만하다(우리 문학 최초의 밀리언셀러인 1980년대 김홍신의 {인간시장}과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의협심 강한 권순범 기자가 검찰 특수부장으로부터 10여 년 전 발생한 의문의 교통사고에 대한 제보를 받고서 끈질긴 추적 끝에 그 사건이 사고로 위장한 살인사건임을 밝혀낸다. 물리학자 이용후 박사가 박정희 대통령을 도와 핵 개발을 주도하다가 CIA의 음모로 죽었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죽음과 함께 핵 개발은 진행되지 못하고 말았지만 결국 권순범 기자는 당시 인도에서 들여온 플로토늄이 청와대 마당 코끼리상 속에 숨겨진 채로 방치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이를 계기로 남북한이 공동으로 핵무기를 개발해 냈는데, 마침 시베리아개발권과 관련해 일본이 한국을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에 한국이 핵무기로 반격하자 일본은 항복한다. 현실에 바탕을 둔 사회성이 강한 메시지, 속도감 있는 사건 전개, 쉽게 읽히는 문체, 미스터리 속에서의 긴장감과 궁금증 등이 독자들을 빨아들이는 힘이었다.

{아버지}는 40대의 공무원이자 모범가장인 정수가 친구 남 박사로부터 췌장암 선고를 받으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남은 삶이 반년이 채 못된다는 벼락같은 판정을 받은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가족으로부터 자신이 소외되어 있음을 강하게 느끼면서 남은 삶은 자신을 위해서 살아보리라고 작정한다. 그동안 일과 가정에만 몰두하느라 들여다보지도 않던 고급음식점을 찾기도 하고 이소령이라는 여인을 만나 로맨스를 가져보기도 하다가 결국 안락사를 맞이하기에 이른다. 부권상실의 시대에 명예퇴직·감원 등의 구조조정 한파가 휘몰아치던 사회분위기와 맞물려 고개 숙이고 상처 입은 아버지에 대한 연민을 이끌어낸 것이 베스트셀러의 요인이다.

{가시고기}의 주인공은 백혈병을 앓고 있는 어린 아들 다움이의 병원비를 대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는 헌신적인 아버지 정호연이다. 그는 원고 대필이나 번역거리 등 돈되는 일을 찾아 하며 아들의 치료에 힘쓰는데, 그런 와중에 각막까지 팔게 된다. 그의 아내 하애리는 오래 전 그와 이혼한 뒤 프랑스로 유학 가서 유명 화가와 재혼해 귀국한다. 다움이가 병에 걸린 것을 안 그녀는 남편의 노력을 되레 비난하면서 능력 있는 자신이 아들을 데려가겠다고 한다. 정호연은 다움이를 치료하기 위해 산 속에서 생활해 보기도 하지만 결국 병원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병세가 악화되어 절망상태이던 다움이는 일본에서 구한 골수를 이식 받아 회생한다. 그러나 정호연은 수천만 원의 아들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장기를 매매하려다가 자신이 간암에 걸렸음을 알게 된다. 정호연은 자신의 병을 숨긴 채 아들을 하애리와 함께 프랑스로 보내고 눈을 감는다. 아들을 위해 눈까지 팔아가며 헌신하다가 끝내 죽어가는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가 감성적인 문체에 녹아들면서 독자들을 사로잡은 작품이다.

이들 대중소설들은 물론 출판기획의 면에서 적절한 시기(time)에 적절한 독자를 대상(target)으로 삼아 그럴듯한 제목(title)을 지어냄으로써 3T를 충족시켰기에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이들 최근 10여 년의 밀리언셀러에서는 몇 가지 특징적인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주인공들의 면모를 볼 때, 희생적인 인물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소설 동의보감}의 허준은 대가에 대한 기대 없이 오로지 병자들에게 베푸는 일에만 몰두하는, 자신을 희생하면서 다른 이들을 살리는 인물이다. {가시고기}의 정호연은 아들을 치료하기 위해 각막을 떼네고 나아가 장기까지 내어주려다가 결국 간암으로 죽어간다. {아버지}의 정수도 자신은 암으로 죽어가면서도 가족만큼은 지켜주고자 하는 부정을 지녔다는 면에서 희생적인 인물로 볼 수 있다. 곧 밀리언셀러의 대열에 진입할 것으로 보이는 김하인의 {국화꽃 향기}도 희생적 인물이 전편을 지배한다. 이미주는 사랑하는 남자와 뱃속의 아이를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인물이며, 김승우는 그런 여자를 위해 헌신하는 인물이다(공교롭게도 {가시고기}, {아버지}, {국화꽃 향기}의 주인공들은 모두 암으로 죽는다.). {퇴마록}의 준후, 박신부, 현암, 승희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권순범도 희생을 무릅쓰고 마를 퇴치하거나 진실을 캐내기 위해 노력한다는 면에서 희생적인 인물로 볼 수 있다. 이는 고통스런 현실을 살면서 자기희생적인 영웅의 출현을 염원하고 이타적인 가족주의의 향수에 젖어있는 대중들의 기대지평과 관련된 인물창조의 양상이다. 1990년대에 접어든 이후 사회가 더욱 혼돈에 빠져들게 됨에 따라 거기서 연유하는 현실의 각박함과 전망부재가 낳은 작품인 것이다. 말하자면 최근의 한국 대중독자들은 희생과 가족애 등을 중심으로 '정서적 연대감'을 형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지만, {퇴마록}·{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등 무협소설적 성격의 작품은 물론이고 {소설 동의보감} 등에서도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주인공들이 등장하고 있음도 특징으로 꼽힌다. 이들 작품들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모두 비범한 능력을 지녔다. 악의 무리가 이 사회에서 창궐하고 있음에 따라 대중들은 허구의 세계에서나마 그들을 물리칠 만한 강력한 힘과 능력을 지니고 정의감으로 뭉친 영웅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대공황이 휘몰아친 1930년대에 미국을 중심으로 SF에서 슈퍼맨이 등장했다든지 하드보일드계 추리소설이 유행한 점과 일맥상통한다.

영상물이나 컴퓨터 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점도 공통적인 면모다. 영상문화와 사이버문화에 익숙한 독자들을 감안한 작품들이 주목을 끌었다는 것이다. {소설 동의보감}은 [집념]이라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대본을 다시 소설로 썼다는 데서부터 영상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작품이 속도감 있는 사건 진행, 잦은 반전 등이 두드러진 것은 작가 이은성이 시나리오작가였기에 그 역량이 발휘된 것이다. {퇴마록}이나 {드래곤 라자} 같은 작품은 먼저 컴퓨터 통신에 연재하고 나서 책으로 엮은 것이다. 이 작품들은 1990년대 한국문학에 팬터지라는 요소를 각인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가시고기}나 {국화꽃 향기} 등도 영상적 분위기가 짙게 배어있는 작품들이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액션 영화를 보는 분위기를 연출한 작품이다. 짧고 톡톡 튀는 문장이 주종이고 대화가 많은 점도 이들 대중소설의 특징인데, 이는 컴퓨터통신과 영상물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통속성의 범주에서 보면 최근의 대중소설에서는 환상성, 야만성, 감상성이 두드러진다. 야만성과 환상성은 최근의 소설에선 거의 동일 범주처럼 되어버렸다. {퇴마록}이나 {해리포터} 시리즈 같은 팬터지 소설이 모험과 무협의 양상을 동시에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서 야만성은 두드러진 반면 환상성의 요소가 적은 것은 시사적인 내용을 제재로 삼은 데서 연유한다. 감상성은 전통적으로 한국문학에서 유난히 부각되는 속성이다. {아버지}, {가시고기}, {국화꽃 향기} 등은 그것을 적절히 활용해 성공을 거두었다. {아버지}와 {가시고기}는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주제를 다루면서도 '눈물'에 호소하여 많은 독자들을 사로잡은 소설이다. {국화꽃 향기}는 남녀간의 지순한 사랑을 다룬 연애소설이지만 눈물 짜내기 혹은 연민 모으기라는 면에서는 이 계열로 분류된다.

반면에 최근의 밀리언셀러들은 관능성과는 거리가 있다. 성적인 자극과는 거의 무관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의 과다한 노출이 베스트셀러로 연결되지 않았음은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한만수는 [90년대 베스트셀러 소설, 그 세계관과 오락성]({대중문학과 대중문화}, 아세아문화사)에서 이를 '성 묘사의 후퇴'라는 말로 지적하면서, 그 원인을 문학 이외의 다른 분야에서 성적 자극을 접할 수 있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다른 해석을 내려 볼 수 있다. 대중에게 퍽 익숙한 내용과 형식을 따르면서도 나름대로의 새로움과 개성이 발휘된 점이 더 큰 원인이었으리라는 것이다. 무조건 통속성의 요소를 과다하게 설정했다고 해서 독자들에게 인기 있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충분한 재미와 문학성이 내재해 있기 때문에 밀리언셀러에 등극했다는 말이다. 카웰티가 말한 '도식성과 개별성'의 원리도 이런 관점에서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3. 대중문학을 꾸짖는 문학의 권위

앞서도 언급했듯이 대중문학이 독자들을 사로잡는 최근의 현상을 바라보는 문학인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특히 비평가들의 태도는 대부분 부정적이다. 김주연은 [대중문화시대의 대중문학]({문예중앙} 1999년 봄호)에서 "대중문학의 저 자동화된 어둠의 세계"라는 지적을 한 바 있다. 대중문학을 자동화된 문학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말이다. 하지만 '어둠의 세계'라는 말은 편견이 개입된 것이라고 본다. 다소 짓궂게 받아친다면, 대중문학 작가와 독자는 '어둠의 자식들'이라도 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이런 현상은 순문학과 대중문학을 이분법적 우열관계로 보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대중문학의 통속성을 그것 자체로 바라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대중문학에 대한 편견은 우리 문단을 강력히 지배하고 있다.

하응백은 대중문학 작품에 대한 비평을 비교적 부지런히 하고 있는 비평가다. 그리고 그의 분석은 예리하다. 그리고 상당 부분 유효한 것도 사실이다. 대중문학 작가들이나 독자들이 경청하여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 사항도 많다. 하지만 좀 삐딱하게 보면 마뜩하지 않은 점이 있다. 지나치게 부정적인 면만을 들춰내고 그것을 탄식하는 형식으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1990년대의 대중문학에 대해 진단한 하응백의 평문들에 대해 함께 고민해 보자는 취지에서 몇 마디 건네 볼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하응백은 이런 식이다. 그는 [팬터지 소설의 허와 실]({문예중앙} 1999 봄호)에서 "내용적으로도 현금의 팬터지 소설은 컴퓨터 게임의 구조에 황당한 요소를 가미한 무협지류일 뿐이다. (…) 팬터지 소설의 문학적 미래는 없다. 그러나 신종 문화상품으로서의 미래는 있다."며 대중문학을 문학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또한 [한 베스트셀러 소설의 허상]에서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소설의 구조상 전혀 현실적이지 못한 무협지이며, 내용상 애국적 열정으로 교묘히 포장되어 있기는 하나 실상은 맹목적 애국주의와 약소민족의 감정적 한풀이에 불과하다. 이 소설이 오락용 읽을거리라 할지라도 독자에게 미치는 해악은 무시할 수 없다. 일본 순사 뺨치고 양코배기에 침뱉는 식의 국수주의는 역사적 정당성을 가진 반미·반일 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이 소설은 통일, 남북관계, 한미관계 등 우리의 국내외적 현안을 추상적인 독선으로 바라보고 있음으로 인해 독자들의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판단력을 혼미하게 만든다. 이 소설은 애국심을 교묘하게 포장해 상품화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독설을 퍼붓는다. [상업적 성공을 위해 '제작'된 소설]({책과 인생} 2001년 2월호)에서는 "{가시고기}의 성공은 문학적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각박해져 가는 사회적 분위기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사회적 현상으로, 대중문학의 산업화 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라면 제조회사에서 대중의 취향을 조사하고 제조하고 홍보하여 제품을 팔 듯이, 이제 대중소설도 20세기를 거치면서 산업적으로 '제작'하는 단계로 들어선 것이다. 산업화된 문학에 비하여, '문학의 죽음'을 운운하는 수공업적 문학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다."라고 대중소설의 인기 현상에 혀를 차면서 순문학의 위기를 걱정한다.

이 같은 면들을 종합해 볼 때 하응백은 지나치게 엘리트주의를 견지하고 있는 것 같다. 지난 12월 국민일보에 실린 [2000년 문학 결산]이라는 글을 보면 그 점에 확신을 갖게 된다. 그는 2000년 한 해의 문학을 총점검하는 글을 쓰면서도 그 해에 가장 많이 팔린 소설 {가시고기}나 {국화꽃 향기}에 관해서는 아예 언급하지도 않는다(물론 지면이 한정된 탓도 있을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 글에서 문학권력논쟁에 관해 "인터넷 등지로 (논쟁이) 확산되면서 인신공격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의 목불인견의 논쟁이 되고 말았다"고 전제하고 "상업주의의 선정성과 개인의 허욕과 불순한 욕망들이 논쟁에 가담"한 것은 "한국사회의 천민자본주의적 속성이 문학관으로 전이된 결과"라고 준엄한 심판을 내린다. 대중문화·대중문학과 상업주의에 지나친 결벽증을 드러내고 있다고 아니할 수 없다. 문학 귀족주의 입장에서 대중문학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고자세의 평문들에서 독자들이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의구심이 생긴다. 이런 한심한 책 따위는 다음부터 읽지 말아야지, 참으로 어리석은 독서를 했구나, 하고 후회하라는 것인가. "고고한 지식인의 관점에 서서 대중문학을 업신여기고 논의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사람은, 이미, 빠르게 와버린 변화된 현실의 맥락을 읽어내지 못한 사람이다."(장석주, [대중문학, 논쟁의 불길], {20세기 한국문학의 탐험}, 시공사)라는 말을 곱씹어 볼 일이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대중문학에 대한 비평가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대중문학을 올바로 읽어내는 안목을 열어주되, 엘리트주의적인 시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이다. 문학을 엘리트들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문학이란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공동의 문화자산"(김창식, [대중문학과 독자], {대중문학을 넘어서}, 청동거울)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대중을 우중(愚衆)으로만 보고 계도하려고만 들어서는 곤란하다. 왜들 그렇게 고압적인가. 현 시점에서는 오히려 순문학이야말로 현실과 유리된 고루한 지식인들의 세계에 함몰해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작가와 독자 사이에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소통구조가 형성되던 좋은 시절은 이미 지나갔음을 인정해야 한다. 비평가들이 지도비평으로 권위를 세울 시점도 아니다. "'문학한다는 것' 자체가 갖는 권위는 이제 사망 직전"(남재일, [영상세대와 문학의 전략], {문예중앙} 1999 봄호)인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쌍방적이고 수평적인 방향으로 새판 짜기가 이뤄지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그것은 문학의 민주화로도 볼 수 있다.

또한 통속적이라고 해서 무조건 몰아붙여 저질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대중문학의 통속성은 단지 진지한 것의 결여 상태로만 보기에는 너무나 뚜렷한 독자적인 미학을 갖고 있고, 통속성은 대중문학이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중요한 지향점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통속성에도 엄연히 질이 있고 편차가 있다. 긍정적인 통속성과 부정적인 통속성은 구별되어야 한다. 비평가들은 바로 이런 점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모든 예술이 그렇듯 문학은 진정성만으로 이루어지는 예술이 아니라, 그 다른 편에는 통속성이 있는 것이다. 그것들을 병행하면서 접합점을 도출해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중문학을 기존의 순수예술지상주의적 관점으로만 보기 때문에 늘 성에 차지 않는 것이다.

앞으로는 대중문학 작품도 현장비평의 대상으로 당당히 끌어들여 애정어린 시선으로 논의해야 한다. 무협지 같은 구조니까 형편없다, 현실에서 있기 어려운 환상적인 이야기여서 문제다, 눈물 짜내기에 골몰하는 작품이니까 싸구려다, 만화 같은 허무맹랑한 이야기여서 가치가 없다는 식의 비평은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그것은 순문학이라는 정전(正典)이 아니니까 나쁘다고 진단하는 처사일 따름이다. 마치 유명메이커 상품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나쁘다고 단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4. 야합이 아니라 모색이다

그러면 작가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포용을 통해 모색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독자와의 관계든 대중문화와의 관계든 마찬가지다.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문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반영해야 한다.

우선 독자와의 관계를 올바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선민의식·특권의식을 버려야 한다. 작가가 자신을 몰라주는 독자를 나무라기에 앞서 어째서 독자들이 대중문학을 즐겨 읽는지를 따져 보고 그에 대처하는 일이 훨씬 의미 있고 효용이 있다. 독자대중에 대한 냉정한 분석을 토대로 그들의 수용조건에 어느 정도 맞춰가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성이나 메시지를 담아내는 작품을 쓰기 위해 더 한층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일찍이 추리소설과 연애소설로 대중을 사로잡았던 김내성의 견해를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문학의 실천 방향 혹은 작품의 창작 방향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대중문학은 항상 독자의 문학적 교양의 수준을 염두에 두는 반면에 순수문학은 어디까지나 작자 자신의 문학적 척도에서 하등의 속박이 없이 자유롭게 제작되면 그만이다. 전자가 비교적 타협적이요 조건부인 반면에 후자는 비타협적이요 무조건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소위 순수문학은 독자대중이 이해하건 못하건 그런 것에 괘념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그의 당연한 귀결로서 순수소설 작자는 자기의 그러한 비타협적인 문학적 척도에서 제작된 작품에 독자대중의 이해 및 환영을 받지 못하는 사실을 서러워하고 나무랄 하등의 권리도 자격도 없을 것이다. 다만 일부 고도의 문학적 교양을 가진 극소수의 독자에게 자신의 문학적 척도의 심천(深淺)을 제시하는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다.([대중문학과 순수문학―행복한 소수자와 불행한 다수자])


다수 대중을 위해 복무하는 문학이어야 한다는 김내성의 50여 년 전 통찰은 지금도 유효하다. 독자와 타협한다는 말이 야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독자대중의 수준을 염두에 두면서 재미를 유발하는 가운데 그들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끌어올리며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문학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조건적·타협적' 문학은 위기 상황의 출구를 찾는 바람직한 모색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영상시대·사이버시대의 한복판에서 대중문화를 멀리하여 문학만이 갖는 고유하고 순수한 세계를 고집하고 수호하려는 태도를 견지한다면 문학은 살아남기 어렵다. 그것을 포용하면서 문학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이미 1960년대 초반에 레슬리 피들러는 문학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과감히 스크린과 제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화만이 아니라 텔레비전, 만화, 가요 등 여러 대중문화와의 교섭도 꺼려할 필요가 없다. 사이버공간도 문학적으로 좀더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그것을 상업주의와의 영합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오히려 상업성을 지나치게 경원시하는 것이 더 문제다. 순문학이라고 해서 상업성과 무관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순문학 작품도 출판사의 철저한 기획을 거쳐 나와서 치밀한 마케팅 전략을 토대로 판매하는 지금, 예술과 상품을 적대적으로 바라보는 사고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살아남기 위해서 뭐든지 가리지 않고 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영상시대·사이버시대의 달라진 문학 시스템의 양상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음악인인 이건용은 [순수예술음악과 대중음악 사이의 보이지 않는 길 찾기]({현대문학} 2001년 1월호)에서 "나는 내가 지금까지 경험했던 바 예술적 감동이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그것을 만들 수 없다면 순수예술음악의 어법이건 대중음악의 어법이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고 그 작품을 가능하다면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고귀하면서도 대중적인 것, 예술적 감동을 주면서도 동시에 상품적 인기를 가진 음악을 실현시키려 한다고 했다. 기존의 예술적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예술적 감동과 상품적 인기를 동시에 충족시키고자 한다는 이런 신념을 문학 창작 주체들이 본받아야 한다.

결국, 문학의 권위와 위기 그리고 대중문학 현상에 대한 결론은 이렇게 귀착된다. 이미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온 '즐거운 진지성'이라는 다소 이율배반적인, 그러나 이율배반적이지 않아야 할, 명제가 오늘의 시점에서 문학의 향방에 좌표를 설정하는 핵심일 수밖에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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