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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기-제12호 '이 시인을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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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경기 화성 출생.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동국대학교 대학원 졸업(의학 박사).
신경정신과 전문의, 한국 정신분석학회 정회원.
영동병원 정신과장, 현 영주 김 신경정신과의원장.
1996년 <오늘의 문학> 가을호 신인상(詩).
칼춤 외 4편
재발굴-이 시인을 다시 본다|김승기․
날선 눈빛, 그녀를 처음 보는 순간 시퍼런 칼날임을 알았다. 한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순자 씨의 칼 솜씨는 대단했고, 아슬아슬 내 옆구리를 몇 번이나 지나가기도 했다. 같이 온 남편은 번번이 칼날을 피해 보지만 그때마다 그는 점점 잘리어 몽당발이가 되어갔다. 어젯밤 기필코 점수를 따보겠다고 순자 씨 옆에 갔다가, 어느 년에게 힘 빼고 와서 육갑 떨어! 끝내 칼을 피하지 못했다. 이래도 베이고 저래도 베이고, 이젠 아주 칼날 위로 올라가 축 늘어져 있는 사내. 3일 뒤 가정법원 제출용 소견서 써달라며 조목조목 남기고 간 예리한 증거를 차트에 적는다. 참 이상한 일이다. 아무리 또박또박 적으려 해도 날카로운 칼 동작만 떠오를 뿐이다. 59세 피너스가 무슨 죄인지 몰라도, 질질 끌려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 들린다.
조의돈공(弔意豚公)
상가 마당 끝에 세워놓은 트럭 위, 죽음을 치르기 위해 준비되어진 또 하나의 죽음. 그 아이러니를 벗어버리려 돈공은 밤새 버둥거리지만, 한껏 가늘어진 외줄기 울음이 속수무책 여름 빗줄기에 젖는다.
그가 토해 내는 붉디붉은 노을 곁으로, 하나 둘 모여드는 사람들. 사람들은 죽음의 그림자가 튀지 않을 만큼의 거리에 빙 둘러서고, 팽팽해진 허공을 가르며 금속성의 번쩍임, 오히려 확 살아나는 불길, 잘 포장된 살의가 또 한번 달려가지만 또 뒤채는 불꽃, 은근히 도망가고 싶은 기용이, 피 묻은 칼을 마지막처럼 든다.
길길이 날뛰던 몸부림에서, 이 고요까지 우리는 어디를 죽음이라 하는가?
죽음을 씹는 메스꺼움에 술잔이 오가고, 여든 여섯이면 호상이여. 두 죽음에 하나도 다치지 않은 산 자의 시간들. 조각조각 염이 되어 추녀 끝에 걸리는 돈공. 그의 무덤들이 낄낄대며 흰 이를 연신 드러낸다.
역류(逆流)
골짜기 물이 모여 시냇물로 흐르고,
그 시냇물이 모여서 샛강으로 흐르고,
그 샛강이 모여서 한강이 되어 흐르고,
나는 그렇게, 그렇게
양수리쯤 흐르나보다.
강물이 뒤척일 때마다
하얗게 뒤집어지며
바위 틈
태초에 싱싱한 물소리까지
어쩌면 잡힐 듯, 잡힐 듯,
노을빛에 물든다.
종착역 청량리는 가까워 오는데
이 불길한 저녁 열차
나는 북한강 줄기로,
아득한 나의 골짜기로
자꾸만, 자꾸만
거슬러 오른다.
새 집 짓기
맨드라미가 피어 있는 안마당을 지나 뒤주단지가 있는 뒤꼍, 한참을 자다 깨어 오줌을 누고 돌아서려면 온 하늘에 별들이 가득했습니다. 어쩌다 그 별들이 떨어지면 무서워서 울었습니다.
언제부턴지 별들 사이 허공이 커지며 검은 구름이 하나씩 피어나 온 하늘을 덮기 시작했습니다. 숨어 있던 그림자들이 흐물흐물 어둠 속에 녹아들어 온 세상을 지우기 시작했습니다. 길은 사라져서 책 속에서 찾아보려 했지만 휘도는 바람의 시끄러운 발자국 소리, 나는 거리에서 술잔 속에 매일 빠져 죽었습니다.
그림자들을 하나하나 사살해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꺼질 듯한 촛불로 어둠을 쫓으며 내 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죽은 그림자의 시신으로 마루를 깔고, 천형天刑 같은 생채기로 기둥을 세우고, 빛바랜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찢어다 하늘도 만들었습니다.
지금 나의 집에는 내가 만든 별들이 반짝거립니다. 이제는 낮잠도 늘어지게 잘 수 있습니다. 밤에만 별이 뜨는 게 아니라 낮에도 별이 뜨고, 울안에는 풀꽃들이 웃고 있습니다. 어쩌다 별이 떨어져도 이제는 울지 않습니다.
제3의 병동
쉼 없는 눈길을 헤집으며 입을 벌리고 있는 방들. 가늘고 긴 복도가 힘겹게 그들의 일상을 잡아보지만 벌써 그들의 눈빛은 멀리 달아나 있다. 한 사내가 내 앞에 앉혀지고, 그의 먼 초점을 향해 장거리 전화를 건다. 번번이 불통일 때도 많지만, 오늘은 특히 감이 멀다. 또 혼선이 되었는지 난데없는 방향의 바람이 불다가 알아들을 수 없는 파도가 철썩거린다. 나는 기를 쓰고 그를 읽어내려 가야 한다. 이번엔 푸코, 그는 반사적으로 내 눈빛을 벗어 던지며 거친 항의를 한다. 다수의 언어는 그를 더 단단히 묶어놓을 수 있고, 알약이 몇 개 더 추가된다. 지칠 대로 지쳐 탈출만을 꿈꾸는 나의 저녁은 벌써 붉은 담을 넘고 있다. 허공을 할퀴며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 가벼워진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낄낄 웃음소리. 멀리 달아났던 눈빛 몇 개가 문가로 달려와 재빨리 나를 읽어내려 가고, 철커덕, 나는 병동 밖에 갇힌다. 잘난 당신의 나라에도 겨울이 있냐고, 하얀 알약같이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추천 소감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의 윤곽들이 모두 희미해지며 뒤죽박죽 되어갔다. 뚜렷하기만 하던 나의 길들도 흐물흐물 사라져버렸다. 그 속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라진 길을, 내가 설 땅을, 내가 바라볼 하늘을 그려 넣는 것이었다. 그 형벌 같은 작업을 통해 세상은 재구성되어갔고, 나의 발밑은 겨우 설 만큼 단단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거울 속에 나를 바라 볼 기회가 있었다. 아뿔싸, 형체가 없는 것은 나였고, 거울 속에 세상은 멀쩡했다. 윤곽이 없는 내가 세상 바라보기, 나는 그동안 세상을 그린다는 핑계로 허물어진 자신의 윤곽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내가 무엇을 계속 형상화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것을 보면, 아직도 나의 윤곽은 너무나 허약한가보다. 아직도 희미하기만 한 그 미명(未明)을, 과분한 이 세상 언어로 이름 불러주신 분들께 그저 감사할 뿐이다.김승기․경기도 화성 출생
․1996년 ≪오늘의문학≫으로 등단
․시집 ꡔ어떤 우울감의 정체ꡕ
―김승기
✔추천의 말
의사시인, 그것도 신경정신과 의사시인. 어떤 환자인들 안 만나봤겠는가. 그러나 그들의 질환을 인류의 질환으로 환치하며 묻고 캐고 껴안는 품이 체홉이나 윌리임즈를 연상케 한다.
「칼춤」:외도한 남편을 닥달하는 부인의 앙칼진 목소리, 당연히 칼날이다. 그러나 가정법원에 제출할 소견서 써달라며 ‘조목조목 남기고 간 예리한 증거를 차트에 적으며' 부인의 앙칼진 그것은 칼날이 아니라 칼춤이라고 시인은 생각한다. 의사시인다운 눈이다.
「조의 돈공」:인간의 죽음을 치르기 위해 돼지를 죽이는 사람들. ‘두 죽음에 하나도 다치지 않은 산 자의 시간’들이 참으로 치사하고 역겹다. 역시 의사시인다운 눈이다.
「역류」:‘강물이 뒤척일 때마다 하얗게 뒤집어지며’ 태초의 물소리까지 튕기는 듯하더니 종점 청량리에 가까워오면서 그것이 아님을 깨닫고 ‘아득한 나의 골짜기로’ 되돌아가는 물, 그 역류가 의사시인다운 역설, 환유이다.
「새 집 짓기」:내가 사살한 그림자로 마루를 깔고 ‘빛바랜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찢어다 하늘을 만드는' 새 집 짓기가 의사시인답게 듬직하다.
―김동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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